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신자다.
창세기 강해 (18)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2:20-23)
남성우위사상을 지지하는(?) 성경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보다 한 쌍이 적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 하나로 이브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학이 발달되기 전에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탓이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 진리다. 그 진리를 인간이 이해하기 쉽게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인간의 언어로 계시한 책이다. 당신의 뜻을 정확하고 쉽게 전달하고 때로 강조하기 위해서 문학적 기법도 동원되었다.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것은 남녀가 한 몸을 이루어 부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남자와 여자의 갈비뼈는 똑같이 열두 쌍이다. 간혹 열한 쌍만 갖고 태어나는 자가 있는데 오히려 여자 쪽에 빈도가 높다고 한다.
본문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사항은 성경은 남성우위사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고대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거의 노예 내지 물건 수준이었다. 구약에서도 일부다처제를 용인하여 여성을 비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그렇게 했을 뿐 하나님의 뜻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그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가르침을 주시려는 뜻이었다. 그 전까지 구약성경의 계시는 완전히 명확하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았다. 완전한 하나님 뜻을 보이신 예수님은 간음한 연고 외에는 절대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맺어준 것을 인간이 나눌 수 없다고 선포했지 않는가?
거기다 놀랍게도 구약성경 민수기 27장과 36장에 따르면 슬로보핫의 딸들에게 100% 동등한 재산 상속권을 보장해주었다. 한국에서 딸에게 아들과 동등한 유산권리를 법으로 보장한 것이 겨우 1990년이었다. 민수기 사건은 그보다 무려 3,400년 전 일이다. 본문에 이어지는 24절에도 남녀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하나님이 명했다. 상하주종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태초부터 최초의 남녀는 평등하다고 확고히 밝혔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든 것은 남녀의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 조직, 장기가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브는 아담에게서 일부가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남녀를 각기 따로 동시에 창조했다.(창1:27)
아내가 아프면 남편도 아픈가?
아담이 이브를 보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 것은 결혼제도를 창설하고 남녀 간에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여 그분을 찬양하는 표현이다. 또 이브를 그만큼 진실 되게 뜨겁게 사랑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부부가 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자기 뼈와 살이라고 고백했으니 둘은 사실상 한 몸이기에 부부 한 쪽이 아프면 자동으로 배우자가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 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자식이 아프면 가슴이 찢어지지 않는 부모는 없다. 가끔 신기하게도 신체적으로도 같은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부모 한쪽만이 아니라 둘 다 그럴 수 있다. 단순히 심리적 공감만이 아니다. 부모는 자녀와 각각 혈연관계이기 때문이며, 또 그 자녀를 통해 부부도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공동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런 가정만의 특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뼈 중의 뼈라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또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소명을 주셨다. 가정에서부터 살 중의 살 같은 공동체를 이루라는 것이다. 또 그런 특성이 후손 모두에게 동일하게 이어지는 모습으로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된다는 것이다. 부부는 바로 그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일꾼이다.
바울이 이런 원리를 또 다른 공동체에 적용하고 있다. 바로 교회이다(고전12장).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한 몸을 이룬 공동체다. 목사를 포함한 모든 성도가 그 몸의 지체다. 권세 자격 지위에서 우열은 전무하고 맡은 역할만 다를 뿐이다. 하나님 앞에 모두가 동등한 신분이요 그분의 동역자다.
만약에 한 지체라도 없으면 그 몸은 불구가 될 수밖에 없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12:26) 실제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발가락 아니 발톱 하나만 빠져도 너무나 고통스럽지 않는가?
혈연관계인 가정처럼 교회는 예수님의 보혈로 서로에게 뼈 중의 뼈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결혼 전에는 생판 남이었던 부부가 자식을 통해서 한 몸으로 고통 받는 것처럼, 교회로 모이기 전에는 생면부지였던 교인들이 예수를 함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랜 친구처럼 모이면 즐겁고 자주 모이고 싶다. 예수님을 통해 다른 이의 기쁨과 슬픔이 나의 것이 된 곳이 교회다.
하나님 공동체에 더 중요한 요소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불임부부가 자녀를 입양하여 사랑으로 양육하면 자녀가 아프면 친자식 이상으로 부모도 아프게 된다. 서로를 끈끈이 이어줄 매개체 혈연이 없고 DNA를 전혀 공유하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그런데 지금 제가 성경적으로 아주 틀린 말을 했다. 무엇인지 눈치 채겠는가?
모든 인간은 한 부모인 아담과 이브에게서 출생했다. 모두가 혈연관계이며 같은 DNA를 공유한다.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아담과 이브에게도 하나님은 한 부모다. 아담이 이 고백을 할 때는 그 두 사람이 인간 공동체의 전부였다. 따라서 이 고백도 하나님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 돕는 배필을 붙여주신 첫째 의미 조력자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입양한 자녀처럼 직접적 일차적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다. 다른 이의 고통을 즉시, 자동적으로, 같은 크기의 내 고통이 되어야 한다. 내 고통을 가만 두는 자는 죄송하지만 문둥병자뿐이다. 살이 썩고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도 전혀 고통을 못 느낀다. 이웃의 고통에 둔감하고 외면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보면 영적인 문둥병자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모든 이가 원죄 하에서 내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는 습성에 묶여 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돕는 배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혈연이 회복되어야만 비로소 그 사랑이 가능하다. 이웃을 참 사랑할 수 있으려면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온전히 알아야 즉, 창세기 1,2장에 계신된 그분의 창조신학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율법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 물었다. 주님은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둘째는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웃이 아프면 너도 자동적으로 아파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명이 첫째인 하나님 사랑과 같다고까지 말했다. 그 중요도에서 같다는 뜻이긴 하지만 이웃도 하나님처럼 사랑해라는 뜻으로도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믿은 후에 여전히 나만 사랑하려는 미련이 남아 있다. 이웃은커녕 하나님도 온전히 사랑할 주제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주님의 이 계명을 정말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본을 보이러 이 땅에 오셨다. 실제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이웃을 참 사랑하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렇게 하셨다. 그럼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인간 신자도 그 일이 가능함을 증명하신 것이다. 스데반 같은 초대교회 순교자들이 그대로 따랐다. 주님은 당신의 그 사랑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신자 안에 당신의 사랑의 유전자를 심어주려고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로 그분에게 붙어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작금 교회는 신자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는 곳으로 바뀌었다. 교회 안에서 세상보다 더 추잡하게 싸운다. 성도는 세상과 천사도 판단할 수 있는데도 교회 분쟁을 세상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려 한다. 그런 소송이 대형교회일수록 더 많다. 대체 어찌된 형편인가?
절대 선이신 하나님, 절대 은혜인 예수님, 절대 능력인 성령님, 절대 진리인 성경을 알기는 하는지? 아니 소유라도 하고 있는지?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의 십자가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불법이 성하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한탄하신 대로다.(마24:12)
아담의 이브에 대한 이 고백은 모든 인류가 그들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절대 진리라는 뜻이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려야 할 소명이 단순히 물리적 지구환경을 보존하라는 차원이 아니다. 인간은 서로 돕는 조력자로 만드셨기에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뼈 중의 뼈의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그분의 청지기 직분과 동의어가 되어야 한다.
브레이크 터진 기차
며칠 전 뉴스에 따르면 지구 곳곳에서 섭씨 40도가 넘는 불볕더위 때문에 일사병 환자가 급증했다고 한다. 국지적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구온난화가 과학자들의 예측보다 더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브레이크 터진 기차처럼 도무지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음 세대, 아니 우리 세대 안에 대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불길하고 우울한 소식만 들린다.
이 재앙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지구를 태양에서 단 몇 십 미터만 뒤로 물리면 간단히 해결된다. 그러나 신자들이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해결해주지 않는다. 마지막 심판에 해가 어두워지는 때까지 유보해 놓았다.
그렇게 유보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때까지는 인간끼리 진정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인류가 문화, 사상, 종교, 종족 등 모든 것 내려놓고 서로 내 몸처럼 사랑하면 당장에 해결된다는 것이다. 최고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프레온 가스사용을 전면 금지시키지 않는 한 재앙은 닥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 재앙은 절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다. 인간의 탐욕스런 죄악의 필연적 결말이다. 지금 요한계시록의 예언대로 인류의 1/3이 죽는 재앙으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 후에 이 땅에 세우려한 당신의 나라는 모든 이가 서로 돕는 배필이 되는 참 사랑의 공동체였다. 비록 아담이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왔어도 하나님의 그 뜻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전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또 당신께서 남겨두신 당신의 자녀를 통해서만 그 뜻을 이루신다.
그분의 관점에선 작금 지구 온난화가 심화되고 불법과 무정이 성행하는 이유는 참 사랑을 알고 실천해야 할 신자들의 태만 때문이다. 신자와 교회가 창세기 1,2장에 주신 소명을 실천하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기독교가 왕성해도 인류에겐 소망이 전혀 없다. 그 일을 바로 부부끼리 내 몸처럼 사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뜻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와 신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자연 재앙으로 종말이 닥쳤다고 아우성이다. 심지어 신자들끼리 별도 공동체를 만들어 산속에 피신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자고 한다. 전도에 열심을 내어서 그 재림을 독촉하자는 자들마저 있다.
이미 십자가 안에 들어온 신자는 종말과 재림을 염려할 필요도 독촉할 이유도 전혀 없다. 때가 되면 불시에 주님은 다시 오신다. 대신에 신자는 정말로 이웃을, 최소한 교회 안에서라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정작 해야 할 이 일을 등한히 하면 인류의 상당수가 피해를 당할 재앙은 불가피한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항은 그렇다고 해서 종말은 아니다. 본문과 다른 주제라 길게 설명할 여유는 없다. 간단하고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직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과 맞바꿀 만큼 사랑하시기에 여전히 더 많은 자들이 당신의 품 안으로 돌아오길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이라도 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도록 그래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이전에 형제와 화해부터 하라고 했다. 제사보다 긍휼을 구하러 세상에 오셨다고 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뼈 중의 뼈라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부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 그들 본인보다 하나님 당신께서 더 간절히 소원한다는 것이다.
은밀히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아담이 이브에게 뼈 중의 뼈라고 고백한 성경 기록을 자세히 보면 너무 오묘하고 은혜가 넘친다. 아담이 이때에 자기 갈비뼈가 없어진 줄 알았을까 몰랐을까?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외과 수술한 것이 아니니 알고 말고 할 것도 사실은 없다.
문자적으로만 봐도 “깊이 잠들게”(21절) 한 후에 그렇게 하셨다. 일종의 마취를 한 것이다. 그럼 잠을 깨자마자 갈비뼈가 없어진 줄 알고 그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니다. 대신에 22절 후반에 보듯이 하나님이 이브를 이끌어 오자 아담이 그런 고백을 했다.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해석해도 이는 비유와 상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정말로 마취하여 그렇게 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아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미리 배려한 셈이 된다.
아담은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이브를 붙여주신 너무나 큰 사랑에 감격한 것이다. 또 아내를 자기 분신으로 여기고 너무나 사랑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이 깊이 잠든 사이에 그 일을 진행시켰다.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방안을 아담 모르게 마련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적으로 영원히 사랑하신다. 또 그 사랑을 인간이 인지하지 못해도 언제 어디서든 은밀하게 한 결 같이 인간에게 부어 주신다.
지구 온난화로 종말이 당장 닥칠 것 같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단 한 치도 줄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류의 고통을 방치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다. 그분에게 구원의 능력이 없음도 아니요 손이 짧아서 해결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인간끼리, 특별히 가정에서 부부끼리 서로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기에 지금 이런 파국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 책임이라고 그분 탓이라고 핑계 댈 수는 결코 없다. 너희들이 이웃의 고통이 즉각, 자동적으로, 같은 크기로 너의 고통이 되었다면 과연 가만히 있었겠느냐는 뜻이다.
나아가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고통과 질병과 환경오염을 자동으로 다 제거해준다고 해서 인간끼리 결코 참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육신적으로 고통당하고 그 삶이 불편해도 영과 영끼리 진정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로마를 물리쳐 주지 않았다.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켜 주지 않았다. 심지어 질병을 고쳐달라고 사람들이 몰려들어도 다른 동네로 피신해버렸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신께서 오신 궁극적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아무 말 없이 오르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 뜻도 신자들더러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서로 용서해주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신자와 교회의 첫째 소명이라는 것이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부부가 가정에서부터 실현해야 한다는 원리는 굉장히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의 뜻은 창조 타락 이후 영원까지 동일하다. 그분의 뜻이 중간에 바뀌는 법은 절대 없다. 오늘날 모든 교회와 신자가 새겨듣고 실천해야 한다.
최근에 기독교 교세가 약해지고, 특별히 청년 교인이 감소된다고 아우성이다. 온갖 대책을 강구해서 실현하고 있으나 사태의 본질을 다루지 않고 미봉책에 불과하다. 수술해야 하는데 고약과 반창고만 바르는 꼴이다.
청년들이 교회 이탈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부모처럼 예수를 믿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아버지가 장로 아니 목사, 어머니가 구역장 아니 사모라도 그렇다. 교회에선 거룩하게 손을 잡고 사랑하나 교회 문만 나서면 정말 사소한 일로 싸운다. 물론 연약한 인간이라 때로 싸울 수는 있다.
더 근본적으로 자식이 보기에는 부모에게 돈이 하나님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자기 이름과 자존심을 높이려 믿는다는 것을 자녀들은 알고 있다. 쇼윈도 부부, 쇼윈도 신자가 너무 많다. 자식도 못 속이는데 어찌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는가? 너무 어리석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런 행태에 변화가 없고 일부이긴 해도 갈수록 더 타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건물부터 쇼윈도 건물, 같은 목사로서 죄송하지만 목사도 쇼윈도 목사, 교회 중직들 모두가 쇼윈도 신자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쇼윈도만 모였으니 보이는 것이 전부 그럴싸하다. 다들 잘하고 있는 양 착각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어쩜 그들도 영적인 양심에 찔릴 때가 있을 것이다. 모두가 영적 문둥이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그래서 현실에서 궁핍해질까 염려한 것이다. 하나님과 십자가 복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러는 청년 신자라고 크게 나은 것도 없다. 신자임에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다. 결혼해도 아이들 낳지 않겠다고 한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동성애처럼 결혼마저 개인 선택과 자유에 속한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첫째요 가장 중요한 소명이라는 철저한 인식이 없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죄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물론 지금 같은 사악한 세태에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심정은 이해된다. 그러나 자녀를 양육하느라 자기들 생활이 여유 없이 쪼들릴까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또 자식들 세대에, 아니 우리 세대에 닥칠지 모르는 자연 재앙의 피해자가 되지 않겠다고 하는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옳은 것은 다르다. 재앙은 하나님의 심판이기 이전에 인간의 죄악의 결과다. 특별히 신자가 하나님의 소명을 태만하게 행한 때문이다. 신자가 신자답게 살지 못하면 정말로 이 세상은 소망이 없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주님처럼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어서 다른 이들을 살려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그분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분의 영광을 실현시키며 그 영광에 참여하며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신자가 결혼하지 않고,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은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것이다. 비록 현실의 삶이 고달프고 재앙이 닥친다고 해도 자녀들로 그런 영광에 참여할 기회를 아예 미리 박탈하는 것이다.
아담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고 너무 거창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목숨 걸고 순교하라고 요청하지도 않는다. 우선 기혼자 신자라면 솔직히 자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라는 것이다.
내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정말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가? 감정적으로 뜨겁게 좋아하며 사랑하라는 질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가 깊이 잠든 사이에 은밀하게 나를 위한 당신의 사랑의 계획을 다 마련하신 후에 내게 붙여 주셨음을 확신하는가? 그분의 사랑을 함께 누리며 그분의 일을 이 땅에 실현할 동역자로 여기는가?
그래서 그 일을 실제로 가정에서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실천하고 있는가? 자녀들이 내 믿음과 삶의 본을 보고 배우도록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계승시키고 있는가? 자녀들이 세상 다른 이들 앞에서 자기 부모를 하나님 다음으로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존경하며 닮고 싶다고 자랑하는가? 최소한 부모 때문에 교회 가기 싫다는 소리는 안 들을 자신이 있는가?
미혼 신자라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단순히 생활의 편의를 위하고 외롭지 않으면서 함께 돈을 많이 벌려는 목적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첫째 가는 방안으로 확신하는가? 그래서 그 일에 자신을 헌신할 태세가 되어 있는가?
불행히도 신자들마저 결혼을 하나님의 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교회에서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순전히 개인의 선택과 자유에 속한 문제로 제쳐놓았다. 교회가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가 옳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바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아니고는 이 땅에 소망이 전혀 없다. 바로 그 영원하고 절대적 진리를 교회에서 배우고 막상 실천하는 첫째 가장 중요한 현장은 가정, 그것도 부부 사이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가 아무리 외적으로 흥왕해 보여도 종교왕국을 건설한 것뿐이다.
요컨대 지금 현재의 아내, 남편, 자녀들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 최대의 선물이자 은혜임을 확신하는가? 그런 확신이 없다면 믿음조차 없는 셈이다. 정말로 최고 최대의 선물이라고 여긴다면 내 몸처럼 아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신자들의 가정이 그렇게 변할 때에 비로소 이 땅에도 주님의 빛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런 신자의 가정, 부부는 어떤 자연재앙이 닥쳐도 넉넉히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뜻이다.
7/19/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