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문을 항상 빼곡 열어놓는 불신자들

창세기 강해 (26)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8-10)

 

 

벗은 몸인가 벗은 행위인가?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 금령을 어겼다. 그 첫째 결과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부끄러움이 생겼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반드시 수치심이 생긴다고 가르친다. 이는 틀림없는 진리다. 그러나 창세기 1-3장이 계시하는 내용과 완전하게는 부합되지 않는다. 죄를 지으면 수치심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양심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면 누구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또 죄에 내포된 추악한 죄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성경은 7절에서 벗은 몸인 줄 알게 된 후에 부끄러워졌다고 명시하고 있다. 자기 존재 전체가 오염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오늘날의 모든 인간도 추악한 행동 여부와는 무관하게 태생적으로 자신을 치장하려는 본성이 있다. 남들에게 자기 실체를 정직하게 드러내지 않고 감추려고만 든다. 심지어 부부사이와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속인다.

 

따라서 벗은 몸 즉, 죄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의 본질인 셈이다. 벗은 몸으로 행하니까 벗은 행위 즉, 부끄러운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따라 나오는 또 다른 추한 행위일 뿐이다. 벗은 몸, 죄인으로 태어나는 까닭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거역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반대편에 선 것인데 성경이 마귀의 자식이라고 선포하는 까닭이다. 마귀 쪽에 위치해 마귀에게 미혹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불신자들은 이런 영적 원리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다. 그래서 평생을 수고해봐야 사실은 자기를 감추려는 헛된 몸부림에 불과하다. 감추는 방식이 꼭 재물, 권력, 명예 같은 세속적인 수단이 아닐 수도 있다. 희생, 수고, 봉사 등의 선행의 양상을 띨 수 있다.

 

그 행위만 떼서 보면 분명 의롭다. 그러나 불완전하고 자기중심적 존재로 타락한 상태에서 나오는 행위인지라 그 동기와 의도가 결코 순전한 선이 아니다. 선행 안에 의외로 자기 자랑이나 교만이 훨씬 더 교묘한 양상으로 더 많이 포함되어 있다. 마귀 쪽에 위치하다보니 항상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하는 사탄의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그럼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완전하고 유일하며 절대적 선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공급하는 선을 받지 않고는 어떤 인간도 아무리 스스로 노력해도 그 자신의 자격과 공로로 자기의 벗었음을 감출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아무리 칭송을 받는 자라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 이미 영적으로 우매해졌는데 그들 사이의 평가는 절대적이지도 않으며 아무 의미가 없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들이지 않는가? 그들은 구제와 금식과 기도와 십일조 등에 정말로 열심이었다. 사람들로부터 의롭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이 위선이요 가식이라고 통렬하게 꾸짖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완악하게 굴자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까지 하셨다.

 

타락한 둘째 결과

 

본문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독사의 자식이 된 즉, 죄로 오염된 둘째 결과를 말하고 있다. 우선 첫째 결과로 생긴 부끄러움을 인간이 스스로 만든 무화과나무 잎 치마로 가리려다 완전히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그 낯을 피해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다고(8절) 한다.

 

성경기록이 참 세밀하지 않는가? 나뭇잎으로 안 가려지니까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이다. 그린베레 특공대처럼 큰 나무 기둥 뒤에 몸을 바짝 붙였을 것이다. 또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피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혼자말로 중얼중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찾는 기척을 눈치 챘거나, 이미 여러 번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불렀음에도 그저 숨기만 했다는 뜻이다.

 

이는 죄의 본성이 얼마나 추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과일을 먹고 자기들이 벗은 몸인 줄 알고 부끄러워졌다. 가려보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럼 이실직고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되지 않는가?

 

아빠가 가장 아끼는 무선조종 비행기를 책상 위에 두고 아이더러 절대 만지지 말라고 명했다. 그런데 아빠가 외출한 사이에 갖고 놀다 부러뜨려버렸다. 테이프나 접착제로 살짝 붙여서 제자리에 갖다놓고 아무 일 없는 양 시치미 뗀다고 아빠가 모를 리 없다. 아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아빠는 벌을 주기는커녕 기꺼이 용서해 주고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숨기고 잡아떼면 당연히 더 혼나지 않겠는가?

 

죄란 감춘다고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이미 본인은 오염되고 주위에 폐해는 발생했다. 설령 형벌과 부작용 없이 넘어갈 수 있다 해도 거짓말을 추가한 죄가 보태졌다. 죄는 죄를 확대재생산하는 특성이 있다.

 

또 아무 형벌 없이 자꾸 감추다보면 죄가 죄라는 인식이 둔해진다. 반면에 죄가 주는 스릴과 쾌감은 반대로 늘어난다. 쾌감이란 절대로 만족을 모른다.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한다. 바늘 도독이 소 도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성경은 모든 악은 모양이라도 멀리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느낀 죽음의 감정

 

그런데 지금 아담과 이브가 숨은 까닭이 하나님의 형벌이 두려웠기 때문만은 아님을 간과해선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으니 당연히 형벌이 따를 것도 각오했고 불안했음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하나님이 “정녕 죽는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현재 단계의 아담과 이브로선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이 호흡과 맥박이 중지되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며 아무 활동을 못한다고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해도 실감을 하지 못한다. 어린아이에게 가족이 죽은 의미를 설명해주어도 모르듯이 말이다. 아이는 언제 깨닫는가? 친구나 가족 이상으로 아끼며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야 비로소 알게 된다.

 

죽어 있는 상태에 대해 생물학적으로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강아지는 학교에서 귀가하면 꼬리 흔들면 뛰어와 안겼다. 어디를 가도 졸졸 따라다녔고 밤에는 한 침대에서 같이 누워 잤다. 도저히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종식되니까 비로소 아쉬움과 애통함이 밀려오고 큰 슬픔을 느끼게 된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의 형벌에 대해 이해한 의미는 아주 특이했을 것이다. 우선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선 그들도 아직은 무지했을 것이다. 어쩌면 에덴동산의 다른 동물은 물론 식물도 죽은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육체적 죽음의 비참함을 알게 되면 선악과 금령은 겁을 주는 공포의 독선이 되지 않겠는가? 자발적이고도 기꺼운 순종은 어렵다.

 

그들에게 호흡이 가빠지거나 눈이 흐려지는 것 같은 육체적 변화는 없었다. 영적의미이긴 해도 성경은 오히려 눈이 밝아졌다고 한다. 하나님이 정녕 죽는다고 하신 말씀도 강아지와 어린이의 관계에 비춰 설명한 의미와 같다. 하나님 당신과 인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의 관계가 종식된다면 바로 그것이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뜻이었다.

 

아담과 이브는 자기들이 벗은 몸인 줄 알게 되자 생전 처음 겪는 너무나 이상한 체험을 했다. 자신들이 찝찝한 정도를 넘어서 완전히 더러워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선하고 기쁜 감정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자기가 자기를 봐도, 또 서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부끄러웠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하는 죽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감추었더니 그런 감정이 조금은 줄어들어서 그것으로 끝인 양 여겼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 마음속에서 이미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스스로 에덴동산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과 하나님과 동등 내지 우월해보겠다는 탐욕은 전혀 버리지 않았다. 여전히 그것 때문에 영혼이 오염되어 있었다. 인간이 절대 품어서는 안 되는 그 탐욕이 모든 생각을 지배했다. 그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여 말하고 행동했다. 비록 이전과는 달리 많이 부족하고 불편해도 그냥 그 정도로 만족하고 지내려 했다. 스스로 나뭇잎 치마를 만들어 입고 처음 계획한 대로 에덴에 인간의 왕국을 건설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런 와중에 하나님이 자기들을 찾는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부끄러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정이 또 생겼다. 두려움과 공포였다. 조금 전까지의 부끄러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그 강도가 세었다. 오금이 저려 도무지 헤어날 수 없었다. 인간 왕국을 건설할 기력과 의욕마저 다 꺾이는 것 같았다. 그 두려움의 감정이 주는 부작용이 너무 심해 나뭇잎 치마로는 부족해서 이제 나무 사이에 꽁꽁 숨은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숨바꼭질

 

그들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대답했는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10절). “내가 범죄 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두려워서 피했나이다.”라고 하지 않았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들은 형벌의 성격, 범위, 강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몰랐다. 벗은 몸인 줄 알게 되었고 그 자체가 형벌 즉, 죽음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죄를 지은 두 번째 결과인 두려움도 벗은 몸 때문에 생긴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자신의 불완전함, 뭔가 모르지만 본래의 아름답고 선한 형상이 왜곡 파괴되었음을 인식한 것이다. 또 그 상태에서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으니 더 두려워진 것이다. 인간 사이의 수치심은 나뭇잎 치마로 감추려 했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나무사이에 숨어서 해결하려 했으나 어느 쪽도 아무리 해도 불가능했다.

 

하나님 또한 그들을 찾으면서 어떻게 불렀는가? “아담아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렇게 물었다면 하나님도 선악과 금령을 어긴 행위에 대한 벌칙을 주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 된다. 대신에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담과 이브가 그린베레처럼 얼굴에 숯 검댕을 칠하거나 나뭇가지로 온 몸을 덮는 위장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들을 못 찾을 리 없다. 아담과 이브가 숨어 있는 바로 그 자리 앞으로 오셨다. 어디 숨었는지 모르면 하나님도 아니다. 인간이 숨어 있다는 사실과 그 장소까지 빤히 알고 있었다.

 

아빠와 아이가 숨바꼭질을 하면 아이는 꼭 옷장 속에 숨지만 아빠는 쉽게 알아챈다. 인기척이 날 뿐 아니라 아이가 문을 완전히 닫으면 속이 캄캄해서 자기들이 더 무섭다. 또 아빠가 혹시 자기를 찾지 못하면 어쩌나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문을 빼곡 조금은 열어 놓는다. 아빠는 이미 다 알지만 어디 있는지 도무지 못 찾겠다고 큰 소리로 엄살을 부린다. 게임을 재미있게 하려는 뜻이다.

 

지금 에덴동산에서의 인간과 하나님의 숨바꼭질은 외적 모양새는 그와 비슷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게임에 재미를 더하려는 의도는 없다. 정말로 심각하고 중요한 의미만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네가 왜 숨느냐? 숨을 필요가 전혀 없지 않느냐? 제발 잘못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그냥 나오기만 해라.”

 

선악과를 따먹었어도...

 

하나님이 선악과만 먹지 말고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된다고 했다. 만약 정말로 선악과를 절대 먹지 못하게 하려했다면 아예 만들지 않으면 된다. 그럼에도 만들어서 동산 중앙에 두었다. 그 자체로 인간이 혹시 먹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한 것이다. 또 그런 사태가 벌어져도 인간이 먹었다고 정직하고 순전하게 고백하며 용서만 빌면 만사 오케이라는 뜻도 내포된 것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뜻은 너와 나의 친밀하고도 순전한 사랑의 관계에 한 치의 금이 가지 않게만 하라는 것이다. 단 그렇게 하고도 말하지 않고 숨긴다면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 없이 홀로서기를 시도한다면 정녕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자 기원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마음에서부터 모든 다른 가공할 죄들이 확대재생산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기 전에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뜻으로 지금 그들을 부른 것이다. 지금 너희가 뼈저리게 느끼는 부끄러움과 두려움 바로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그런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당신의 간절한 소망이라는 것이며, 그 소망의 결정체가 선악과인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그런 뜻으로 왜 말씀하지 않았느냐는 반발은 성립되지 않는다. 먹고 나서 회개하면 된다고 하면 아무 거리낌 없이 먹을 것이다. 또 그 회개에는 아무런 진정성이 없고 상투적 외식적인 회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당장에 먹느냐 안 먹느냐보다는 당신과 온전하고 선한 관계를 영원히 지속하자는 것이다.

 

만약에 금령을 어긴다면 지금처럼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휩싸여 절망적 상태에 빠져야만 한다. 그 후에 회개를 해야 참 회개가 된다. 하나님의 명령에 계시된 진리가 100% 완전하고도 영원한 선으로 다가온다. 앞으로는 절대로 그분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따른다. 그런 후에 교제하고 동행해야만 온전한 성장이 가능하다.

 

아담아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 더러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은 데는 진정으로 회개하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종교적 차원과는 다른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은 네가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왜 내 품을 떠났느냐? 네가 정녕 거(居)해야 할 곳은 내 사랑과 권능 안이다. 그럼 정녕 생명이다. 반면에 나를 떠나면 독립은커녕 사탄의 노예가 될 뿐이고 그것이 바로 정녕 죽음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지금 너희가 그 일부를 절감하고 있지 않느냐? 그곳에서 어서 나오라. 네가 이 땅의 주인이 되어서 너희 스스로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너희가 너희 입으로 스스로 인정했듯이 나를 떠나는 순간 너희는 곧바로 벗은 몸이 된다. 그 벗은 몸의 상태로는 평생을 가도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절대 해결 못한다.

 

지금 성경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범죄 한 후에 그 형벌이 두려워지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죄가 갖는 부작용으로 두려움이 더욱 가중되었거나, 개별적 특정 죄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인간이 갖는 더 큰 두려움은 그 이전에 자신의 부족하고 불완전한 벗은 몸, 특별히 영혼이 타락한 탓에 생래적인 것이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이 없는 불신자들의 실상은 그 태생적 두려움에서 헤어날 길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 질문을 했을 때는 틀림없이 온유한 사랑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아담과 이브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애틋한 심정이 담겼을 것이다. 이때에 곧바로 “하나님을 떠나니 벗은 몸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돌아가 이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고만 대답했어도 되었다. 선악과를 먹은 것, 먹고 나서 숨은 것, 치마를 스스로 만들어 입은 것 모두를 한 순간에 용서 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인간의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인간의 본성이 지금과 다르고 아담과 이브도 에덴에 남아 있었을 수 있다.

 

아빠가 아끼는 무선조종 비행기를 부숴버린 아이로선 아무리 해도 원상으로 복구할 재간이 없다. 그 벌이 두려워 며칠을 가출하여 친구 집과 동네 공원에서 먹지도 못하고 새우잠을 자다 견디다 못해 거지꼴로 집에 돌아갔다 치자. 부모가 먼저 맨발로 뛰어나와 너무나 기뻐할 것이며 돌아와 준 것 하나만으로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돌아온 둘째 아들 탕자의 비유가 바로 그 뜻이지 않는가? 또 그분의 십자가와 오늘의 본문과 나아가 선악과 금령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전부 그것이지 않는가?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청소년들이 10억만 준다면 10년간 감옥에 대신 가줄 용의가 있다는 자가 대다수라고 한다. 재물로 자기를 치장하려는 욕망이 중고등학생 때부터, 인생의 지혜와 가치관이 다 영글기 전부터 가득 찼다. 태생적으로 벗은 몸인 줄 그들도 아는 것이다. 젊은이나 어른이나 음악이 쿵쿵거리는 커피숍에 노트북을 들고 나와서 업무를 보거나 공부를 한다. 혼자 있는 것이 불안하거나 싫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려는 뜻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긴다. 최초 인간이 나뭇잎으로 서로를 가리고도 모자라 나무 사이에 숨은 이후로 모든 인간은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한다. 온전하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다. 사람이 제일 무서운 때는 밤중에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못 믿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무서워한다. 이런 비극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들었다. 다른 이와 사랑을 나눠야만 그 존재이유와 목적이 충족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이 본성이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 훼손 파괴되었다. 사람이 무섭고 싫어졌다. 그래서 아무 이야기를 다른 이와 나누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 속에 파묻히기를 좋아하는 이상한 습성이 생긴 것이다. 모든 인간이 태생적으로 벗은 몸이라는 확실한 증거다.

 

인간이 벗은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사람들이 교통법규의 범칙금이 무서워서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은 잠시다. 좌우를 살펴 언제든 위반한다. 그런 스릴을 즐기고 나중에는 습관이 되다 못해 그런 일이 잘한 짓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를 바보로 취급하는 것이 인간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벗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이 죄를 짓고 또 모든 문제가 파생한다고 선포한다. 그럼 그 해결책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뜻이지 않는가? 너희들을 내가 죽기까지 사랑하니 제발 나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절규이지 않는가?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살고 죽는 문제라는 뜻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빈 무덤의 부활로 그 점을 당신의 몸으로 실증해보였지 않는가?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그래서 모든 인간이 갖는 생래적인 더 큰 두려움이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는 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딤후1:7)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도, 정말로 사방이 완전히 막혀 출구 하나 없는 캄캄한 방에 갇혀 있어도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하고 있음을 알기에 두렵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고 감사하게 된 것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불신자들은 앞에서 예를 든 어린아이의 숨바꼭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혼자선 제가 제일 똑똑한 줄 착각해도 훤한 대낮에 군중 속에 파묻혀서도 도무지 생래적인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한다. 그래서 옷장 속에 숨었어도 빼곡 문을 살짝 열어두는 행태를 보인다. 스스로는 그런 점을 부인하고 아주 강한 척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수고와 노력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뜻이다. 다른 말로 궁극적이고 영원한 절대자 하나님을 만나려는 몸부림이다.

 

이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가? 단순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나오면 되는데 그러지 못한다. 마귀에게 미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그런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절실함, 갈급함을 우리는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그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또 그 해결책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자다.

 

신자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 품안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해야 한다. 말로서 교리를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큰 고난이 닥쳐도 평강을 잃지 않는 즉, 생래적인 두려움이 해소된 모습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점검해볼 질문이 하나 있다. 지금 과연 나는 어디에 거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더 이상 찾지 않는 아니 찾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확실히 되어 있는가?

 

9/2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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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않는 교회들 (창세기강해 #48-창4:16-22)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않는 교회들 창세기강해 (48)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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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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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 만큼 치사하고 사악했던 목사 (창세기강해#47-창4:15&23,24)

라멕 만큼 치사하고 사악했던 목사 창세기 강해 (4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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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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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강해 #46 - 창4:9-15)

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 강해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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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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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강해#45 - 창4:9-12)

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강해 (4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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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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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소원과 죄의 절제 (창세기강해 #44 - 창4:7)

죄의 소원과 절제 창세기 강해 (44)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7) 죄에 대한 성경 최초의 진술 인간이 에덴 밖에 저지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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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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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진짜 이유 (창세기강해 #43 - 창4:2-8) [1]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이유 창세기 강해 (43)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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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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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은 아벨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였다. (창세기강해 #42 - 창4:2-8)

가인은 아벨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였다. 창세기 강해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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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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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 (창세기강해 #41 - 창 4:1) [1]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 창세기 강해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성경이 말하는 바는?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꼭 알아야만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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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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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과 그 대책 (창세기강해 #40 - 창3:4-7)

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과 그 대책 창세기 강해 (40)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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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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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신자들 (창세기강해 #39 - 창2:15-17)

지금도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신자들 창세기 강해 (39)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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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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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영생은 없었다.(창세기강해 #38 - 창3:22-24)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영생은 없었다. 창세기 강해 (3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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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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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진짜 이유 (창세기강해 #37-창3:22-24)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진짜 이유 창세기 강해(37)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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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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