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1-3)
시간에도 복을 주신 하나님
지난주까지 창조전반에 내포된 일곱 가지 하나님의 경륜과 인간창조의 두 가지 특별한 의미를 살펴보았다. 오늘부터는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고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으셨는지 알아보자. 역으로 말해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을 대신하여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청지기 소명을 주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해당된다.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해야 할 절대적 근거이자 목적이다.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고 있지 않다면 성경적으로 따져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 금주부터 살펴볼 내용은 그 근본적 소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지침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할 제반 여건을 마련한 후에 6일 째에 맨 마지막으로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했다. 그리고 일곱 째 날에 안식을 하셨다. 단순히 아무 일 하지 않고 그냥 쉰 것이 아니다. 본문에만도 “일곱째 날에 복을 주어서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지 않는가?(3절)
이전 6일 간은 물체와 생물을 만들어 공간을 채우셨다. 일곱째 날 하루는 시간을 따로 떼어내어 구별하여서 인간이 안식하는 날로 제정했다. 창조 전반에 내포된 일곱 경륜 중에도 시간과 역사의 주인공이 당신이심을 분명히 선포했었다. 시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그렇게 만드셨음은 다른 모든 피조물, 특별히 인간도 그날에는 같이 안식하라는 뜻이다. 또 그래서 나중에 모세에게 십계명 중에 제4계명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구체적이고 기록된 말씀으로 명하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주일에 교회에 모여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또 그날만은 세속적 활동은 중지하고 육신적 휴식은 물론 경건하게 말씀과 기도로 보낸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과연 하나님이 안식일에 부여한 의미와 목적을 온전히 충족시키는지 의심스럽다. 몇몇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안식일은 한 주일의 끝이 아니다.
우선 많은 신자들이 주일을 한 주일의 마지막 날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일주일간 세상에서 열심히 돈 벌어 자식 먹여 살리느라 수고한 것을 내려놓고, 사람들 사이에 상처와 모욕과 수치를 받은 것에 대해 위로 받고,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실수 허물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회개하는 날이다. 아무 일 하지 않고 하루 푹 쉬는 것으로 그 주일을 마감한다고 여긴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창조를 마친 후에 안식하셨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쉬는 법은 없다. 그분은 시간 자체를 초월하신 분이다.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는 영원히 현재에 거한다고 밖에 표현을 못한다. 그 말의 뜻만 해도 그분에게 후퇴, 일시중지, 휴식은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고 더 중요하고 영원한 사역인 모든 피조세계를 질서 있고 아름답게 운행하는 일을 시작했다. 하나님이 쉰다고 해서 우주가 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쉬시면 우주 전체는 완전한 혼란(chaos)에 빠지고 인간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분은 너무나 광대하시다. 인간의 측정은 물론 상상도 완전히 넘어선다. 인간의 그분 이해는 바닷가 수많은 모래알 중에 겨우 하나에 주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런 표현 자체도 사실은 인간의 수준에 맞춘 것이다. 오직 인간은 그분과의 관계라는 차원에서만 그분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제한된 인식으로도 하나님은 충분히 당신을 계시하고 넘치는 은혜를 주신다.
요컨대 본문의 안식일 개념은 인간 그 중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에게만 해당된다. 인간은 이 땅에 실존하게 된 첫날, 탄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보냈다. 안식일(주일)은 인간에겐 한주일의 마지막 날이 아니라 첫날이다.
주일을 지키는 의미도 쉼과 회개에 초점을 두어선 안 된다. 하나님과 교제와 새로운 출발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재물을 얻을 능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다. 각 사람의 거주의 한계만 정한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가장 합당한 재능과 은사를 주었고 직장과 가정도 허락했다. 범사를 주관하신다. 주일은 하나님께 힘을 얻는 날이다. 그분께 생기를 받아 그분의 충만하고 활기 찬 생령이 되는 날이어야 한다.
따라서 신자는 바울처럼 지금까지 행한 것, 지나간 일을 다 잊어야 한다.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앞에 있는 푯대만 바라보고 전진해야 한다. 천국의 영광과 몸의 부활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에게 붙잡힌바 된 대로 살아야 한다.(빌3:12-14)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는 소명을 직접 받았다. 그 후 그는 죽기까지 충성 헌신했다. 세상의 어떤 핍박과 고난도 감수하며 이겨냈다.
하나님은 신자를 종으로 삼아 부려먹는 독재자가 아니다. 그분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기를 가장 원하신다. 그것도 혼자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서 함께 자라야 한다. 또 그런 자들이 모여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고 거룩한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 확장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
역으로 말해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걱정 염려 고뇌 혼돈에 빠져 낙심 나태 정체 후퇴하는 모습이다. 진전과 개선이 없는 것이다. 신자 자신의 눈에는 사방이 완전히 막혀 출구가 전혀 없어 보이지만 하늘을 향한 창은 항상 열려 있다. 신자가 넘어지고 심지어 죄 중에 빠져 있어도 하나님이 불러내신 자이기에 그를 향한 사랑과 권능은 절대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난다.
신자로선 그런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면 반드시 그분이 손을 붙들고 일으켜 세우시고 풍성한 은혜로 채우신다. 정말로 오묘하고도 신기하게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신다. 모든 문제와 고난이 단번에 완벽하게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이다. 만약 신자 쪽에서 믿음이 떨어져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그분에 대한 의심, 불만, 불신이 생겨도 신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고 신자 스스로 일어서서 돌아오길 기다릴 뿐이다. 신자를 향한 사랑에 단 한 치의 감소도 결코 없다.
결국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신자도 지난주에 말한 대로 바로 곁에 계시는 아무리 캄캄한 가운데서라도 더듬어서라도 당신을 발견하려고 찾는 자다. 구태여 찬양과 기도와 말씀에 뜨겁지 않아도 된다. 주여 외치기만 해도 된다. 외치지 못해도 마음속으로만 간절히 찾고 또 찾으면 하나님의 심령은 기쁨으로 충만케 된다.
바울이 지난 일은 잊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진전한다는 것은 과거는 없고 미래뿐이라는 뜻이다. 하루하루를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로 여기고 최선을 다한 것이다. 하나님도 영원한 현재이므로 후퇴와 정체는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오직 미래뿐이다. 쉽게 말해서 어떻게 하면 신자에게 앞으로 더 많은 복을 줄까만 궁리 계획 시행하신다는 뜻이다.
신자가 주일에 지난 한주간의 삶을 마감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주일 아침 교회 가기 전부터 새로운 일주일은 시작된 것이다. 예배를 통해 이번 주에 하나님과 교제 동행할 때에 그분께서 부어주실 은혜를 예상 기대하며 설레야 한다. 교회 문을 나설 때는 기쁘고 신나고 활기차야 한다. 하나님의 생기로 충만히 채워져야 한다.
주일을 종교적 의무와 절차로 그쳐선 안 된다. 죄를 회개하고 알지 못하는 허물까지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아주 선한 일이다. 상처 주고받아 괴로운 심령을 찬양으로 위로 받는 것도, 교회에서 하루 종일 봉사하는 것도 그렇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대박의 은혜는 몰라도 흉사는 생기지 않겠지 안도하는 마음으로 그치면 기독교가 아니다.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너무나 가난한 신앙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제공하고 있으며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보고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정말로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겨우 그 정도의 복을 주려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숱한 고난을 받으며 죽었겠는가?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는 이미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다. 이 땅의 역사를 이끌 주역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복을 주었듯이 이 지구 시간 전체의 주인공이다.
창조와 안식일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을 닮게 만드시고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라는 청지기 직분을 주신 것은 절대적인 소명이다. 창조 후에 첫째 실천적 지침으로 주신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다. 따라서 주일의 의미도 바로 이 근본 소명과 연결해서 살펴야 하고 주일 예배에서 그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
최초 인간이 이 땅에서 첫날을 하나님과 교제하며 보냈다.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참 안식은 오직 하나님 품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첫날 하나님과 인간이 시쳇말로 그저 멍 때리며 쉬고만 있었겠는가? 아니다. 바로 이 근본소명을 처음으로 일러주시고 가르쳤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아담을 에덴동산에 데려가서 만물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두고 보셨지 않는가? 그 때에 또 하나님이 동물을 아담에게 이끌고 왔다.(창2:19) 그분이 아담을 교육훈련 시켰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자도 주일에 과연 이 청지기 직분에 충성하고 있는지부터 점검 회개해야 한다.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드러내고 있는지? 내 주변에서 그분의 나라가 조금씩 실행 확장되고 있는지? 나아가 이번 주에 내게 맡겨주신 영역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릴 수 있을지 계획하고 준비하고 훈련해야 한다.
예수님이 모든 신자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구약 창세기의 최초의 절대적 소명과 맞먹는 신약에서 신자의 지상 명령으로 주신 것이다. 그렇다고 꼭 오지에 갈 필요는 없다. 땅 끝은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모르는 모든 사람이다.
신자는 가장 먼저 가정과 교회에서, 그리고 직장과 소속된 단체에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던 정말 예수의 빛을 비춰내어야 한다. 부부는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 예배를 자기 잘못한 일의 면피용도로 활용해선 안 된다. 차라리 가정부터 온전하게 바로 세워야 한다. 교인끼리도 상처를 주는 대신 무한한 긍휼로 대해야 한다. 가정은 아버지가 아닌, 교회는 담임목사가 아니라 정말로 예수님이 머리가 되어야 한다.
주일은 새롭게 시작되는 일주일간 교회 성도와 이웃들을 내 몸처럼 끝까지 사랑할 준비를 하는 날이다. 나에게 피해 상처 준 자도 내 쪽에서 먼저 찾아가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작정을 해야 한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치울 것이 아니라 직접 아주 적은 일에서 가장 적은 자와 함께 주님의 사랑을 나눠야 한다.
나아가 죄악으로 더욱 타락해져가는 이 세대를 붙들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고쳐달라고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당장 나부터 또 나의 직장에서부터 정말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 알의 썩는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내속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교만을 죽여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마저 자랑하려는 나의 의를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로 세상 앞에 서있어야 한다. 그 한 사람의 신자로 인해 교회와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하게 변해야 한다. 만약 그 일을 하고 있지 않거나 게을리 하거나 잊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도록 간구하여 하나님의 생령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십자가 군병으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다시 일어서야 한다.
승리를 보고하는 주일
하나님의 청지기 직분을 하지 않는다면 신자가 아니라 교회 멤버일 뿐이다. 작금 교회와 담임목사에게 충성하게 만드는 종교 왕국이 성행하고 있다. 심하게 말해 종교 장사만 번창한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도 혹시 그 왕국에 누락될까 전전긍긍한다. 하나님에게 잘못 보일까 염려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초조해 한다. 주일마다 천국보험증서를 꺼내어 먼지가 끼지는 앉았는지, 혹시 유효기일이 지난 것은 아닌지만 확인한다. 목사들도 교회와 자기 이름을 높이는 데만 모든 초점을 높인다.
초대교회에는 교회건물, 조직체, 심지어 성경과 교리도 없었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교인들의 주인이었다. 하나님이 직접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영들로만 교회가 이뤄졌다. 그들은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몸의 부활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고 정말로 온전히 믿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확신을 통해 당신의 거룩한 역사를 일으켰다. 그들이 성령의 인도에 온당하게 반응하며 사니까 그리스도의 빛도 당연히 비춰 나왔다.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자가 그분의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것에 기쁨과 감격이 충만했고 또 그것만이 인생의 목적과 소망이 되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이라는 설렘과 기대가 충만했다. 어느 누구도 강요는커녕 주도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모이기에 힘썼다. 모이면 말씀과 기도에 전무했다. 심지어 재물도 자기 소유를 고집하지 않고 필요, 부족, 궁핍한 자들과 나눠썼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비유로 그치지 않고 현실에 실제로 구현되었다.
그러니까 신자들을 가만히 있는데 불신자 쪽에서 먼저 그들에게 작은 예수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신자와 그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거룩하게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분명히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초대교회에 체계적인 선교전략이 없었어도 기독교는 염병처럼 번져나갔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두 명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을 내보냈다. 돌아온 제자들이 귀신도 자기들에게 항복했었다고 기뻐하며 보고했다. 그런데 더 놀랍게도 주님이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이미 보았다고 대답했다.(눅10:18) 전도하여 복음의 열매가 맺는 순간에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할 뿐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 하나님 나라가 단 한 명이 늘어난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탄의 나라가 수십 배로 더 크게 무너진다.
이처럼 주일 예배는 신자들의 승리보고회가 되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젠 그런 모습은 눈 닦고 찾으려야 없다. 주일예배를 보러오는 교인들의 거의 전부가 얼굴상이 구겨져 있거나 교회인지라 마지못해 경건하게 웃고 있다. 정말로 환하게 밝게 웃고 신이 나는 교인은 찾기 힘들다. 내 코가 석자인지라 그나마 교회에 나와 봉사, 기도, 헌금하면 형편이 조금 나아지겠지 막연한 기대로만 예배를 본다.
죄송하게도 주일 예배에 언제부터인가 기쁨과 감격이 완전히 실종되었다. 영적 찔림조차 아예 없다. 표피적 감성적 자극과 위로뿐이다. 그 정도로 그치면 위로라도 받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외부인들이 자기들끼리 박수치고 찬양하며 복 받으려는 완고하고 광적인 집단이라고 비난을 해도 제대로 당당하게 반박하지 못한다. 장로와 목사가 편을 나눠 싸우고, 최근 대형 교회 목사들이 추행, 부정을 자행해도 전혀 회개는커녕 시인도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엄청난 신자의 직분
아담이 타락한 후로 모든 이가 죄 중에 태어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전권대사요, 동역자는 오직 예수를 믿는 자다. 이 직분이 얼마나 소중하며 고귀한지 모른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따로 떼어서 거룩하게 보내라고 했다. 주일에 제일 먼저 가장 중요하게 행할 일이 바로 그 하나님이 주신 그 소명, 신분, 위치를 얼마나 막중한지 재확인 점검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 직분에 더욱 충성 헌신할 수 있을 지에만 초점을 모아야 한다.
만약 신자가 이 직분에 충성하지 않으면, 신자답게 살지 못하면 이 세상은 절망뿐이다. 타락으로 치달아 하나님의 심판은 시간문제다. 이 땅에 빛은 소멸되고 흑암으로 뒤덮이며 소금이 기능을 못해 썩게 된다. 부득불 예수님이 다시 오실 수밖에 없다. 세상에 소망은 완전히 사라진다.
역으로 말하면 신자는 청지기 직분을 다하여 이 땅에 소망의 불길을 활활 타게, 최소한 꺼지 않게 해야 한다. 부모 없는 고아요, 목자 없는 양떼 같은 잃어버린 세대에 길이 되어야 한다. 갈 바 몰라 혼돈스러워하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광대하신 은혜와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고 알게 해야 한다.
이를 또 바꿔 말하면 신자는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을 최대한 늦추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의 재림으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고 몸의 부활이 될 것을 소망하는 것까지는 선하다. 그러나 “어서 빨리 오시옵소서!”라고 하면 재림을 독촉하면 우리의 직무태만이다. 자기가 행해야만 할 일이 귀찮고 싫으니 이제 제발 끝을 내달라는 뜻이다. 불신자들에게 너희 예수 믿는 자들만 천국 가려 하느냐는 비난 받을 주원인을 우리 스스로 제공하는 것이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간구는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대환난이 일어나고 많은 이들이 박해 받고 순교 당할 때에 말고는 원칙적으로 신자가 해선 안 되는 말이다. 예수님이 빨리 오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그럴 수 있는 기회는 인류 역사상 너무 많았다. 죄악은 항상 관영했다. 나찌 독일 때는 물론 지금 북한의 평양에 오시면 된다.
대신에 주님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하려고 최대한 그 오심을 늦추고 계신다. 그런데도 어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것은 죄 많은 저들과 같이 천국 가기는 싫으니 어서 빨리 우리만 데려가라는 너무나 큰 교만이요 독선이다.
기독교가 다시 부흥하려면 주일예배부터 부흥되어야 한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화려하고 장엄하여 감동을 끼칠까 온갖 궁리를 짜고 있다. 예배 부흥은 다른 것이 아니다. 참석자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이자 대리인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땅을 거룩하게 통치하는 첫걸음이 바로 주일예배에서 시작되어져야 한다. 바로 그것이 교회의 소명이다.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지고 주심의 십자가 사랑으로 섬겨지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야 한다. 주일 예배에 최소한 악에 대한 승리의 보고는 있어야 한다. 한 걸음이라도 실행은 해야 한다. 아니 그런 결단과 헌신이라도 해야 한다. 그런 계획이라도 짜야 하고 최대한 양보해서 그런 하나님의 대리인과 그 역할을 깨닫게라도 해야 한다. 작금의 많은 한국교회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 참여한다는 인식은 없고 그저 일신상의 형통만 강조하는 주일예배라면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셈이다. 그것도 성전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도 말이다.
5/31/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