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믿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살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선악과 금령을 잊어버린 신자들
선악과 금령의 의미가 얼마나 중대한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신자가 꽤 많다. 불신자야 그 나무의 화석도 남아있지 않으니 기독교가 지어낸 픽션이라고 반발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성경이 그분의 절대 진리의 말씀임을 믿는 신자가 선악과 금령이 본인의 믿음 생활과 크게 관계없다고 여기니까 문제다.
물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날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받아들여졌다. 더 이상 그분의 진노 아래 있지 않다.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위반한 원죄에서 사함을 받았으니 본문의 심각성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자주 드는 예화를 다시 들겠다.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고 자율학습을 하고 있으라고 말씀하고는 외출했다. 선생님이 볼일을 다 보지 못했지만 학생들이 염려되어 잠시 돌아와 보니 아무도 숙제는 하지 않고 교실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줄 테니까 교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처음 내준 숙제를 다 해놓으라고 말하며 다시 외출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선생님께 숙제하지 않은 벌을 받지 않은 것과 같다. 그 후에 학생들은 여전히 처음 숙제를 풀며 자율학습을 해야 하듯이 신자도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제정한 의미를 정확히 분별하여서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한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두 번째로 주신 명령이다. 첫째 명령(창 1:28)은 무엇이었는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했다. 생명을 보존하고 후손을 번창시키라는 것이다. 인간도 생물학적으로는 동물에 속하며 피조물에 불과함을 겸허하게 인정하라는 것이다. 또 인간더러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아름답고 선하게 가꾸라는 것이다. 피조물 중에 인간에게 가장 높은 위치와 특권을 부여했다.
이 첫째 명령은 인간이 이 땅에서 마땅히 존재해야 할 외적 모습에 관한 것이다. 불신자도 성경의 이 구절에 관해선 전혀 반박하지 않는다. 성경을 몰라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실제로 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에 대해 훨씬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개선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 땅에서 자연과 더불어 생존하고 번영하라는 이 명령을 인간이라면 어길 수 없다. 쉽게 말해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이 명령을 어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두 번째 명령인 선악과 금령은 인간 공동체보다는 각 개인에게, 그것도 내면의 정신세계에 관한 것이다. 이 땅이 인간의 것이 아니며 각자의 인생의 주인도 자기가 아님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은 사탄의 꾐에 빠져 그 뜻을 잠시 잊었다. 하나님이 인간이 자신의 경지에 오를 것을 시기하여 못 먹게 했다고 오해하고선 자신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 결과 그의 후손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17절)고 했는데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아담 스스로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잎 옷을 벗기고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손수 지어 입히셨다. 비록 에덴에서 쫓겨났고 이 땅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많아졌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말하자면 생육하고 번성하며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첫째 명령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신자들이 본문에 대해서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까닭이다. 아담처럼 가끔 하나님을 부인 혹은 반대해도 죽지 않으니 예사로 여기는 경향이 생겼다.
하나님이 정녕 죽는다면 정녕 죽는 것이다.
불신자는 두 번째 명령을 비토하고 비아냥거린다. 그럼 이 명령대로 살고 있는지 여부가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실은 분문의 의미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른다. 다시 자율학습의 비유를 들어보자. 선생님이 처음에 벌을 면제해 주었다. 두 번째 돌아왔는데도 숙제를 하지 않으면 선생님을 우습게 여긴 것이다. 선생님을 선생님 취급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초림 때에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 값을 대신 감당하셨다. 아담의 후손들이 숙제하지 않은 것을 용서해준 것이다. 신자들이 믿은 후부터 재림까지 이 명령대로 살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것이다. 거기다 하나님이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도 죽지 않는다고 여겼으니 그분을 거짓말쟁이 취급한 것이다. 아주 잘 봐주어야 겁을 주려는 허풍쟁이 꼴로 여긴 것이다.
하나님 당신이 바로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하고도 유일한 진리요 선이다. 당신께서 선포하신 말씀도 당연히 그러하다. 특별히 약속은 절대로 변개, 수정, 타협, 후퇴, 포기가 없다. 고의적인 음모, 술수, 거짓, 사기는 물론 인간을 고의로 조종하고 강요할 의사도 추호도 내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녕 죽는다고 말씀하셨으면 정녕 죽는다. 거짓말 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구태여 믿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 금령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간주하는 셈이다. 그야말로 자가당착적인 신앙이다. 사기꾼인 줄 빤히 알고도 계속 돈을 빌려주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꼴이다. 신앙생활에 혹여 그런 모습이 없는지 철두철미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도 아담은 곧바로 죽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리실 죽음의 형벌은 육신적 죽음이 아닌 다른 죽음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두 종류의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육신의 죽음이 아닌 그 다른 죽음이야말로 진짜 죽음이자 정녕 죽으리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불신자와 신자를 구분 짓는 명령이다. 불신자는 육신의 죽음으로 자기 존재, 삶, 인생이 완전히 멸절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첫째 명령은 쉽게 납득한다. 신자는 그 반대여야 한다. 육신의 죽음이 절대 끝이 아님을 믿는다. 아니 알고 있다.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는 다른 죽음을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수용한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둘째 사망과 연결시킬 필요까지는 구태여 없다. 불신자는 처음 육신의 죽음을 당하고 마지막 심판 때에는 영과 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영벌을 받는 것이 둘째 죽음이다. 신자는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순간 영생을 소유한다. 둘째 사망은 영원토록 완전히 소멸되었다. 도리어 육신은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님과 왕 노릇하는 영광을 누린다.
이 땅에서의 또 다른 죽음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정녕 두 번의 죽음을 맞으며 본문의 궁극적 의미도 그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더 주목해야 할 뜻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죽는 것이므로 이 땅에서부터 육신의 죽음과 다른 차원의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 땅과 자신의 절대적 주인임을 부인하는 순간 그 죽음이 임한다.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인간의 모든 비극의 원인이자 시발점이라는 뜻이다.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금령을 어기자마자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지기는커녕 하나님께 벌 받을까 두려워지기만 했다. 또 아담과 이브가 서로를 향해 부끄러움만 느꼈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너무나 불합리한 명령이다. 그 과일을 따서 인간끼리 서로 나눠먹은 것은 아주 선한 일이다. 아담과 이브가 잠시 하나님을 잊고 자기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아 높였다. 그럼, 즉 하나님이 부재한 것이 사실이고 인간끼리 아주 선한 일을 했다면 당연히 신나고 즐겁고 만족해야 하지 않는가? 최소한 평강과 자유함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정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그럼 하나님이 절대로 부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룩하고 의로운 그분이 모든 인간 역사의 배후에서 통치하시며 각 개인의 심령까지 주관하신다는 것이 절대적 진리로 판명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이 금령을 어기기 전에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서로에게 잘못은 물론 감출 것도 단 하나 없었다. 갑자기 상대를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각자의 추함을 실감했다. 상대에게 내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다. 상대를 이전처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상황과 전혀 달라졌고 아예 불가능해졌다. 마냥 좋기만 했던 것과 거리가 멀어지고 오히려 상대의 허물만 눈에 띄기 시작했다.
서로 살을 맞댄 부부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는 장벽이 생겼다. 각자가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에 한없는 자괴감이 생겼다. 자기 자신의 전부에 영향을 미치는 실존론적 존재론적 불안감과 공허감이 끝없이 몰려왔다.
또 그런 상태로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신분과 자격이 아님을 절감했다. 이전처럼 하나님과 순전한 마음으로 교체할 자신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나님이 두렵게만 여겨졌다.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도무지 넘을 수 없는 큰 강이 가로 막혔다. 최초 인간 둘은 동산 깊숙이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렸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그런 상태를 두고 정녕 죽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절대 취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인간 내면 모습이다. 거기다 그런 상황을 인간 스스로는 절대 벗어나거나 개선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는 정녕 죽음인 것이다.
이미 말세는 시작되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지옥 가지 않고 미래에 천국이 보장되었다는 교리를 수용하는 차원에 절대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는 도무지 벗어나지 못한 절망의 심연에서 지금 건짐을 받은 것이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고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한다.
지금껏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고 큰소리쳤지만 하나에서 열까지 오직 실패와 허망함과 갈급함뿐이었음을 철저히 자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했어도 뭔가 충족되지 않고 항상 불만이었다. 일시적으로 기쁘고 평안했을 뿐 절대 지속되지 않았다. 순전한 100%의 기쁨과 평안이 결코 아니었다.
이 땅이 전부임을 믿고 생육하고 번성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살았지만 사실은 짐승처럼 산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구원이란 그래서 짐승에서 인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꼭 살고 있어야 할 참 인간의 모습으로 재창조된 것이다. 본문의 선악과 금령이 허무맹랑한 픽션이라고 비방했던 것이야말로 내 모든 실패와 허망함의 첫째 원인이자 전부였다. 하나님과 반대쪽에 서면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완전한 악일뿐이다. 소망이라곤 아예 없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끼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 땅을 보존 번창시킬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쳐 왔다. 작금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갈수록 환경오염과 기후급변이 심해져 앞으로 식량과 물이 부족하고 황폐해질 것을 모두가 예상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모든 나라가 합심해서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고 안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나라와 민족의 번영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들이 자기를 최고의 위치에 두었다. 또 그런 자들이 모여서 민족과 국가를 이루니 자기 나라, 자기 민족, 자기 국가만이 최우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해의 주범인 프레온 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미국과 중국이 그것을 통제하는 국제협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이 땅에서 현실적 물질적 패권을 서로 차지하겠다는 탐욕 때문이다. 후진국 또한 그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언제까지 빈곤에만 머물 수 없고 삶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욕망 때문에 무차별로 개발하고 있다. 돈이 없어 공해방지에 투자할 여력조차 없다.
그저께 안타까운 뉴스가 보도되었다. 남미의 빈국 중의 하나인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앞이 안보일 정도의 공해가 심해 낮이 밤처럼 암흑천지로 변했다. 미세먼지의 농도가 안전치의 열 배가 넘었다. 며칠간 공장가동과 자동차운전을 전면중지해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스스로 자율학습 할 수 있는 자는?
예수님은 말세에 해가 어두워진다고 예언했다.(마24:29) 대낮에 캄캄해서 하늘을 볼 수 없으니 이미 말세는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 완전하고도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두들겨 맞아도 정신을 차릴까 말까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닫고 고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율학습의 비유를 또 들어보자. 선생이 다시 오시기 전에 어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겠는가? 자신이 도무지 학생답지 않다는 것을 철저히 자각한 자다. 선생님이 처음에 용서해준 사랑의 그 깊은 뜻을 깨달은 자다. 틀림없이 많은 애들이 또 놀기 바쁠 것이다. 선생이 다시 오지 않는다, 오더라도 늦게 와서 숙제 검사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설령 벌을 준다고 해도 어차피 다 같이 맞는 것이라 얼마든지 견딜 만하다고 큰소리치면서 말이다.
그리고 혼자만 열심히 공부하는 자를 비겁하고 치사하다고 비방할 것이다. 어쩌면 학급의 짱이 공부하지 말라고 두들겨 팰 것이다. 그런 온갖 비방과 핍박에도 그 학생이 공부하는 까닭은 선생의 벌이 두려워서도, 용서해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만도 아니다. 숙제하지 않는 나야말로 가장 치사하고 비겁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전혀 선생님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학생이 전혀 학생답지 못했다. 그런 내 자신이 너무나 추하고 더럽게 여겨졌다. 내가 이렇게 계속 지낼 수 없다는 후회와 반성이 가득 생겼다. 그래서 죽어도 이전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이전에 숙제 않고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이 진짜 죽음임을 알게 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 멋대로 살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기들 스스로 판단했던 것이 자기 존재 전부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오류이자 죄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께서 지으신 인간을 시기하지 않는다.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고 그분께서 먼저 찾아오셨고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에겐 어떤 변함도 없었고 아담더러 당신의 사랑을 직접 풍성하게 체험토록 해주었다.
아담도 범죄 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스스로 찾았다. 자기 입으로 이브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나님이 붙여주신 돕는 배필로 받아 감사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도록 순수하게 아내를 사랑했다. 그랬음에도 그가 하나님을 잠시 잊자말자 자신의 존재론적인 모든 공허함과 불안함의 원인과 책임이 이브에게, 나아가 이브를 붙여주신 하나님에게 있다고 핑계 대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자신을 그 자리에서 당신의 약속대로 육신적 죽음을 주지 않고 더 튼튼한 옷으로 갈아입혀주자 자신이 그분의 사랑 앞에 항복하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우며 어리석은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정말로 선악과 금령을 어기니까 그래서 내가 하나님 대신에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자 정녕 죽는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과연 목숨 걸고 믿고 있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이 지난 죄의 벌만 면제 받은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일시적으로 부인 내지 잊으면 정녕 죽음임을 체험으로 절감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 순종하는 정녕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불신자와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주일 성수하고 기도하며 말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어야 편하고 재미있고 신난다. 때로 허망하고 갈급함을 부지불식간에 느끼긴 한다. 그러나 이 땅이 전부이기에 어떻게 하던 이 땅에서 수명만 연장 내지 하려하게 만들려 든다.
신자는 내 스스로는 자신을 고칠 수 없는 추하고 더러운 존재론적 절망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이 씻음 받았다. 한 순간이라도 그 주님의 사랑과 권능이 없으면 허망하고 갈급해짐을 알게 되었다. 간혹 이전의 습성으로 돌아갈 때도 있지만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죄악과 흑암에 세력에 대해 아주 민감해졌다. 그것들을 저주하며 맞서 싸워 승리할 수 있다. 아직도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 부르는 자들을 보면 정녕 죽음만이 기다리기에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 배후에 있는 사탄에게 극도의 분노가 절로 생긴다.
선악과 금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부인하면 정녕 죽음이 임함은 절대적 진리다. 그럼 정녕 죽기를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그 금령을 지켜야 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한다. 신자의 살고 죽음은 정녕 이 말씀에 달렸다. 하나님이 독재자 폭군이 아니다. 모두 순교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과 인생만이 정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삶과 인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조금 덜 좋거나 더 나쁜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도덕적 의를 쌓거나 현실적 형통을 도모하는 싸움이 결코 아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없으면 육신은 살아있어도 내 정신, 즉 진짜 실존은 죽은 것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죽을 수도 없고 두렵기만 하기에 연명만 하는 것이다. 근본 해결책을 전혀 모르므로 그 연명을 모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더 화려하고 풍성하게 만들려 하지만 사실은 좀비에 화장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화장한들 좀비는 좀비일 뿐이다.
지금 불신자를 탓한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첫 번 외출의 벌이 면제된 신자가 그 후에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않으면 좀비 꼴로 되돌아간 것이다. 신자라면 믿음을 진짜로 살고 죽음의 차원으로 인식하고 그런 인식하에 죽기 살기로 살아야 한다.
제 개인의 이야기를 하자면 예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아니 그분과 원수처럼 지낼 때에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오셨다. 당신께서 나를 알고 계시고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절대적 생명과 진리를 체험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 대한 그분의 계획과 소명도 알게 되었다. 그분의 그런 일방적 은혜가 없었다면 지금쯤 틀림없이 술에 찌들어 살거나 자살해 죽었거나 둘 중하나일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나의 교만과 욕망을 세상에선 내 스스로 도무지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불신자도 생존 번영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첫째 명령대로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그분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문이야말로 신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첫째 명령인 셈이다. 신자에게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진실로 명하노니 예수 십자가를 붙들지 않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신자는 예수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 영광이 자기를 통해 드러나게 해야 한다. 순교의 자리에 이르는 한이 있어도 주님의 십자가를 놓지 않아야 한다.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자. 예수를 믿은 것이 내 생애에 정녕 최고로 성공한 일인가? 또 그럼으로써 참 생명을 얻고 누리고 있는가? 최소한 짐승에서 인간으로, 또 인간 중에 참 인간이 된 것을 확신하는가? 또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기 내면은 썩어서 곪아터져 가는데도 기도응답 받아 외면만 치장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자기에게마저 속거나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신에 언제 어디서나 현실적 겉모습은 아무리 초라해져도 내 속에 오직 하늘에서 주시는 평강과 자유로 채울 것인가? 그래서 세상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과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길 것인가 말 것인가?
6/28/2015
불신자의 둘째 사망에 대해서 자칮 영혼멸절로 오해할 수 있도록 설교했습니다.
설교 오디오보다는 본문 텍스트를 참조해 주십시오.
가끔 설교는 저도 모르게 흥분하거나, 원고를 까먹거나, 다른 부분과 혼동해서
제 의도와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항상 설교 본문을 함께 올리는 것은 본문을 우선으로 참조해 달라는 뜻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