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증 3/10 - 향방 없는 달음박질을 하지 않는가?

조회 수 797 추천 수 30 2012.07.03 19: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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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방 없는 달음박질을 하지 않는가?
(조급함도 큰 죄다. 시리즈 3)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5-27)


불안감으로 가득 찬 이 세대

최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장래에 대해 극히 불안해하고 있다. 우선 세계적 불경기가 언제쯤 끝날지 아무도 예측을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작금의 불경기가 단순히 미국 월스트리트의 탐욕 때문이거나, 경기 사이클이 나빠진 탓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생산, 유통, 소비 모든 측면에서 자동화, 정보화, 세계화가 급격히 진행되어서 전통적인 직장이 상당수 필요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구조적 불황인지라 일할 만한 직장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젊은 세대들은 풍족하게 자라기는 했지만 막상 자신의 꿈을 펼칠 때가 되어선 캄캄한 미래가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지성과 문명이 최고로 발달해 각 개인마다 아주 큰 꿈을 품을 수 있게 된 세대가, 이전에는 몰라서도 제대로 꿈꾸지 못했지만, 그 실현할 길은 도리어 막히는 기막힌 모순이 노정되었다.
    
나라마다 공통적으로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너무 심해져 가진 자 1%와 못 가진 자 99%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못 가진 자는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가진 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상실감마저 생겼다. 대다수 개인은 실직하고 소득이 감소하는데 반해 글로벌 대기업만 예외인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한계가 드러났으므로 혁신적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서서히 호응을 얻고 있다.

일종의 역사적 경제적 큰 전환기에 접어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언제 호황이 올지 예측을 불허한다는 뜻이 된다. 빈부의 차이를 메울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고 또 현재의 경제구조를 대체할 마땅한 제도가 없다는데 고민은 더 깊어진다. 이러다 칼 마르크스의 망령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까 두려울 정도다.

정치적으로도 이스라엘과 그를 지원하는 서구와 아랍권 극단 세력 간의 해묵은 갈등이 최근 절정을 향해 치닫는 듯하다. 이란의 핵개발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이스라엘로선 지금껏 그래왔듯이 서슴없이 선제공격도 감행할 것이다. 세계의 패권국가가 되려는 야심을 서서히 드러내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 사이에 자칫 신냉전이 형성될 조짐도 보인다. 아프리카와 중동의 민주화 바람이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전환되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극단 세력의 등장을 부추기고 있다.  

한국만 해도 북한정권이 대내외적으로 크게 선전해온 강성대국원년이자 삼대세습이 시작되는 2012년에는 그간의 실패를 덮으려고 어떤 도발을 감행해올지 모른다. 마침 지난 12월 17일 독재자 김정일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는 바람에 남북 간의 긴장은 더 높아지고 있다. 내년은 남한의 총선과 대선은 물론 미국 대선까지 겹쳐서 한반도 주변정세가 격변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거기다 무차별적인 자연훼손과 경제발전으로 인류가 발을 딛고 사는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로 인한 지구온난화는 이상 기후와 각종 자연재앙을 불러오고 있다. 최근에는 화산과 지진 활동마저 부쩍 심해졌다. 이런 흉흉한 정황에 편승하여 온갖 이단 종파들은 종말 예언으로 한몫(?) 잡으려 든다. 사람들은 이래저래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말세의 죄악들

한마디로 젊은이나 늙은이나 안락한 미래를 실현은커녕 설계조차 할 수 없다는 불안감으로 지구 전체가 뒤덮여 있다. 불안감은 필연적으로 조급함을 불러 온다. 초조하고 두려운 심리적 증상을 어서 빨리 중지 시키고 안락감 내지 평온함으로 회복되고 싶다. 그러려면 불안을 일으킨 나쁜 상황을 빨리 개선해야 하는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현재의 불안감을 유발시킨 원인이 거의 외부에서 왔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가 계획한 일이 일정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생기는 조급증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일의 진척이 더딘 조급증의 원인 대부분은 자신에게서 기인한다. 최악의 경우 자기 계획을 포기해버리면 그에 따른 조급증도 사라질 수 있다.

반면에 외부 요인에서 생기는 불안감은 자신의 통제 밖인 것이 대부분이다. 현 세대가 느끼는 불안감을 보라. 극심한 불경기, 사회 구조적 문제, 환경오염과 자연 재앙, 불안한 정정 등등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결코 아니다. 또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문제라 정도는 달라도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각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런 전 세계적인 불안감과 그에 따른 조급증도 죄악이라고 지적한다. 신자이면서 먹고 마시는 문제인 경제나 정치에 민감한 해졌다고 야단치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세에 나타날 특징적인 죄악과 이단자들의 잘못들을 지적하고 있다. 바로 앞 2장에서 그리스도의 군사 된 자의 자격과 임무에 대해 가르쳤다. 3장에선 말세의 죄악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신자더러 그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자가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 고난을 끝까지 견디어내고 승리하라는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 믿음의 유산을 잘 지키고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고(3:14) 했다.

말세에 두드러지게 나타날 죄악이란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는 죄라는 뜻이다. 신자라면 더더욱 멀리해야 할 죄다. 그 가운데 조급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포함되고 있다. 주로 기질상의 약점처럼 간주하기에 나쁜 결과를 유발하지 않은 이상 죄가 될 것 같지 않은 조급증이 사실은 마지막 심판마저 재촉하는 큰 죄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사도가 열거한 죄악들이 그리 심각한 것 같지 않고 또 지금껏 모든 세대가 다 범해왔기에 구태여 말세를 재촉하는 죄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자세히 따져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 죄들의 배경에 일관된 사상적 흐름이 분명히 엿보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바로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세태와 너무나 일치한다.

포스트모던의 실체

계몽주의가 발달하자 인간이성과 과학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품게 되었다. 인간의 능력으로 유토피아를 당장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은 꿈에 부풀었다. 그 위대하고 의로웠던 비전은 일이차 세계대전으로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무참히 깨어졌다.  

그런 실패 이후의 이 세대(post-modern)의 특징은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누구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중심성이 상실되고 모든 표준이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이성과 과학이 휘두르던 무소불위의 칼은 사라졌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방임적인 감성과 직관이 모든 결정을 좌우하는 지렛대가 되었다. 절대적 진리는 절대로 없다는 것이 절대적 진리가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현 시대의 죄악상이 얼마나 엄청난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단순히 죄악의 정도가 심해지고 점차 불신자들도 늘어나면서 기독교 교세가 약해진다는 정도로 이해해선 안 된다. 신자들마저 역사상 최고로 안락한 물질문명을 누리며 인권과 자유가 잘 보장되는 가운데 몸담고 살고 있기 때문에 영적 통찰력이 너무 떨어져버렸다.

포스트모던 이전까지의 모든 세대에는 모두가 믿고 의탁할만한 중심성과 표준은 있었다. 역사상 모든 세대의 모든 종족에게는 각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 방식까지 결정할 수 있는 특정한 준거가 있었다. 그 준거가 유형이든 무형이든 간에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여 적용했다. 이를테면 비록 비성경적이긴 해도 원시시대에는 각 종족마다 제사장과 사제들이 그런 역할을 맡았다. 암흑시대라는 중세에도 교황과 교황청이 모든 사람의 생활에 중심으로 버티고 있었다. 종교가 활성화되지 못한 사회라도 나름대로의 도덕률과 관습이 그 공동체의 질서를 잡아주고 모든 이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또 그 중심들의 형태가 유형적인 인간이나 인간의 단체든, 무형적인 관습 법 도덕 종교든 간에 단순히 공동체내의 범죄만 관리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결정하는 보편적인 지렛대 역할을 했었다. 이제 포스트모던에는 그런 준거들이 거의 모두 해체되어 버렸다. 완전한 해체는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주지해야 할 사항은 인간 죄악의 양상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현재는 매스커뮤니케이션과 인터넷의 발달은 물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Social Network Service) 소통방식의 급속한 보급으로 모든 죄악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되니까 더 심각하고 많아 보일 뿐이다. 죄가 전 세대에 계속 편만한 모습이었고 하나님을 부인 거역 저주하는 사람들도 항상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세대가 범하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악은 바로 죄를 판단할 기준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죄 자체가 실종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를, 특별히 개인의 삶과 인생을 인도하는 중심성이 상실된 것이다. 계몽주의로 하나님에 관한 견해가 서서히 불경하게 바뀌면서 그분마저 실종되기 시작한 때에도 이성과 과학이라는 절대적 준거는 있었다. 이젠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을 하나로 묶거나 한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전혀 없다.

이런 현상은 분명히 인류 역사상 최초로 있는 일이다. 모든 것이 해체되고 그저 남은 것은 완전히 파편화된 개인들뿐이다. 전통적으로 선하고 유익하다고 인정되는 기준들은 더더욱 해체작업이 가속화 되었다. 심지어 한 개인 안에서도 온갖 형태의 해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야말로 자기가 자신조차 전혀 감도 못 잡는 시대가 되었다.

다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종말의 특징을 천천히 살펴보자. 한 마디로 자고하여져서 자기만 사랑하는 증상들이지 않는가? 오직 자기뿐이다. 하나님을 덜 사랑하는 정도는 모든 세대에 있어왔지만 이젠 부모마저 거역한다. 부모를 거역하는 판에 이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니까 이웃에 대해 무정하고, 참소하고, 배반하여 팔게 된다.  

또 자신의 사고와 말과 행동의 방향을 잡아줄 절대적 중심이 없으니까 감성과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순간순간 기분 내키는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니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조급하게 된다.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또 감성은 쾌락을 쫓기 마련인데 세상 쾌락은 모두 선과 등을 지고 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함에도 모든 악이 선으로 위장하고 있다.  

지금껏 개인과 사회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버팀목이 있었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선과 의를 지향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사회에 통용되는 도덕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은 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게 만들어진 형상이 타락하긴 했어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흔적인 양심에 따르려 했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사는 것조차 아무 의미가 없고 경우에 따라선 거꾸로 악한 것이라고 매도당하고 있다. 죄라고 범주되어지는 사안이 전혀 없다. 대표적 예로 동성애나 혼외정사가  전적으로 각자의 자유에 속한 것이기에 결코 죄가 아니다. 그런 행위가 악하다고 판단만 해도 도리어 그들의 인권과 자유를 저해하는 악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신자의 분주함, 불신자의 조급함  

믿고 의지할 중심성이 사라지면 불안해지고, 그 불안감은 조급증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런 조급증은 이미 말한 대로 기질적으로 성격이 급한 것이나, 자기가 계획한 일의 진척이 늦어서 생기는 것과는 다르다. 또 일을 빨리 많이 처리하는 분주함과도 다르다.

바울 사도는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한다고 했다. 그도 분명히 달음질은 했다. 다른 이와 다른 것은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했을 뿐이다. 향방이 분명하게 정해져서 달리는 달음질은 아무리 급해도 문제가 안 된다는 뜻이다.

그는 사도로서의 삶을 당시의 올림픽 경기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가장 먼저 “이기기를 다투어야” 한다고 말한다. 분명한 목표를 갖고서 그 목표를 성취하도록 노력하는 일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더러 개인적 현실적 목표를 세우기 이전에  예수님의 제자 된 소명을 정확히 인식하고 평생을 통해 실현하라는 것이다. 구원이후 신자의 삶의 자세다.  

물론 그 목표는 세상 사람과는 달리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는 것이다. 영생을 소지한 자로서 천국의 영광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얻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는 않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부끄럽지 않은 구원을 얻어야 한다.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야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비춰야 한다.

신자가 되면 반드시 자기 사고와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확실한 기준이 하나 생기게 된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일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며 무엇이 인생에서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열망에 붙들리게 된다.

그렇다면 자꾸만 자신을 그러지 못하게 만들려는 즉,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이전의 집착, 편향, 선호, 미련 등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서 경건을 훈련하여야 한다. 죄악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겨야 한다. 그 일에 정말로 열심히 달음질 즉, 부지런하고 아주 바빠야 한다. 사단과 죄악은 절대로 쉬지 않고 신자를 시험하고 유혹하기에 절제하는 일에 느긋하고 게으를 수는 결코 없다.

앞선 글에서 성경적으로 조급함이 죄가 되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논하는 종말의 보편적 심리상태인 조급증도 같은 맥락이다.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고 허공을 치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할 중심이 마음에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영역이 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고는 항상 갈급할 수밖에 없는 내면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인간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지 않으면 생령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지만 아담의 원죄 이후로 모든 이가 그 형상이 파괴 왜곡된 상태로 태어난다. 하나님과 다시 화목되어서 영적 교통이 이뤄지지 않으면 갈급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하나님을 버리고는 웅덩이를 아무리 깊게 판들 그 비워진 공간에 생수가 채워지지 않는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곧 바벨론에게 멸망할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이미 종말의 세태를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하나님을 마음에 제거한 불신자들을 향한 영원한 진리를 선언한 것이다. 그들의 조급증이 보편적 심리이고 외부적 요인이 크다고 해서 개인적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기를 온전히 붙들어 줄 진짜 중심인 하나님을 거부한 것은 분명 그 본인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그와 반대여야 한다.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아도 향방이 분명하면 아무 결실도 못 맺는 허공을 치는 싸움이 될 수 없다. 반드시 지금 가고 있는 한 쪽 방향의 끝인 종착점에 도달하게 된다. 신자는 선한 싸움에 정말로 바쁘게 달음질해야 한다. 그러나 그 중심에 예수에 대한 열망과 성령의 붙들어 주심으로 인해 아무리 바빠도 조급증이 생길 수 없다. 신자 되었다는 큰 특권 중의 하나가 자신이 걸어가는 향방이 온전히 정해져 있기에 범사에 조급증 대신에 평온함과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말세의 진짜 징조

흔히들 말세의 징조를 외적 현상에서 찾으려 든다. 도덕적 성적으로 극심한 타락, 대규모적인 자연재앙, 최근 같은 사회경제적 구조의 와해,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전쟁의 발발 등에서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들은 단지 말세의 시작이라고 했다. 이제 곧 말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경고이지 말세가 본격적으로 닥쳐서 나타나는 증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느냐 너희는 삼가 두려워말라 이런 일은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4-8)

그런 외적 증상은 단지 시작일 뿐이니 분명히 두려워말라고 했다. 반면에 막상 말세가 닥친 후의 상황을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모든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9-13절)

자세히 보면 바울 사도가 말한 바와 같지 않는가?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지고, 서로 미워한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자는 예수님의 삶과 동일한 삶을 삶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사서 환난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넘기워진다고 한다. 그리고 끝까지 견디는 즉, 세상 사람과는 전혀 반대되는 방식으로 살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럼 정작 신자가 판단할 말세의 징조란 자신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기에 고난을 받고 심지어 그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처지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지금껏 아무리 죄악이 관영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조가 득세를 해도 그래도 공동체를 유지하는 틀은 있었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선악을 가름 짓는 기준은 있었다. 쉽게 말해 아무리 죄를 지어도 공동체의 보존과 번창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할 줄은 알았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금지시켜서 영적 타락을 주도했다고 비난받는 케네디 대통령만 해도 국가가 너희를 위해 해주길 기대하기 보다는 너희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젠 완전히 반대다. 자기 안일과 쾌락을 위해 공동체가 자기를 섬겨야 한다고 믿는 세태로 변했다. 내 개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지 않는 국가라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말하자면 각 개인이 하나의 왕국을 이루어서 스스로 자기 충족을 구하고 있다. 모든 사회가 정말로 완전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에 말세에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고 서로 미워하게 된 원인도 오직 개인이 왕국이 된 까닭이다. 자기의 기분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미워한다. 문제는 그렇게 백 프로 해체된 개인들이 과연 자기 힘으로 충족을 얻을 수 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한탄대로 아무리 물을 채워도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붙기다.

포스트모던 세대가 나타난 결정적 이유는 인간 스스로는 결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인간을 지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꾸만 자기 속으로 파고들기만 했다. 태어나고 죽는 일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자기 충족을 자기가 구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나중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그런 자들을 세계 제국 하나로 묶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인간 스스로 무덤을 판 결말일 뿐이다.

자기 충족을 스스로 구하는 최종 단계는 개인이 개인의 왕국을 쌓는 것이다. 그동안 함께 쌓으려던 노력이 다 실패로 돌아가자 나 혼자만의 유토피아로 만족하겠다는 고집이다. 최근의 웰빙(well-being)을 추구하는 사조도 엄밀히 따지면 그런 성향의 일종이다. 자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의미 있게, 정확히 말하면 남들과 다르게 더 잘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담을 쌓은 웰빙은 절대로 웰빙이 될 수 없다.

정작 문제는?

지금껏 말한 것이 불신자를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신자들이다.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조급함은 하나님이 없어지고 모두가 극도로 개인적으로 변하면서 나타나는 보편적 성향이라고 했다. 어차피 모두가 그렇게 바뀌게끔 역사가 진행된다는 뜻이다. 역으로 말해 불신자들에게 그런 잘못을 지적해주어 쉽게 깨닫고 회개할 수 있다면 말세가 올 리도 없다. 그들에겐 조급증의 잘못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는 것이 급선무다.

반면에 신자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니까 이미 말한 대로 말세의 조급증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과연 그러할까? 최근 기독교가 개인적 성향으로 해체되기 바쁘지 않는가? 종교성과 영성으로 포장하긴 해도 신자는 개인 왕국을, 교회는 교인들만의 왕국으로 바뀌었지 않는가?

예컨대 교회가 심리 치유 전문 병원이 되어 가고 있다. 신자들마저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기에 심리적 기법을 동원해서라도 안심을 심어주기에 급급하다. 그 치유과정에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와 성령의 중생의 씻음이 없거나 아주 미미하다. 요컨대 불안감에서 오는 조급증을 없애려 교인이나 교회나 조급증을 내고 있다. 죄에서 구원을 받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권면은 강단에서 사라졌고 마치 성경에 없는 구절 같아졌다.

신자 고유의 말세적(?) 잘못도 있다. 이미 말한 대로 말세의 징조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들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이 말하는 징조를 잘 분별할 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흑암의 세력이 세상 사람들을 교묘하고도 음흉하게 오도하는 영적 흐름은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 채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보고 성급하게 말세로 오해한다.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불신자들의 특징이다. 신자가 신자 된 신분과 특권을 잊고 쉽게 불신자 시절의 습성으로 돌아가는 것도 또 다른 조급함이지 않는가?  

서두에 열거한 현 세대의 불안감에 신자가 함께 부화뇌동하는 것도 자칫 간과하기 쉬운 조급증이다. 다른 말로 말세의 조급증이 세상 사람만의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천재적인 정치가나 학자가 나타나 현세대의 문제들을 다 해결했어도 임시방편 밖에 되지 않음을 신자들이  모르고 있다. 모든 선한 것은 온전히 선하신 하나님께로만 오고 역사를 실제로 통치하는 이는 그분 혼자임을 잊고 있는 조급증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세상의 어떤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예컨대 지구 온난화의 문제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이 지구를 태양에서 조금만 뒤로 물리치면 단 번에 해결된다. 전환기에 들어선 경제적 위기는 그동안 물질 우상만 추구한 인간들의 죄악에 대해서 그 상실된 마음 그대로 두고 있는 하나님의 형벌인 셈이다. 바꿔 말해 인간의 자승자박인 것이다.  

새로운 경제체제를 고안하든, 아니면 호경기 사이클로 회복이 되든 인간이 생수의 근원 되시는 분께로 돌아가지 않는 한 또 다른 문제는 생기기 마련이다. 문명이 더 복잡하고 고급하게 발전할수록 문제 또한 그에 따라 복잡하고 고차원적이 될 뿐이다. 아니 인간이 처한 정황은 이미 실타래처럼 엉키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종말에 나타나는 신자의 조급함도 하나님의 완벽하신 주권과 섭리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성경이 종말이 시작되고 적그리스도의 환난이 닥칠 때에 신자에게 반복적으로 강하게 권면하는 말씀이 무엇인가? 끝까지 참으라는 것이지 않는가? 절대 조급증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조급증이 일반적 현상이 되면 종말이 다가왔다는 징조로 분별해야지, 그들의 불안감에 물들어 같이 조급해지지 말라는 것이다.  

간혹 어서 빨리 예수님 오시기만 기다리는 이상한 종말관이 있다. 진정으로 이 땅의 회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환난을 피하려는 패배주의라면 너무나 큰 조급증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흑암의 세력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이루셨다. 그 복음 안에 온전히 참여한 자에게도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열쇠를 주셨다. 신자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와 간섭으로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세력 앞에 당당하게 맞서서 이길 수 있다. 신자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오래도록 이런 은혜와 권능 안으로 초대할 책임이 있다.

문제는 그분이 나를 온전히 들어서 쓰시도록 자기 전부를 비워 내어드리느냐 여부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지 못하는 아주 큰 장애 중의 하나로 지금껏 대부분이 미처 몰랐던 “조급함”을 들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를 위하시면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두려움이 없으면 초조함도 없어지는 법이다.

바울이 열거한 말세에 나타날 죄악의 실상을 정반대로 바꿔 보라. 바로 지금처럼 모든 이가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떨 때에, 나아가 말세가 언제 닥치든 간에 신자가 끝까지 인내하며 견지해야 할 신앙생활의 자세다.  

“자기나 돈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긍하지 않고 겸손하며 이웃을 섬기며 부모에게 효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거룩하며 자비하며 화해하며 남을 세워주며 절제하며 인자하며 악은 저주하고 선한 것만 좋아하며 배반치 아니하며 인내하며 자기를 낮추며 쾌락과는 담을 쌓고  경건의 모양보다는 그 능력을 추구하라.”

12/25/2011

사라의 웃음

2012.08.13 23: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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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질문할 때, 향방없이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답변엔 항상 NO!!, 허공을 치는 듯 싸우는 것은 아닌가? 라는 답변에도 늘 NO!! 라고 스스로에게 답변을 했었습니다. 자신의 문제점들을 들여다 본다고 열심히 노력만 했을 뿐이지 막상 문젯점 앞에선 인정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ㅠㅠ

영적무지로 인해 비참한 영적상태임을 인정하지 못할 만큼 스스로 높아지려 버둥거리는 모습들을 제 안에서 봅니다. 이런 실체이기에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주셔요!! 덮어 주셔요!! 기도할 수 밖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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