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부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창1:20-23)
Blue Marble 같은 지구
지구에 Blue Marble 이라는 별칭이 있다. 아폴로 17호 비행사들이 1972년 12월 7일에 지구45,000 Km 상공에서 지구를 촬영한데서 유래한다. 투명한 청색 하늘과 바다에 구름이 흰색 나선 띄를 두르고 있으니 어렸을 때 갖고 놀던 푸른 구슬 같다는 뜻이다. 푸른색은 청량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을 준다. 비행사가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이 너무 경이롭고 아름다워 그런 찬탄이 절로 나온 것이다.
창조에 부여하신 하나님 여섯 번째 뜻을 살펴볼 차례다. 하나님은 물고기와 새들을 창조한 후에 당신께서 “보시기에 좋았다”(21절)고 한다. 첫날 빛을 만든 후에 4절에서, 셋째 날에 땅과 바다로 나누고 식물을 창조한 후 12절에서, 넷째 날 크고 작은 두 광명으로 나눈 후에 18절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한다. 둘째 날도 기록에는 없지만 전후문맥상 당연히 그런 뜻이 내포된 것으로 봐야 한다.
당신께서 계획한 대로 종류 별로 완벽하게 그대로 창조했기에 만족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성적인 판단과 평가의 결과만이 아니다. 당신의 감정이 풍성히 실린 표현이다. 아폴로 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지구를 촬영한 것은 지구 밖에 계신 하나님이 지구를 바라보신 것과 방불하다. 비행사들이 느꼈던 바로 그 감동과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의 외침이 하나님의 입에서 절로 튀어나온 것이다.
정말로 예쁜 아기가 태어나면 최고로 가까운 형제와 조부모는 물론 주위 사람들마저 저절로 너무 예쁘다고 칭찬하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막상 아기를 낳은 부모의 감격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광대한 우주 밖에서 그보다 더 광대하신 하나님이 우주전체나 지구를 볼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각 피조물 하나하나를 창조한 후에 그 개체별로 보실 때도 Blue Marble 이라는 감탄 위에 감탄을 더하신다. 오늘날에도 그 감정에 단 한 치의 감소, 수정, 변개, 취소가 없이 똑 같이 우리를 기뻐하신다.
지구가 푸른 이유
이는 엄연한 사실이자 영원한 진리다.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가? 현재 내가 처한 환경과 내 꼴을 내가 봐도 형편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럴 것 같지 않은가? 거기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좋아한다면 내가 호강하게도 아니고 단지 고난만 없애달라고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하는데도 아직 응답이 없다니 이상하다고 여기는가?
지구가 푸르게 보이는 이유는 생명을 유지하는데 핵심요소인 물과 공기가 행성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21세기 최첨단 과학기술로 만든 전자허블 망원경으로 우주를 속속들이 탐구하고 촬영을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Blue Marble은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구만 생명체가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이자 감사할 일인가? 지구는 우주 전체에서 유일한 하나님의 보석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보석 위에 살고 있는 그분에게 보석 같은 존재다.
미국은 경관이 수려하고 장엄한 곳이 많다.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아름답고 신비롭다. 지구 안에서 인간의 눈으로 봐도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이 보기에 좋다. 미국에는 또 땅이 너무 크다보니 이곳 캘리포니아의 Death Valley 국립공원처럼 황량하고 삭막한 땅이 광대하게 펼쳐진 곳도 있다. 지옥에 가보지는 못했어도 아마도 그렇게 생겼을 것 같은 기괴한 형상의 바위와 생명체 하나 없는 완전히 메마른 땅도 있다.
이상하게도 그런 사막 광야에서도 조금만 천천히 둘러보면 그곳 나름의 멋과 아름다움이 있다. 심지어 고요와 안정과 평화를 오히려 그런 곳에서 맛볼 수 있다. 일부러 그 외딴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이도 꽤 많다. 부족하고 어리석으며 죄에 찌든 피조물인 우리가 보아도 이 땅 전부가 아름다운데 직접 만드신 하나님에게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땅 어느 곳 하나, 어느 피조물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다. 단 하나의 예외를 빼고는 말이다.
유일하게 추하고 더러운 인간
그 유일한 예외는 바로 인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다. 인간으로 모든 피조물의 으뜸으로 삼고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고 정복하게 했다. 아름답고 진실하며 선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이 땅의 주인이 자기인 줄 착각했다. 아니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알고도 고의로 거역했다. 의롭게 다스리진 않고 제 멋대로 정복만 했다. 무분별하게 개발하여 Blue Marble 이 몸살을 앓게 했다. 환경을 오염시켜 지구온난화가 심해졌고 급속도로 사막화가 진전된다. 이곳 캘리포니아 주만 해도 천 년만의 가뭄이 덮쳤다. 자동차 세차 금지를 넘어서 급기야 미국의 자랑인 자동급수 잔디 정원을 없애면 정부의 보상금을 주려는 조치를 취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이 사는 환경만 황폐화된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사랑은 완전히 실종되었다. 자기와 돈만 사랑하며 부모마저 거역하고 감사와 거룩은 눈 닦고 찾아보려 해도 없고 모두가 절제하지 않고 사나워졌다. 옛날보다 나라끼리 전쟁이 줄었다고 해서 나라별 갈등을 관용 조정 통합했기 때문이 아니다. 더 영악해져서 전쟁이 나면 서로 공멸하는 것을 알아 조심할 뿐이다.
대신에 속에 가득 찬 죄악, 저주, 흑암의 기운을 아무 죄 없는 불특정 다수의 힘없는 시민을 무차별로 죽임으로써 해소한다. 인간의 죄악, 엄격히 말해 사탄의 세력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공동체들이 테러로 파괴된다면 각 개인들은 마음이 피폐해져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이 번창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소망보다는 절망을, 더 나아지고 있지 않고 점점 더 나빠질 것이라고 십중팔구는 입을 모은다. 하나님의 보시기엔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서두에 말한 대로 지구와 인간을 좋게 보고 있는 하나님의 그 심정이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이 나이 들어 노안이나 착시 현상이 생기거나 영적분별력이 떨어질 분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좋아하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 뜻대로 완벽하게 만드신 당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피조물 중에 인간만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사랑하신다.
자기 자식이 병이 들거나 나쁜 길로 빠진다고 해서, 심지어 살인범이 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 해도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은 점점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를 버릴 수 있어도 부모는 절대 그러지 못한다. 인간이 가진 한계와 인성의 연약함 때문에 그 사랑을 100%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실현과 표현은 못한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평생토록 자기 가슴에 품고 산다. 인간 부모가 그럴진대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당신의 피조물을 향한 사랑에 변함이 있을 리는 없다.
하나님의 감정과 공의는 다르다.
그러나 주지할 사항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가슴에 품은 근본적인 정서라는 것이다. 이 땅을 반드시 공평과 정의로 바로 서길 소원하신다. 당신의 이름을 찬미하는 당신의 백성들의 나라를 세우길 원하신다. 그래서 인간을 양과 염소로 구분해서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신다. 그 나누는 기준도 이미 창조 때부터 즉,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정해 놓으셨다.
모든 동식물의 생명을 유지하는 핵심요소인 공기와 물은 사실은 무색, 무미, 무취다. 흰색도 아니고 투명하다. 샌디에고 시월드의 고래 쇼를 하는 거대한 수영장의 바닷물도 퍼서보면 투명 흰색일 뿐이다. 그럼에도 바다가 경이로운 푸른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빛의 파장 때문이다. 파란 색은 빛이 흡수되지 않고 반사되는데 공기와 물이 많을수록 더 깊고 신비한 파란 색으로 보인다.
요컨대 빛이 없다면 푸른색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구가 Blue Marble로 보이는 까닭은 하나님이 첫째 날 빛을 창조한 때문이다. 지금 이곳 엘에이는 스모그가 가득하다. 한국은 미세먼지 때문에 비가 오면 세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물이 흘러내릴 정도라고 한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 어디나 악취가 진동하고 햇빛을 가릴 정도로 하늘은 뿌연 잿빛으로 변한지 오래다. 그럼에도 지구 아니 우주 밖에서, 물질계를 초월해서 계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당신의 만드신 빛 때문에 여전히 Blue Marble 로 보인다.
인간이 죄악으로 이 땅을 아무리 더럽혀도, 시커멓게 바꾸어도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분의 본질이, 아니 그 전부가 사랑이다. 사랑이 변질된다면 사랑이 아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더 확증하기 위해 창조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빛을 창조한 것이다. 빛을 통해서 당신의 피조물을 깨끗하고 청정하고 푸르게 보시려는 것이다. 빛이 존재하는 한 그분의 피조물을 향한 사랑과 은혜 또한 영원하다.
당신께서 빛을 통해 당신의 피조물을 보시려는 뜻이 지구 전체만이 아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죄에 찌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도 당신의 그 빛을 통해서 순수하고도 깨끗하게 바라보시고 심히 좋아하신다. 그 빛은 무엇인가?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다.(요1:1)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생명의 기본요소인 물과 공기가 빛을 통해 푸른색을 띄듯이, 참 빛이신 예수를 통해 인간은 참 생명을 지니게 된다.
그럼에도 죄에 찌든 인간들은 참 빛이 세상에 왔으되 그를 알지 못하고 배척했다. 그분의 외모만 보고 비천한 로마의 사형수로 십자가에 처형했다. 하나님은 그 십자가에 우주의 영원한 빛을 숨겨놓았고 그 빛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비록 추악하고 더러운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도 그 주홍 같던 죄를 예수님의 빛의 파장으로 인해 양털 같이 희게 보신다. 예수의 생명을 품은 자는 그분에게 보석이다. 반면에 예수 십자가의 빛을 통과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그 육체적 생명이 아무리 펄펄 띄고 풍요롭고 화려하게 살고 있어도 하나님 눈에는 그 실상 그대로 추하고 더럽고 검게 보일 뿐이다.
인간으로 인해 노래를 부르시는 하나님
스바냐 선지자가 어떻게 선언했는가? 하나님이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이기지 못할 대상은 우주 전체에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인간을 향한 기쁨만은 이억제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 않는가?
또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고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하지 않았는가?(습3:17) 이 또한 대단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이 인간더러 당신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었다.(사43:21) 그런데 도리어 하나님이 인간으로 인해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스바냐 3장의 전반은 죄로 타락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후반에선 그럼에도 일부 여호와의 백성을 남겨두실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날 즉, 스바냐 당시로선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이 남겨두신 그 소수의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한 자다. 참 생명의 빛 가운데 들어온 자로 인해서 하나님은 기뻐하고 또 기뻐하시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땅을 당신의 계획에 따라 종류별로 완벽하게 창조하시고 이름을 붙여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후에 너무나 흡족해 하셨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오직 하나다.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이, 당연히 아니 더더욱 인간을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는 것이다.(엡1:10-14)
바울 사도도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12절)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찬송을 부르는 주체가 하나님과 인간 신자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된다. 하나님을 받는 ‘그의’의 원어는 행동의 출발과 결과가 자기에게 미치는 재귀형이다. 예수를 믿는 신자는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찬양도 되는 존재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너무나 과분하고 황송하지 않는가? 그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가? 만약 처형이 확정된 죄수가 단 하나 의와 공적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무조건 사면되었다면 평생 그 사면자의 종이 되어 죽도록 섬길 것이다.
그런데 신자는 영생까지 확보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는 동역자로 부름 받았다. 도무지 그 황송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거기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부르신다고 한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되찾으면 하늘에서 잔치가 열린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기독교에선 다른 종교에선 말도 안 되는 아주 엉뚱한 계명 내지 말씀이 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고 한다.(롬5:3) 신자는 하나님과 이미 화평했기에 더 이상 정죄가 없다. 또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통과시켜서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아는 자다.
스바냐 선지자가 하나님이 남겨두신 그래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자들도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습3:12)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빌4:4-8) 항상 즉, 고난 중에도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너희는 당장 눈앞의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나오지 않더라도 하나님 그분이 너희로 인해 노래를 부르고 기뻐하시는데 무엇을 염려하며 두려워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네가 의지적으로 쥐어짜서 만들어내는 안심 망각 도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한다.(빌4:7) 그래서 신자가가 자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Blue Marble 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믿고 난 이후 자기를 단 한순간도 외면, 침묵, 거절하거나 싫고 귀찮고 미워한 적이 없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요 영원한 진리임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더러 항상 기뻐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기쁨이 이미 되어 있기에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신자 또한 하나님처럼 자연과 이웃의 인간들을 Blue Marble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 십자가의 아름다운 빛에 투영시켜서 콧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지구를 정복만 하려는 신자들
지난 주 미국 크리스천 신문에서 조금 우울한 기사를 읽었다. 미국의 공화당은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기독교 보수파가 주류다. 반면에 민주당은 하나님보다 인권을 우선시하기에 동성애 낙태 등을 찬성하는 진보자유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에 대해서 공화당이 훨씬 덜 심각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기사에는 없었지만 그 이유를 추측컨대 경제 개발에 더 우선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지구를 정복만 하려는 기독교 독재라는 구시대적인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 구원의 진리는 수호하면서도 그 진리의 적용과 실천에선 훨씬 잘못하고 있다. 또 그래서 기독교와 예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꼴이 된다.
신자가 행해야 할 첫째 사항은 영적인 왕국을 건설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 자체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주신 첫째 명령이지 않는가?
죄로 타락한 바람에 그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인간끼리 분쟁하고 다투어 이렇게 황폐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죄에서 구원받은 신자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그 첫째 명령부터 준행해야 한다. 이 땅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 상태로 아름답게 가꿀 책임이 신자에게 있다.
본문 창세기 1:21의 단계는 죄가 들어오기 이전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구와 인간은 있는 그대로 실제로 순수했다. 그러다 인간이 죄로 더럽히고 피로 땅을 적셨다. 신자라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본래 의도했던 모습으로 회복시켜서 그분께 돌려드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그분께 드릴 올바른 경배요 산 제사다.
신자라면 전기나 수소 자동차 개발과 실현에 앞장서야 한다. 앞서서 태양 에너지 난방으로 전환해야 한다. 잔디 정원의 스프링클러를 제거하고 물을 아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 된 표시이자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근본 의미다. 교회에 모여 박수 치고 찬양하기 이전에 먼저 행할 일이다. 교회 모여 기도하는 것도 바로 그 일을 잘 하기 위해서다.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믿음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가치관으로 실제로 살고 있는 모습이다. 인간의 탐욕과 죄악으로 끊임없이 서로 경쟁하고 충돌할 것이다. 지구 Blue Marble에는 고난과 모순과 후퇴와 파괴로 가득 찰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광야 같은 인생길이 될 것이다.
신자는 현실에서 하나님 뜻을 실제로 실천하며 싸워나가야 한다. 교회 안에서 교인끼리 경건하고 거룩한 모습은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유지할 수 있다. 교회 문밖으로 나가서, 그것도 혼자서 세상 죄악과 흑암의 세력과 맞부딪힐 때에 믿음이 드러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그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모습은 내가 처한 여건과 사건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영원토록 신실하게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또 그런 앎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계획이 있으며 이미 참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힐 씨앗을 내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신자다. 최소한 모든 염려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평강으로 자기 마음과 생각에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사막의 교부들을 보라. 캘리포니아 Death Valley 같은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분과 관계가 더 깊어져 놀라운 영적 진리를 깨달았지 않는가?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없다면, 최소한 기뻐해본 체험이 한 번도 없다면, 혹은 평강이라도 유지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이 지금도 바로 자기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5/3/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