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가죽 옷에 숨겨진 비밀
창세기강해 (35)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0,21)
긍휼의 심판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에게 각각 형벌을 부가했다. 그런데 벌은 벌이되 실은 원래의 창조질서와 선악과 금령을 주신 의미를 회복하는 절차였다. 이브는 자녀를 출산 양육하고 남편을 섬겨야 했다. 그럼으로써 아담을 가정의 영적 지도자로 세운 결혼제도를 창설하신 목적을 재강조한 셈이다. 자연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다는 것도 아담과 이브 즉, 모든 사람이 서로 도와서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가꿔야 할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다시 일깨워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안에는 사실 하나님만의 긍휼이 풍성히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겪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숨겨져 있다. 아담과 이브는 이 사실을 그런대로 이해하고 감사한 것 같다. 우선 아담이 이브를 하와라 불렀다.(20절) 처음에 하나님이 이브를 아담에게 데려 왔을 때는 여자(이브)라고 칭한 것과 대조된다.(창2:23) 자기를 돕는 배필로 아직은 연인, 잘 해야 아내라는 뜻이다. 자기중심적인 측면에서만 감사한 것이다.
지금 범죄 했음에도 하나님은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 나아가 이브를 생명의 통로로 삼아서 인류를 번성케 하는 복을 주었다. 아담은 그래서 모든 산 자의 어미라는 의미로 하와로 칭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에 동참하게 됨에 감사했다. 감사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님의 일군으로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적 차원에서 감사했다.
아담은 여자의 후손이 와서 자기들을 죄에 빠트린 뱀(사탄)의 머리를 깰 것이라는 약속을 상기한 것이다. 물론 이 당시로는 그가 그리스도가 동정녀에서 탄생해 십자가 대속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계획과 의미는 전혀 몰랐다. 여자는 이브뿐이고 그 이름도 자기가 붙였다. 여자의 후손은 바로 이브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그 약속이 자기 아내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최소한 뭔지 몰라도 장래에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일으키는 시발점이 자기 아내가 된다는 점은 인식했다. 벌 받으리라 기대했다가 정말로 황송해서 고개도 들지 못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사고로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표출하고 장래를 예시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정체성과 인생의 의미를 확정하는 뜻이 있다. 아담이 이브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거나 여자에 비해 우월하다는 뜻은 없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벌로써 당신의 뜻을 재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제부터 자기들 부부관계를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보호와 인도 아래 두고 순종 헌신하겠다는 고백이자 첫 실행이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통해 이루실 계획을 깨닫고 아담은 그분의 뜻 즉, 가정의 영적 지도자라는 자신이 맡은 바 위치에 자기를 바로 세운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그 은혜를 받아본 자라면 마땅히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그대로 반응한 것이다.
분리를 회복하려면?
살펴본 대로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다. 그 결과 자기가 자신과도 분리되고 그 후에는 이웃과도 분리된다. 지금 이들 부부는 죄에서 구원 받아 회복되어야 한다. 또 그러려면 반드시 분리된 것을 다시 연합시켜야 했다.
주목할 것은 우리 상식으로는 범죄는 인간이 저지른 것이고 분리도 인간이 능동적 고의적 적극적으로 자초했기에 다시 연합할 책임도 인간에게 있을 것 같다. 또 연합의 순서도 분리된 것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범죄를 하자 부부끼리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아무리 감춰도 부끄러웠다. 그럼 부부가 먼저 서로 용서 화해한 후에 하나님에게 나아가 우리는 회개했으니 용서해달라고 해야 옳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찾으셨다. 형벌을 가했지만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가 포함된 회복의 절차를 그분이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밀었다. 용서는 그 본질상 피해자가 주도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하는 것은 보상책임을 다하는 것이고 그 후에 피해자의 처분만 기다려야 한다.
지금 하나님은 인간에게 형벌 아닌 형벌을 가함으로써 일단 가해자에 대한 보상의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미 인간의 영혼은 타락했다. 인간 쪽에서 주도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없었다. 오직 자기가 주인 되려는 고집 때문에 그럴 능력조차 없었다. 하나님은 지금 그런 점까지 감안하셨다.
무슨 뜻인가?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이 인간적 상식과 통념처럼 자기 스스로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고 인간 사이에 사랑을 회복해야만 하나님이 당신과의 관계도 복원해주는 것이 아니다. 죄의 시발과 원인이 하나님과 분리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연합을 인간 스스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
거기다 지금처럼 범죄 한 이후의 단계에선 하나님 쪽에서 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범죄 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아니 더 넘친다는 인식을 인간더러 확고하게 인식시켜주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죄 중에 있는 인간으로선 끝까지 하나님과 관계가 미안하고 어색한 채로 남게 된다.
실제로 본문의 단계에선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에게 여전히 죄책감과 수치와 두려움의 감정이 많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조차 완전히 해소시켜줄 필요가 있다. 인간이 아무리 잘못해도 벌만 주고 끝낼 수는 없다. 아이들 잘못하면 가정의 질서를 세워야할 아버지는 야단치고 벌주지만 사랑으로 양육해야 할 엄마는 나중에 몰래 달래지 않는가? 하나님으로선 인간과의 뭔가 불편한 관계를 가시적으로 확실하게 회복할 절차를 시행해야 했다.
구원을 주도적으로 시작하는 하나님
아담과 이브는 범죄 한 직후에 자기들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지어버리고 거역하여 자기들이 세상 주인 노릇하려 했다. 사탄의 꾐대로 지혜가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는 존재가 되어서 자기 멋대로 에덴을 통치하려는 분수에 맞지 않는 아주 건방진 꿈을 꾸었다.
결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전혀 의도는커녕 예상도 못했는데 순간적 자동적 불가항력적으로 수치와 공포가 엄습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당장에 순전하게 사랑했던 부부사이에도 서로를 못 쳐다볼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급하게 나뭇잎으로 가렸으나 여전히 쑥스럽긴 마찬가지고 더 괴롭게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졌다.
기억할 것은 이들은 아직 죽음의 실상과 의미를 전혀 몰랐다. 단지 그 전에 누렸던 기쁨, 순수함, 충만함, 선함 같이 내면의 긍정적 측면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은 알았다. 나아가 정반대의 갈급함, 눌림, 염려, 혼란스러움 같은 부정적 요소로 가득 찼기에 나무 사이에 꽁꽁 숨어버렸다.
에덴에 기후변화가 닥쳐 추워져서 나뭇잎 옷을 지어 입은 것이 아니다. 땅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기 전이었다. 내면을 가득 채운 수치와 공포를 스스로 자기들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었으나 무참히 실패한 것이다. 인간 영혼에 이미 똬리를 틀고 있는 죄의 본성 즉, 자기가 주인이 되려는 끈질긴 성향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게된 것이다. 선은 오직 하나님께로 오기에 그분을 떠나선 어떤 선한 결과도 맺을 수 없다. 아담과 이브는 지금 그런 진리를 눈치도 못 채고 있다.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가죽옷을 지어 입힐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21절) 주도적으로 구원의 절차를 시행한 것이다. 이 본문은 정말로 두렵고 떨리며 너무나 정미한 은혜의 말씀이다. 문자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말씀이다. 잠시 당시의 아담과 이브의 입장에서 말씀을 추적해야 그 은혜를 제대로 실감할 수 있다.
육신적 죽음을 처음 보는 인간
가죽옷이 하나님이 최고급으로 내구성이 강한 말하자면 명품 브랜드의 옷을 만들었다는 간단한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경고를 했지만 아담과 이브는 육신의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 대신에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혼의 죽음이자 실질적 죽음만 체험했다. 지금 그런 죽음조차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처절히 느꼈고 스스로 그 고통에서 탈피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한 후다.
가죽 옷을 지어 입히려면 반드시 짐승을 죽여야 한다. 무슨 뜻인가? 최초의 인간들은 동물이긴 해도 육체의 죽음을 자기 눈으로 처음 생생히 목격한 것이다.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의 에덴동산에는 죽음이 없었다. 어떤 부정적 현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풍요로움의 극치였다.
과일과 채소는 완전 무공해 organic이었고 공기에 티끌 하나 없었으며 물은 정수하지 않고 그대로 마셔도 약수 그 자체였다. 어쩌면 아직 낙엽도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계절은 분명 있었으나 봄의 신선함과 여름의 풍성함만 누렸을 것이다. 동물들도 서로 물고 뜯어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뱀도 노아홍수 전인데다 상징적이긴 해도 하나님께 벌 받은 대로 땅의 흙만 먹었을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수명과 수태기간이 짧은 다른 동물이 새끼를 낳아 생육 번성하는 모습은 보았을지 모른다. 쉽게 말해 아담과 이브는 육신의 생명의 소중함을 아직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이 없으면 생명이 끊기고 생존조차 못한다는 인생에서 가장 간단한 원리도 체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보존해 주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도 첫 째 가는 감사마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이 호흡이 끊기고 생명이 단절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냥 죽인 것이 아니다. 가죽 옷을 지어 입히려면 껍질을 다 벗겨야 한다. 처음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어 벌벌 떨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꽁꽁 얼어붙었을 것이다.
동물의 피는 왜 붉은가?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이 얼마나 정미한지 모른다. 색깔을 인식하여 감정에 변화가 생기고 그 감정 변화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입고 먹고 사는 것을 colorful하게 디자인하고 장식하는 일은 다른 피조물은 전혀 하지 못한다. 인간이 똑똑해서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부여한 특성이자 선물이다.
오래 전에 TV에서 큰 인기를 끈 SF 시리즈물 V에 외계인의 피가 초록색으로 묘사되었다. 파충류의 징글징글한 모습을 더 강조하려는 연출자의 의도였다. 영화이기에 그렇지 짐승의 피도 빨간 색이다. 만약에 빨강이 아니라 노랑이나 흰색이었다면 강렬한 느낌이 훨씬 부족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경감된다. 아담과 이브의 눈앞에 짐승의 진홍빛 피가 땅에 쏟아졌다. 너희의 죄가 이처럼 땅을 더럽힐 만큼 강력하고 지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 외에는 너희 죄 값을 갚을 길이 없다고 하나님이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짐승은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어린 양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져서 안 보이는 곳에서 잡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이 풍부해도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들에게 선악과 금령의 목적을 다시 상기시키고 영적 교육을 시키기 위해,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들 눈앞에서 죽였을 것이다.
그들로선 여자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대신 죽음으로써 사탄의 모략을 원천무효 시킬 것이라는 창3:15 원시복음의 의미를 알 수는 없다. 단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자는 정녕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 했는데 그 사형을 하나님이 지금 그들 눈앞에서 실연해 보인 것이다. 나중에 아벨이 하나님께 양으로 제물을 바쳤는데 스스로 아이디어 낸 것이 결코 아니다.(창4:4) 부모에게서 이 사건과 그 깨달은 감상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어린 양은 죽기 직전에 두려움에 떨며 한창 바둥바둥 했을 것이고 사지를 비틀다 결국은 꼼짝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호흡은 중단되고 미동도 하지 않게 되는 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의대생들은 생체가 아닌 시체로 해부학 공부를 하는데 그것만으로 중도에 공부를 포기하는 자가 있고 대분의 학생이 졸도 혹은 구토를 한다.
하나님은 지금 최초 인간들 앞에 최초로 생체해부를 했다. 생명과 죽음을 극명하게 대조시켰다. 선악과 금령을 어겼을 때에 정녕 죽는다는 것이 엄포가 아니라 바로 저런 상태를 뜻하는 것인 줄 말하지 않아도 깨달았을 것이다.
아담과 이브로선 단순히 가공할 두려움에 휩싸인 정도가 아니다. 인간은 도무지 어찌 해볼 수 없는 모든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인간의 통제는 물론 계획 예상할 수 있는 범위의 밖이다. 자기 인생에 본인마저 절대로 관여할 수 없는 차원이 있는데 바로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다.
자기 인생의 주인조차 될 수 없는 그런 형편에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같이 되고 그분을 제거한 후에 이 땅을 제 멋대로 다스리려고 설쳤던 일이 얼마나 부끄러워지고 두려워졌겠는가? 다리에 힘이 다 빠지고 입은 얼어붙고 심장이 멎는 듯 했을 것이다. 잠시나마 정말로 육신의 죽음과 방불한 상태에 빠졌을 수 있다. 그들로선 오늘날 어려서부터 병아리 토끼 벌레 같은 것들의 죽음에 익숙한 우리와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 그야말로 천지가 완전히 뒤집히는 일이었다.
공포를 넘어서는 감사와 찬양
지금 하나님이 단순히 선악과 금령을 다시 세우려는 뜻이 아니다. “두 번 다시는 어기지 말라. 그럼 바로 이런 꼴이 된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죽음과 방불한 상태가 조금 지나 진정이 되자 아담과 이브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가장 먼저 하나님이 우릴 저렇게 벌을 줄 수 있는 분인데도 그러지 않고 살려주었다고 깨달았을 것이다. 죽음과 대조하여 살아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며 감사하고 기쁨이 넘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생명의 활력, 풍요함, 아름다움 등등을 호흡하는 순간순간마다 절감했지 않겠는가?
거기다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은 이브에게 잉태의 고통은 있지만 생명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아담도 이브와 한 몸을 이루어 그 풍성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 아담과 이브는 서로 한 몸이 되지 않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음도 알았다. 동성애는 바로 그래서 죽음을 전파하는 문화다. 아담과 이브는 지금 부부로서 다시 사랑으로 뭉쳐야만 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선악과 금령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죽음의 실체를 모르니 아주 가볍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양의 죽음까지 목격하고 나니까 그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정확이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품 안에 남아 있어야만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비로소 아담과 이브로선 산 자의 아비와 어미가 된 것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혀주는 순간 어떠했을지 한 번 상상해보라. 눈물 콧물 다 흐르며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 감사, 찬양, 찬양이 저절로 튀어나왔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절감했다가 이제는 그것을 망라하고 넘어서는 너무나 부요한 사랑의 바다에 푹 잠겼을 것이다.
도저히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그 거룩하심을 가죽 옷이 몸에 밀착되듯이 피부로 실감했을 것이다. 그분 앞에 완전히 꿇어 엎드렸을 것이다. 저절로 기꺼이 자발적으로 순종 헌신을 결단했을 것이다. 이젠 두 번 다시는 하나님의 품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겠다고....
자기들이 그렇게 죽었어야 하는데 양을 대신 죽이고 자기들을 살려주셨다. 그들로선 다시 사는 제 2의 공짜, 덤의 인생이다. 주님이 죽으라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옛사람은 죽었고 지금도 언제든 죽을 수 있기에 죽음마저 두렵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하나님과 분리된 영혼의 실질적 죽음이 얼마나 갈급하고 허망하고 염려 불안스러운지 이들만큼 잘 아는 자는 없다. 죄가 없었던 충만한 상태를 체험한 유일한 인간이다. 까닭 없이 눌리고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나빴다는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자연히 그런 삶으로는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 첫 사랑을 기억하는가?
서두에 그들의 입장에 우리 자신을 대입해야만 본문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인 줄 실감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와 동일한 체험을 한 자다. 에덴동산의 이 현장에 영적으로 동참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근본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의 품 밖에 있었더니 처절한 실패요 죽음과 방불했다는 점을 삶에서 피부로 절감한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 없이는 살 가치와 의미도 없음을 깨달은 것 아닌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갈급함과 허망함 가운데 있을 때에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주셨지 않는가? 그래서 “OOO야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정녕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다. 내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오너라!”는 따뜻한 음성을 들었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날 때부터 앉고 일어섬과 입술의 말과 마음의 생각까지 다 알고 계셨다. 정확하게는 그분이 그분만의 주권으로 인도하셨다. 우리가 그분을 알고 믿으려는 의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열성과 권능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서 다시 살리셨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몰랐던 지난 삶이 처절한 실패였다는 깨우침과 또 그래서 두 번 다시는 그 때처럼 하나님의 품 박으로는 나가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게 해주었다. 실제로 신자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예수님을 맨 처음 인격적으로 대면했을 때 사람마다 그 구체적 방식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신 그 엄위하신 공의와 풍성하신 사랑 앞에 눈물콧물 흘리면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체험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 그런 온전한 헌신과 환희에 찼던 감격을 유지하고 있는가? 감정적인 절정과 충만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인생을 살기로 결단했기에 그렇게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 앞에 자발적으로 엎드려 헌신 순종을 결단했던 첫 사랑이 살아 있는가?
이 질문에 당당히 예스하지 못하면 이상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가죽 옷으로 바꿔 입힌 까닭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양의 가죽옷은 아담과 이브의 피부와 밀착되어져 몸의 일부가 되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시를 평생 몸에 지니듯이 가죽옷을 볼 때마다 죄에서 구원 받은 감사 찬양과 헌신의 결단을 상기하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에겐 최초의 양의 해부는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사건이었다. 가죽옷은 하나님이 죽음과 생명을 주관하는 이라는 것뿐 아니라, 죄에 빠졌던 자기들을 건져서 새롭고 활기차며 거룩한 인생을 살게 해주는 이도 오직 그분뿐임을 뜻한다. 그 옷을 입고 있는 동안에 감사와 찬양이 끊일 수 없다. 호흡이 있는 동안에 그분과 함께 기뻐할 수 있다.
이런 경이롭고 엄청난 대속의 구원을 직접 눈앞에서 수여 받았다. 아담과 이브의 구원은 우리와 다르다.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으로 하나님이 직접 베풀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영혼은 죄로 이미 오염되었다. 여전히 연약하여 가끔 부부싸움은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직접 지어 입힌 가죽옷으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할 것은 그 이후로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다는 의미다.
우리도 이미 하나님의 가죽옷을 입고 있는 자다. 우리 스스로 만든 나뭇잎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권능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럼에도 우리 또한 죄의 본성이 살아서 연약하여 쓰러질 때 많다. 특별히 죄인끼리 결혼이라 부부싸움에서 자유로울 자 아무도 없다. 스스로 나뭇잎 치마를 만드는 인간적 노력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 십자가의 은혜와 권능 안에 다시 잠겨야 한다.
그럼 우리 죄가 아무리 주홍 같을 지라도 양털처럼 희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다. 그것만이 이 땅에서의 제한된 인간이 자기 생명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불신자는 죽음의 공포가 너무 두려워 죽지 못해 겨우 연명하며 살고 있는 자다. 반면에 신자는 잘 죽기 위해서 사는 자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다. 죽어도 사는 자요 영원이 사는 자가 신자다. 바로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가죽옷에 숨겨진 뜻이다.
12/13/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