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단위로 축소된 믿음
마태복음 강해(143)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 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든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는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13:1-9)
신앙생활을 10년 20년을 했어도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다. 성경 통독도 여러 번 했고, 기독교 교리 공부를 했음에도 그렇다. 그것도 동일한 본문에 대한 설교를 수차 들었고 성경공부까지 했음에도 그렇다. 신자들이 기억력이 나빠서 금방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나 목회자들이 본문이 정작 말하는 바와는 다르게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본문의 씨 뿌리는 비유다. 그것도 예수님이 18-23절까지 직접 그 뜻을 풀어서 설명했고, 그 전에 10-17절에서 비유로 가르치는 이유에 대해서 보충까지 했음에도 상당히 부족하게 이해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14절에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일종의 경고가 바로 본문부터 해당된 셈이다.
흔히들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서 그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삼십, 육십, 백 배의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전혀 틀린 것 같지 않다. 예수님이 비유를 풀어서 설명한 결론인 23절을 표현만 조금 바꿔서 그대로 인용한 것 같다. 과연 그러한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진술 하나만 따로 떼어서 보면 원론적으로 틀린 것은 없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내용과 본문이 속한 13장 전체의 주제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구체적으로 잘못된 내용은 차츰 따져보기로 하고 우선 13장 전체의 주제를 개론 식으로 살펴보자.
씨 뿌리는 비유의 근본적 오해
13장의 주제를 정확히 알려면 마태복음 전체와 연결해 봐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가 복음서 곳곳에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저자 마태는 주제별로 다섯 강화(講話)로 묶어서 그 내용이 전개되는 순서대로 배열해 놓았다.
먼저 신자가 하나님을 믿고 난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산상수훈으로 가르쳤다.(5-7장) 두 번째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파송하며 전도와 선교에 대해 가르쳤다.(10장) 셋째 강화는 바로 본문이 속한 13장으로 천국에 관한 7가지 비유가 나온다. 넷째는 천국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신자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준비를 시키는 내용이다.(18-20장) 마지막 다섯째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감람산에서 당신의 재림과 마지막 날의 심판에 관해서 가르쳤다.(24-26장)
결국 다섯 강화 모두에서 저자는 예수를 믿은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를 천국과 마지막 심판과 연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산상수훈만 해도 그 결론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대신에 반석에 집을 짓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7:21,24) 이어지는 두 번째 강화에서 제자들더러 전도를 하다보면 순교까지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셋째 강화가 천국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에 관해 가르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논리의 흐름이다.
13장의 일곱 가지 천국 비유도 그 내용에 따라 의도적으로 배열되었다. 먼저 본문의 씨 뿌리는 첫째 비유는 말 그대로 천국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는 단계에 관한 것이다. 둘째 가라지 비유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 교회 안에는 천국으로 구원 받을 자와 지옥으로 떨어질 자가 공존한다는 뜻이다. 셋째 겨자씨와 넷째 누룩의 비유는 천국 복음이 신자의 내면과 공동체에서 확장되는 모습을 상징한다. 다섯째와 여섯째는 천국복음이 얼마나 고귀하며 그것을 소지한 자의 기쁨을 감추인 보배와 값진 진주에 대조시켰다. 마지막 일곱 번째 그물 비유는 마지막 날에 곡식과 가라지의 영원한 운명이 둘로 나뉜다는 뜻이다.
이렇게만 따져 보아도 씨 뿌리는 첫째 비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오해가 간단히 풀렸다. 신자가 순종하면 삼십, 육십, 백배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이차적 적용은 될지언정 본문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신자가 믿은 후의 신앙성숙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이 11절에서 비유로 천국이 비밀에 관해 가르쳐주겠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천국복음이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전파될 때에 나타나는 네 가지 반응을 묘사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 결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복음이 사람 안에 역사하여 영생의 열매가 맺히느냐 아니냐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앞의 세 반응은 그 원인과 경과야 어떻게 되었던 구원을 얻는데 실패한 모습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가라지 비유가 뜻하는 바가 교회 안에는 곡식과 가라지 즉, 구원과 심판만 공존하지 그 중간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 안에는 앞의 세 가지 모습의 가라지 신자가 있고 그래서 이 비유를 신상생활의 성숙을 위해 적용하는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서 이 비유의 의미 자체를 신자의 신앙 성숙 단계에 따라 하나님께 복을 받는 정도가 다르다고 해석해석 해선 안 된다. 만약 그런 뜻이 되려면 예수님이 곡식과 가라지로 나눌 것이 아니라 보리, 수수, 밀, 쌀 식으로 네 가지 곡식에 대조시켜야 논리적이다.
천국의 이중성(二重性)
예수님이 구태여 일곱 비유를 든 것도 의미심장하다. 일곱은 알다시피 완전 숫자다. 천국은 완전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천국으로 인도하는 십자가 복음도 완전하다. 귀 있는 자가 그 복음을 잘 깨달으면 복음의 역사도 완전히 이뤄져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복음이 살아 역사하고 예수님이 머리가 되어 있는 교회나 교인의 공동체에도 천국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는 요한계시록처럼 천국의 실제 상황이나, 역사의 마지막 때의 구체적 모습에 대한 묘사는 없다. 신자의 이 땅에서의 삶과 교회의 상태에 비유했다. 천국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신자가 장래 죽은 후에 들어갈 천국과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되는 것은 미래적 천국이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 완성됨으로써 이 땅에도 천국이 실현될 수 있는데 바로 현재적 천국이다. 예수님은 이 둘 중에 오히려 천국의 현재성을 더 강조하는데 일곱 비유의 초점을 맞추었다.
예컨대 감추인 보화나 값진 진주의 비유에 당연히 미래의 천국이 그만큼 귀하다는 근본적인 뜻이 있다. 눈물, 슬픔, 고통, 죄악, 상처, 분노, 거짓 등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천국이 너무나 소중하므로 신자는 다른 어떤 일보다 가장 먼저 시급하게 십자가 구원을 얻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 강조하면 자칫 현실을 탈출하고 도피하려는 종말주의에 빠지게 된다. 주님이 강조하는 측면은 현재 이 땅도 미래의 그런 천국만큼 귀중하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다른 점이 아주 많다. 그중 아주 중요한 것 하나는 다른 모든 종교는 죽은 후에라야 구원과 심판으로 나뉜다. 그러나 기독교에선 이 땅에 살아있을 동안에, 그것도 아주 어려서부터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구원 후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이 땅에서부터 천국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다. 이 땅에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말하자면 지금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보화와 진주를 사야한다는 비유가, 죽기 직전에 지옥 심판으로 떨어질까 너무 두려워서 전 재산을 다 주어도 좋으니 제발 구원 받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을 의미한 것은 아닌 것이다. 신자는 천국을 소지한 채 죽는 것이다. 그 천국을 하늘로 갖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물려주고 죽어야 한다.
물론 죽기 직전의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기존의 신자는 예수 안에 들어오면 이미 천국 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복음(Good News)인 것이다. 본문에서 신자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의미는 이차적이다. 처음 십자가 복음을 전해 들었을 때에 과연 천국 문이 열리는 팡파르 소리로 들렸는지,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의 필터를 통과하는 순간 자신이 천국에 들어와 있음을 확신하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가?
그럼 여러분에게 한 번 물어보자.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가? 천국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현실의 삶이 너무 고달파서 도무지 천국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느끼는가?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를 믿었다면 이미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데도 별로 실감을 못한다. 그 이유는 우습고도 불행하게도 바로 본문을 잘 믿으면 비례해서 복을 받는다는 식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름 열심히 성경공부 했고 교회 모임에 성실히 참여했으며 봉사와 헌금과 전도도 분에 넘치도록 했는데도 삼십, 육십 배의 복은커녕 더블로도 못 받았으니 분문의 말씀을 믿기는커녕 하나님 그분마저 의심이 든 것이다.
잘 믿으면 하나님은 비례해서 복을 준다거나, 반드시 축복이 따른다는 잘못된 인식이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에게 정말로 뿌리 깊고도 끈질기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이유가 불신자 시절의 잘못된 인식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면도 있지만, 작금 교회에서 믿음을 너무나 단순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는 말씀으로 믿음의 본질을, 그것도 문자적으로만 설명하고 치운다.
믿음의 내용을 절대자가 계시다는 실존성과 그에게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두 가지 요소로만 소개한다. 이는 이방인과 타종교인들도 알고 믿고 따르는 바다. 믿음을 가장 최소 단위로 축소시켰다. 이 히브리 본문이 얼마나 내용이 풍성한지 잘 모르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과연 무엇인지조차 따져보지도 않는다.
많은 신자들이 본문을 그저 주문처럼 외우며 기도한다. “하나님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해 놓고 왜 이 고난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덧나기만 합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기억력마저 의심하고 당신이 하신 말씀을 깨우쳐 주려 한다. 또 그러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칭송한다.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따져도 그런 의미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치고 그분이 계신 것과 그분을 찾는 이에게 응답해준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기도를 시작조차 않는다. 본문은 믿음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말씀이다. 또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타종교와 다를 바 없는 기독교
이는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다. 신자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이방인의 그것과 방불하게 만들었다. 믿음을 너무나 왜소하게 축소해 버렸다. 믿음 자체가 너무 작아졌으니 신앙생활의 당면과제는 어떻게 하면 그 믿음을 키울 수 있는가가 되었다. 또 그래야만 잘 믿어서 복을 많이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믿음에다 힘과 정성과 열의와 노력을 추가로 가능한 많이 보태야 한다. 어떤 수를 동원하든 “으ㅆㅑ! 으ㅆㅑ!” 가장 뜨겁게 믿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물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께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것은 믿음의 핵심이자 근본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학으로 치면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믿음이 완전해지려면 믿음의 충분조건에도 맞아야 한다. 예컨대 “3의 배수이면서 5의 배수도 되는 가장 작은 숫자는?”이라는 문제가 있다 치자. 그럼 3, 6, 9, 12는 단지 필요조건에만 맞았기에 절대 정답이 될 수 없다. 정답은 5의 배수면서 최소 숫자인 충분조건에도 부합한 15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필요조건만 갖추었다고 하나님 앞에 자기들 믿음이 정답이라고 우기거나, 조금 깨인 자는 그 반은 맞추었으니 복을 반이라도 주어야 한다고 우긴다. 하나님은 3, 6, 9, 12는 정답이 아니니 꿈쩍도 않으신다. 신자가 정답인 15를 제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은혜를 베푸신다. 그렇다고 15에 맞춘 15의 복으로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정답의 믿음을 안 것 자체가 복이 된다.
많은 신자들이 필요조건인 하나님의 실존성과 기도 응답 능력만 믿으니 아무리 부르짖어도 별무 소식일 때가 많다. 실제로 믿음으로 승리하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뜨겁게 열성과 힘을 보태어도 달라지는 것도 없다. 차츰 믿음에 힘이 빠지고 건성이 생기고 형식적, 의무적 믿음으로 바뀐다.
믿음 자체를 최소 단위로 만들었으니 그 열매도 최소로 맺힌 당연한 결과다. 신자들이 이런 원리는 몰라도 오랜 체험을 통해 기도 한다고 그리 응답되지 않음을 깨닫고는 지레 믿음을 자꾸 더 축소시킨다. 그나마 반쪽의, 사실은 기독교의 믿음이라고 볼 수 없는데도, 믿음마저 포기하면 나쁜 일이 생길까, 하나님께 벌 받을까 두려워서 주일을 지키고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최소한의 의무는 지키기로 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 신자들끼리만 모여서 찬양과 기도는 뜨겁게 한다는 뜻이다. 환난과 죄악과 흑암이 들끓는 교회 밖으로는 너무나 두려워서 나갈 엄두도 못 낸다.
이처럼 신자 스스로 자기 신앙을 축소시켰으니 기독교가 힘을 잃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한 동력과 죄인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생명력을 상실했다. 역으로 세상이 교회를 타락시키는 중이다. 그럴수록 신자들은 그저 자기 믿음을 불붙여 뜨겁게만 바꾸려 한다. 불을 붙이면 그나마 있던 믿음마저 타서 없어질 수 있다. 실제로도 그렇게 뜨겁게 울부짖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믿음의 생명력은 오직 물로서만 자란다. 예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성령의 생수다. 절대자에 대한 열성과 정성은 죄송하지만 다른 종교가 훨씬 강하다. 만 배 절을 한다든가 탑을 수천 번 돈다. 기독교도 특별 새벽기도 백일이나, 천일 제단 쌓기 등으로 자기 소원을 기도하여 응답 받는 일에만 집중하면 그들과 다를 바 하나 없다. 하나님과 예수님이라는 절대자의 이름이 다른 것 빼고는 말이다.
믿음의 본질
히브리서 11:6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는 것이 절대자의 객관적 실존성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나의 개인적 하나님이 되신 것을 믿는 것이다. 정말로 나의 주인이 된 것이다. 자신의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이미 보장되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뿌려진 씨앗은 천국복음이다. 바로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자는 영생을 얻었고 천국 안에 이미 들어온 것이다. 그의 심령 안에 성령님이 임재해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자 하는 열망이 생긴다. 예수님의 이 땅을 향한 첫 메시지도 천국이 가까워왔으니 회개하고 천국을 차지하라는 것이었지 않는가?
믿음이란 예수님이 정말로 자신의 처음이요 끝이 되어 있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영원토록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완전한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다. 자신의 전부, 생명까지 그분에게 의탁해야 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신의 심령에 임재해 있는 예수님으로부터만 영향을 받아야 한다. 예수를 믿고 난 이후로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만, 최소한 그렇게 살고 싶은 소망을 갖고 열심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니까, 흔히들 내가 하고 싶은 일 이것 저 것 전부를 하나님이 해결해 달라고 맡긴다. 믿음이라는 이름을 걸고 기도의 형식만 빌렸다 뿐이지 내가 주인이요 주님을 나의 종으로 삼는 짓이다. 내가 하는 일과 주위 환경만 주님께 떠넘겼지 정작 자신은 전혀 맡기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에게 안전, 행복, 만족을 주는 것은 그 일들과 그 환경이다. 하나님을 진짜로 주인으로 모신, 말하자면 천국에 들어간 체험이 없다.
예수님이 나의 알파요 오메가요 전부라고 고백하는 일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어떤 신령한 체험을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은 절대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철두철미 깨닫는 것이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건강, 지성, 명예, 권력도 마찬가지다. 그 모두를 다 갖추었어도 여전히 내 속의 염려, 상처, 시기, 질투, 분노, 저주, 갈증, 허망, 거짓 등을 없애기는커녕 제대로 처리도 못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또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두 팔 벌리고 주께로 나오는데 주님이 나를 박대하시면 전혀 갈 곳이 없다는 고백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고백들이 예수 믿을 때 뿐 아니라 믿은 후에도 매일 매일 진정한 고백이 된다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건강, 재물, 지성, 직위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인생살이에 아주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또 모든 인생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심지어 신자에겐 그렇게 사는 것이 임무다. 하나님이 주신 최초의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세상의 것이다. 세상의 것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물질이다. 물론 지성이나 권력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라 해도 보이는 세상 즉, 물질계 안에서만 필요하고 힘을 발휘한다. 내가 현재 이 땅에서 당장 힘들어 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줄지는 몰라도,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살찌우고 행복케 해 줄 수는 없다. 그런 것들이 미래의 천국에만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지도 못한다.
이 땅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의 것으로 세상에서 천국처럼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들이 신자들보다 도덕적 영적으로 미숙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오직 보이는 이 물질계 안에다 묶어놓은 것뿐이다. 요컨대 스스로 자신을 물질에 불과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최소 단위로 축소시킨 것이다.
지금 불신자들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실존성과 기도 응답 능력이라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 축소시킨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 보이는 것이 전부로 인식했던 불신자 시절에서 바뀐 것이 거의 없다. 자신의 정체성을 여전히 물질계 안에서 형통을 바라는 물질로 제한시키고서 하나님은 그 형통을 도와주는 도우미에 불과하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죽은 후의 구원만 바라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이 땅에서부터 자신의 참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천국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그분이 내 안에 실제로 임재하는 것이다. 당장 실감이 안 나고 그 실현이 더딜지라도 무한한 가능성이 그분과 함께 와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란 단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기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싶은 열망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가 절대로 물질로 끝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보이는 것 풍성해진다고 내 삶이 윤택해지는 것과는 별개임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내 인생이 끝난다면 그만큼 허망한 인생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새벽 기도에 천일제단을 쌓아서 이 땅의 형통만 이뤄낸다면 문제는 해결될지라도 나는 온전한 천국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런 일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도 전혀 참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신자는 대신에 눈에 보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룩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사랑을 주님이 내 안에 실현시켜 주고 계심을 체험한다. 또 나를 통해 내 주위에 번져나가게 해주신다. 그래서 이미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또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다시 그 흑암의 구렁텅이로 끌고 나갈 수 없음을 안다. 천국에 시민권을 이미 확보한 것이다. 이 땅에선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어떤 세력 앞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무엇에든지 의롭고, 무엇에든지 진실 되고, 무엇에든지 아름답고, 무엇에든지 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나의 진짜 주인 되심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분과 동행하는 체험을 통하여 아주 익숙하게 아는 것이다.
믿음의 궁극적 도착지만 천국이 아니라, 그 출발지도 천국이다. 주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명하면 서는 것이다. 출애굽한 백성 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임재하신 주님의 명에 따라 기둥이 멈추면 백성도 멈추었고, 기둥이 진행하면 백성도 진행했다. 또 에스더는 하나님이 죽이신다면 얼마든지 죽겠다고 하면서 아하수에로 왕 앞으로 나갔다. 바로 그것이 천국이다.
믿음을 최소 단위로 축소시켜 놓았으니까 자꾸만 그 믿음을 최대한 키우는 것을 영적 훈련 내지 성장이라고 말한다. 아니다. 영적 성숙은 오히려 믿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참 복음, 순수한 복음, 예수님이 진짜 나 개인의 구주가 되는 복음을 회복하면 된다. 예수님을 소유한 자는 천국 안에 들어온 것이며, 천하를 다 가진 것이다.
그 말은 바로 세상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바꾸는 일은 오직 신자만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자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비록 우리가 아직도 연약하고 나태하여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신분과 위치를 제대로 확신하고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바로 내 자신의 삶은 물론 내가 속한 가장 가까운 공동체부터 천국이 임하고 나를 통해 천국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8/12/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