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
창세기 강해 (14)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7-9)
에덴은 허무맹랑한 설화?
진화론자들은 인간 생명의 기원을 약 40억 년 전 바다에서 탄생한 것으로 본다. 그 대표적 이유로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체액의 성분이 바닷물과 화학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다 밑에서 생성된 원시 액상수프는 물론 그 수프에서 단세포 생명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한 화학방정식을 제시하지 않는다. 멸치 보다 작은 단세포 생명체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인간이 되었는지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어쨌든 40억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안에 생명의 합성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이는 마치 인간이 진화를 계속하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영생하는 신이 될 수 있다거나, 멸치가 수십 억 년 동안 체육관에서 열심히 운동하여 힘을 기르면 고래도 자기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런 궤변을 일삼는 사람들이 도리어 본문의 에덴동산과 그곳에 살았던 아담과 이브에 대해 허무맹랑한 픽션(fiction)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아담과 이브라는 사람이 실존했는지 안 했는지 누가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에덴동산의 흔적도 유물도 없으며 어디인지 모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 그렇다고 본문의 기록이 사실이 아니기에 본문이 함의하는 종교적 영적 개념만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본문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다. 인간의 족보를 역삼각형으로 계속 추적해 올라가면 마지막에는 최초의 부부 두 사람에게 도달하게 마련이다. 이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그 두 사람이 바로 아담과 이브다.
히브리어 아담과 이브에는 각각 남자와 여자라는 보통명사의 뜻이 있다. 하나님이 최초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는데 그것이 그들의 고유의 이름이 된 것이다. 에덴동산이 지리적으로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최초의 부부가 거주했던 장소는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그곳이 바로 에덴이다.
체액성분이 비슷한 이유
인간의 체액이 바닷물과 화학성분이 비슷한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은 물질을 먼저 만드시고 그 물질로 모든 생명을 창조했다. 본문 7절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했는데 흙이 먼저 있었다는 뜻이다. 또 그 흙의 원어의 뜻이 먼지, 티끌이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지구에 현존하는 118개 원소를 사용해 인간을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러니 바닷물과 비슷할 수밖에 없다.
간혹 원숭이와 인간이 유전자의 93%를 공유(共有)하기에 진화가 옳다고 주장한다. 둘의 유전자가 비슷한 까닭도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이 생존하는 환경이 동일하게 때문이다. 온도, 습도, 중력, 자력, 공기, 물 같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공유하고 있으니 각 생물의 구성요소는 물론 그 배열구조도 유사할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선 하나님이 참 짓궂으신 것 같다. 만약에 원숭이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진화론이 지금처럼 기승을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원숭이는 두 발로 걷고, 인간의 얼굴 형태를 갖고, 때로 울고 웃기도 하며, 나름 규율을 갖춘 공동체 생활을 하고, 간단한 문자와 규칙을 습득하여, 인간과 초보적 대화가 가능하다. 얼마든지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최근 연구를 할수록 원숭이와 인간의 유전적 접근이 더 멀어짐을 발견했다. 예컨대 DNA가 5%만 달라도 세부구조의 순열조합은 1억5천만 개가 넘게 달라진다고 한다. 유전적 간격이 그렇게 벌어진다는 것은 원숭이의 후손에서 인간이 출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이 진화를 증명하려 시도하면 할수록 오히려 부인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DNA가 유사함이 생명의 기원이 같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주장은 분명한 진리다. 그 동일한 기원을 궁극적으로 따지면 창조주이냐 우연이냐 둘 중 하나인 것도 확실하다. 문제는 창조 즉,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오직 우연에만 자기 실존의 근거를 둔다는 뜻이다. 그래서 불신자의 삶은 항상 허공에 떠있는 상태가 된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업적을 성취해도 갈급함과 허망함을 해결할 길이 근본적으로 없다.
하나님이 짓궂으시다는 것이 사람과 닮은 원숭이 때문에 인간의 기원이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은 절대로 멀리 계시지 않기에 인간으로 더듬어서라도 찾게 만드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로는 아무리 DNA를 파고들어도 인간에게 절대 소망을 줄 수 없다.
바울 사도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 안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므로 핑계할 수 없다”(롬1:20)고 선언한 그대로다. 바울은 2천 년 전 사람으로 진화나 DNA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럼에도 상식에 따라 원숭이가 인간과는 도무지 비교 대상이 안 됨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영이 내주케 되자 그분과 교통할 수 있는 ‘생령’(7절)이 되어서 그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우주만물이 실존하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 그 안에서 인간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가 어디이며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래서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할지, 영원한 진리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인간이 거주할 곳은?
하나님은 새들에게 삶의 거처로 공중을 허락했다(창1:20). 물고기는 바다를(21절), 짐승은 땅에서(24절) 살게 했다. 그럼 인간의 거처는 어디인가?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으니 물, 공중, 땅 어디에서나 살아도 되는가? 실제로 우주정거장까지 만들 정도로 과학이 발달하여 주거 환경에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에덴을 창설하고 인간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어디가 되었든 하나님이 마련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곳이 바로 인간의 거처다. 인간이 탄생한 첫날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누렸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
본문은 절대 허무맹랑한 픽션이 아니다. 아담과 이브에 대한 특정한 이름, 성장배경, 얼굴 모양, 체격, 학력, 경력 등 구체적 기술이 없어서 못 믿겠다고 반발한다. 그런 반발은 자신이 너무 어리석을 뿐 아니라 이성에 바탕을 두고 객관적 합리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밖에 안 된다.
모든 민족의 시조설화야말로 진짜 동화 같은 픽션인데도 철석 같이 믿는다. 혹시라도 시비를 걸면 입에 거품을 물고 선조를 모독했다고 덤벼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다. 자기들 설화가 절대 허무맹랑하지 않다고 반발하려면 최소한 그들 또한 본문에 관해 동일한 비방을 하지 않아야 공평하지 않는가 말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최초의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고, 그들이 아직 생존 기술을 터득하기 전이라 각종 과일을 맘껏 따먹을 수 있는 장소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는 것이다. 또 그들의 자식이 번성하고 차츰 이 땅을 다스리게 됨으로써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몇 번 강조했지만 창세기만큼 인간의 기원에 대해 아름답고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는 책은 없다. 본문은 아주 합리적이고 정교하게 기록된 사실이다.
두 종류의 사람들
결국 하나님을 찾고 알고 싶은 마음이 있는 자와 전혀 그럴 의사가 없는 자에 따라 본문의 의미는 정반대로 나뉜다. 너무나 불쌍하고도 안타깝게 불신자들이 단순히 하나님이 없고 그분을 믿지 않는 단계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부할 구실과 핑계를 찾으려 혈안이 된다.
불신자들도 바울이 선언한 대로 하나님의 실존함을 자연을 통해 너무 명료하게 볼 수 있다. 또 자기 내면의 합리적 이성과 도덕적 양심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다. 그런데 더 깊은 또 다른 중심에는 하나님께 항복하기 싫고 무엇이든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생각이 훨씬 강하다. 그런데 자기 멋대로 하자니 스스로 원인도 의미도 잘 알 수 없는 자책감과 눌림이 생기기에 어떻게 하든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들 내면의 참 실체와 합리적 사고에 따른 판단과의 이런 간격과 괴리를 지워야만 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진화의 가설을 고안하고 붙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몸부림 자체가 바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임에도 끝까지 시인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고의적으로 하나님 밖에 있으려고 선택하고 또 그런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않도록 사탄이 불신자들의 심령 안에 견고한 진을 만들어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진을 깨트릴 수 있는 분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뿐이다. 따라서 신자가 새롭게 영적 출생을 한 것은 너무나 큰 은혜다.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 심령을 직접 터치한 것이다.
그래서 원숭이로 하나님을 거부할 핑계로 삼던 자가 오히려 원숭이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원숭이를 만드신 하나님의 짓궂음 가운데 있는 그분의 놀랍고도 풍성한 권능과 은혜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인간 스스로는 절대 자기 중심을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겉과 안을 완전히 바꾸었다. 우리 속에 천지개벽 같은 일을 그분이 일으켜 주신 것이다.
바꿔 말해 본문의 사실성과 역사성을 깨닫고 나서 기독교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역으로 하나님이 실존하시고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거룩하게 통치하고 있는 은혜를 먼저 깨닫고 누린 후에 본문이 역사적 사실임에 의심을 않게 된 것이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믿어지고 나니까 알아지게 된 것이다. 이는 또 인간은 결국 오직 두 종류로만 나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린 자와 끝까지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 있는 자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런 진짜 이유?
지금 후자인 불신자를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신자가 과연 자신의 거처가 하나님과 함께 함을 확신하는지? 또 그런 거처에 합당하게끔 살고 있는지? 본문의 에덴동산을 제대로 이해 적용하고 있는지? 불행하게도 대다수의 신자들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수를 믿으면 야자수 그늘 아래 누워서 쥬스를 마시며 느긋하게 낮잠을 즐기는 식으로 삶이 변화될 것을 소망과 목표로 삼는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만, 불신앙으로 치닫는다.
이 땅의 삶이 이렇게 험난해진 까닭이 무엇인가? 아담이 타락해서 에덴에서 쫓겨났기 때문인가? 피조세계도 함께 벌을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때문인가?(창3:18) 물론 성경은 그렇게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정확히 해석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에서 각종 들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지켜보셨다. 인간은 에덴에서부터 이 땅을 정복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부터 이미 노동했고 이마에 땀을 흘렸다. 틀림없이 최초 인간의 근무시간이 역사상 제일 길었을 것이다. 얼마나 할 일이 많았겠는가? 의식주의 기본체계를 확립했다. 그런데 그 일들이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었을 것이다. 아담의 지성과 지혜도 역사상 최고였을 것이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죄에 빠진 인간끼리 끊임없이 시기하고 분쟁한 부산물이다. 자연을 수탈 파괴하고 온갖 질병이 발생하고 자원이 감소하고 기후 변화가 생겼다. 점점 갈수록 죽도록 고생해야만 먹고 마실 것을 겨우 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생길 것이라고 미래시제로 말씀하셨지 않는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진보를 이룬 미국에서 지금 그 중에서 최고인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수 없어 젊은이들이 소망을 잃어간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했는데 먹거리를 유전자 조작하고 화공약품 비료를 사용해서 도무지 안심하고 먹을 수 없어 유기농 슈퍼마켓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지금 생산량을 늘리려니 비료와 유전자 조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부작용이 두려워 중지하자니 기아문제를 해결할 방도도 없다. 인류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고급해지고 선하게 진보한다는 진화론이 옳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인간이 제일 먼저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은?
예수 믿는다고 절대 형통하지 않는다. 무사무탈 하지도 않다. 한국의 메르스가 신자라고 피해가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수용, 실행하여 종교인으로 머무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대로 인간은 오직 두 종류로 나뉘는데 내 실존의 근거를 절대로 우연과 허공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내 존재의 뿌리와 인생의 출발과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생명의 호흡을 하나님에게서만 받는 것이다. 이 땅에서 지금 이 모습으로 반드시 살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와 의미와 가치를 오직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말 그대로 하나님 품 안에서 사는 것이다. 정말로 내 신분과 나의 나됨을 그분께만 돌리는 것이다, 그분 안에 있는 권능과 은혜가 그분만큼 장엄하고 광대하며 신비롭고 풍성하며 아름답고 선함을 절감하며 누리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얼마나 되는지 깨달을 수 있다.(엡3:19) 하나님의 그런 충만함으로 우리 속에 충만하게 채울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지각과 이성을 갖게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가? 자신의 뿌리를 이 땅에 든든히 내릴 수 있는 자기 정체성부터 온전히 발견해야 한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결국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근본방향과 결말을 알고서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그 중간과정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온전한 해답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지 못해 사는 인생밖에 안 된다. 정말로 헛되고 헛된 시간을 연장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모두가 time killing 잘하기 위해 뭔가 더 신나고 지겹지 않으면서 쿨(cool)한 일이 없는지 찾고 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에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자기 뿌리가 되는 하나님을 배제한 삶은 궁극적인 의미가 전혀 없다. 정말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 예쁜 여자를 보고 음란한 마음이 들면 관계를 맺어야 한다.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으면 죽여야 한다. 그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법에 저촉되지 않아야 한다면 법이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신나게 놀아야 한다. 그래야만 최소한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자로서 치사비겁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신자로서 불신자답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불신자를 탓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우리를 되돌아 봐야 한다. 자연이 너무나 장엄하고 정밀하고 신비해서 절대로 우연히 생길 수 없음을 안다. 우연히 생겼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며 그렇게 믿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 조금이라도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법을 어기면 내 속의 양심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두렵게 여겨진다. 죄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세태가 점점 악해짐을 보고 심한 애통과 분노가 교차한다.
이전에는 잘못된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서만 죄책감을 가졌지만 이젠 나라는 존재 전체에 대한 자괴감이 생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시 엎드리게 된다. 내 심령이 얼마나 가난한지,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내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절감한다. 또 그래서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이웃을 보면 그저 긍휼한 마음부터 앞선다. 그들에게 현실적 도움을 주기보다 예수님부터 소개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두 종류로만 나뉜다는 본문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싶다.
우리에게 일어난 이런 변화가 얼마나 엄청난지 아는가? 너무나 큰 축복이기에 정말로 감사하고 있는가? 예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않는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나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장엄하고 신비롭고 광대하며 정밀한 권능과 은혜가 실제로 나를 통해서 지금 역사하고 있다. 죄에 대해서 이전과 달리 아주 추하게 여기고 화가 나는 것만 해도 그분의 거룩한 역사가 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 바로 그런 권능과 은혜가 지금 내 인생 전체를 주도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내 현실적 상황이 별 볼일 없어도 한 가지 절대적 진리는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과 사랑과 열정으로 그분이 나를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의 의롭고 강한 오른손의 움직임이다.
신자도 세상의 죄악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수시로 자신의 탐욕과 죄의 본성에 져서 넘어질 수 있다. 그래도 신자는 하나님께 영원히 속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광대한 은혜로 반드시 당신의 선함과 완전함과 아름다움으로 신자를 이끄신다. 하나님 품 안에 있다는 것은 그 품 밖으로 끌고나갈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신자는 더더욱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
불신자는 불신자다워야 한다. 인간이라면 최소한 치사하고 비겁하지는 않아야 한다. 이 원리는 신자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 불신자는 어차피 우연에 자기 모든 것을 맡긴 자다. 죄송하지만 그 인생 자체가 비겁하다.
반면에 신자는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 들어온 자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안에 자신의 생명을 포함해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 불신자는 죽을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어 제대로 살지도 못하지만 신자는 죽음 이후가 완전히 보장되었기에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지 않는가? 그래야만 신자가 신자다운 것이다. 신자답다는 뜻이 성숙된 신자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신자로서 필수적인 근본을 갖춘 것이다. 최소한 신자로서 비겁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이는 엄염한 영적 진리지만 우리 체질이 연약하고 진토 같아 그 실행이 그만한 수준이 안 될 수는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더 누리고자, 최소한 그분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소망과 노력은 있어야 한다. 그분의 영광스런 계획에 내가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 아니 소망, 아니 기대, 아니 예상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작금 많은 신자들이 그저 무사무탈 한 것만 목표로 한다. 하나님은 단지 수호천사로 전락했다. 신앙을 갖는 중요한, 아니 유일한 이유가 고난에서 해결 받는 것뿐이다. 또 그러기 위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며 기도만 하면 신자로서 행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동산을 창설해준 뜻도 모른다. 죄로 타락하여 그곳에서 쫓겨나왔어도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과 계획은 단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예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아는 신자에겐 이미 각자를 위한 에덴동산을 하나님이 이미 창설해주셨다. 신자는 그 안에 이끌려 들어와 있다.
그러신 후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 우리가 우리 주변에 어떻게 이름을 짓는지 지켜보고 있다. 신자는 만나는 사람과 겪는 사건과 소속된 공동체를 아름답고 선하고 충만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재능과 은사도 하나님께 충분히 받았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엄청나고 광대하다. 그분만큼이나 그렇다. 그런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인간의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함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상적 방식이 불신자 때와는 정반대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죄악이 들끓는 세상에선 이전 불신자 시절에 꿈꾸던 유토피아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도깨비 방망이로 소개된 적은 성경에 단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을, 또 그분과 함께 한다는 뜻을 정말로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고 비로소 그분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바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을 그곳에 두었다는 뜻이다.
6/14/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