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핵심적 거짓

조회 수 3009 추천 수 271 2006.04.20 19: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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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루마니아를 뒤엎은 작은 기도 모임

공산당 차우세스크의 학정 아래 있었던 1987년 루마니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조그만 마을 티미소아레에서 몇몇 기독교 신자들이 비밀리에 기도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은 “두려움과 공포의 영을 대적하라”는 말씀을 가장 먼저 주셨다. 나아가 한 밤중에 밖으로 나가 몇 명씩 나누어 마을을 돌면서 공산 학정이 끝나도록 기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철옹성 같이 버티고 있는 공산 정권이 시골 마을의 이름 없는 신자 몇 명이 기도한다고 무너질지 도저히 확신이 들지 않았고 심지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그렇게 하면 기도의 불꽃이 그 마을에서 시작하여 전 루마니아로 퍼질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 그들은 정말 여리고성 전투 때처럼 인내로 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가 임박할 것이라는 믿음이 들어 그대로 순종하였다.

그 2년 후 1989년 12월 15일에 라스즐로 토케스라는 개혁파 목사가 가택 구금당했다. 루마니아 각지에서 신자들이 찾아와 그 집 앞에서 인간 사슬을 이루어 기도했다. 그 중 몇 명이 끌려가 고문을 당했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드디어 수천 명이 그 집 앞에서 기도했고 심지어 불신자들도 참여했다.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의 총 앞에 바로 무릎 꿇고 기도했다. 시골 마을에서 붙은 기도의 작은 불씨가 정말 전국을 불태웠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 같은 역사가 일어났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시민들의 전국적인 저항을 견디다 못한 공산 정권이 손을 들고 물러난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신문의 제목이 놀랍게도 “두려움과 공포의 사슬은 끊겼다”였다. 공산당의 그 두렵던 공포의 학정이 종식되었다는 의미였지만 그 시골마을의 작은 기도 모임에 최초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과 그대로 일치했다.

영적 전쟁의 실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신자가 신령해져서 능력이 크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거룩해져서 온전해지는 것은 영적 전쟁을 승리한 결과다. 경건의 훈련을 쌓아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이 신자를 통해 나타나는 것도 그 열매이지 전쟁 자체는 아니다. 또 그런 결과와 열매는 정작 신자 자신의 노력보다는 성령의 간섭하심으로만 맺어진다.

영적 전쟁이란 뜻 자체가 성령과 악령 간의 싸움이지 않는가? 그 전쟁의 시작과 경과와 결말 모두를 성령이 이끄신다. 영계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다. 신자로선 단지 하나님의 통치가 전 우주와 영계를 통틀어서도 확장되어지기를 소원하거나 기도로 동참하는 길 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이 땅도 사실은 영적 전쟁터로 신자 주위에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 전쟁의 결과다. 이 땅의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과 신자 속에 좌정한 성령이 싸운 결과가 신자의 삶을 좌우한다. 성령이 승리하면 신자의 삶도 승리하고 성령이 패배하면 신자의 인생도 패배로 치닫는다. 성령이 사단보다 능력이 약하거나 성령이 사단에게 질 수도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신자가 성령이 대신 싸우도록 그 자리를 완전하게 내워주지 않았기 때문에 신자가 사단에게 지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가 영적 전투에서 정말로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 노력할 일은 성령의 그런 간섭하심이 완벽하게 드러나도록 자신을 준비시키고 내어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또 그런 준비란 바로 신자 속에 자꾸 생겨나거나 남아 있는 “두려움과 공포의 영”을 없애는 것이다. 그런 영들이 신자의 영을 지배하도록 방치한 부분을 먼저 찾아내어 그 지배를 벗어나게 해야 한다.  

염려의 실체

두려움과 공포의 영은 사단이 신자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사단의 영이라고해서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공포에 질리게 하거나 뭔가 음산한 기운으로 꼼짝 못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런 일은 사단이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했을 때에 최후의 수단으로 동원한다. 대신에 사단은 단순히 앞일을 걱정하게 만들 뿐이다. 예컨대 “이 질병이 끝까지 낫지 않는다면, 사업에 예상 못한 변수가 생겨 부도가 나면, 아이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나쁜 아이들과 사귀어 타락하면, 어떻게 하나?” 같은 염려를 끊임없이 떠오르게 만든다. 이런 현실적 염려를 없애는 것이 사실은 영적 전쟁의 실체다.

영적 전쟁이라고 해서 아주 믿음이 좋은 사역자들이 어떤 흑암의 도성을 두고 합심으로 중보기도하거나 신령한 은사자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만이 아니다. 사실은 그런 것은 영적 전쟁의 극히 일부분이다. 아니 일반 신자들이 영적 전쟁에 실패해서 누적된 쓰레기들을 치우는 일이다. 사단이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최후의 수단이듯이 복음의 사관학교를 나온 장교들이 병사를 대신해서 싸우는 비상수단일 뿐이다.

사단의 주된 전략은 평범한 신자들이 아주 일상적인 일로 염려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맞서 싸우는 전략도 평신도들이 일상적인 일에서 염려를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싸움을 제대로 못하니까 하나님의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고 심지어 성마저 빼앗기기도 한다. 그럴 때는 신령하고 믿음이 좋은 사역자들이 빼앗긴 성과 무너진 성벽을 탈환하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평소에 일반 군사들이 성벽을 잘 지키고 있었더라면 그런 싸움은 사실 필요 없고 그 평소의 전투란 바로 두려움의 영을 없애는 것이다. 따라서 염려를 없애는 것은 영적 싸움의 처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염려를 없앤다고 해서 장래 일을 계획하여 준비마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염려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그 중에서도 일어날 확률이 아주 낮은 일에 사로 잡혀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실제로 질병이 끝까지 낮지 않을 확률 즉 불치병에 걸릴 확률, 심지어 사업이 부도날 확률과 아이들이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 타락할 확률은 여전히 아주 낮고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언제 그렇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미리 걱정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이 염려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내려 주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27) 인간이 염려한다고 키가 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을 걱정하는 것이 염려라는 뜻이다. 사실 스스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은 염려하지 않는다. 계획을 세워 대비하면 그만이다. 따라서 솔직히 우리의 염려는 자기 능력 밖의 일과 전혀 예상치 못하는 돌발 상황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집중되고 있다. 그야말로 염려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일, 즉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다.

결국 염려는 자기의 통제와 예상을 넘어서는 일을 두고 미리부터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일을 인간이 대신 걱정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는 염려를 기도로 바꿀 줄 아는 자이며 불신자는 여전히 염려에 사로 잡혀 있는 자를 뜻한다. 사단의 일을 확장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염려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기도에 의해 가장 크게 확장 된다.  

통제와 예상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해서 전혀 해결이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키가 자라기 위해서는 염려 대신에 키가 자라도록 영양을 섭취하고 열심히 운동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키를 자라게 한다. 마찬가지로 염려할 일은 하나님에게 맡기고 신자는 열심히 기도하고 현재의 상황에 최선을 다해 적응하면 된다.  

사단이 자꾸만 신자더러 염려케 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영적 전쟁의 본질은 당연히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대다수의 신자들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염려가 되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의지해야 함에도 오히려 더 의지하지 않으려 든다. 바로 이런 것이 사단의 고단수 전략이다. 가장 일상적인 부분에 가장 교묘한 모습으로 숨어 들어와서 신자로 혼돈스럽게 만든다.  

사단은 절대로 어렵고 무시무시하고 거창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는다. 거짓의 아비인지라 주로 사기술(詐欺術)을 동원한다. 사기란 가짜이면서 진짜인 것처럼 꾸미는 기술인데 진짜에 가까울수록 더 효과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염려가 들면 자꾸 염려하는 것이 마치 장래를 위해 잘 하는 일인 양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자는 사단의 이런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두려움과 공포의 영이 들면 그 즉시 사단의 흉계임을 알아서 바로 하나님께 무릎 꿇어야 한다. 설령 사단의 사기가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잘못이나 여건의 미비로 생긴 어려움이라도 신자에겐 기도 말고 다른 방법이 따로 없지 않는가?  

영적 전쟁의 실체

하나님이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 된 모임에서 가장 먼저 왜 두려움과 공포의 영을 대적하라는 기도 제목을 주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공산당 정권이 하루 속히 무너져 자유를 달라”는 기도부터 해야 하지 않는가?

공산당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철저히 부인한다. 그렇다면 그 배후에는 사단이 숨어 있다. 말하자면 루마니아 사람들은 겉으로는 공산당의 학정에 시달리지만 영적으로는 사단의 영에 눌리고 메여 있었다. 정보 정치에 희생되어 언제 잡혀가 고문당할지 모른다. 자칫 그들의  눈에 벗어나면 파리 목숨이 된다. 항상 눈치를 보아야 하고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장래에 대한 아무런 소망도 없이 포기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이제 그 작은 기도 모임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은 루마니아 백성들과 공산정권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사단과 하나님을 대리한 사람들 간의 영적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을 이기는 법은 가장 먼저 사단의 사기술을 쳐부수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단의 주 전략인 두려움과 공포의 영을 대적하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문제만 해결해달라고 하나님에게 떼를 쓴다. 심지어 공포의 영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도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도깨비 방망이 뚝딱 식으로 해결해 주리라 기대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문제만 해결해 주려 하지 않는다. 신자가 영적 전투에서 사단을 직접 대적하여 이기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다음에 사단의 동일한 사기술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단은 사람더러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을 염려하게 만드는 일에 너무나도 능수능란하다. 루마니아 사람들, 특별히 민주화를 위해 기도해야할 용사들은 더더욱 사단의 사기술의 본질을 알아야 했다. 신령하게 변화되어 축사(逐邪)의 능력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공포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

사기술은 그 허상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거짓의 정곡만 찔러버리면 절대 힘을 못 쓴다. 현실적으로도 앞으로 닥칠 공산당의 체포, 고문, 처형 등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당히 맞서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공산당을 쳐부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마저 조종하고 있는 그 배후의 실제 대적인 사단과 맞서 싸우라고 한 것이다.  

두려움의 영이 든다면 하나님의 영이 줄었거나 사라졌다는 뜻이다. 루마니아가 공산 학정에 몇 십 년 지나다 보니 사단의 영만 늘어나고 하나님의 영은 줄었다. 공포의 영이 그 땅을 지배하고 있었다. 사단의 궁극적 목표는 너무나 분명하다. 신자로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것 오직 하나다. 그분의 인도와 보호를 의심하게 만들려면 두려움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결론적으로 신자가 정작 모든 신경을 쏟아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의 실체는 이것이다. 눈에 보이는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하든 병을 낫게 해 달라,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 아이들 공부 잘하게 해 달라, 기도하기 이전에 먼저 두려움의 영을 벗는 것이다. 공포의 영이 물러가도록 성령이 내 영을 주장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렇다고 두려움의 영이 물러나면 현실의 어려운 문제도 당장 함께 해결되리라 오해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뜻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 주어 소파에 눕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부터 사단을 대적하여 싸우는 거룩한 군사로 양성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염려를 없애야만 그 영이 하늘로 향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의 연습은 영적 전쟁에서 사실은 이차적인 과제라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자는 그 속에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의 영이 자기의 영에 충만하기에 두려움이 생길 여지가 없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상 즉 그곳의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에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염려가 엄습할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을 사랑하라.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라. 사단의 영을 대적하라.

두려움은 사단의 거짓 중에 가장 핵심적인 거짓이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염려에 대처하는 것이 바로 영적 전쟁이다. 현실의 고통과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염려가 없어진다면 언제 될지 모르는 그 때까지는 여전히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여 제대로 승리 한 번 못해본다. 그야말로 마지못해 쥐어짜는 신앙생활 밖에 더 하겠는가?  

4/20/2006

하얀구름

2008.01.25 13:00:19
*.182.40.42

좋은 싸이트를 마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장영

2009.02.14 14:31:13
*.143.215.105

제 블로그에 퍼 갑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의
합당한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샬롬!

김순희

2010.09.05 12:10:02
*.161.88.93

염려를 없애는 것은 영적싸움의 처음이라기보다 오히려 전부라. 두려움은 사단의 거짓 중에 가장 핵심적인 거짓이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염려에 대처하는 것이 바로 영적 전쟁이다. 아멘! 아멘!!

하나님으로 신자의 맘에 하나가득 차 있다면 염려가 비집고 들어올 구멍이 없음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으로 가득 찬 우리, 하늘에 풍선하나 띄우 듯, 하나님께 우리의 맘을 띄우며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그 사랑에 그저 감사하고 감격하여 어찌할 줄 몰라하는 신자의 모습으로 되어짐. 그 되어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그래서 감사함을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절절 매는 우리 신자들이 되길...

사라의 웃음

2012.06.20 22:36:08
*.109.85.156

신자 속에 신앙과 불신앙의 모습이 다 들어있는 것이군요.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면 불신앙인 두려움은 사라질 터이고...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눈이 묶여서 그로 인한 염려와 불안을 해결해야함은 자주 잊는
것이 문제임을 배웁니다. 그것 또한 사단의 교묘한 술책이구요...

전쟁을 치르면서 신자다운 모습으로 성장시켜 가심은 현실을 재료로 사용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풍성한 은혜를 입혀
주시기 위해 치러내게 하시는 은혜가 현실의 환난들이며 고난들인 것을 또 생각해 봅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시방 네가 있는 곳이 가시방석이 아니고 꽃방석이라는...

날마다순종

2020.08.24 15:59:04
*.14.99.253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바로 내 아버지시다. 세상 그 무엇이 두려울쏘냐. 혹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품속에서 벗어날까 다만 그것만이 두려울 뿐이라"라고 매순간 고백하는 우리 자녀들 되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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