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시험을 이기는 최선의 방안
창세기 강해 (22)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자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1-4)
가장 간교한 들짐승
기독교가 정의하는 죄의 본질은 도덕적 잘못 이전에 하나님을 부인 거역하는 것이다. 특별히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영역 밖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무관하게 스스로 인생을 끌고나갈 수 있다는 차원으로 그치지 않는다. 사탄의 농간과 조종 아래 있게 된다는데 죄의 심각성이 있다.
불신자로선 분명히 사탄이 싫고 따르길 소원했던 적은 더더욱 없다. 사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판국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정한 독선적 교리라고 반발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반발하는 것 자체가 바로 사탄의 노예가 된 증거다. 기독교를 잘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비방한 탓이 아니다.
자기를 세상의 최고 중심에 두고서 자기 뜻대로 인생을 살겠다고 고집한 때문인데 사탄이 바로 그렇게 만들었다. 사탄의 유일하고 절대적 목표는 사람으로 창조주 참 하나님을 외면케 하는 것이다. 자기를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더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수 있다고 자부심만 고취시킨다. 그럼 자동적으로 하나님도 무시하고 그 반대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3장 전반부에도 사탄은 최초 인간 부부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주고는 자기는 뒷전으로 빠져버렸다. 그런데 그 과정이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동시에 너무나 교묘하다. 사탄이 흉악하고 추한 실체를 보이면 어떤 인간도 넘어갈 리 없다. 항상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는 거짓의 아비다. 귀신처럼 무서운 모습으로 출현하는 것은 모든 위장과 거짓이 통하지 않을 때에 최후의 수단으로 겁을 주어 강제적으로 노예를 삼으려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사탄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을 동원했다.(1절) ‘간교’라는 단어가 교활하고 음흉하다는 부정적 의미로 주로 사용되지만 재치 있고 영리하다는 긍정적 의미도 있다. 예수님도 제자를 전도여행에 내보내면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고 말했지 않는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진리를 뒤집으려면 사탄도 세상 최고수준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지금은 아직 죄가 들어오기 전의 상태다. 아담과 이브 부부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으니 동산의 모든 동식물과도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아가 그들이 들짐승의 이름을 붙여주었다.(창2:19) 뱀이 가장 지혜롭다고 아담과 이브가 인정한 것이다. 만약에 사탄이 소나 돼지를 사용했다면 이브가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사탄의 속임수가 얼마나 정미한지 짐작할 수 있는가? 이 때 하나님과 함께 이름을 지었으니까 어쩌면 하나님이 이미 뱀에 대해 조심하라고 힌트를 주었는데도 인간이 귀담아 안 들었을지도 모른다.
죄의 근원과 책임은?
본문을 살피기 전에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할 신학적 과제가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근원과 책임이 사탄인가 아닌가이다. 사탄은 말씀드린 대로 인간을 속이기만 하고 뒤로 물러났다. 인간사회에서 속인 자도 잘못했지만 속은 자의 잘못이 더 크고 최종 책임을 져야 한다. 상업계약서에 애매모호한 사항을 아주 작은 글씨로 귀퉁이에 적어 놓고는 책임을 면제하려 한다. 그 글이 아무리 작아도 읽지 못한 소비자에게 책임이 있지 않는가?
사탄도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일종의 그런 작전을 구사했다.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온 시발점과 경로가 사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죄의 근원과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죄의 부작용, 폐해, 형벌은 인간이 져야 한다. 사탄은 처음부터 끝까지 흑암의 세력 그 자체다. 최후의 심판 때까지 인간을 유혹하는 대적으로 남을 것이다. 하나님도 그 때까지 이 땅의 공중권세를 잡고 인간을 미혹하도록 허락해 놓았다. 계속해서 죄의 통로이자, 인간 특별히 신자를 넘어트리는 것이 사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다.
그럼 그 모든 여건을 조성하고 허락하신 하나님의 책임인가? 아버지가 고등학교 3학년 아들더러 주중에는 친구들 만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고 주말에는 신나게 자유롭게 놀아도 된다고 명령했다 치자. 아들이 주중에 몰래 나쁜 친구들 어울리느라 성적이 떨어지고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그럼 나쁜 친구들 만나는 것을 막아주지 않은 아버지 책임인가? 결코 아니다.
동산의 다른 모든 과일은 다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만 금지했다. 만약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지만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아버지가 주중에 놀지 말라고 명령한 것도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 들어가라는 뜻이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 당신의 품 안에만 있으면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겠다는 뜻이다.
선악과를 먹는 것 즉, 과일 자체가 죽음으로 이끄는 독약이 아니었다. 실제로 먹고도 바로 죽지 않았다. 부모 말을 듣지 않아서 대학 입시에 실패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분의 모든 사랑에서 끊어질 뿐이다. 정녕 죽는다고 한 것도 그러니까 제발 거역하지 말라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부모가 내 말 안 들으면 반드시 대학 떨어진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제발 공부 열심히 하라는 강조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아들은 당장에 대학생처럼 즉, 성인 흉내를 내고 싶어서 술 담배를 하고 나이트클럽에서 밤새 변장을 해서 놀다가 그 인생의 향방이 정반대로 흐른다. 성실하게 부모 말씀 듣고 대학입학하면 여학생과 소개팅도 하고 동아리 활동으로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 부모가 주중에는 절대 놀지 말라는 것이 부모의 욕심이 아니다. 오직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란 것인데도 자식이 제 발로 걷어찬 것이다. 책임은 전적으로 자식에게 있고 그 모든 피해도 자기가 감당해야 한다.
죄는 사탄도 하나님도 책임질 일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도 아니다. 아무리 자식이 공부 열심히 하기를 바라도 부모가 일주일 내내 방에 가둬놓고 외출 금지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인간이 타락할 줄을 아시고도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기꺼이 당신을 찾고 감사함으로 당신의 은혜를 누리길 원했다. 그렇지 않고 강제로 주는 은혜라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은혜가 참 은혜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사탄의 교묘한 노림수
사탄은 우주 전체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지혜롭다. 지금도 공중권세를 잡고 우리를 넘어트리려 우는 사자처럼 문밖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본문에서 최초로 인간을 시험에 빠트리는 과정을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진정한 사기꾼은 몇 년씩이나 준비한다. 온갖 그럴싸한 수단을 동원하기에 쉽게 속아 넘어 간다. 평신도들도 분명히 잘못된 줄 아는 이단에 저명한 신학자 목사들이 넘어가지 않는가?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이단의 꾐이,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이 워낙 간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담과 이브가 이미 지혜롭다고 인정한 뱀을 동원했다. 사탄은 처음에는 항상 99%의 진리를 내세운다. 나머지 1%의 비진리로 현혹시킨다. 계약서에 깨알 글씨로 구석에 숨겨놓으니 잘못 보는 꼴과 같다. 그 1%의 잘못은 어지간해선 찾기 힘들다. 지금 사탄의 속임수를 알려면 100% 온전한 하나님의 진리부터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악과 금령(창2:17,18)에는 네 가지 절대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모든’ 실과를 먹을 수 있다. 둘째 인간 ‘임의’로 먹을 수 있다. 셋째 먹지 말아야 할 것은 선악과 ‘오직 하나’다. 넷째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을 그대로 옮겨오되 부정적 의미만 강조했다. 이브에게 아주 간단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하나님이 틀렸고 잘못하고 있으니 따르지 말고 대신 자기 말을 들으라고 설명 권유하지 않았다.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권투로 치면 잽처럼 아주 무심결에 가볍게 질문 하나를 툭 던졌다.
그 때의 아담과 이브의 영성은 어떠했는가?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로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라 따져볼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냥 말씀 그대로 순전하게 지키고 있었다. 거기에 사탄이 나타나 “과연 그것이 100%의 절대적 진리인지 일단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지 않겠니?”라고 말한 것이다.
참으로 먹지 말라고 했느냐는 부정의문문에는 두 가지의미가 있다. 그 명령이 진리인가, 비진리인가? 또 그렇게 명한 자의 진심을 믿을 수 있는가, 아니면 뭔가 숨겨진 다른 의도는 없는가? 하나님 그분을 부정하라, 따르지 말라, 반대하라고 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라는 정도였다. 잔잔한 호수에 아주 작은 조약돌을 그것도 가장 자리에 아주 살짝 퐁당 던진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 말씀의 진리성과 그분 마음의 순수성에 대해 의심의 파도가 이브의 심령에 급격하게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사탄의 계산대로 반응하는 이브
제 삼자가 객관적 입장에서 사탄의 질문을 따져보면 사실은 “너희가 혹시 잘못 들은 것 아니니?”의 뜻일 뿐이다. 그런데도 막상 이브에겐 하나님이 거짓말 했다, 우리에게 잘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의 추가 기울어졌다. 사탄의 그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사탄의 꾐에 거의 넘어간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일단 그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이라고 부정해야 함에도 그 점을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동산 나무의 실과는 먹을 수 있으되”라고 대답했다. 하나님 명령의 네 가지 절대적 요소의 첫째 둘째가 실종되었다. 모든 나무의 과실을 임의로 먹어도 된다고 했다. ‘모든’과 ‘임의’라는 핵심적 두 단어가 없어졌다. 이는 엄청난 생각의 변화다. 두 가지 절대적 전제가 상대적 가능성으로 변모했다. 하나님이 99.99% 이상의 자유를 부여했는데도 극히 일부를 마지못해 승낙한 것처럼 되었다.
거기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한다. 만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한 진리에 인간의 뜻을 보탰다. 하나님이 선악과 하나만 먹지 말라는 것이 부정의 뜻이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 품 안에 있어야 참 생명이자 100% 완전한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브에게는 그런 긍정적 의미에서조차 원망과 불신의 싹이 튼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바보처럼 만져보지도 않았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이 만지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독선적 폭군으로 오해 내지 지레짐작하게 되었다. 하나만 먹지 말라는 셋째 절대적 요소를 자기 임의로 변개시켜 버렸다. 자유의지를 벌써 오용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말씀하셨다고 대답했다. 넷째 절대적 전제인 “정녕 죽는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100% 확정된 진리가 단순히 여러 대체 방안 중의 하나로 둔갑했다. 선악과가 다른 모든 과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럼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을 수도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은 무시되고 여러 신들, 그것도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뿐 아니라, 이왕이면 여러 종교의 가르침 중에 자기에게 적합한 것들 다 골라 적용하면 된다는 식이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설마 나를 죽이겠어? 그냥 떠보느라 하는 말이겠지? 당신께 무조건 복종하라고 겁주는 것이야. 진짜 그것이 주기 아까워서 먹지 말라고 했을 수 있어.”로 점차 생각이 바뀌어 나간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정말 이럴 수 있는가 원망으로 변했다.
너무나 간교한 사탄이 이브의 이런 생각의 흐름을 놓칠 리가 만무하다. 이미 반 이상, 아니 99% 자기에게 넘어온 것을 꿰뚫어 보았다. 곧바로 어떻게 맞장구쳐주었는가? 선악과를 먹더라도 결코 죽지 않는다. 100%의 진리가 100%의 거짓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순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인간을 미워하고 그래서 뭔가 숨겨놓은 위선적 거짓된 마음으로 인식되었다. 그 다음에는 사탄에겐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아담과 이브는 일사천리로 사탄이 파놓은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탄이 고작 행한 일
사탄이 최초 인간에게 행한 일은 무엇인가? 아주 간단했다. 고작 하나님의 말씀에서 토씨 하나, 단어 하나 바꾼 것뿐이다. 잘 생각해 봐! 혹시 하나님에게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을까? 설명하지도 부추기지도 않았다. 네 스스로 따져보라고 했다.
바꿔 말해 “진리를 액면 그대로 믿지 말라. 문자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말고 그 숨은 뜻을 찾아봐! 인간이 에덴동산 전체에서 최고이고 네가 지금 다스리고 있지 않느냐? 너처럼 똑똑한 존재가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니?”였다. 인간이 사탄은 물론 하나님 그분보다 더 지혜롭다고 칭찬해준 꼴이다.
지금도 사탄이 신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똑같다. 전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을 100%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지 다시 한 번만 생각해봐. 네 주위 여건과 일어나는 사건을 잘 돌아봐! 그분에게 네 전부를 걸 수 있겠는지 판단해!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딱 한 가지 고질적인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지 않느냐? 심지어 더 큰 고난을 겹치게 하지 않느냐?
너에게 사치하고 화려하게 살 생각은 추호도 없지 않느냐? 신자답게 검소하게 선하게 살려는데도 그렇지 않느냐? 이것만 해결되면 하나님께 더 잘 순종하고 나이 들어 은퇴한 후에 해외선교도 갈려고 작정했는데 지금껏 이 간단한 고난에서도 구원해주지 않지 않느냐? 선악과 하나만은 절대 먹지 말라고 했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99% 믿을 수 있다. 그런데 1% 부족한 것 같지 않니? 또 1% 부족한 하나님이라면 과연 진짜 하나님이겠니?
하나님은 인간으로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는 직분을 맡겼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단순하고 쉽고 분명한 진리로 알게 해야만 한다. 어렵게 꼬아서 혼란스럽게 만들어 곰곰이 생각하도록 해선 안 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얼마든지 가능하며 또 신자로 그럴 수 있도록 성령까지 내주시켜 주셨다.
선악과 금령은 너무나 분명하다. 의도적으로 네 가지 절대적 요소를 포함시켜 인간에게 혼동하지 않도록 했다. 네 번이나 진짜라고 강조한 셈이다. 말씀 그대로 하나님만 따르면 정녕 생명이고 따르지 않으면 정녕 죽음이다. 영어로 말해서 죄송하지만 “That’s it.”이었다. 더 보태고 뺄 것이라곤 전혀 없다. 숨은 뜻 찾기도 아니다. 타협, 조종, 수정할 여지도 전무하다.
종종 비유하는 대로 선악과 금령은 복잡한 쇼핑몰에서 어린 아기를 개목걸이 하듯이 엄마에게 줄로 묶어 놓는 것이다. 아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이다. 아기는 그 줄에 묶여 있어야 정녕 살 수 있다. 스스로 풀고 혼자 설치는 순간 곧바로 정녕 죽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뜻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부모님이다. 자식에게 나쁜 것을 주려는 부모는 인간 세상에도 없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가 한둘이라 노후 은퇴 자금으로 모아 놓은 돈까지 다 도와준다. 당신들은 정작 정부 보호시설에서 쓸쓸이 여생을 보내면서까지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바로 그것이다. 아니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사랑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전부와 맞바꾼 것이다. 하나님에게 신자는 세상 어느 것보다 가장 귀하고 소중하다. 오직 그 한명 뿐인 것처럼 당신의 모든 것을 베풀어서 사랑하신다.
십자가는 바로 그 사랑의 절정이다. 하나님의 순전한 진심을 제발 알아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면 진짜 죽음인 것이 절대적 진리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선악과 금령의 뜻과 하나 다를 것 없다. 다른 모든 죄는 다 용서해준다. 그러나 십자가의 이 사랑을 거부하는 것 즉, 하나님의 통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만큼은 용서 못해준다. 아니 끝까지 그 밖에서 지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심판이다. 정확히 말해 사탄의 종이 된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사탄은 언제 어디서나 끈질기고도 교묘한 유혹의 덫을 친다. 아주 그럴싸하고 합리적이다. 그 자체로 의롭기까지 여겨진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따져보라고 한다. 한국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듯이 어감만 아주 살짝 비틀어서 다시 생각해보라고 한다. 하나님이 1% 부족하지 않니?
그럼 이런 너무나 올바른 것 같은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확실한 방도는 하나뿐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뿐이다. 현실의 고난이 늘어나고 하나님마저 침묵하여 의심 불만이 들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단 1%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는지 생각해보라. 십자가를 따져서 그것이 가짜, 부족, 의심할 만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사탄의 교묘하고 끈질긴 유혹뿐 아니라, 현실의 고난과 하나님 그분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예수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 은혜와 권능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것뿐이다.
8/23/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