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멸망의 주범은 거짓 목사들이다.
창세기 강해 (19)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니라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4,25)
인류 역사상 현재처럼 가정이 총체적으로 파괴된 적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을 사람들이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신자들도 많이 포함된다. 창세기 2장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이 땅을 가정을 통해 거룩하게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그럼 상당수 신자들이 그분의 나라를 건설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또 그 나라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에도 경각심을 갖기는커녕 그런 상황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는 뜻이다.
물론 아담의 타락 후로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첫째 책임이 교회에 맡겨졌다. 그러나 장차 교회를 부흥시킬 주역인 젊은 세대들이 급속히 기독교 신앙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들이 교회 출석을 꺼리는 중요 이유 중의 하나가 부모의 위선적 신앙행태가 싫다는 것 아닌가?
세 종류의 하나 됨.
이처럼 신자들의 가정마저 온전치 못한 것은 본문에 드러난 하나님의 소원과 계획대로 부부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의미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부부가 완전한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주례사에서 단골로 등장하듯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사랑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성경은 세 가지의 하나 됨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한다.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가정을 이룰 책임이 남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부모 입장에선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한다.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새로운 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아들을 양육하는 것이 가정의 첫째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사회 경제적 요인이 많긴 하지만 자녀가 집집마다 한둘뿐이라 결혼하여 독립해야 한다는 의식이 부모와 자녀 양쪽 다 희미해졌다. 부모가 정말로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이 충만한 부부관계와 가정을 이루는 본을 보인다면 자녀도 어서 빨리 나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 독립해야지라는 마음이 들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가 독립하는 것을 당신의 나라를 설립 계승하는 첫째 원리로 제시했다.
둘째는 남편이 아내와 연합해야 한다고 한다. 동등한 신분, 위치, 자격을 가진 온전한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부부 간에는 상하주종이나 우열의 관계가 절대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한다. 먼저 결혼의 첫째 목적인 생육하고 번성하려면 육체적 결합을 해야 한다.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면 일부다처제는 물론 간음도 금지한 것이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확고한 뜻이다. 수치적으로만 따져도 아예 불가능하다. 이는 둘째 연합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연합이란 반드시 둘이 하나가 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연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합의 구체적 의미
국제연합(the United Nations)의 총회에선 미국이나 중국 같은 최고 강대국이나, 아프리카의 이름도 생소한 최고 약소국이나 투표권은 동일하게 하나다. 부부의 현실적 학력, 가문, 재력, 특기 등에는 분명 우열이 있다. 연합의 가장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 앞에서나 가정을 이루어감에 그런 것들로 인해 상대를 조금이라도 못나게 여기거나 비방 멸시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보유한다면 상명하달식의 체계는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복수의 구성원들이 모였다면 유엔의 사무총장처럼 조직의 질서를 유지하고 상호 합의한 규칙을 집행하는 실무책임자는 필요하다. 부부 관계도 그러하다. 남편이 아내에게 지시할 수 없다. 아내도 남편의 종이나 심부름꾼이 아니다. 돕는 배필이란 처음부터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버지를 그 가정의 최고 권력자가 아닌 대표가 되도록 했다. 신자의 가정과 부부관계를 실제로 주관하는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한 분뿐이다.
이스라엘을 애굽 종살이에서 구출해 낸 모세도 백성들 앞에는 지도자이지만 하나님 앞에선 그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자였을 뿐이다. 그는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과 사십 년 광야 방황생활에서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수행했을 뿐이다. 딱 한 번 백성들에게 화를 내고 하나님 앞에서 불평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신자의 가정에서 아버지, 남편은 가족 구성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온전한 교통을 하도록 이끄는 영적 지도자이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 전하는 대언자요 그것을 실현하는 책임자다. 그래서 바울은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했다.(딤전2:9)
베드로는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아내도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서 귀히 여겨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벧전3:7) 아내와 자녀와 함께 천국을 간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아버지는 가정을 가족 모두가 천국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이끌라는 것이다.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천국 구원에서 누락될 것을 바랄 가장은 없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하나님만큼이나 귀하다. 아무리 가정의 대표라고 해도 인간 가장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지닌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함은 너무나 지당하다.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라.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베드로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가정이라면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는 없다. 나아가 바울이 권면한 대로 남편이 가정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언제 어디서 어떤 고난을 만나도 함께 동등하게 나눈다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모세는 호렙산 정상의 화염 중에 나타나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율법을 전해 받았다. 구약시대에 그만한 하나님의 종은 없다. 장차 오실 메시아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했다. 그가 잠시 하나님을 대면하려 산에 올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음란하게 숭배했다. 하나님이 대노하여 모두를 진멸하고 모세의 가문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선포했다.
모세는 그 때 하나님께 거의 대들어 따지듯 기도했다. 저들을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는 약속을 지키려고 애굽에서 구출하셨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 죽이면 하나님의 당신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차라리 저를 저주하시더라도 저들은 버리지 말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죄에 빠진 백성들이지만 함께 생명의 은혜를 이어갈 자로 귀히 여겼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아내를 귀히 여기되 지식을 따라 그렇게 하라고 했다. 지식은 성경과 예수님과 그 십자가 사건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권능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죄는 저주하되 죄인은 끝까지 품어주는 사랑을 바탕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아버지이자 남편은 부부 사이와 가정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한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주로 어머니가 새벽기도에 나가 기도한다. 아버지는 바깥일 하기 바빠서 신앙생활을 등한히 한다. 흔히들 마누라 치맛자락만 붙들고 있으면 천국 간다고 농담한다. 성경은 지금 아내나 자식이 남편과 아버지 바짓가랑이를 붙들라고 하는 셈이다. 아버지가 가정을 교회로 만들고 그 가정 교회에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아버지와 남편부터 하나님의 참 생명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가족들이 아버지의 삶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거룩하신 인도를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매일 가정예배 드리고 부부가 아침저녁으로 손잡고 기도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본문이 말하는 대로 부부 둘이서 한 몸을 이루어 연합해야 한다. 온전하고 순전한 연합이어야 하는데 불신자와 신자는 물론 기독교 가정사역 부부상담 전문가들도 미처 모르는 연합의 뜻이 본문에 있다.
결혼의 일반적 공식
불신자들은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결혼의 공식을 1+1=2로 간주한다. 그들도 남녀는 동등한 인격체로 평등하며 서로 다름도 인정한다. 그러나 둘이 합쳐 결혼했기에 신분, 위치, 능력이 두 배 이상으로 상승할 것을 기대한다. 아내가 혼수로 아파트를 사오든지 아니면 여자도 맞벌이를 해서 My Home을 장만할 꿈을 꾼다. 중요하고 좋은 일이다.
문제는 결혼의 목표가 2로 느는 것이라 그렇지 않으면 갈등이 분쟁으로 발전될 소지가 항상 있다. 한국에선 대부분의 아버지가 돈 버는 기계로, 엄마는 입시정보 수집전문가로 변했다. 자식도 성적 올리는 것과 최신 전자기기 취득을 교환으로 부모와 거래하는데 능숙하다. 부모는 자녀에게 엄친아, 엄마 친구의 아들을 본받으라고 잔소리 한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내 친구 엄마처럼 해준 것도 없으면서 그런 소리 할 자격도 없다고 반발한다.
조금 의식 있는 불신자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결혼의 공식이 1+1=1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크리스천 상담가들도 그렇게 되라고 권하면서 그럴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컨대 여자는 감성적이라 남편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목적이자 기쁨인 반면에, 남자는 이성적이라 아내의 말에 기승전결이 없고 핵심주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여긴다고 한다. 둘이 계속 그러면 대화 부족 내지 실종이 되니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함께 공감반응을 하며 들어주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의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부부세미나에서 항상 강조하는 내용이다.
옳은 이야기며 그러면 상당한 효과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 그런 원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의지적으로 몇 번 노력하여 성공할 때도 있지만 문제는 지속적으로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가정을 화목하게 꾸려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갈수록 상황은 더 나빠진다.
거의 모든 부부가 같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밖에 안 된다는 증거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 자기가 최고이며 하나님보다 우위에 있다. 예수 믿은 후에도 그런 본성은 남아 있다. 부부가 서로 자기가 낫다거나 최소한 자기중심으로만 판단한다. 자식마저 부모를 대할 때에 그렇다.
둘 다 자기는 끝까지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남아 있고 싶다는 상태에서 1+1=1 되는 것은 평생을 노력해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부부생활에 관해 영국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신혼여행 가는 3일 간만 서로 사랑하고, 그 여행에서 상대에게서 연애할 때와 다른 점을 발견하고는 3주간 서로 탐색한다고 한다. 그리고 상대를 자기 취향으로 뜯어 고치려고 3년간 싸우지만 결국 서로 모두 실패하고 30년간 포기하고 사는 것이라고 결혼을 풍자했다. 이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신자 또한 1+1=1을 목표로 하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다.
둘이 한 몸이 된다는 참 뜻은?
둘이 한 몸이 된다는 하나님의 공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둘이 합쳐 1이 되어야 하므로 각각은 0.5일 수밖에 없다. 결혼은 그래서 0.5+0.5=1이어야 한다. 혹시라도 남편이 0.7 아내가 0.3이라고 착각하면 연합이 불가능하며 아예 동등하지도 않다. 남편과 아내가 각자와 하나님 앞에서 0.5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철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물론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선 독립된 인격체 1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부부관계에서만은 일반 인간관계와 전혀 달라야 한다. 각자가 너무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무능하고 무지하기에 나머지 0.5가 없으면 항상 그런 상태에 머물고 그 0.5가 보태져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 부부여야 한다.
옛날에는 실제로 결혼하지 않으면 완전한 성인 취급을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만 하면 아무리 나이 많은 싱글에게라도 반말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인생의 깊고 풍성한 맛을 모른다고 간주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 결혼이란 자기 나머지 반쪽, 아담이 고백한 그대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을 찾아서 결합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반쪽을 하나님이 예비해서 붙여 주신 것이다.
부부관계를 온전하게 이어 가려면 나머지 반쪽으로 인해서 둘 다 온전해져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래야 한다. 단순히 서로를 다르다고 인정하면서 양보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다르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고 완전한 하나가 되려면 반드시 달라야 한다. 또 그래야만 하나님으로부터 0.5가 아닌 1의 완전한 은혜와 생명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부족한 존재다. 그 부족을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음을 실감한 자가 신자다. 하나님은 그 부족한 부분을 함께 당신을 믿고 따르는 배우자로 하여금 현실적 실제적으로 보완하여 충족시키려고 결혼 제도를 창설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상황은 최초 인간들이 죄로 타락하기 전이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는 온전한 교제를 하면서 부족하지 않은 독립된 인격체였다. 그분만을 주인으로 모셨다. 그럼에도 인간끼리는 창조 당시부터 서로 부족한 존재였다. 남자나 여자나 혼자서는, 또 같은 동성끼리는 절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었다. 요컨대 결혼하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 부부는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려고 조종 영향을 끼쳐선 안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까 그냥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없다면 인생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오묘하고 풍성하며 거룩한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도 알지도 못한다.
신자의 결혼은 정말로 배우자 때문에 한 인간으로써, 신자로써 아름답게 성숙해져 가는 것이다. 서로 상대에게 나머지 0.5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최고의 소망이 된다. 그러니까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다(25절) 또 서로로 인해 자라가니까 나이가 들수록 신자 부부의 사랑은 더 늘어나는 것이다.
가정에서 천국을 실현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 결혼하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오해는 마셔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계획이 있다면 독신의 은사를 줄 수 있다. 또 모든 여건상 혼자 살아야만 하거나 태어나면서부터 육신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자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거나 그런 상태로 허락했다면 그에 합당한 당신의 은혜를 반드시 베푼다.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뜻은 반드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 당신의 나라를 세우라는 것이다. 그에 가장 적합한, 아니 유일한 방안은 부부가 0.5+0.5=1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배우자와 다시 결혼하겠는지 묻는다. 환생이 없으니 아예 불합리한 질문이다. 신자에겐 질문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배우자가 없다면 단순히 허전하고 외로운 차원을 넘어서 아예 무능하다 못해 불구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을 수 없다고 절감하는지 물어야 한다.
요컨대 지금의 아내와 남편과 함께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둘이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하느냐가 아니다. 상대가 있음으로 해서 없을 때보다 훨씬 더 깊고도 선하며 아름다운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가 충만해지고 있는가? 또 그런 충만함에 자녀들도 동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체험하고 있는가?
둘이 한 몸이 되는 0.5+0.5=1의 공식은 부부가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내가 눌리고 힘들 때에 제일 먼저 배우자를 찾고 상대의 0.5로 나를 채울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배우자를 찾기 이전에 내가 상대의 0.5가 되어주는 것이 결혼생활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가장 큰 기쁨이요 보람이요 가치가 되어야 한다.
그런 부부는 자연히 하나님 앞에도 손잡고 기도하며 같은 말씀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서로를 탓하는 blame game 은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겸손해지며 하나님 앞에선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가정에 성령의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이며 그분의 나라는 날로 확고히 서게 되며 주위에도 누룩처럼 번져나가고, 최소한 자식을 통해 승계될 것이다.
너무나 요원한(?) 이야기
지금 도무지 비현실적이라 실감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솔직히 제가 설교를 하면서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저부터도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자기를 앞세우는 본성이 너무나 끈질기고도 교묘하게 우리를 붙들고 있다. 바로 그래서 교회에서 그 본성을 죽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배워서 날마다 새롭게 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다른 말로 0.5+0.5가 1이 되는 사랑을 최소한 교회 안에서부터라도 실행해야 한다. 모든 지체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한다. 목사와 장로가 만나면 0.5+0.5=1이 되어야 한다. 상대가 없으면 장로는 물론 목사의 직분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이는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주제다.
예컨대 교회 멤버가 목사를 포함해 모두 100명이라고 치자. 그들이 오직 예수님만을 머리로 모시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럼 각자가 1/100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성도들 사이가 그래야 한다. 그 말은 당연히 목사도 포함이다. 교회 안에선 모두가 1/100의 위치, 신분, 자격, 능력을 가졌을 뿐이다. 단 하나의 1/100이 없어지면 부족한 정도를 넘어 불구인 셈이다.
그러나 실정은 어떠한가? 일반 신자들끼리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목사는 백배의 자격 능력 권세를 가진 양 착각 행세하고 있다. 천 명의 교회면 목사는 천배, 만 명의 교회는 만 배가 된다. 성도들도 그런 착각을 부추기고 있다. 만 명 출석하는 교회라면 건물과 프로그램도 그에 걸맞아야 한다고 여긴다. 우리 교회쯤 되면 목사가 미국에서 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영어로 설교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쇼윈도 목사가 득세하고 그에 물든 쇼윈도 교인들만 넘쳐나고 있다. 만 명의 교회로 성장했다면 어쨌든 하나님의 큰 은혜와 역사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럴수록 모두가 하나님 앞에 똑같이 1/10,000의 자격으로 만 배로 겸손해져야 한다. 그 일을 목사가 앞장서서 본을 보여야 한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세상에서 당신의 이름과 권세와 명예를 앞세운 적이 없다. 불치병을 낫게 해주고도 비밀에 붙이라고 했다. 세리, 죄인, 창기, 불구자, 귀신 들린 자 등 모두에게 한 결 같은 사랑으로 그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교제했다. 매국노로 인간 취급도 못 받던 삭개오의 집에 유숙했다. 제자들의 발을 그들 앞에 무릎 꿇고 손수 씻기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후에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 하자 도망쳤다.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죄인과 동등한 위치에까지 자신을 비하하셨다. 제자들에게 높아지려면 낮아지라고 가르친 것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쉽게 말해 주님은 수십 억분의 1로 낮아진 것이다. 인류 전 세대의 구원하실 백성들의 숫자를 감당할 수 있는 낮아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를 완전히 없애는 죽음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셨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 십자가 은혜로 다시 살 수 있는 것이다. 모세도 자기를 저주하더라도 우상숭배의 죄에 빠진 동족들을 살려달라고 간구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약 이백만 명이었는데 단지 그들 대표로서 그는 이백만 분의 일로 자기를 낮춘 것이다. 자기가 저주받더라도 그렇게 해달라고 했으니 그도 자기를 완전히 없애는 자리까지 내려갔다.
세상 멸망을 책임질 자는?
지난주에 신자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이 땅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지 않으면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신자들에게 사람의 창조 목적인 돕는 배필 즉, 인간끼리의 온전한 연합 0.5+0.5=1에 대해 정확히 가르쳐야 할 책임은 목사에게 있다.
그런데도 상당수의 목사들이 교인 숫자에 비례해서 자기 혼자만의 권세를 늘리고 있다. 신자들도 그들의 본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능력만 빌려 세상에서 권세, 재물, 이름 높이는데 믿음이 동원된다. 결국 그런 목사들이 세상을 절망으로 치닫게 하는 셈이다.
인간끼리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1+1=2의 연합 원리는 오히려 세상에 갈등과 분쟁만 조장한다. 또 1+1=1의 공식은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로워 보여도 인간의 본성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증명하듯이 문화나 종교 전쟁이 불가피해진다.
너무나 슬프고도 우습게도 교회는 세상에서 통하고 노력하는 연합의 이 두 원리조차 실행하지 않는다. 목사만 권세를 독점하는 정말로 기묘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세상 멸망의 책임은 거짓 목사들에게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제일 먼저 임할 것이다.
사람이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는 즉, 0.5+0.5=1이 되는 하나님의 연합의 원리가 아니고는 세상에 소망이 없다. 하나님의 원리이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도다. 그런 연합을 가정 아니 부부 사이에서부터 실현하라는 것이 본문의 뜻이다. 정말로 지금의 배우자가 당신의 나머지 반쪽으로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7/26/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