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주부의 너무나 고귀한 영적사명
창세기 강해 (31)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
선악과 금령을 재확인하신 하나님
사탄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함으로써 세상에 죄가 들어온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런 시험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이성적 분별력을 이미 주셨다. 따라서 죄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를 감당할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마땅했다.
하나님이 그래서 어떻게 벌을 주셨는가? 모든 전후사정을 이미 꿰뚫어 알고 계셨기에 간단하게 질의응답을 했다. 재판으로 치면 검사가 인증심문을 한 것이다. 그런데 범행 당사자 피고인 인간부터 선고를 내리지 않았다. 범죄를 모의 유도 방조한 제 삼자 격인 사탄에게 먼저 판결을 내렸다.
영원히 땅에 기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벌을 주었다. 진멸시키지는 않되 사탄의 활동 범위를 땅으로 제한한 것이다. 인간 중에 땅에 기고 있는 즉, 땅이 전부이기에 땅만 바라보고 사는 불신자들의 왕이 되게 했다.
반면에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형벌을 내렸다. 땅에서 기고 있다가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일어서서 손을 하늘로 향해 펴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는 신자를 조종 농간할 권세는 전혀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비록 사탄이 신자를 유혹하고 겁주어 때로는 넘어트릴 수는 있어도 신자가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소속과 특권은 절대로 손상할 수 없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에게는 분에 넘치는 너무나 큰 은혜였다. 그와 동시에 사탄은 불신자를 건드릴 필요가 없기에 신자만 사탄이 호시탐탐 노리는 사냥감이 되었다. 신자가 땅에 기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혈과 육의 전투가 되어 질 수밖에 없는 반면에 하늘로 향해 일어서는 영적 싸움을 해야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사탄에게 내린 판결은 사실은 선악과 금령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재차 확인하고 구체적으로 계시한 것이다. 모든 인간더러 하나님의 품을 절대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신자라도 잠시만 벗어나면 사탄에게 질 수밖에 없으며, 불신자는 대신에 하나님의 품으로 진심으로 겸허히 돌아오면 언제라도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신다는 뜻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인간을 땅에 기는 자와 하늘을 향해 손을 드는 자, 오직 두 종류로만 나누고 또 그에 걸맞게 대우한다는 것이다.
이브에게 판결을 내리는 하나님
사탄의 판결을 종결하신 하나님은 사탄의 꾐에 먼저 넘어간 이브부터 그 죄에 적절한 선고를 내렸다. 이 단계에서 간과해선 안 될 영적 진리가 하나 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선포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거나 했던 말을 취소 번복하는 분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으나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오래 살았다. 하나님이 말한 “정녕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대신에 지금 모든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체험하듯이 윤리적 죄를 지으면 저절로 수치와 공포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또 불신자는 항상 그렇고 신자도 가끔, 죄를 짓지 않는 평상시에도 자신의 존재 전부에 공허와 갈급한 상태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이 땅에 부모 없는 고아처럼 버려진 잃어버린 존재가 된 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평생토록 자괴감에 사로잡혀서 뭔가 상실된 듯한 자아를 도무지 충족시킬 방도가 없는 것이 실질적 죽음이자 더 고통스런 죽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선고를 듣기 전의 이브는 실질적인 죽음의 형벌을 이미 받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와 공포를 없애보려 했지만 인간끼리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는 짝꿍이 맞는 공범의식만 강해졌다. 그 와중에 부부끼리도 서로에게 잘못을 전가하며 상대를 비난했다. 몸 전체에 엄습하는 수치와 공포는 도무지 해소되지 않아 나무 사이에 꽁꽁 숨었다. 하나님이 정녕 죽는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실감했다.
거기에 하나님이 형벌을 더하시려고 하니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보다 더 끔찍하고 비참하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추가할 것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 것이다. 실신 졸도하기 일보직전이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이제 죽이면 죽는 수밖에 없다고 각오하고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렸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이브에게 임신과 출산의 고통과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두 가지 벌을 내렸다. 오늘은 그 첫째 형벌만 살펴보자. 하나님은 잉태하는 고통을 겪고 수고해야 자식을 낳는다고 했다. 그럼 과연 잉태 출산이 “정녕 죽음”보다 더 크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인가?
먼저 찾아오시는 긍휼의 하나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라.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고 했다. 원래 있는 형벌에 다른 형벌을 또 준다는 뜻이다. 하나님도 이브가 이미 정녕 죽음의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신 말씀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서 교제 했다. 죄는 없었고 피조세계에도 모순과 재앙이 없었다. 각자가 순전하게 하나님과 항상 동행했고 부부사이도 100% 순수한 사랑으로 서로 돕는 배필이었다. 추하고 더러운 것은 물론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모순조차 단 한 치도 개입되지 않았다. 완벽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이 땅에서 일시적이긴 해도 천국과 동일한 삶을 살아봤던 유일한 인간이었다. 인간이 정말로 인간다운, 하나님이 소망 목적 계획했던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분리되자 모든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스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전의 상태로 회복할 수 없었다. 갈급하고 허망했고 어딘가 숨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부끄러웠다. 가만히 있어도 아무 까닭 없이 저절로 덜덜 떨렸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바로 직전의 상태와 비교 대조할 수 있어서 실질적 죽음을 분명하게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하나님으로선 “내가 뭐라 그랬어? 반드시 죽게 된다고 말했지? 그러니까 먹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 한 것 아니야!”라고 야단치거나 그들의 잘못을 다시 일깨워줄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은 나중에 에덴동산을 폐쇄하고 생명나무를 옮기고 최초 인간을 낙원에서 내보냈다. 이 순간 이후로는 아담과 이브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100% 순전한 교제는 불가능해졌다. 그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얼마나 처절하고 비참한지조차 스스로는 알 수 없다. 이미 죄로 오염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이브에게 내린 형벌의 첫째 의미는 모든 인간은 죄 중에 잉태하여 죄 중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브부터 그것을 실제로 겪게 했다. 큰 아들 가인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고 집을 떠나 온 세상을 유리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또 하나님을 아는 경건한 아들 아벨이 그 형에 의해 죽는 아픔을 견뎌야 했다.
지금 이브에게 내린 벌은 결국 모든 인간에게 내린 형벌이다. 태생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태어나기에 이 땅에서 잃어버린 존재이자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다. 이 땅이 전부인 줄 알고 가시적 물질계에 갇혀서 이 땅의 유한한 것들, 헛되고 헛되어 썩어 없어질 것들만 추구하는 존재다. 쉽게 말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만 집착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늘로 손을 들지 못하는 인간은 땅을 기는 사탄의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얼마나 좋은지 알지 못하면 그분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 날 때부터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아담과 이브와 같은 체험이 없는 인간으로선 자력으로 아니 자의로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한다. 그 원인은 오직 하나님과 단절 된 것이며 그 해결책은 그분과 연합뿐이다. 이미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선 그분과 연합해야 한다는 구원 진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오늘날 불신자들이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에 대해 코웃음 치는 까닭이다.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과 연합된 온전한 기쁨과 분리된 처절한 아픔 둘 다를 체험 자각한 자는 아담과 이브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높이는 탐욕에 사로 잡혀서 죄로 인한 수치와 공포를 스스로 해결하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하나님으로선 도무지 마냥 두고 볼 수는 없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곳은 네가 있을 곳이 절대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먼저 찾아오셨다.
형벌인가, 축복인가?
하나님이 이브에게 임신의 고통을 더한 것이 과연 벌인가? 만약에 이브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현대 여성들은 출산할 때에 무통분만주사를 맞을 필요 없이 그냥 순풍, 순풍 아기를 쉽게 잘 낳았을까? 또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이 남성이 대신 출산해주어 여자는 맘껏 밖에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밤늦도록 흥청망청 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두 가지의 벌을 준다는 것은 그만큼 이브를 안타깝게 여기고 바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표시이지 않는가?
우선 죽어 마땅한 이브에게 오히려 생명의 통로이자 기원이 되게 했다. 이브에게서 시발된 죄로 인해 인간은 실질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이브에게 생명을 부여해 번성토록 했다. 육신의 생명일지라도 살아있어야 실질적 생명을 주시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생긴 결과를 하나님은 지금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일을 이브를 통해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브가 “산 자의 어미”가 될 것이라고 했다.(20절) 옛날에는, 아니 저희 때만 해도 의술이 미개하고 먹을 것이 너무 부족해 집집마다 두세 명의 자식이 죽었다. 그럼 그 죽은 자의 엄마는 아닌가? 그럴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아는 자, 실질적으로 살아 있는 자, 하나님 품 안에 살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는 축복을 이브에게 주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실질적으로 그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서 그 상태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런 자신들의 영적 상태의 의미는 물론 자신들의 그 실상도 스스로는 도무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로 당신과 교제하는 지극히 기쁘고 즐겁고 아름다운 상태를 몸 전체로 체험케 했다. 그리고 그들이 타락할 줄을 아시고도 묵인했다. 그럼으로써 당신과 분리되었을 때의 지극히 수치스럽고 두려운 상태를 몸 전체로 느껴보라는 뜻이었다.
그런 후에 이브에게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주셨다. 무슨 뜻인가? 네가 몸 전체로 배우고 깨달은 것을 네 후손에게 단 하나의 거짓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을 처음에는 오해했지만 전혀 그것이 아니었음을 철저하게 깨달은 대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브에게 말하자면 최초의 제자훈련을 행한 것이며 그것을 후손들에게 계승하라는 것이다.
최초 인간 그중에서도 이브는 하나님을 자의로 고의로 적극적으로 거역하며 타락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먼저 오셔서 죽이기는커녕 생명의 어미가 되는 무한한 은혜를 주시며 일방적으로 사랑하셨다. 인간 구원의 방안과 그 의미를 이들만큼 정확히 아는 자는 없다. 실질적인 죽음을 맛보았고 다시 실질적인 살음을 얻었기에 몸 전체로 겪고 배운 실질적 산 지식이 되었다.
이브는 모든 인간이, 당장에 가인과 아벨부터도 스스로는 도무지 해소는커녕 감소도 못시키는 본성적인 수치와 공포를 해결하는 길을 몸으로 배운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가되, 하나님이 자기를 먼저 찾아왔듯이 하나님 그분에 의해 돌아가야 하며, 그래서 하나님과 연합해야만 한다. 그 후로는 그분을 절대 놓지 말아야 함을 자식에게 가르칠 것을 이브는 자신의 소명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너무나 완악한 인간들
하나님과 연합하지 않으면 실질적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 절대적 진리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생만사를 그분이 주관하신다. 자신의 살고 죽음 즉, 자기 인생의 시작과 끝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인간이 그분을 외면 거역 분리한다는 것이 도대체 가당치나 한 일인가? 이런 아무 근거 없는 자신감 아니 허세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바로 하나님을 부인한 원죄에서다.
그럼에도 인간이 얼마나 완악한지 모른다. 예수 믿기 전의 바로 저처럼 여전히 갈급하고 허망한 가운데 있으면서 결국에는 절묘한 해법을 인간 스스로 강구해냈다. 인간은 영원히 선재(先在)해 있던 물질에서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 진화한 물질적 존재라는 것이다. 물질이므로 당연히 도덕적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작금 그 어떤 것도 죄가 아니게 된 상황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도덕적 죄책은 그런대로 무시할 수 있었지만 원인 모를 공허감은 여전히 해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인간은 원래부터 그런 존재라고, 즉 이 땅에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증상이라고 간주했다. 수치 공포 허망 갈증 등이 바로 인간의 실존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왕에 실존하는 것에 대해 의미를 따지는 것조차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고 소용없는 짓이라는 너무나도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어리석기 짝이 없고 불쌍하지 않는가? 하나님 쪽으로 잠시만 얼굴을 돌려도 참 생명이 풍성히 예비 되어 있는데도 끝까지 그러지 않는다. 어렴풋이 그런 생명이 있음을 눈치 챈 자들도 자기를 높이려는 탐욕 때문에 절대 그러지 않는 너무나 큰 교만에 빠져 있다.
여자만 출산의 고통을 겪는 것이 억울하고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도 어불성설이다. 아담이 전혀 벌을 받지 않았어야 성립되지만 아담도 합당한 벌을 받았다. 그럼 두 사람의 죄의 질을 비교하고 받은 형벌의 경중을 따져야 합리적인데 그러지 않는다. 거기다 어차피 두 사람 다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
나아가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 다르게 지어진 존재인지라 아무 의미 없는 주장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 생물을 암수 한 쌍으로 만들어 그 둘의 생식으로 후손을 이어가게 했다. 암수 둘 중에 하나는 잉태해야 하고 그 잉태하는 쪽이 여자다. 남자가 출산의 고통을 받아봐야 그는 남자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여자라는 뜻이다.
내가 딸이 아니라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신나고 보람찬 인생이 되었을 텐데라는 미련과 불평도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토기가 어떤 토기가 될지 정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토기장이에게만 있다. 토기인 인간이 딸 아들 불평할 자격은 전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출생과 사망을 조절함에 완전히 무력한 인간이다. 이 땅에 비록 유한하고 불완전하지만 생명을 받아 태어난 것만도 감사해야 한다.
거기다 신자는 죽을 수밖에 없던 진노의 자녀였는데 하나님이 택하여서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찬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이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그분께 감사 찬양해도 모자란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되었다는 가장 첫째요 가장 중요한 증거다. 이마저 못한다면 엄격히 말해 신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탯줄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랑
이브에게 출산의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이 있다. 아담이 이브를 처음 만났을 때에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다. 나의 분신으로 내 몸의 일부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이브를 문자적으로 아담의 갈비뼈로 만든 것이 아니며 따로 각각 만들었으므로 고통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는 완전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100% 순전한 교제와 동행이 이뤄졌다. 부부 사이에 감출 것 하나 없이 부끄럽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했다. 내 생명을 대신 바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고백이었다.
죄가 이 땅에 들어오고 나선 그런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해졌다. 하나님이 소망했던 참 인간답게 살 수 없다. 죄인끼리 살아야 하는데 서로 깎아내리기 바쁘다. 그런 와중에 여자가 아이를 잉태 출산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아담이 했던 대로 자식에게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게끔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고대에는 아이들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고, 산 채로 우상 신에게 바쳤고, 오늘날도 아동 학대가 성행하고 있다. 땅에 기는 불신 죄인들의 행태다. 산 자의 어미인 이브의 후손들, 신자는 절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여자에게 잉태 출산하는 고통을 주신 것은 자신과 아이가 연결된 탯줄이 잘려나갈 때에 자신의 분신임을 절감케 하려는 것이다. 엄마의 탯줄이야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이어지는, 나아가 그분의 사랑이 전달되는 통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엄마에게 아이를 양육하는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책임을 맡겼다. 여성은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것이 바로 모성애다. 비록 불완전하긴 해도 인간의 사랑 중에는 가장 순수하다. 말하자면 산 자의 어미인 이브에게 아들 딸 구별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사랑을 전달 계승할 책임을 맡긴 것이다. 또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까지 알게 하라는 것이다.
어린이는 아직 연약하고 지성적 이성적으로 영글지 않아 감성적이다. 정서적으로 풍부하고 따뜻한 엄마에게서 참 사랑을 배워야만 한다. 사랑은 말이나 교리가 아니라 실천, 그것도 몸을 사리지 않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도 기꺼이 대신 버릴 수 있다. 영어사전을 출판하는 Oxford 사에서 가장 따뜻한 느낌을 주어 사랑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뽑는데 매년 엄마(mom)가 압도적으로 일등을 한다. 아빠(dad)는 불행하게도 10위 안에도 없다.
한국의 소리꾼 장사익의 “꽃 구경”이라는 노래가 있다. 먹을 것이 없어 다 늙은 엄마를 산 속 깊이 꽃 구경 가자고 속여서 버리러 가는 노래다. 이전에 실제로 있었던 고려장을 노래로 옮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인지 다 알고도 아들의 등에 업혀 가면서 솔잎을 길에 자꾸 뿌린다. 깊은 밤에 산을 내려가면서 길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당신은 이제 곧 죽을 줄 알면서도 아들의 안위부터 걱정하는 것이 엄마다.
실제로 주일학교는 엄마 손 붙들고 나가기 시작한다. 집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도 엄마의 역할이다. 통계에 따르면 성인이 되어서 주일학교를 거치지 않고 교회 출석하는 자는 열 명 중 겨우 한 명꼴 밖에 안 된다고 한다. 역으로 말해 신자들 거의 다가 주일학교 출신이므로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도 거의 엄마 때문이라는 뜻이 된다. 기독교를 유지 성장 부흥시키는 일을 엄마가 맡아서 한다는 말이다.
그저 평범한 주부로 끝낼 것인가?
이는 정말로 심각한 이야기다.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다. 간혹 믿음이 좋은 여자 집사님들 가운데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몰라 곤혹해 하는 분들이 있다. 이렇게 집안일만 하다가는 하나님께 충성 헌신 한 번 못해보고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 뭔가 경건하고 큰일을 해야 하고 집안일보다 교회에 더 헌신해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은 모든 엄마들을 이브에게 주신 너무나 거룩하고 고귀한 소명에 동참하도록 했다. 죽어 마땅한 이브에게 먼저 생명을 이어가는 소명을 맡겼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모든 인간의 육신의 엄마는 이브다. 이브가 없었으면 이 땅에 인간은 존재치도 않는다. 이브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도 계승 실현되었다. 이브가 없었으면 이 땅은 흑암의 권세만 설칠 것이다. 사랑이 완전히 실종된 이 땅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무엇보다 이브가 없었으면 구원도 예수님의 십자가도 없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모든 엄마도 우선 자기 자식을 이 땅에 버려진 존재, 잃어버린 상태에서 구해내어야 한다. 그 실존의 밑바닥 뿌리부터 흔들리는 갈급하고 허망함을 해소시켜 주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해악을 끼치는 자들은 뇌가 유전적으로 이상한 자가 아닌 이상, 백이면 백 애정결핍, 그것도 어려서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탓이다.
엄마는 모든 인간에게 이 땅에서 살아갈 인생의 장막의 기초를 쌓아주는 자다. 고아들이 생부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고 생모만은 꼭 찾아보려 한다. 탯줄로 이어진 생명과 사랑의 원천과 자신을 이으려는 뜻이다. 순전한 참 사랑,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고 싶은 것이다. 본성적으로 자신이 이 땅에서 잃어버린 상태에 있음을 즉, 실질적으로 죽어있는 줄 알고 되살아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을 발견하여 그분의 사랑에까지 연결되고 싶은 것이다.
불신자 엄마도 자식에게 생명을 주고, 인간사회의 윤리를 가르치고, 그 인성을 올바르게 세우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 엄마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실질적으로 죽어 있는 아들을 실질적으로 살리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엄마 본인부터 잃어버린 존재로 실질적으로 죽어 있는데 어떻게 자식을 살릴 수 있겠는가? 함께 땅에서 기되 최고로 풍성하게 기게 만드는 것으로 그칠 뿐이다.
신자 엄마는 다르다. 실질적으로 죽어 있는 자식을 실질적으로 살릴 수 있다. 물론 구원 자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그러나 이브처럼 자신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하나님에 의해 옮겨진 생생한 체험과 산 지식을 통해 십자가 구원을 소개하고 예수께로 이끌 수는 있다. 기독교 최초의 제자훈련 수행자요, 주일학교 교사였던 이브처럼 자식을 하나님을 알게 하는 너무나 막중하고 고귀한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이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다면, 아니 그런 사명에 대해 알지도 못한다면 사실은 기독교 믿음이 없는 것이다.
지금 교회 안에는 여성이 훨씬 더 많다. 죄송하지만 그런데도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다면 엄격히 말해 엄마들이 집에서 주일학교 교사 역할을 소홀히 한 탓이다. 집안일보다 교회 일에 충성하는 것이 신자의 첫째 소명이자 하나님이 더 기뻐하는 일이라고 착각 오해 아니 무지했던 때문이다.
너무나 유감스럽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고등학교만 진학하면 교회가 아니라 학원으로 내몬다. 땅에서 기고 있는 자들 중에서 더 화려하고 풍성하게 기라는 목적이다. 이는 하나님도, 성경도 모르고 심지어 구원 받지 못한 불신자라고 할 수 있다. 엄마들이 오늘의 본문이 이브에게 내린 형벌이 아니라 너무나 풍성하고 은혜로운 축복이었다는 진리만이라도 정확히 깨달아 그대로 실행한다면 기독교가 다시 부흥할 수 있다는 뜻이다.
10/25/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