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없다.
창세기 강해 (28)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4,15)
사탄과 딴 살림 차린 인간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하나님처럼 위대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럽고 두렵기만 했다. 과일에 그런 신비한 성분과 효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외면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자기 속의 형상이 파괴됨으로써 자기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것이다. 하나님과 분리되자 인간은 자기 자신과도 분리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각자가 스스로 부끄럽게 되자 상대를 온전히 쳐다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를 최고로 높였기에 상대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주변 여건을 탓했다. 사람 사이에도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죄로 인해 참된 사랑은 인간사회에서 완전히 실종되었다.
지금 최초 인간들이 처한 상황은 구약성경이 일관되고도 가장 강하게 정죄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영적 간음죄를 범한 것이다. 본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간부인 사탄과 바람을 피운 것이다. 아니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꽁꽁 숨었으니 아예 딴 살림을 차린 꼴이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을 불순종한 그들의 죄와 그 오염된 폐해를 처리해야만 했다. 인간과 사탄을 몽땅 멸망시키면 가장 손쉽고 속이 시원한 해결책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창조 자체가 무효가 되고 이 땅은 다시 공허한 흑암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아예 없던 일로 눈 감아 줄 수는 더더욱 없다. 그래서 각 당사자에게 죄의 질에 적합한 형벌을 주되 계속 살려놓기로 하셨다.
그 징벌의 첫 대상이 사탄이다. 죄는 하나님의 순전하고 의로우며 완전한 통치를 자발적으로 고의로 적극 거부한 인간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먼저 아담을 추궁했는데 이브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브에게 또 물었더니 사탄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탄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어야 할 차례다. 그런데 전혀 따지지 않고 곧바로 심판부터 선포했다.
비록 인간에게 죄의 근본책임이 있기 해도 선악과 금령을 어기도록 교묘하게 유도한 사탄의 잘못 또한 엄청나다. 어쨌든 죄의 시발은 그에게서 부터였다. 하나님은 현재 벌어진 일의 전후 사정과 사탄에 대해 완벽하고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다. 나아가 사탄은 하나님이 절대로 함께 도모하고 상의하거나 서로 대화를 나눌 상대도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오직 인간으로 당신의 자녀답게 세우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와는 당신의 그 목적을 이뤄나갈 동역자였기에 대화한 것이다.
사탄이 인간에게 가장 자주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있다 해도 자기 인생과 전혀 무관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로 동일한 방식으로 사탄을 대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그 본을 보이고 있다. 바로 사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탄의 실존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상대할 가치와 이유가 전무하므로 대화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사탄은 인간으로 하나님의 실존 자체에 의심을 갖게 만드는 것만이 목적이므로 역으로 따지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찾는 것이 사탄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가 된다. 실제로 사탄의 유혹에 지레 겁을 먹거나 귀신에 관심을 갖고 두려워하는 자들이 사탄의 더 좋은 먹이 감이 된다.
인간을 직립(直立)하게 만든 이유
본문에서 뱀에게 벌을 주었다고 진술하고 있지만 꼭 문자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뱀은 사탄에게 이용만 당했을 뿐이다. 사악한 선지자 발람이 발락의 유혹에 넘어가려 할 때에 하나님은 나귀를 이용해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민22장) 그렇다고 그 나귀가 상급을 따로 받지 않듯이 말이다.
거기다 뱀은 영적 존재가 아니다. 에덴동산에선 인간의 통치를 받아야 했기에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무엇보다 뱀은 14절처럼 흙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동물을 산 채로 집어 삼키지 않는가? 또 15절에선 전부 사탄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탄에게 내릴 형벌을 뱀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기에 그런 상징들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야 한다.
사탄에게 내릴 형벌은 한마디로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15절) 여자의 후손이라고 해서 딸을 말하지 않는다. 모든 생물은 극소수의 예외를 빼고는 암수의 생식으로 후손이 출생한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불합리하고 비과학적인 말이다. 하나님 당신의 창조의 뜻에도 어긋난다.
결혼이 남녀끼리 동등한 신분과 자격으로 연합된 공동체이지만 하나님은 남자를 대표자로 세웠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남자, 아담의 후손이라고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꼭 여자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말 그대로 여자만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남편과 성적 교섭이 없이 즉,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자를 말한다. 언젠가 성령으로 잉태된 메시아가 나타나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반드시 주지해야할 사항이 하나 있다. 15절 이전에 14절의 형벌이 먼저 내려졌다는 것이다. 뱀은 배로 기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것이다. 뱀 대신에 사탄에게 적용하면 어떤 뜻이 되는가? 사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최고로 비천한 신분과 위치로 떨어진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며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신자에게 사탄은 결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유일하게 두 발로 직립해서 걸을 수 있다. 두 발은 육신으로서 인간은 이 땅을 딛고 살아야만 한다. 반면에 머리는 정신과 영혼으로서 항상 하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두 팔을 하나님을 향해 높이 들어 그분을 감사, 찬양, 경배해야 한다. 호흡이 있는 동안 범사에서 그분을 기뻐해야 한다.
그럼 땅에서 기고 흙을 먹고 사는 사탄에게 눈을 돌릴 여유도 필요도 없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땅에 기고 있는 사탄은 보이지도 않는다. 분명 사탄의 유혹과 시험은 끈질기고 교묘하며 강력하다. 그러나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벌리고 있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투를 벌이면서 모세가 여호와께 두 팔을 들고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승리했듯이 말이다.(출17:8-16)
땅의 주인은 사탄이다.
그럼에도 사탄이 땅에서 기며 흙만 먹고 살게 된 것은 여전히 땅에서 힘깨나 쓸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여자의 후손이 올 때까지 사탄은 계속 이 땅에 존재하며 불순종의 영으로 공중권세를 행사하도록 하나님은 허락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에덴에서 내어보냈다. 생명나무는 천군천사가 화염검으로 지키게 했다. 그분의 거룩하고 완전한 통치 즉, 하나님 나라는 하늘(영계)로 옮겨졌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이 땅의 주인은 오히려 사탄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당신 대신에 이 땅을 아름답게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수여했다. 그런데 인간이 사탄의 편에 붙었으니 이 땅을 다스릴 권세도 자연히 사탄이 차지한 꼴이 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따로 허락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인간은 자발적으로 사탄의 조종과 농간 아래 들어갔으니 자연스레 또 결과적으로 사탄의 세상이 된 셈이다.
그런 사탄의 권세는 언제까지 지속되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머리를 상하게 할 때 즉, 십자가에 죽으시어 인류를 구원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사탄의 권세는 종식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 오신 후로도 지금 겪고 보듯이 여전히 사탄은 공중권세를 잡고 있고 갈수록 더 위세를 떨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휘하에서 노예가 되어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뜻은 과연 무엇인가? 말 그대로 상하게, 부상을 입힌 것뿐이다. 죄송하지만 머리를 자르거나 깨트리지 않았다. 예수님의 발꿈치와 대조되므로 머리가 상한 것은 분명히 치명상이긴 해도 멸망당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에 하나님의 아들임을 제일 먼저 사탄의 졸개인 귀신이 알아봤다.(막1:21-28) 안식일에 주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자 유대인들이 그 권세 있는 가르침에 놀랐다. 그 중에 귀신들린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여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라고 물었다. 사탄의 졸개, 본문으로 치면 뱀의 후손인 귀신도 하나님이 뱀에게 선포한 저주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 공중권세 잡고 흑암의 왕국을 이루고 있지만 언젠가 무너질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때도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말씀의 검 한마디로 얼마든지 사탄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머리를 잘라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만 했다. 지금 사망의 세력으로 묶어서 조종하고 있는 그 사람을 풀어주라는 것이다.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만 한 셈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죄인의 구원에 있다. 사탄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 남아서 설칠 것이다.
사탄과 하나님의 전쟁터(?)
그러다보니 일부 교파에서 이상한 주장을 펼치게 되었다. 사탄과 하나님이 이 땅에서 태초부터 계속해서 다투고 있고 승리와 패배를 교차해서 차지한다고 말한다. 어떤 때, 어떤 장소, 어떤 사건에서 사탄이 이기면 하나님이 진다. 반면에 다른 때와 장소와 사건에서 하나님이 이기면 사탄이 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초림하신 것도 사탄에게 빼앗긴 나라를 탈환하고 사탄이 주관하는 인간의 영혼을 풀어주려고 사탄에게 바쳐진 제물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땅의 인생만사를 사탄과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양분하여 번갈아 가며 통치한다는 이원론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고 있고 정통 교회 신자들마저 무엇이 잘못인지 잘 모르고 있다.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에 본문의 문자적 해석만으로도 너무나 틀린 주장임을 간단히 알 수 있다.
사탄에게 땅의 권세를 주신 이가 누구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계획하고 주도하여 시행했지 않는가?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만 상하게 하고 하나님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면 그 능력과 권세에 도무지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는가? 귀신들도 예수님을 처음보자마자 우리를 멸할 것인지 물었다. 언젠가는 하나님에 의해 멸망될 수준밖에 안 된다는 점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부 신학자와 목사들이 사탄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로 격상시키고 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자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렸다고 비난한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원론을 주장하는 자들이야말로 사탄의 졸개로 성령을 훼방하는 절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불신세상은 사탄의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지배하에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로도 계속 그랬다. 그러나 이 땅을 최종적으로 궁극적으로 주관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혹시 오해는 말아야 한다. 최종적 궁극적이라고 해서 사탄이 훼방하고 잘못한 일들을 결국 마지막에 가서 고쳐준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망라하여 총체적으로 주관하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그분이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자 끝이다.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사탄의 흉계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초림 때에 본문의 예언 그대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즉, 사탄에게 치명적 손상을 입혔다. 멸망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어서 제대로 힘을 못 쓰게 만들었다. 머리를 상하게 했다는 것은 사탄의 음흉한 흉계를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뜻이다. 사탄의 더럽고 추한 실체를 완전히 벌거벗겨 사람들로 똑똑히 보게 했다.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 발가벗겨서 달렸다. 인간의 원죄의 결과인 사람 사이의 부끄러움마저 당신께서 다 감당하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탄도 사실은 완전히 발가벗겨졌다. 인간의 비참한 영적 상황과 현실의 고난 갈등 죄악의 근본원인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탄에게 붙은 것 때문임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십자가 이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선을 공급받지 못해 인간들은 평생토록 갈급함과 허망함을 멸할 길이 없었다. 예수님은 사탄이 아닌 하나님께 영단번의 완전한 제물로 바쳐졌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당신의 몸으로 깨트린 것이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이 찢길 때에 성전의 지성소를 가로막던 휘장도 동시에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그분의 이 대속의 은혜를 순전히 받아들이고 믿는 모든 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던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사탄이 아무리 교묘하고 음흉해도,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위장을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과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삼위 하나님만 인생의 소망으로 삼는 자에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문자 그대로 땅에서 벌벌 기는 존재일 뿐이다.
본문에서 지금 인간은 온갖 핑계를 대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서로 손가락질 하며 심지어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인간이 타락한 직후로 아직 인간을 벌하기 전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무엇부터 행하고 있는가? 사탄을 벌주고 있다. 당신을 거역하여 죽어 마땅한 죄인인 인간의 구원을 약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과 재앙이 아니라 구원이다. 이 얼마나 크고도 진정한 사랑인가?
말하자면 본문은 성경 최초로 예수 십자가구원을 계시하고 있다. 원시복음(原始福音, Proto-Gospel)을 선포하고 있다. 이후의 인류 역사는 바로 이 약속이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확장 성취되어 가는 과정일 뿐이다. 때가 차매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의 후손으로 나게 했고 율법에서 인류를 속량하여 믿는 자로 아들의 명분을 주었다.(갈4:4,5)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죽음은 발꿈치가 상한 것에 불과했다. 대신에 오순절에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을 영원토록 내주케 했다. 그 때까지 죄인의 심령에 자라잡고 있던 사탄의 견고한 진을 깨트리고 구원을 베풀었다. 사탄은 머리가 상한 것이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와 은혜를 제대로 아는 자는 더 이상 사탄에게 미혹되지 않는다. 그분은 참 빛으로 오시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다.
사탄은 미혹만 하지 통치는 않는다.
분명히 불신세상은 사탄의 농간과 조종 아래에 있고 죄인들이 속고 미혹 당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사탄이 통치 주관하는 법은 단 한 시도 한 장소도 없다. 그가 하는 짓이라곤 어떻게 하든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게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여자의 후손으로 온 성육신한 메시아임을 부인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불신자의 호흡과 모든 것까지도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욥기의 서두에 보듯이 사탄이 사람을 죽일 능력은 있으나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 죽이지 못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아름답고 선하고 순전한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 그분이 만왕의 왕이다. 하나님이 인류역사의 어느 순간, 어느 장소, 어느 사람도 사탄에게 패한 적이 없다. 사탄에게 내어준 것도 없기에 탈환할 필요도 없다. 사탄이 지배하는 특정 지역과 특정 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겉으로만 인간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에 불과하다.
이원론을 주장하는 이단에게 넘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자신이 사탄에게 질 때가 이길 때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보고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과 하나님이 자기와 세상을 교차해서 주관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인지한 것은 여전히 자신의 지정의 영역 안이다. 가시적 범위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자신의 불완전한 판단에 갇힌 꼴이며 엄격히 말해 그 자체가 사탄에게 넘어간 셈이다. 내주하는 성령의 세밀한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탄에게 넘어갈 때마다, 또 사탄을 두려워할 때마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성도를 위해 대신 간구하는 것이다. 성령이 신자에게 영원히 내주하는데 어찌 사탄에게 내어주며 일시적으로라도 패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탄은 이 땅에서 배로 기고 있다. 땅의 주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차적 표면적 주관일 뿐이다. 땅의 주인이므로 그 모든 것이 물질적 가시적 현상에 국한된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기에 보이지 않을 뿐 만사의 배후에 있는 최종적 궁극적 통치자이다. 그러니까 성경(히11:1)은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선포하지 않는가?
또 다시 땅의 물질은 사탄이, 하늘의 영은 하나님이 양분해서 통치한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신자는 인간으로 직립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하는 자는 땅과 하늘 모두의 주인이다. 발로 딛고 있는 땅을 신자가 주관해야 한다.
반면에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지 않는 자는 그 손이 땅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네 발로 기는 짐승이 되는 셈이다. 사탄에게 넘어가 그 시야가 땅으로 제한되어 가시적인 틀에 붙들리게 된다. 현재 불신자들의 실상이 그렇지 않은가? 진화를 믿음으로써 네발로 기는 짐승을 그들의 조상으로 모신다. 바로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종신토록 땅에서 배로 기어야 하는 사탄의 자식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만 했지 완전히 부수지는 않고 공중권세 잡도록 허락하셨다. 당신의 힘이 없거나 손이 짧아서가 아니다. 인생으로 일부러 고생을 시키려는 뜻은 한 치도 없다. 인간이 자발적 고의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했다. 이제 그와 똑같이 기꺼이 의도적으로 적극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다. 사탄이 설치고 있음에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찾는 자를 하나님도 찾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감사할 일인가? 인류역사는 예수 십자가의 드라마이다. 인간을 창조한 것은 그 드라마를 실현하기 위해서이며 신자는 그 드라마의 주역으로 뽑힌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신자만 상대해서 이 땅을 이끌어 가신다. 신자는 그분의 동역자, 친 백성, 자녀, 후손으로 세움을 받았다.
바울은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가장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설명한 로마서의 16:20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초림 때에 사탄의 머리만 상하게 했는데 이제 신자의 발 아래에서 상하게 된다고 한다. 신자로 인해 더욱 철저히 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 일이 속하게 이뤄진다고 한다. 재림이 임박하며 최후의 완전한 승리의 주역이 신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신분이자 특권인가? 여러분은 이런 권세를 실제로 누리고 있는가? 최소한 이미 그런 권세를 이미 소유하고 있음을 알기라도 하는가?
10/4/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