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로봇에게 지배받는 까닭
창세기 강해 (34)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전통적 성경해석의 오류(?)
이곳 캘리포니아 주는 미국 전국에 과일과 채소를 공급하는 주산지다. 무엇을 심어도 물만 주면 무럭무럭 잘 자란다. 본문에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다. 지금껏 하나님이 땅을 저주한 결과로 지진 홍수 태풍 가뭄 같은 자연재앙이 발생한다고 배워온 성경해석도 조금 납득 되지 않는다.
불신자들은 죄악으로 찌들어서 온갖 모순과 불공평이 기승을 부리고 가난하고 착한 자들이 더 피해를 입는 세상을 가만 두고 보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비난한다. 거기다 자연재앙까지 하나님이 인간 죄악에 대한 형벌로 주신다고 하니 기독교에 대해 더 반감을 갖는다. 차라리 인간끼리 힘을 합치고 세상을 살기 좋게 바꾸는 것이 인간이라면 행해야만 하는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반발한다. 그런 지적에 대해 신자들마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변증도 못한다.
미국의 3대 자연재앙은 지진, 허리케인, 토네이도인데 콜로라도 주와 그 인근은 이 셋이 닥치지 않는 주로 유명하다. 그럼 그곳 주민만 특별히 선택 받아서 아담의 원죄로 인한 형벌과 무관하다는 이상한 결론이 되지 않는가? 지금 전통적 해석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져 죄로 타락하면 하나님은 염병과 자연재앙과 대적의 침입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벌을 내렸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부터 땅을 저주해 처음부터 자연재앙이 땅과 동반되는 것이라면 따로 형벌로 더할 필요가 없다. 신약시대에 예수님도 종말이 닥치면 자연재앙과 전쟁 등이 동시에 빈발해질 것이지만 종말이 아니라 심판이 시작되는 징조로 해석하라고 했다. 자연재앙 자체가 형벌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리는 없다. 그런 전통적 가르침이 옳으려면 땅이 큰 재앙을 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야 한다. 본문을 다시 자세히 보라. 채소가 인간의 식물이며 종신토록 수고하며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다고 형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는 개인의 일상생활에 관련된 형벌이지 일 년에 한두 차례 있는 자연재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왜 가난한 나라만 피해를 입는가?
문제는 홍수 태풍 지진 같은 재앙이 뱅글라데시나 아이티 같은 아주 가난하고 소박하게 사는 적은 나라에 큰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면 정말로 불신자들의 반발처럼 불공평한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재앙은 빈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
미국에 이민 와서 느낀 것은 미국은 땅덩어리가 너무 커서 그런지 자연재앙의 규모도 엄청나다는 점이다. 한국은 기껏 몇 명 많아야 몇 십 명 희생되는데 미국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달한다. 하나님이 가난한 소국에만 재앙을 주는 불공평한 분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가장 첫째로 주신 명령이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산에 나무가 하나 없어 홍수통제가 되지 않아서 기아를 자초했다. 이 땅을 다스리려면 치산치수부터 해야 한다. 또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난을 허락하는 것은 연단을 통해 성숙시키려는 뜻이다. 이곳 캘리포니아에는 겨울에 몇 번 비오는 것 빼고는 연중 내내 맑은 날씨다. 그런데도 저수지와 도수로 관개시설을 완벽히 구비해서 기근만 극복한 것이 아니라 과수와 야채 중심의 농업이 세계 최고로 융성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지진 홍수 기근 등은 인간으로 겸손하게 만든다. 모든 미개 종족에도 나름의 신과 종교가 있고 그런 관념이 형성된 시발은 천둥 번개 앞에 인간의 너무나 왜소하고 연약함을 절감했기 때문이지 않는가?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나고 죽음도 관장하지 못하며 자연세계의 주인도 따로 있음을 그들은 알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연재해 안에는 땅을 저주하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의 뜻이 있다. 지구의 기후와 환경을 보존하려는 하나님만의 놀라운 신비와 섭리가 있다. 이곳 로스앤젤레스는 미국 내에서 공해가 제일 심한 곳이다. 인간이 환경을 더럽혔다. 어쩌다 비가 한 번 오면 먼지가 싹 씻겨 내려가 공기가 너무 맑아진다. 인간에게 생명을 유지하는 산소를 공급하는 것은 나무뿌리의 질소동화작용 때문이다. 천둥 번개를 통해 그 질소의 대분이 엄청난 규모로 작동 생성되는 놀라운 은혜가 숨겨져 있다.
요컨대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벌을 줌으로써 에덴동산의 때부터 땅이 황폐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매일의 개인의 일상적 삶에서 고통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인간들이 고의적 능동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결과다.
인류의 미래는 분홍빛인가?
약 30-40년 전만 해도 멀리 떨어진 가족과 얼굴을 보면서 통화하는 것이 우리 세대 내에 가능할까 막연히 꿈만 꾸었다. 그러니 이미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간편하게 핸드폰으로 그것도 컬러 화상통화가 실현되었다. 공상과학소설의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도 이제는 공상으로 남아 있지 않다.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20-30년에 올 것이라는 예상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래서 “꿈은 이뤄진다.”는 것이 현 세대의 모든 분야의 구호가 되었다.
그런데 인류의 미래에 대해 분홍빛 희망으로 설레며 기대하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 첨단기술에 관련하는 종사자들은 수입이 증가되므로 그럴 수 있다. 반면에 모든 이들이 뭔가 실체를 알 수 없는 회색 두려움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첨단기술 개발자들마저 이 기술이 악용되면 자연재앙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불행이 생기고 자칫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염려를 품고서 연구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인류의 미래가 어떨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대다수가 일상생활이 아주 편해지고 어떤 신기술이 개발될지 기대된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럼 질문의 내용을 살짝만 바꿔서 미래가 살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을지 물어보자. 자신이 소망하는 바대로 인생을 꾸려갈 자신이 있는지? 아마 10중 8-9는 부정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이번 주는 프랑스 파리의 테러 때문에 부정적 대답이 100%일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인간 지성이 최고로 깨이고 모든 분야가 눈부시게 발달했다. 삶의 여건이 너무나 편리하고 풍부해졌다. 반면에 인류의 미래와 개인의 인생에 대한 부정적 전망은 최고치에 달한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어떤 꿈도 못 이룰 것 없다고 큰소리치는데 막상 한국의 N포 세대처럼 모든 것을 포기한 세대로 변했다. 이룰 꿈이 없어졌는데 꿈은 이뤄진다고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신자들의 자가당착
지금 제가 두 종류의 질문에 각기 두 종류의 대답을 대조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대답이 둘이라고 해서 사람이 두 부류로 나뉘지 않았다.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동일한 맥락의 질문에 한 개인이 두 가지 대답을 한 것이다. 미래의 삶이 아주 편리해질 것이라는 대답은 물질계와 자기 외부여건이 최고로 발달할 것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도무지 살만한 가치가 없을 것 같다는 대답은 인간내면의 만족도는 최저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외부여건은 편리해지지만 내부정서의 황폐화는 반비례하여 삶의 의미와 가치는 상실된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이 땅이 전부요 인간은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를 거듭했고 앞으로도 계속 진화할 존재라는 진화론이 틀렸다는 뜻이지 않는가? 진화론으로는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물론 온전한 설명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 진화론자들도 물질적 여건이 개선되는데도 기술개발자 자신도 불안할 정도로 인간의 만족도가 함께 상승하지 않고 반대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 아니 체험했다. 또 그래서 그렇다고 시인하는 대답을 했다. 말하자면 인간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존재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그 영혼의 기원과 실체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불신자들은 자연재해 같은 모순이 발생하는 것을 방임하는 하나님은 불공평해서 못 믿겠다고 반발한다. 그 반발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논리적인 생각인지 그들은 모른다. 자연재앙과 세상모순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별개로 먼저 따져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해도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 불평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또 그럼 그 모든 불공평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근거로 불공평과 모순을 내세우는데, 하나님이 없어서 세상만사를 인간이 주도한다면 그 모든 것이 결국 자기들 탓이라고 시인하는 자가당착을 범한 꼴이다. 기독교와 창세기의 하나님에 대해 시비 논쟁할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다.
인간관계에서도 그 자리에 없거나 잠시 자리를 비운 사람의 뒷 담화를 하는 것은 비겁한 짓으로 치부된다. 아예 실존도 하지 않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은 어리석다 못해 살짝 맛이 간 짓이지 않는가? 모든 인간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실존여부부터 따져야 한다. 하나님이 있다고 확신이 서면 그 때에 왜 이런 불공평하고 모순처럼 보이는 일들이 발생하는지 하박국 선지자나 욥처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불공평하게 보이니까 하나님이 틀렸다거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아버지가 공부 잘 하는지 감시만 하고 그러지 않으면 야단만 치니 도무지 맘에 안 든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대드는 것도 아주 큰 잘못이다. 하나님이 불공평과 모순을 허락하는 이유와 목적을 정확히 알고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으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옳다. 정말로 그래서 하나님을 등진다면 아마 당신께서도 벌을 주지 않고 용납해주실지 모른다.
앵무새처럼 반복만 하는 불신자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심지어 스스로의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기 귀찮아한다. 하나님이 없다든지 인간으로선 알 수 없다고 지레 결론을 내린다.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과 차원만 보게 되고 그 안에 자신을 제한시킨다.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 차원에 따라 반응한다.
세상의 불공평 모순 죄악 같은 인류의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하다 분쟁으로 치닫는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사랑으로 서로 품고 관용하고 용서하라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신(神)은 아예 관심 밖이다. 인간끼리 힘을 합쳐 살기 좋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을 얼마든지 건설할 수 있고 그렇게 하자고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은다. 인류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랑이 실종된데 기인하니까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자도 일부 동조한다. 그러나 성경이 본문이 말하는 바는 아니다.
물론 그 진술은 진리로 옳다. 또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도 올바른 방향과 맥락에 바탕을 두고 접근했다. 그러나 여전히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 분석하고 판단한 결과일 뿐이다. 보이는 것의 껍질을 벗겨 그 핵심과 본질을 파헤치지 않았다. 마치 부부간의 갈등이 많아 싸움이 그치지 않자 해결책으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과 같다. 사랑은커녕 용서도 안 되고, 용서는커녕 이해도 안 되는데 사랑하라니 무슨 도움이 되는가?
뚱뚱한 여자더러 많이 먹지 말고 살 빼면 예뻐진다고 하는 셈이다. 먹고 마실 것을 탐하는데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어쩌다 열심히 노력해 성공해도 잠시만 방심하면 요요현상이 도져 이전보다 살이 더 찐다. 살 빼면 예뻐지고 서로 사랑하면 부부와 가정이 회복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할 수 있는 말이다.
문제는 인류는 유사 이래로 동일한 문제로 고통을 겪고 동일한 해법으로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모순과 갈등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더 심해져 간다. 그럼 결국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 바로 인간 자체가 문제다. 인간에게 사랑하고 용서할 용의는 있다. 실제로 열심히 노력해서 가끔 성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상, 철학, 도덕, 종교는 서로 사랑하자는 것을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최고 가치 있는 계명으로 내세우고 지금껏 앵무새처럼 외쳐왔다.
성경은 인간에게 사랑할 소망만 남아 있다고 선언한다. 다른 말로 인간본연의 특성에서 사랑할 능력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 갑부인 빌게이츠가 자기 재산의 거의 전부를 지금 아프리카 구호사업에 쏟아 붓고 있다. 그럼에도 아프리카의 인종, 도덕, 경제, 정치적 빈곤과 고통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분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솔직히 우리 각 자를 되돌아보자. 죄는 가만히 노력하지 않고 있어도 너무나 쉽게 자주 짓는다. 때로는 재미와 스릴마저 느낀다. 반면에 선은 아무리 쥐어짜듯이 노력해도 너무 행하기 힘들지 않는가? 내가 빌게이츠가 같은 부호가 되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슈퍼로토에 걸린 자들의 말로는 하나 예외 없이 비극으로 끝났지 않는가?
인간은 절대로 주변 여건이 풍부해진다고 인간 내면까지 풍부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 내면이 풍부해져야 자기 주변 여건까지 풍부히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부터 원래 그렇게 만드셨다.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릴 직분을 주기 위해서다. 인간의 외부는 하나님이 풍부하게 주셨다. 선악과를 빼고는 마음대로 먹게 하셨고 본문에서도 땅을 황폐케 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담에게 내린 형벌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인간이 열심히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훈련하고 실천했지만 그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갔고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는 것 아닌가? 인간 스스로의 사랑할 소망과 의지만으로 행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참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없음을 몰랐던 것인데 그렇게 된 까닭은 하나님 그분을 외면 배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분리되기 전까지는 아담과 이브는 정말로 뼈 중의 뼈처럼 서로 사랑했다. 감출 것 하나 없어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들부터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 자신 속에 그분의 사랑이 사라지자 곧바로 부부 사이에도 서로 잘못을 전가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붙여준 남편이, 아내가 없었다면 나 혼자선 선할 수 있었다고 큰소리치는 너무나 비겁하고 치사한 존재로 전락했다. 사랑할 능력을 상실한 인간에게 서로 사랑하자는 것은 너무나 의미 없는 해결책이다. 모든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의 원천이자 공급처인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는 인간은 절대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벌은 다시 말하지만 개인의 일상사의 고난이다. 땅 자체를 황폐화시킨 것이 아니다. 전후 문맥상 땅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을 뜻한다. 땅을 지배하는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영역이다. 물질이 전부이기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만들 것만 추구한다.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은 것으로 자기를 치장해 자랑하려 든다. 경쟁은 불가피하다. 문제, 고난, 불공평, 모순, 갈등, 분쟁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아담더러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벌은 또 무슨 의미인가? 일차적으로 인간도 그 육신은 물질이므로 수명이 다하면 죽어서 땅에 묻혀 썩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생은 무상하고 어차피 그런 것이니까 인생에 대해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그쳐선 안 된다. 땅에서 취함을 입었으니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인간된 신분과 위치를 정확히 알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땅만 바라보고 살면 평생 땅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는다는 것도 땅의 소산만 바라면 땀만 흘리다 끝나는 즉, 기껏해야 죽지 못해 생존만 하는 인생을 끝난다는 것이다.
반면에 또 그러니까 더더욱 땅에서 살되 하늘을 향해 손을 든다면 그 인생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땅에 죄인으로 들끓어 아무리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무성해져도 그래서 신자의 현실에 고난이 그치지 않아도 날마다 하나님의 생기를 날마다 받아 생령이 되면 정말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 내면의 영혼에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평강, 위로, 기쁨, 만족, 자유가 넘치게 된다. 인간은 땅을 다스려야 하는 존재이지 땅에게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결코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땅을 다스리라는 인간에게 내린 첫째 명령을 재확인한 셈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는 절대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사실을 모른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로 타락한 본성의 실체다. 그 사랑은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서의 인간의 죄를 위한 화목제로 십자가에 먼저 죽이시는 모습으로만 온전하게 드러났다. 또 그 십자가로만 세상에 공급된다.(요일4:9,10)
신자는 예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자신의 연약함, 무능함, 특별히 사랑할 소원은 있으나 능력이 없음에 대해서 겸허하게 실토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채워져야 비로소 우리를 통해 다른 이에게 전달될 수 있다. 예수 십자가 안에서 타인을, 남편과 아내를 바라볼 때에는 결점과 허물은 사라지고 모두가 너무나 불쌍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사랑이 필요 없는 자가 없음을 알게 된다.
예수 안에서 예수 사랑으로 채워져야 다른 이도 그가 받은 예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 외의 인간 스스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지금 기독교 교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절감했던 지난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정말로 순전한 사랑을 부부사이에도 도무지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실상이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에 그래서 예수 십자가 사랑에 다시 푹 잠겼을 때에 사랑은 몰라도 비로소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었지 않는가? 그래서 주변 모두가 나처럼 불쌍하지 않은 자 없음을 깨닫게 되고 또 예수를 모르는 자가 가장 불쌍해졌지 않는가?
로봇의 지배를 받게 될 인류
지금 인류는 로봇이 인간 활동의 거의 전부를 대신 감당해 줄 너무나 편리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와 동시에 결국은 로봇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며 곧 닥칠 그 때를 대비해 대응책까지 논의하고 있는 단계다.
이 또한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인간이 스스로 생각 분석 선택 판단 결정 시행하는 일이 너무 귀찮고 싫어서 로봇을 고안해냈다. 그럼 인간 대신에 생각하는 로봇이 아무 생각도 않는 인간을 지배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인간은 또 그렇게 될 사태를 염려하고 있으니 또 다른 자가당착이다.
물질이 전부가 아님을 지금껏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물질이 풍요해지면 인간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고집하는 너무나 완악한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인간은 또 하나님의 실존여부를 먼저 확정한 후에 그분이 불공평하다고 따져야 함에도 거꾸로 따지는 너무나 어리석은 존재다. 이런 어리석음과 자가당착 또한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이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지언정 상충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이해 수준이나 감정의 변화와 무관하게 거룩하신 그분은 완전한 진선미로서 창세부터 영원토록 실존하고 통치하고 있다. 특별히 십자가 사랑 안으로 돌아온 신자와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동행하여 보호 인도해주신다.
본문은 하나님이 이 땅을 파괴했다는 형벌의 기록이 아니다. 하나님을 거부하여 이 땅에 속한 자들로 인해 땅이 더렵혀질 것이라는 예언이다. 최근의 오존층 파괴만 해도 부자 나라가 먼저, 그것도 기독교 사상으로 건국한 미국이 가장 앞장섰지 않는가?
사방대적을 멸하고 이스라엘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다윗 왕이 인구조사를 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도 그 믿음이 좋은 다윗조차 잠시 그 사실과 진리를 망각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 내지 과신하려고 군대 수자를 헤아린 것이다. 그 때도 하나님은 염병과 자연재앙과 대적침입 중에 받을 형벌을 고르라고 했다. 벌을 바로 주지 않고 고르라고 하시는 그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정말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헤아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참으로 정미하다 못해 흥미롭기까지 하다. 인간은 하나님이 부재하고 자기들끼리만 있으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가 충만해지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했고 또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지금 인류 역사상 최고로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가 많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살만한 가치와 의미는 역사상 최저치로 낮아졌고 장래 꿈마저 완전히 상실되었다.
살 가치가 없다면 무슨 뜻인가? 실질적인 죽음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정녕 죽을 것이라는 선악과 금령이 말하는 바대로 되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땅만 바라보는 아담의 후손들이 받을 벌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심판이라는 것이다. 대신에 십자가 안에 있는 신자는 진정한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을 주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다, 부부사이, 가정, 교회, 사회를 예수님 사랑으로 회복시키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 이 땅의 미래도 충분히 살 가치와 의미 있게 만들 수 있고 하늘에는 영광스런 소망까지 이미 확보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얼마나 큰 축복이자 특권인가?
11/15/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