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포세대의 유일한 해법
창세기 강해 (27)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1-13)
실종된 소망과 목전에 닥친 종말
현재 인류 앞에는 온갖 문제가 산적해 있다. 사회체계를 두고 이데올로기로 다투던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경제, 문화, 종교전쟁으로 유발된 새로운 냉전이 더 격렬하고도 인간생활에 전반적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거기다 자원고갈, 환경오염, 이상기후 때문에 생존마저 위협 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로 따져도 주변을 둘러보면 힘들지 않는 인생은 단 한 명도 없다. 따뜻한 사랑으로 충만한 가정은 눈 닦고 찾기 힘들다. 갈수록 인간관계는 피폐해져 간다. 한국의 청년들은 스스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라고 자조했다. 그것이 수년 전이었는데 단 몇 년 사이에 내 집 마련, 인간관계, 소망, 심지어 직장 얻는 것까지 포기한 7포 세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은 인간의 지성과 도덕성이 역사상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문명은 하루가 멀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반면에 정신세계의 황폐화는 최악이 되었다. 인류 전체로는 눈앞에 닥친 멸망을 걱정하는 종말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망을 이룰 수 없기에 소망을 갖는 자체가 어리석다고 여겨지는 지경까지 되었다.
놀랍게도 창조로는 짧게는 수천~수만 년, 진화로는 길게는 수백만 년이 흘렀음에도 인류는 본문의 최초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서 단 일보도 개선되지 않았다. 같거나 더 악화되었다. 인류는 절대로 진화하지 않고 도리어 퇴보하고 있는 중이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배제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했지만 무참히 실패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휩싸여 나무 사이에 꽁꽁 숨었다. 이 또한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그들의 지성, 능력, 열성, 의지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현대인보다 결코 그 수준이 낮지 않았다. 그 모두를 최고 수준으로 동원한 결과가 그랬다.
자기들 생각과 판단에는 분명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는데 막상 따먹자 정반대의 상태가 되었다. 육신과 안목의 정욕은 전혀 충족되지 않았다. 특별히 이생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는데 거꾸로 자랑의 정반대인 수치심만 잔뜩 생겼다. 부부간에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야말로 정녕 생명이 일순간에 정녕 죽음으로 바뀌었다.
자기부터 분리되는 죄
지금 단계에서 인간사회는 오직 두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사법제도는 물론 인간생활을 제약하는 어떤 규칙도 없었고 심지어 서로 간에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사이좋게 과일을 함께 나눠 먹었다. 상호 부끄럽고 두려워할 이유도 필요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둘은 과일을 먹자마자 자신들이 벗은 몸인 줄 동시에 자동적 순간적으로 절감했다.
자기가 자신을 봐도 부끄럽고 싫어서 부인하고 감추고 싶어졌다. 도무지 그 상태로는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무엇으로든 가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편이 아내 앞에, 아내가 남편 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설 수 없었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둘 다 비 맞은 생쥐처럼 덜덜 떨게 되어 나뭇잎으로라도 옷을 지어 입어야만 했다.
자기가 자신을 부인하고 싶다는 것은 행동하는 자신과 생각하는 자신이 다르다는 뜻이다. 자기 속에 자기가 최소 둘 이상이 된 것이다. 죄 이전의 자기 실체와 지금 죄 이후의 자기 실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 자신과도 분리된 것이다. 죄의 외적 결과인 수치심과 공포심의 원인은 바로 이 자신과의 분리 때문이라는 뜻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자 눈이 밝아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에 옷을 지어 입었다.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옷을 입고 있다 벗은 것이 아니다. 몸의 외적 상태는 하나 변함없이 똑같이 벗은 상태에서 자기들이 벗은 몸이라고 깨달았다.
그 전후에 바뀐 것은 오직 하나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발적 고의적으로 종식시킨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된 것이다. 그럼 그 분리가 있기 전에는 인간은 벗은 몸이 아니었고 입은 몸이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충만히 받아 누리고 있을 때는 입은 몸이요 이제 그것이 없어졌으니 벗은 몸이 된 것이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 된 것을 죄의 본질이자 죄의 모든 것이라고 선포한다. 또 그럼 필연적으로 자기가 자신과도 분리된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끝까지 외면 거역하는 불신자는 죽을 때까지 평생을 노력해도 자신과 분리 상태를 해결하지 못한다. 흔히 말하듯이 자아실현은커녕 발견도 못하고 평생을 보내게 된다. 자기 정체성이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자신의 분리를 바로 잡기는 아예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과연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왜 내가 이 땅에 존재케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아무리 피땀 흘려 수고해본들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한 것뿐이다. 또 그런 상태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죽을 때는 모두가 “인생은 원래 다 그런 것이야!”라는 자기 위로와 핑계밖에 댈 줄 모른다.
자신과 분리된 그 상태로 일생을 마치는데도 그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어도 구원에 초대해도 끝까지 외면 거부한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자신한다. 그럼 구원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그 사실조차 모르니 이 얼마나 불쌍한가?
아담에게 책임을 묻는 하나님
하나님이 인간이 당신을 부인하고 꽁꽁 숨은 이유와 배경을 모를 리 없다. 아담과 이브는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동산의 관리는 아예 뒷전이고 뭔가 어색하고 불안한 상태로 안절부절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바울이 이브는 아담의 뒤에 지음을 입었고 대신 먼저 꾐에 먼저 빠졌다(딤전2:13,14)고 지적했지 않는가? 그럼 이브에게 왜 그랬느냐 먼저 물었어야 하지 않는가?
성경은 남성우위 사상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남성의 우선적 책임을 확실하게 강조할 뿐이다. 아담을 부를 때에(9절) 사람이라는 보통명사의 뜻이었다고 확대해석할 이유는 없다. 본문의 11, 12절에 따르면 분명 남편 아담에게 먼저 질문한 것이다. 부부란 남녀가 하나님 앞에 동등한 자격과 신분과 특권으로 연합된 공동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가정을 이루라고 했다(창2:24). 하나님은 그 가정을 이끌 책임을 지는 영적 지도자로 남자를 세운 것이다.
사탄이 얼마나 간교하고 영악한가? 이성적인 아담은 두고 감성적인 이브부터 유혹했다. 아직은 아담이 이브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브 말이라면 그대로 들을 것이라는 것까지 계산에 넣은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추궁한 뜻은 네가 온전한 영적 통찰력으로 사탄의 흉계와 그 저의를 분별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브를 말렸어야지 왜 옆에서 수수방관 아니 동조했느냐는 것이다. 네 진짜 속내가 진작 하나님을 부인하고 싶었는데 참고 있다가 이브가 그러니까 옳다구나 적극 동참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그와 동시에 지난주 말씀 드린 대로 이 단계의 하나님으로선 아담이 잘못을 시인하기만 하면 용서해줄 태세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또 지금 있는 곳이 네가 있을 곳이 절대 아니니까 어서 빨리 내 곁으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그럼에도 아담의 대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숨었다고 한다. 자기변명과 핑계부터 먼저 대었다. 내 나름대로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정도 모르면 야단치지도, 따지지도, 아니 묻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야말로 죄가 갖는 첫 번째 두드러진 특성이다. 잘못을 범해도 곧바로 사죄 회개는커녕 자백조차 하지 않는다. 반드시 자기를 변호해서 자기를 감추려 한다. 그 뜻이 무엇인가? 잘못을 범한 내가 나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 진짜 실체는 사실은 이보다 훨씬 선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는 자기가 아니라고 한다. 자기와 자신이 분리되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변명부터 하는 것이 죄 자체의 추한 특성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모든 이가 벗은 몸이라는 생생한 증거다.
하나님과 맞장을 뜨는 아담
하나님 음성을 듣고 두려웠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언제든 회개하면 용서해줄 채비가 되어 있어서 그 말투는 온유하고 포근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이 단절되어 벗은 몸이 된 상태인지라 아담이 듣기에 냉혹하고 무섭게 여겨진 것이다.
이 대답의 뜻이 무엇인가? 지금 무서워서 숨은 것은 하나님의 음성 탓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일의 근본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 셈이다. 실제로 12절에서 하나님이 만들어 나와 함께 살도록 붙여주신 이브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이브만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현재 인류가 겪는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는가? 하나님이 실존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왜 방임하고 있느냐? 모든 재난을 하나님이 막아주지 않는 탓으로만 돌린다. 또 그런 신이라면 믿을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강변한다. 자신들의 탐욕과 잘못과 죄는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다. 벗은 몸이 되어 구원 받기 전 타락한 상태의 아담의 지금 모습과 똑같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그 전(11절)에 누가 네게 벗었음을 고했는지 물었기에 그런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의견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인간적 변명일 뿐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의 배후에 사탄이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담도 이브처럼 솔직하게 그 사실만이라도 인정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사탄 쪽에 잠시 붙었다는 대답은 하나님을 벗어난 잘못을 저질렀다고 간접적으로나마 시인하는 셈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아담은 사탄이나 뱀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이 이때부터 부정적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다스릴 권한과 능력을 부여 받았다. 그런데 거꾸로 뱀의 유혹에 넘어갔으니 그대로 인정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담이 하나님이 물은 그대로 이브가 줘서 먹었다고만 대답했어도 하나님이 봐줄 여지는 남아 있었다. 어쨌든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붙여주신” 여자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에게서 죄가 시발되었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에겐 잘못한 것이 눈곱만큼도 없다고 한다. 만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면 모든 되어진 일에도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하나님과 맞장을 떠보겠다는 기세다. 아담은 이미 자기를 하나님 위에 두었고 아예 그분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벗은 것은 사람이 가르쳐 주지 못한다.
하나님이 누가 네게 벗은 것을 고하였느냐는 물음은 일종의 반어법적 표현이었다. 동산에는 두 사람 뿐이었고 각자가 자기기 벗은 몸이라는 것을 스스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서로에게 아예 가르쳐 줄 수도 없었다. 실제로 선악과를 먹고 나서야 두 사람이 동시에 벗은 몸인 줄 자연스레 인식했다.
이 질문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다른 사람이 가르쳐 준다고 자기가 벗은 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도 절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덧붙이길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과실을 네가 따먹었느냐고 하지 않았는가?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절대로 벗은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사탄이 가르치거나 속여도 그렇다는 것이다.
대신에 오직 하나님을 거역하는 순간 벗은 몸의 상태로 곧바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외면한 불신자의 삶이 끝까지 갈급하고 허망한 까닭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바로 지금 현재의 상황만이라도 솔직하게 시인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주 단순했다. 순전한 회개를 하라는 것이다. 흔히 회개하라고 하면 후회하고 반성하고 고치겠다고 서약하는 일을 눈물 흘리며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긴다. 아니다. 회개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감추지 않는 것일 뿐이다.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6하 원칙에 따라 구체적으로 실토만 하면 된다. 모든 인간이 벗은 몸이 되어서 감추려고만 하므로 있는 그대로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신자가 된 것은 이제 실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즉, 참 회개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너희끼리 부끄러워서 치마를 스스로 지어서 가린 그 상황과 심정까지도 너그러이 이해하신다. 남편과 아내도 감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단 다윗이 그랬듯이 하나님 당신에게만은 아무 것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라는 것이다. 구태여 오버할 필요도 없이 담담하게 자백하면 된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회개다.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이전보다 훨씬 선하고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벗은 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은 것뿐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금 교회에서 도덕적 종교적 열성과 치성을 최대한 동원하여 울며불며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가르친다. 정말로 순전한 진심으로 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자칫 그러는 것 자체가 자신의 벗었음을 감추려는 본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증거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의 대답에 내포된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모른 척 하고선 이브에게 동일한 질문을 했다. 이브는 아담과 동일한 맥락의 대답을 했다. 뱀의 꾐에 넘어가 과일을 먹었다고 이실직고했다.(13절) 아담에 비하면 있는 그대로 사실을 고백했다는 점에선 점수를 줄만하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브 또한 벗은 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자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이성적이지 않고 감성적이다.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는 뜻이다. 논리에 약하니까 순서에 따라 추궁해 들어가면 대체로 솔직하게 실토한다. 어쨌든 아담과 이브 둘 다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다. 죄의 시발과 책임을 상대와 주변 여건에 돌렸다. 심지어 하나님 탓이라고 했다. 바로 그것이 벗은 몸이 된 증거다. 지금 모든 불신자들의 영적 자화상이며 신자들도 그 본성에 여전히 묶여 있다.
오염되고 파괴된 인간의 형상
하나님이 창조할 때에 의도했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던 순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은 모두 오염되고 파괴되었다. 신자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했고 나아가 자기가 자신과 분리되었음을 깨달은 자다. 불신자는 그런 의식이 없고 또 체계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 있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 무의식중에라도 자신이 벗은 몸인 줄 알고는 있다. 그러니까 태생적으로 모두가 자기를 감추려 드는 것이다.
자신의 추함을 발견한 자는 상대의 추함도 자연히 보게 된다. 문제는 하나님을 거역하자 선악을 아는 일에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 자기다. 우주에서 자기를 최고로 높은 위치에 두었다. 자기만이 선하다는 착각과 고집에 묶여 있다. 자기는 옳고 나머지 모두는 열등하거나 틀렸다고 것이 모든 사고 판단을 결정하는 패턴으로 견고하게 고착되었다.
타락 전의 아담과 이브는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면서 정말로 순전히 사랑했다.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랑이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으로 서로 돕는 존재로 만드셨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할 가치와 목적이 되게 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의도는 완전히 뒤틀어졌다.
인간끼리 부끄러워졌다. 자기가 자신을 봐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이율배반적으로 자기가 최고로 선하고 옳다고 고집 내지 착각하는 모순에 빠졌다. 이런 고집들이 상호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참 사랑이 바탕이 된 인간관계는 완전히 실종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부끼리도 삿대질하는 지경이 되었다.
부부도 평소에는 마음과 힘을 합쳐서 열심히 산다. 함께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다. 그러다 막상 자기 자존심이 상하고 경제적 사회적 유익에 손해가 생기며 자기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가 닥치면 언제든지 상대 탓을 하며 배반하게 된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원인이 결국 자존심이 상한 것 때문이 아닌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아브라함도 막상 자기 생명이 걸리자 아내 사라를 두 번이나 팔아 넘겼다. 죄송하지만 신자들 사이에도 간음과 이혼이 성행하지 않는가?
며칠 전 미국 TV 드라마에서 우연히 이런 대사를 들었다. 세계 최고의 지성인과 멋쟁이와 부자들이 모여 사는 세계 최고의 도시인 뉴욕에서 이웃에 대한 최고의 배려는 이웃이 누구인지 아예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이웃을 가만히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라고 했다. 세계 최고의 도시라면 다른 모든 도시들도 발전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웃과의 인간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것이 이젠 인간 사회의 최고의 덕목이자 선이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인간의 비참한 비극인가? 아니 최고의 희극이지 않는가?
뉴욕을 따질 것도 없다. 한국을 보라. 모든 면에서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빨리빨리 국민성 때문에 자꾸만 새 제품을 개발해 내야 한다. 인류의 미래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미래학자들은 그래서 인간의 장래는 한국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 한국에서 일곱 가지 포기한 것 중에 바로 인간관계가 들어있지 않는가? 창세기 1–3장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는 100% 반대편의 상태가 되었다. 종말이 다가올수록 인간관계가 무정하고 삭막해지는 상태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세상에 소망을 회복시키는 길
이보다 더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은 따로 있다.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돈이 들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점심을 한 끼 얻어먹었으면 나도 한 끼 대접해야 하는데 그럴 돈이 없는 것이다. 물론 서로 주고받는 일은 아주 선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을 Give & Take 방식으로 적용하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내가 벗은 몸인 것을 감추려는 본성 때문이지 않는가?
이런 엄연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그들은 모르고 알 수도 없다. 그들에게 설명하고 가르쳐주어도 불신자 시절의 저처럼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케케묵은 소리로 치부하며 앞뒤가 꽉꽉 막힌 근본주의 기독교인의 도그마일 뿐이라고 비웃고 반발한다. 자기들이 최고로 옳고 똑똑해 합리적 논리적이라고 착각 자랑하면서 말이다. 예수 믿는 신자들은 어리석고 나약하고 비겁하기조차 해서 모든 일을 하나님께만 의지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어떠한가? 도리어 자기 정체성도 확립하지 못한 채 일생을 마감한다. 7포 세대라고 공개적으로 자인하면서도 말이다. 지금 불신자를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 얼마나 큰 은혜요 권능이자 기적인지 모른다. 벗은 몸에서 입은 몸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성경은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 죄의 본질이자 시작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자기가 자신과도 분리되며 나아가 이웃과 자연과도 분리된다고 한다. 또 그래서 인간이 겪는 모든 죄와 고난과 문제가 발생한다고 선포한다. 그럼 인류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하나다. 모두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그분과의 분리를 해소하는 것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인간을 향한 그 온전한 사랑의 실상을 당신의 독생자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내셨다. 역설적이고 또 실제로도 하나님이 먼저 당신을 하나 숨기지 않고 완전히 발가벗겨 내보여주셨다. 그 사랑을 보고 깨달은 인간더러도 당신 앞에 완전히 벌거벗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럼 벗은 몸을 입은 몸으로 바꿔주신다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는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충만히 부어주신다.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야기된 모든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과 화목 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들처럼 평생을 갈급하고 허망하게 보낼 수밖에 없다. 예수 십자가 앞에 나오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삶의 모든 면에서 실제로 맛볼 수 있다. 풍성한 생명으로 채워주신다.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 사랑 안에서 확고히 정립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며 나는 그분의 친 백성이 된다. 당신의 독생자까지 우리를 위해 주신 이께서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언제 어디서나, 아니 영원토록 신자는 그 존재와 인생 전부가 그분의 거룩하고 강한 손에 붙잡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세력 앞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 최소한 요동치 않고 평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 없는 불신자들은 앞으로도 점점 일곱 가지가 아니라 열 가지, 백 가지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신자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단 하나도 포기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신자의 인생을 절대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스천 청년들은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출산해야 한다. 특별히 인간관계를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진정한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 참된 인간관계로 회복시켜야 한다. 이웃들에게 다시 꿈을 심어주어서 세상을 사람 살만한 곳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혹시라도 그 일에 소홀히 하면 세상은 소망을 회복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9/27/2015
어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서 깜박하고 오디오를 첨부하지 않은 채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저녁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오디오를 첨부해 올렸습니다.
6학년이 넘고나니까 이런 실수가 잦아지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