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
창세기 강해 (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1-3)
안식일에 관한 치명적 오해
지금은 한국도 많이 일반화된 주5일 근무는 신자에게, 특별히 안식일과 연관하면 아주 좋은 제도인 것 같다. 토요일에는 한 주일을 마감하면서 회개와 안식으로, 또 주일에는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서 소명을 실천할 계획을 짜고 준비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떤 교파에선 본문을 근거로 또 예수님 당시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었기에 주일 예배를 거부하고 토요일에만 모인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한 의미를 너무 협소하게 해석한 것이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주를 운행하는 더 중요한 사역을 시작했다. 특별히 인간에게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는 소명을 준 후에 훈련시켰다. 인간이 이 땅에서 맞은 최초의 날은 안식일이었다. 따라서 안식일은 지난 한 주간을 회개 마감하는 것보다 새 주일을 출발 헌신하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거기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친 일곱째 날 안식일이 오늘날의 달력으로 따져서 실제로 토요일이었는지 여부는 어느 누구도 모른다. 어느 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보다 안식일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어떻게 실현하느냐가 더 중요하게 따져야 할 과제다.
이 문제가 단순히 교파 간의 성경 해석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심각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새 출발에 대한 인식은 없고 안식만 강조하기 때문이 아니다. 거룩하게 안식을 보내느냐 형식적 종교적으로 주일을 지키느냐 차원도 아니다.
그 교파를 이단으로 간주한다는 단순한 뜻도 아니다. 그 교파는 물론 정통교단 교인들 중에도 안식의 약속은 받았으나 실제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다. 성경은 아주 생생한 예화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약속은 받았으나....
하나님은 애굽에서 400년 넘게 노예 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을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출해내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 정확히 말해 그들 선조 아브라함과 이미 언약 맺은 것을 실행하기 시작하면서 재확인한 것이다.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던 중도에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수여했다. 넷째 계명으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도 포함되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방족속과 우상 신들을 진멸한 후에 열방들 앞에서 복의 근원이자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살게 하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율법은 이 땅에 설립될 하나님 나라의 헌법이었다.
가나안 땅의 첫 관문인 가데스바네야에 도착한 모세는 적진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열두 명의 정탐꾼을 파견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은 이구동성으로 가나안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그 백성은 장대하다고 보고했다. 우리는 그에 비하면 메뚜기 같아 도무지 승산이 없다고 예상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처자식을 가나안 족속의 칼에 다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이끌고 나왔느냐고 불평을 쏟아냈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지경까지 갔다. 하나님은 그 벌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했다. 처자가 죽게 되었다고 불평하자 막상 자식은 죽이지 않고 살리시고 그렇게 불평한 자들은 다 죽게 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를 방황하다 죽은 출애굽 1세대를 두고 하나님의 약속은 받았으나 안식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선포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소지했지만 그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알다시피 유대인 독자를 대상으로 예수님의 중보대속 사역이 영단번에 완성되었음을 설명하는 책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을 천사, 멜기세덱, 모세, 아론 계열 대제사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하다고 변증한다.
예컨대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사환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이라고 한다.(히3:5,6) 모세는 안식일 계명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이이었다.(마12:8)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견고히 잡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광야에서 죽은 유대인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는데(히3:11) 그렇게 거역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히3:19) 너희 중에도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다고 했다. 쉽게 말해 교회에 출석해도 구원 받지 못할 자가 있다는 것이다.
창조 때에 확정된 심판 원리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구원의 원리가 창조 때에 이미 확정되었다고 말한다.(히4:3-5)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3절)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4,5절)라고 구체적으로 부연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출 받았고 거룩한 율법을 전수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뜨겁게 부르며 예배를 드려도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창세기의 안식일 규정인 본문에 미리 밝혀 놓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지 않는가?
물론 본문에 그런 명시적 표현은 없지만 전후 문맥상에 그런 뜻은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구원 원리와 안식의 방도가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는 절대 없다. 그것은 타종교, 이단,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우선 선악과 금령만 해도 오직 하나님만이 이 땅의 온전하고도 절대적인 주인임을 믿으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완전히 그분께 의탁해야 참되고 보람 찬 인생을 살 수 있다. 그 전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첫째 소명을 주셨다. 하나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니라는 뜻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려면 믿음으로 화합해야 한다.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3:15) 분명 선악과 금령을 어겼기에 바로 죽음의 형벌을 내렸어야 하나 거꾸로 구원을 베푸셨다.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손수 지어 죄에 빠진 최초 인간 부부에게 입히셨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태초에, 창조 이전에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이 계셨다고 선언한다. 십자가 구원의 경륜을 먼저 마련한 후에 창조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울 약속을 아담에게 창조 칠일 째, 인간의 첫 안식일에 주신 것이다. 그리고 타락하자 그 나라의 시민권은 예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화합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회개와 안식으로 한 주를 마감만 하면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아주 선하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삶의 목표는 이 땅의 형통 내지 문제와 고난에서 구출 받는 것뿐인 셈이다.
반면에 안식일을 주일의 첫 날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을 실현하겠다는 뜻이다. 바울처럼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천국 그리스도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소망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자신의 모습이 아무리 후패해도 고난으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어도 오직 십자가의 거룩한 빛이 자기를 통해 비쳐지길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 성경, 아니 하나님은 바로 그것이 참 안식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안식을 얻지 못한 이유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여 심판을 받고 안식을 얻지 못한 배경을 살펴보자. 가나안 족속은 분명히 성읍이 견고하고 강력한 군대를 가졌다.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는 거짓도 과장도 아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반대 의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거기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도 이해해 줄만했다. 이스라엘은 4백년 간 노예 살이를 해서 육체가 강건했을지는 몰라도 전쟁은 단 한 번도 치루지 않았다. 무기를 변변히 갖추지 못하고 몽둥이로 무장한 민병대 수준이었다. 처자식과 가축을 동반하고 애굽에서 가재도구 귀금속까지 들고 나왔다.
출애굽 때는 얼떨결에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과 권능으로 구출 받았다. 오죽하면 하나님마저 그들이 전쟁을 보면 두려워할까 해변 길이 편안하고 지름길임에도 애굽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므로 광야로 우회시켰다. 가데스바네야에선 누구라도 이스라엘은 전쟁에 이길 수 없다고 예상했을 것이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불신자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이성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한다. 신자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범사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과 권능을 인지하여 믿음으로 그에 걸맞게 반응한다. 이성으로 현실상황을 합리적으로만 판단한 열 명의 정탐꾼은 불신자로 돌아간 것이다. 믿음은 티끌만큼도 동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이길 거부하고 그분의 품에서 탈출해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당시 세계 최강 군대를 가진 애굽을 상대로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일으켰다. 도무지 상상도 못하는 이적을 베푸셨다. 이스라엘은 군대조직도 없었다. 스팔타카스 같은 노예반란은 꿈도 꾸지 않았다. 모두가 의심하고 방관하고 있는 가운데 팔십이 넘은 노인 한 명을 들어서 양을 치던 지팡이 하나로 승리케 했다. 지팡이를 휘두르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10전10승의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들은 것도 아니고 직접 목격했다. 마지막에는 뒤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하고 앞에는 바다가 막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손에 안겨 머리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홍해를 건넜다. 세계 최강 애굽 군대가 수장되는 것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광야에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이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 인도하셨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너희는 꼼짝 말고 있으면 당신께서 다해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에는 애굽 군대와 광야라는 특수상황 때문에 하나님이 이적으로 보호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젠 지금껏 너희가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고 체험했던 하나님이 바로 너희의 하나님임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4백 년 전의 너희 선조에게 했었고 그것을 잊지 않고 지금 시행하고 있는 분이다. 그런 하나님이 애굽에서부터 함께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따라서 만약에 이스라엘이 순전히 이성적으로만 판단했어도 가나안 족속이 아무리 장대해도 애굽에 비하면 약하고, 애굽에선 노인 한 명뿐이었지만 지금은 수십만 명 군대가 있기에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두려움에 휩싸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했다.
믿음으로 화합한다는 뜻은?
신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미래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과거에 겪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완전히 캄캄한데서 무조건 견뎌내라고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의 은혜와 권능을 반드시 맛보게 하여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충분히 제공한 후에 고난을 허락한다. 처음 믿은 얼마 동안 기도가 응답이 잘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안식일에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도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잘 판단하여 알아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과 예측이 불가능한 미래에 대해 믿음으로 화합하여 앞으로 진전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사 무탈만 소원했다. 안식의 약속은 받았지만 한 걸음도 나서지 않고 안전한 자리에만 머물려 했다.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이란 현실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반드시 실현되기에 전적으로 그분께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신자가 형통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나라는 설립 확장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일을 하나님이 가능케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믿고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야만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참 뜻이다.
교회에 출석하여 십자가 의신칭의의 교리를 배우고 납득 동의하고 헌신 결단한 교인들 모두가 믿음으로 화합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구원의 진리를 단순히 믿기만 해선 안 된다. 행동으로 실행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다. 기도하고 전도 선교해야만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조차도 믿음이 없어도 가능하다.
쉽게 말해 가데스바네야의 실패를 않는 것이다. 아무리 현실의 소망이 없어도 사방이 꽉 막혀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홀로 버려두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그분이 나의 인생을 전적으로 주관하기에 반드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설령 세상의 현실에선 오로지 실패뿐이더라도 심지어 순교의 자리로 이끌어도 기꺼이 따르는 것이다.
믿음은 이 땅에서 나의 왕국의 주인이 되는 법을 교회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으로 실제로 죽도록 헌신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실력이다. 최소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해도 약속만 받았지 안식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주일 예배의 유래
토요일 예배가 참 안식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선 나름의 근거를 댄다. 로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에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하는 유대인을 싫어했고 또 일요일에 태양신을 섬기는 미트라 교도를 포용할 목적으로 일요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예배하는 날도 바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1,2에서 갈라디아 교회더러 매주 첫날에 연보를 모으라고 했다. 갈라디아 교회는 물론 고린도 교회도 주일에 예배를 보았다는 뜻이다. 결정적으로 사도행전 20:7에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러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이 제정한 성찬식을 거행한 것이다. 떡을 뗀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 받은 것을 기념 감사 선포하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주일에 예배를 본 것이 분명하며 나중에 콘스탄틴이 그것을 공식화 한 것뿐이다.
또 주일에 예배를 본 것은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바울은 그래서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성도의 몸의 부활만을 전파했고 그 단순한 복음에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다. 신자들의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졌고 목숨을 걸며 주님을 따랐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거듭나지 않으면 절대 참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성경 66권을 줄줄 외우고 신학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예수 없는 믿음은 도덕 종교 수준에 그친다. 참 생명이 없다. 예수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전적으로 주도해야만 참 안식을 맛볼 수 있다. 예수 없는 주일은 주일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어떤 상태와 모습, 심지어 죄 중에 있어도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며 나는 그분의 자녀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다. 구원 후에는 바울처럼 현실이 궁핍하든 풍부하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하며 거룩한 뜻과 계획을 달성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전부를 그분께 내어맡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간혹 실패하고 후퇴해도 하나님은 절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받았던 은혜에 감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실패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풍부하게 숨겨져 있었음을 이성으로 발견하고 앞이 안 보이는 미래를 향해 믿음으로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 것이다.
하나님을 꾸중하는 모세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야에서 반역하자 하나님은 불같이 화를 내셨다. 아마 성경 전체에서 최고로 큰 벌을 내렸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고 믿지 않느냐고 야단쳤다. 그리고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민14:11)고 즉, 이성으로 바로 직전 애굽과 광야에서 맛본 은혜도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전부 전염병으로 멸망시키고 80이 넘은 모세를 아브라함에게 100 세에 이삭을 주었듯이 믿음의 새 조상으로 세우겠다고 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하신 바를 절대 스스로 어기지 않는다. 인간 이해에 맞춘 표현일 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심정이 엄청나게 분노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로 그 때에 모세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아는가? 아니 하나님께 따졌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야단쳤다.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이 없는 고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민14:16)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실 능력이 없어서 죽였다고 이방족속들이 오해하고 소문을 내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뜻이다. “하나님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라는 투이지 않는가?
이 말을 한 모세의 심정에는 “우리 모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백 번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진심어린 사죄의 고백은 물론 깔려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사백 년 전에 약속하셨고 또 그 약속을 지키려고 애굽에서 우리를 끌고 나와선 지금 와서 포기할 것입니까? 그럼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힘이 약하다고 할 것이며 심지어 약속도 안 지키는 신의 없는 믿을 수 없는 신이라고 비방 조롱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는 뜻이다.
이는 엄청난 간구요 호소요 요청이지 않는가? 정말로 온전한 믿음이 아니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다. 모세야말로 참 믿음의 사람이었다. “우리야 어떤 형편에 빠졌던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회복하시옵소서, 당신의 영광을 온 열방에 드러내시옵소서.” 바로 이때에 모세도 예수님의 구원 진리를 믿었고 그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왔다. “당신의 백성이 죄에 빠져서 당신과 원수가 되어있어도 당신께서 당신의 백성에 하신 약속을 성취하셔서 당신의 그들을 향한 사랑을 확정지으십시오.”(롬5:8)
모세는 가나안 땅이 내려다보이는 느보산에서 죽어 묻혔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밟아보지도 못했다. 이때에 하나님께 대들은 벌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현실의 자기 형편이 어떠하든 언제 어디에 있든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믿음으로 화합해 구원을 받았다. 천국의 영광을 이미 보았고 소지했었다. 그는 안식의 약속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 참 안식에 들어갔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바로 그런 모습이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뜻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창조 칠일 째에 이미 그런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밝혀 놓았고 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 안식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말이다. 오직 예수 십자가 은혜로 거듭나 하나님께 자기 전부를 바치며 믿음으로 온전히 화합하는 것이야말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의미라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가 없는 주일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교인이 많이 모이고 눈물 흘리며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해도 그렇다.
생명이 살아나는 주일 예배
주일예배에선 새로운 한 주간에 이룰 하나님의 소명을 위한 계획을 짜고 준비해야 한다. 지난 한 주간에 하나님이 주신 승리에 대한 보고를 해야 한다. 때때로 승리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굳건히 붙들어야 한다. 그분의 이루심을 소망하고 기대하고 설레야 한다. 그분만 전적으로 신뢰하고 더 큰 승리로 이끌 것을 간구해야 한다.
나아가 모세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내가 넘어지고 쓰러져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강권적으로라도 당신의 소명을 나를 통해 이루셔야 하지 않느냐?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해지던 나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당신께서 반드시 드러내셔야 하지 않느냐?” 간구하고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작금 주일 예배를 어느 요일에 드려야 맞느냐 같은 사소한 문제로 다투고 있다. 신자들도 주일에 짜장면을 사먹을 수 있느냐 같은 너무나 유치한 질문을 하고 또 혹시 그러면 하나님 벌을 받지 않는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예수님께 일곱 번이나 저주 받았던 바리새인들의 행태에서 하나 나아진 것 없다. 하나님의 창조 때부터 제정한 안식일의 의미와 진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종교적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 법이라고 가르치고 배워왔다. 이 얼마나 가난한 믿음인가?
신자가 주일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특권이요 은혜다. 주일 예배를 통해 죽었던 생명이 살아날 수 있다. 죄인들의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질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고 확장된다. 예수의 죽으심과 몸의 부활만을 선포한 것으로 초대교회처럼 죽기까지 주께 충성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단순한 십자가 복음의 선포만으로 성령이 불 같이 역사한다.
그래서 신자는 주일예배 때에 나는 현실에서 어떻게 되던, 저를 죽이시던 살리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나를 통해 이루시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드러내시라고 떼를 써야 한다. 안식의 약속을 받고 가만히 그 자리에 있어선 절대 안 된다. 십자가 복음을 통해 그 안식을 이 땅에서부터 차지하고 주위에 나눠야 한다.
6/7/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