당신은 예수의 형제와 자매인가?
마태복음 강해 (142)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46-50)
예수쟁이들이 아주 싫었던 이유
제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다른 불신자들이 그러하듯 예수쟁이(?)들을 아주 싫어했다. 그 중요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인은 유별나게 가족과 가정사는 무시하는 맹목적 믿음을 가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들만 집에 둔 채 밤늦도록 교회 일에 매달리고, 심지어 재산이 거들이 나도록 교회에 갖다 바치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부아를 더 돋우는 것은 그러는 자기들은 의로워서 하나님의 상을 받지만 그러는 모습이 못마땅해 반대 내지 핍박하는 가족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대드는 것이다. 성경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니 이젠 그들이 어리석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제가 예수를 믿고 보니까 실제로 예수님이 가족을 완전히 무시하더라도 자신만 쫓으라는 식의 말씀들을 하셨다는 것이다.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식구끼리 원수가 되게 하고 또 당신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마10:34-39) 부모가 죽어도 장사를 치르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고까지 했다.(눅9:59-62)
본문 또한 그 일련의 말씀들과 동일한 맥락 같다. 예수님은 자기를 낳아주신 모친과 친형제자매들이 당신의 가족이 아니고 대신에 당신의 제자들이 그렇다고 한다.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다른 모든 것은 다 깽판 쳐도 좋으니 자기만 따르라는 투다. 과연 깽판 쳐도 좋은 것들 가운데 가족과 집안 일이 포함되는가? 절대 아니다. 만약 그렇게 알고 있다면 아주 잘못이다. 성경과 주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우선 본문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봐도 그런 의도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전부 남자들이다. 그들더러 자매나 모친 즉, 여성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제자라도 예수님의 모친이 어떻게 될 수 있는가? 그럼 문자적 의미의 육신적 가족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지금 혈연관계가 아닌 다른 차원의 가족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들 현실의 육신적 가족과 예수 믿는 자들의 영적인 공동체를 구분하신 말씀으로 이해한다. 쉽게 말해 가정과 교회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이분하면 필연적으로 둘을 비교 대조하게 되고 그럼 아무래도 하나님은 영적 공동체를 더 소중이 여기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 말씀의 포인트는 당신과 형제와 자매되는지 여부다. 당신과 개인적 관계를 맺은 남자 성도는 형제요, 여자 성도는 자매라는 것이다. 교회나 가정 같은 공동체라는 집합적 의미는 이차적 적용에 해당된다.
거기다 당신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조건을 분명히 제시했다. 우선 “누구든지”(whoever)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당신과 피를 나누든 아니든, 재산과 지위와 권력과 지성이 어떠하든, 인간의 외모와는 아무 관계없다는 뜻이다.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일이 인간이 쌓은 공적과 정성과 열의에 따라 절대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차적 집합적 의미로 적용하면 성도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런 것으로 자랑과 행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자기 의로써 은혜를 더 받으려 거래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행해야만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할 당시로는 모친 마리아와 친동생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 예수와는 분명 가족이었지만,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없었기에 영생을 얻는 구원 안에 아직 들어오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영적 공동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예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을 믿으면 되지 왜 꼭 하나님 뜻대로 살고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신자이고 그분 일을 하면 형제나 자매 같이 특별대우를 해주겠다는 뜻인가? 이 또한 절대 그렇지 않다. 당시 예수 믿는 신자로곤 제자들뿐이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지상명령도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제자로 삼으라고 했지 신자로 삼으라고 하지 않았다. 당신이 가르친 것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했다. 제자가 고급 신자나 교회 직분자가 아니라 바로 신자다.
본문이 하나님 뜻대로 살고 행해야만 예수님의 형제나 자매가 된다는 행위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으면, 당신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면 자연히 하나님 뜻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분께 순종하느냐 여부라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
그럼 여러분에게 질문해보겠다 진지하게 아멘으로 대답해보라. 당신은 예수 믿는 신자인가? 그분의 제자인가? 그분의 형제와 자매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가? 왜 갈수록 아멘 소리가 약해지는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이나 일이라고 하면 일단 도덕적으로 선해지고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는 일에만 초점을 맞춘다. 예수 믿은 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죄를 많이 짓고 있고,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는 반의 반도 자라지 못했고, 주위에 십자가 복음을 소개할 틈도 자신도 없으며, 교회 안의 성도들끼리도 상처를 주고받으며, 내 코가 석자인지라 교회 봉사는 꿈도 못 꾸고 있으니,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게 여겨진다.
그 모든 일들이 다 중요하다. 신자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뜻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아니다. 거꾸로 생각해보라. 불신자들이 예수쟁이들을 싫어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가족은 무시하고 교회 일과 담임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의 전부 내지 핵심인양 비춰졌기 때문이지 않는가? 그들이 기독교 교리는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뭔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면 다행이려만 만약 그들의 생각이 옳다면 우리가 지금껏 배워온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어폐가 있지만 순전한 가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신자들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과연 봉사이겠는가? 전도이겠는가? 죄 안 짓는 것이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그것들은 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분의 첫째 되는 바람은 바로 신자 자신이 잘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예수 믿었다는 의미는 하나님 그분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권세를 얻은 것이다. 우리의 아빠이신 그분이, 당신의 자녀가 되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가장 소원하겠는가? 자녀가 잘 되는 것 아니겠는가? 단순한 추측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에 최초로 주신 명령 즉, 가장 중요한 명령이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정복하고 충만해지라는 것이지 않는가?(창1:28)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는지 질문했을 때에 별로 자신 없이 대답한 까닭이 무엇인가? 먹고 사는데 바빠서 전도도 봉사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예수 믿는 신자이긴 해도 그분의 제자나 형제는 아닌 것인가? 아니지 않는가? 신자, 제자, 형제,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 모두가 같은 의미다. 그 성경적 정의(定意)에선 서로 달라선 안 된다. 비록 현실에서 신자로 사는 모습이 각기 조금씩 달라도 말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가 자동차가 멀쩡한데도 벤즈나 BMW 새 차 더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민 와서 아주 외롭고 고달프지만 정말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곳의 바로 이런 여건에다 바로 이런 모습으로 심어 놓으신 분이 바로 그분이지 않는가? 그런데 왜 열심히 사는 것이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제가 약 25년 전에 모친의 환갑 때에 아주 큰 불효를 저질렀다. 사업을 하다 쫄딱 망하고 너무 형편이 어려워서 정말로 뻔뻔하게도 빈손으로 잔치에 갔다. 그러나 모친은 아무런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제 사정을 아시긴 해도 분명히 그 속으로는 선물 하나 안 사온 것이 안타깝고 심지어 괘씸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물을 못 사온 것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 다른 형제, 친척들과 어울려서 즐겁게 놀지 못하는 모습은 당신의 가슴에 더 쓰라렸을 것이다.
그 때 만약 제가 “어머님. 빈손으로 와서 너무 송구하지만 제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아시지요? 다음 칠순 잔치 때는 제가 세계 일주 여행을 시켜드리겠습니다.”라고 당당하고 유쾌하게 말씀드렸다면 그 안타까움과 괘씸함 모두 눈 녹듯이 풀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 받은 선물 중에 가장 귀하고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근사한 선물을 드려봐야 제가 빚내서 산 줄 빤히 알고 그 또한 더 걱정했을 것이니 말이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잘 아신다. 가뜩이나 연약한 교회에 봉사와 헌금을 제대로 못해 미안해하는 마음까지 아신다. 수시로 죄를 지어 하나님께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도 물론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데에 신경 쓰지 않으신다. 그리고 기억하지 않으신다. 기억은 당연히 하지만 괘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 그분은 우리가 미안해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을 가장 안타까이 여기신다. 실망하고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엎드려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신자를 가장 쓰라리게 여기신다. 가장 안타까이 여긴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가장 바라는 것이라는 뜻이다. 바로 신자 자신이 잘 되는 것이다. 실망한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히 현실과 싸우며 충실히 사는 것이 바로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현실에 충실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영단번(永單番)의 완전한 제물
단 현실에 충실히 살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신자처럼 살아선 안 된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바치며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에 일 년에 일차 모든 백성의 죄를 사하는 대속죄일이 있었다. 동물 희생의 피를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으로 들고 들어가 뿌릴 때에 백성들은 성소 밖에서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만약 대 제사장이 살아 나오면 그 죄는 사함을 받았기에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이다.
그러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그 사정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주님은 아무 흠이 없는 영단번(once-for-all)의 완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졌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 값이 다 치뤄졌다. 허물과 수치와 고통까지 다 감당하셨다. 이젠 언제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매주일 예배가 겨우 지난 주간의 죄책감과 제대로 봉사 헌금 못하는 송구스런 마음으로 엎드리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된다. 들어올 때는 그런 마음으로 왔어도 교회 문을 나설 때는 성령님의 충만한 힘을 얻고 똑 바로 일어서서 나가야 한다. 현실의 삶을 향해 당당하게 맞부딪히려 진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다.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낼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딱 한 가지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 자리에 넘어 엎드러져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 하나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런 자는 그 사랑을 하나도 받아 누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강대상에서 가장 흔하게 하는 말이지만 다시 하겠다. 신자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지 않는가? 예수를 믿었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하늘에서 잔치가 벌어졌지 않는가? 그런데도 왜 주눅이 드는가?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은 어차피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조종 아래 놓여 있다. 죄인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은 온갖 시기 다툼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쉼 없는 고난이 신자라고 피해갈 수 없다. 한 가지 어려운 일이 끝나면 다음에는 더 큰 고난이 닥치기 마련이다.
믿음이란 그래서 고난을 없애거나 예방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고난이 닥쳐도, 또 여전히 해결될 징조가 보이지 않아도 예수와 개인적 관계를 맺은 자는 이미 예수의 형제와 자매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환난 가운데서 안식과 자유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인생에 비를 못 오게 하거나, 비가 온다고 하염없이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비가 억수 같이 내려도 그 속에서 춤을 출 줄 아는 실력이다. 그 일은 오직 예수를 형제로 둔 신자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믿음이란 아주 당당해야 한다. 환난과 고통과 질병과 상처와 죄악이 들끓는 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서 말이다. 당당해지지 못하면 담담해지기라도 해야 한다. 또 담담해지지 못하면, 특별히 주님 앞에서 뻔뻔하게라도 되어야 한다. 때로는 빈손으로 주님 앞에 나올 때가 있어도 말이다. 재물을 얻을 능을 주시는 이가 그분이신데 지금 아주 궁핍한 처지에 밀어 넣으신 분도 그분이지 않는가? 그럼 그분에게 우리가 모르는 계획이 분명 따로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말이다.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는가?
신자 자신이 잘 되는 것이 신자뿐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바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 일을 어떻게 성취하라고 하셨는가? 가정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서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했다. 인간을 창조한 후에 최초로 만든 것이 바로 가정이다.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만드셨다. 정확히 말해 처음에는 가정만 만들었지 교회와 가정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모든 공동체가 당신을 왕으로 모시어 그분의 거룩하고 완전한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기 위해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준 것이다. 당신과 영적인 교통을 하여 당신 대신에 이 땅을 아름답고도 풍성하게 다스리라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 창조의 목적이란 바로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해야할 이유와 목적이 그렇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목적을 충족하면서 살 때에 비로소 가장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가정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다. 각자가 하나님 안에서 신체와 정신과 영혼을 건강하고 아름답고 진실 되게 바꿔야 한다. 가족들 각 자가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가 되어서 그분의 사랑만 증거 실천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 일을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부터 또 아버지와 어머니가 시작하고 주관해야 한다.
그래서 최초로 결혼한 아담과 이브는 정말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다. 서로 돕는 배필이 되어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 결과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창2:25) 부부 사이에 감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다. 비밀, 부끄러움, 허물, 잘못이 없었다. 상호 갈등, 상처, 시기, 미움, 분노, 거짓 등은 티끌만큼도 개입되지 않았다. 순순하게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고, 내어주고, 서로 의탁하며, 무한히 신뢰했다.
아담이 이브더러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 것이 공치사는 당연히 아니며 시적, 상징적 표현도 아니다. 실제 매일 살아가는 삶이요, 현실이었다. 부부가 부부로서 존재해야 할 이유요, 목적이요, 근거요, 실상이었다. 요즘 식으로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서로 비상금을 따로 관리하지 않는 것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윗이나 이메일 계정을 부부가 같은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공유하는 것이다. 혹시 비즈니스 때문에 따로 가진다 해도 패스워드를 언제든 가르쳐주어서 모든 것을 오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의 가장 기본이라는 뜻인데 과연 여러분은 그렇게 하는가?
혹시라도 진정으로 사랑했던 기억이 신혼여행 3일 동안뿐인 것은 아닌지? 연애할 때는 몰랐던 배우자의 허물을 발견했지만 신혼여행인지라 참다가, 돌아와서 3개월간 상대를 탐색하는 기간으로 보내지는 않는가? 그리고 찾아낸 약점들을 서로 자기 기분에 맞게끔 뜯어 고치느라 3년간 박이 터지도록 싸우지는 않는가? 그러다 도무지 실패하자 그 후 30 년간은 자식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포기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여러분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제 이야기다. 올해로 결혼 36 년째인데 이제야 겨우 부부사이의 그런 실상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도 저는 오래 전부터 이멜, 트윗, 폐북, 지갑 모두 톡톡 틀어서 아내에게 보여주고 맡겼다. 제가 잘난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허물을 다 아는데 새삼 숨겨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작금 세계에서 가강 기독교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한국의 이혼율이 50%를 넘었다. 한국에 가출하여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청소년들이 20만 명이 넘는다는 뉴스를 지난 주 신문에서 읽었다. 세상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부부를 눈 닦고 찾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돈, 명품 옷, 보석, 벤즈, 권력, 지위 등으로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해도 부끄럽고, 아니 그럴수록 허물이 더 드러난다는 것을 어린 자녀들도 눈치 챈 것이다. 기독교 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기도도 잘 하지 않는 아이들임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닮게 지어진지라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인간답게 사는지 충분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심각한 이야기다. 단순히 부부 자식 간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되 가정을 통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가정이 무너지면 아무리 교회가 많아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달성되지 못하는 셈이다. 결손 가정이 갈수록 늘어나면 세상을 향한 당신의 긍휼의 한도를 넘어서고 그분의 진노의 심판만 앞당기게 될 것이다.
아담과 이브도 포기하고 살았다.
이렇게 무너진 부부사이, 가정을 어떻게 다시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부부 세미나에서 배운 대로 하루 세 번씩 “Honey. I love you!”라고 사랑의 표시를 해야 하는가? 신자니까 불신자보다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가? 바울이 에베소서(5:22-31)에서 명하는 대로 아내는 주께 하듯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은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가? 물론 다 중요하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부부 세미나에서 배운 대로 행한 효력이 과연 얼마나 지속되던가? 삼 년인가? 혹시 3 개월이라도 지속되던가?
부부 사이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더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따로 있다.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된 자리로 되돌아가 가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다시 엎드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수시로 싸웠던 일을 회개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본질을 다시 붙들어야 한다. 자기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철저히 자각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일에 에베소서 그 본문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를 들었음에도 교회주차장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배우자가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 한마디, 아니 표정 하나로 대판 싸우는 것이 자신이라고 인정하라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근본적인 의미는 선을 행함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의 죄가 나를 붙드는 바람에 제대로 행하지 못함을 애통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과 똑 같은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된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리라).
쉽게 말해 모든 인간은 온전한 사랑을 하고 싶은 소망은 있으나 그럴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어떠한가? 사랑할 소원도 있고 그럴 자신도 있고 그럴 능력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아무리 해도 모른다. 그래서 서로를 고치려고 3년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30년 아니 평생을 싸운다. 그러다 도무지 힘에 부치면 황혼에도 서슴지 않고 이혼한다.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나 같은 사람과 걸맞으려면 최소한 이런 것, 저런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고 고집한 것이다. 두 사람 다 평생 그 고집을 못 버리니 결국에는 파탄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도 실은 30년을 포기하고 산 것을 아는가?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게 산 것은 죄로 타락하기 전 잠간뿐이었다.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자마자 상대에게 그 잘못한 핑계를 대었다. 말하자면 상대를 고치지 못하고 함께 사는 것만도 실은 대단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분의 일이라는 뜻이다.
부부 사이를 온전하게 회복하려면?
부부 세미나에선 귀한 권면을 많이 한다. 대표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안에서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또 상대에게 마음에 안 드는 면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똑 같이 귀하게 여기는 영혼임을 기억하라고 한다. 인간 사회에선 서로 우열을 가리고 누가 우선권을 가지느냐 따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면전에선 동일한 신분과 자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군림하는 자세를 버리라고 한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사항이 하나 빠졌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의 결혼은 죄인끼리 결혼한다는 사실이다. 죄인끼리 결혼했고, 죄인끼리 현재 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죄인끼리 살아갈 것이라는 바로 그 점이다. 상대가 죄인이기도 하지만 내가 더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총이 없으면 단 한 시도 살 수 없듯이, 내 배우자도 동일하고 더 하다는 것이다. 내 배우자게에 정작 절실히 필요한 것이 나의 사랑이기 이전에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나도 주님 앞에서 불쌍한 존재이지만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나보다 훨씬 더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바탕에서 결혼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제 아내의, 제 남편의 이런 저런 허물을 고쳐 달라”는 기도는 중단해야 한다. 그보다 “하나님 저 사람은 이런 저런 허물이 많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음에는 아무 장애가 안 될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주님이 더 긍휼히 여길 줄 믿습니다. 저보다, 아니 저에게 말고 저이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정말 사랑해 주십시오. 정작 은혜가 필요한 자는 제가 아닙니다.”라는 기도가 나와야 한다.
아버지도, 엄마도, 아들과 딸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함을 받은 죄인이다. 여전히 매일 성령님의 깨끗함을 절실히 필요치 않은 가족 아무도 없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예수님을 매일 매순간 머리로 모셔야 한다.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아야 한다. 글머 그 가정의 머리는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이 되며, 예수님이 머리라면 그 가정은 바로 교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신 바로 그 첫째 소원이다.
예수 믿는 모습에서 가장 실패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님의 뜻과는 가장 멀게 사는 모습이 무엇인가? 내 살기 바빠 전도하지 못하는 것인가? 수시로 죄를 짓는 것인가? 그보다는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이 나보다 열등하다고 여기거나, 그들이 짓는 잘못과 허물 때문에 혀를 쯧쯧 차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능력과 지성은 당연히 우열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로 외모로 사람을 대하지 않기에, 그분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 일에서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모자라는 부분 때문에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데도 열등한 법은 결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나님은 힘들고 외로운 자들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 실제로 어머니가 언제나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도 더 자주 읽는다. 아버지들은 기도도 성경읽기도 거의 하지 않지 않는가? 아버지가 아내와 아이들을 향해 혀를 쯧쯧 차고 있을 때에 틀림없이 하늘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아버지를 보고 혀를 차고 계실 것이다.
이 또한 제가 드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가정을 이루라고 하셨지 않는가?(창2:24) 아버지가 영적지도자가 되어서 그 가정을 그분 뜻에 맞게 거룩하고 신령하며 아름답게 이끌어 가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 남자가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는 가정 안에 정말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습으로 서야 한다는 뜻이다.
서두에 가정이 교회보다 우선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과 후가 달라졌다. 그 중요성과 우선성은 여전히 가정이 교회보다 앞선다. 그러나 순서는 교회가 먼저다. 타락 후 마지막 심판 때까지 죄라는 변함없는 상수가 각 개인과 인간사회에 딱 붙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신자도 그 본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 마음은 선을 원하되 육신이 따르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 주간의 첫날은 반드시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진리로 영혼육을 깨끗케 해야 한다. 챨스 스펄전은 내 몸 속에 더러운 피는 다 제거하고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만 채워달라는 기도를 했다. 신자는 주일 예배를 통해 예수님이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 되어달라고 소원해야 한다.
주일 하루에 올인(all-in) 하기 위해 나머지 육 일은 다 깽판 쳐도 된다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나머지 육 일에 올인 하기 위해 주일은 더더욱 주님께 올인 해야 한다. 바로 예수의 형제와 자매로 삶에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억지로 쥐어짜듯이 힘들게 예수 믿으라고 한 적은 없다. 정말 신자가 잘 되기를 그분이 더 소원하신다. 신자는 이미 예수님의 형제, 자매가 되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는가?
8/5/2012
저로선 글로 정리해 홈피에 올려 놓을 필요가 있어서
투박했던 표현을 고치고 아주 일부 보완하여 다시 올립니다.
(앞으로 유튜브 설교는 항상 그러할 것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