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에 숨겨진 하나님의 첫째 비밀
창세기 강해 (36)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0,21)
많은 신자들이 창세기의 기록이 조금만 더 자세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진다. 창조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육하원칙에 따라 그 일정과 순서와 방식을 밝혀 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럼 과학적으로 실증하여 진화론을 믿는 불신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자신이 있을 것 같다.
에덴동산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진술이 되어있고, 선악과나무가 남아 있고, 가죽옷의 유물과 동산의 유적이 발굴된다고 상상해보라.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불신자들의 전도가 쉽고 최소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림 없이 견고해질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수한 동기는 이해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더 부패해 있다. 신자의 이런 기대는 사실은 어리석은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신자가 가져선 안 되는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을 충분히 계시하시는 하나님
도무지 이해도 안 되는 극심한 고난을 두 번 거푸 겪은 욥의 믿음은 아주 신실했다. 모든 자식을 졸지에 다 잃었는데도 생명을 주신 이가 하나님일진대 다시 앗아가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하며 입술로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그것도 가장 흉악한 죄인도 겪지 않을 고통을 겪자 그 이유만이라도 알고자 하나님과 씨름했다.
하나님은 욥에게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에 약 100개가량의 질문을 던졌다. 고난에 관한 종교적 영적 원리나 의미와 연관되는 질문이 아니었다. 일상에서 보고 체험하는 자연의 섭리에 관한 질문뿐이었는데도 욥은 전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과학으로 실험하고 인간의 지혜로 분석 가능한 대상인 물질계의 운행에 관해서도 인간은 완전히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 하늘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인간사와, 특별히 인간 내면의 영혼까지 세밀히 다스리는 원리의 관해선 더더욱 모를 뿐이다. 설명해주어도 모른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욥이 결국에는 어떤 고백을 했는가? 무소불능이신 하나님은 무슨 경영이든 못 이룰 것이 없으니 무지한 말로 깨닫지도 헤아리지도 못할 일을 거론했다고 실토했다. 자신의 너무나 어리석음은 물론 감히 하나님께 따져보겠다고 덤빈 교만을 철저히 회개한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할 뿐 아니라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고 당신만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분이 신자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완전하신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이다. 일어난 일이 이해되고 그것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믿음 없이도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그분에 비추어 주변여건을 적용 판단해야지 주변여건 그것도 겉모습만 갖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은 불경하다 못해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해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은 아예 몰라야 한다든지 몰라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쉽게 말해 일단 무조건 믿고 보는 것이 좋은 믿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일방적 독선적 소위 말하는 불통이라면 당신을 계시하여 인간과 교통하려는 목적인 성경을 주실 리가 없다. 성경을, 창세기를, 오늘 본문을 앞뒤 문맥에 따라 하나님 그분의 성품과 성경전체에 드러난 통치원리에 비추면 하나님을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인지할 수 있다.
다시 오해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실체, 섭리, 주권을 하나에서 열까지 속속들이 알 수는 절대로 없다. 그렇게 시도하는 것조차 교만이자 불경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충분한 만큼은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은 그분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려야 하는 청지기 소명을 감당하는데 하나도 부족함이 없다. 또 그 일을 수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충족하게 누릴 수 있도록 성경에 당신을 계시해 놓았다.
신자가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도 맹목적으로 뜨거운 종교적 열성을 보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차피 신자로선 자기가 그분을 아는 만큼 밖에 반응을 못한다. 그 아는 범위가 아무리 작아도 성경의 진리대로 정확하게만 알고 있으면 기꺼이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헌신하며 순종할 수 있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아담
본문에 이르도록 성경이, 특별히 창세기3장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당신과 다시 연합시키는 그 모든 과정을 당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는 것이다.
인간 상식으로는 인간 쪽에 죄를 짓고 분리된 책임이 있으니 인간이 먼저 회개하며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아담아 어디 있느냐 찾으셨다. 그들의 형편을 알아보고 즉, 나뭇잎 치마가 불편한 것은 없는지 사정을 물어보고 그 답을 듣고서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이 아니다. 모든 사정을 꿰뚫어 아시고 먼저 주도적으로 행하셨다.
반면에 인간이 행한 일은 무엇인가? 아무 생각 없이 제 멋대로 설친 것뿐이다. 주목할 것은 추하고 더럽고 부정적인 요소가 단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행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순전한 교제와 동행이 얼마나 기쁨과 만족과 평안이 넘치는지 누려본 유일한 인간이었다. 문제는 너무 풍성하고 일상적이라 귀한지 몰랐던 것이다.
비유컨대 재벌회장 아들이 단 하나 부족한 것 없는데도 제 멋대로 망나니짓 한 것이다. 늙은 아버지 회장만 없다면 그 많은 회사를 자기 맘대로 운영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회장 아버지를 제거하고, 엄밀히 말해 죽여 없애고 회장 노릇하려 든 꼴이다.
너무 심한 비유인 것 같은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담과 이브의 실제 육신의 부모는 하나님이었지 않는가? 하나님이 잉태 출산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들이 존재케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했을 것 아닌가?
재벌 아들은 아버지 말만 잘 들으면 어차피 모든 것이 자기 것이었음에도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서 아버지를 회장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잠시나마 회장 노릇을 했다. 회장이 가끔 출근해선 자기가 추진하려는 야심찬 프로젝트에 제동을 거는 지시만 하는 것이 너무 싫고 귀찮았다. 하나님이 다른 모든 과일은 먹어도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것과 같다.
아들로선 나이 많은 구세대 아버지가 알면 뭘 알아?, 미국 유학 가서 최신 세계경제 흐름과 경영기법을 다 배워온 자기가 훨씬 잘할 것 같은 자신과 의욕이 넘쳤다. 아버지가 실제 경영일선에 체험하여 쌓은 경영 노하우가 훨씬 중요하다는 점은 몰랐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잠간의 회장 노릇은 무참한 실패로 끝났다. 계열회사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룹회장에 정식 임명된 아들
하나님이 지금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은 그런 아들을 다시 실제로 그룹 전체를 통괄하는 CEO로 정식으로 인정하고 임명한 셈이다.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브는 산 자의 어미가 되었다. 아담은 비록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하지만 이 땅을 다스릴 위치와 신분을 박탈하지 않았고 다시 확인해주었다. 청지기 직분에 복직시켰다.
자신을 제거하려고 왕자의 난을 일으킨 아들을 정식으로 회장으로 임명한 이유는 무엇인가? 노회한 회장은 기고만장한 아들이 그렇게 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실제로 혼자 경영해보라고 잠시 맡겼다. 자기 의욕과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뼈저리게 체험시킨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회장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멋대로만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자기의 자문을 받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을 줄 미리 아시고도 금령을 제정했다. 비록 죄가 세상에 들어와 인간에게 모순, 갈등, 상처, 고통을 안겨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면 너무나도 허망하고 갈급하다는 실질적 죽음을 체험케 하려는 것이다.
또 그래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하나님 없이는 한 시라도 온전한 인간으로 살 수 없다는 고백을 받으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순종 헌신하겠다는 소원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종교왕국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이 땅에서 반드시 누려야 할 근본적이고 첫째가는 복임을 알고 또 누리게 해주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뜻은 본문의 가죽옷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최대한의 노력보다도 하나님의 아주 간단한 보호가 훨씬 안전하고 풍요함을 깨닫게 해주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을 만들어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제정했다.(창1:14) 쉽게 말해 사계절을 만든 것이다. 그에 따라 추측하자면 아담과 이브는 새 생명이 태동하는 봄에 창조되었을 것이다. 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순전한 기쁨으로 교제 동행을 한 시기는 여름이었을 것이다. 선악과 외에는 모든 실과를 먹어도 된다는 금령은 풍성한 여름이라야 실효성이 있지 않는가?
최초인간들은 지금 가장 풍성한 시점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만들 수 없는 낙원에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범죄 했다. 이제 곧 만물이 시드는 가을과 추운 겨울이 다가올 것이다. 또 땅에는 인간 범죄의 결과로 상징적 표현이긴 해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나뭇잎 옷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기에 가죽옷은 필수적이었다.
양을 죽이는 천사의 출현
그러나 본문에서 정작 주목해야할 사항은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힌 시점이다. 당신을 거역한 죄를 원상회복시키는 과정의 맨 마지막에 이뤄졌다. 먼저 말로서 야단을 쳤다. 누차 강조한대로 당신의 창조 목적과 계획을 다시 확인시킨 것이다. 그 후에 죄를 대속하는 양을 죽이셨다.
이 때 하나님의 실체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천사의 모습으로 현현했을 것이다. 본문에 그런 진술이 없으니 무리한 해석이라고 반발할 수는 없다. 우선 하나님의 실체를 봐선 이미 죄에 빠진 아담과 이브도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화 Iron Man처럼 레이저 광선을 비춰서 아담과 이브가 입고 있던 나뭇잎 옷을 자동으로 벗기고 가죽옷이 철거덕 입힌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선 그들로 반드시 양이 죽고 가죽이 벗겨지는 것을 목격시켜야 했다. 양을 실제로 죽이는 사람이 필요했다. 아담과 이브가 인간의 모습을 한 그 천사를 보는 순간 성령의 권능과 영광의 광채가 넘침을 감지했을 것이다. 최소한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인식하고 저절로 그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천사는 바로 한 손을 그들 머리 위에, 다른 한 손은 양의 머리 위에 얹었을 것이다. 그들의 죄를 양에게 전가하는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는 중보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 기도를 듣는 순간 감격에 넘쳐 꿇어 엎드린 아담과 이브의 무릎은 사시나무 떨 듯 떨렸을 것이다.
또 양손이 자기들과 양의 머리에 얹힘으로써 자기들과 양이 일체화됨을 단번에 깨달았을 것이다. 그 양이 피를 쏟고 죽는 순간 어쩜 자기들도 그렇게 죽이려나보다 여겼을 것이고 가죽을 벗길 때는 정말 숨도 쉬지 못하는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뭇잎 옷을 벗기고 가죽옷을 입혀주지 않는가? 얼마나 안도하고 평안해졌을까? 완전히 살았다 싶었을 것이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는가? 그 위에 너무나 신기하게도 그전까지 그렇게 부끄럽고 두려웠던 모든 부정적 감정이 일시에 사라졌다.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생기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큰 기쁨의 구원의 새 노래가 가슴에 가득 찼을 것이다.
순서에 주목하라.
자주 드는 비유지만 이해하기 가장 쉬워 다시 들겠다. 엄마가 외출하면서 아이들더러 조용히 공부 열심히 하라고 숙제를 내주었다. 돌아와서 숙제 하지 않았으면 회초리 백 대를 때리겠다고 서로 단단히 약속했다. 그런데 엄마가 귀가했더니 아이들이 숙제는 하지 않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이들은 설마 엄마가 우릴 백 대나 때리겠는가?, 그냥 겁주려 한 것이지, 때려도 한두 대 때리고 말겠거니 여기고 맘껏 논 것이다.
돌아온 엄마는 어떻게 했는가? 먼저 단단히 말로 야단쳤다. 동시에 공부를 잘 해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알아듣도록 잘 가르쳤을 것이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엄마는 사정없이 자기 종아리에 회초리로 한 대도 감하지 않고 백 대를 때렸다. 당연히 피가 흘렀고 그 광경을 본 아이들이 손발을 빌며 제발 잘못했으니 그러지 말라고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아이로선 무섭고 엄마가 안쓰러워 그럴 수 있다. 엄마의 뜻은 더 깊은 데 있었다. 벌을 주는 순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엄마가 귀가하자마자 먼저 자신을 때린 후에 야단을 치는 것과 어떤 점에서 다르겠는가?
먼저 자신을 때리면 아이들은 그냥 무서워서 맹목적으로 그 다짐을 따르게 된다. 엄마로 다시 피 흘리게 할 수는 없다. 본문으로 따지면 애꿎은 양만 또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의무감과 죄책감으로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엄마에게 약속할 것이다. 말하자면 엄마를 위해서 혹은 엄마 때문에 공부하는 것이다. 자신의 유익과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헌신은 아무래도 많이 부족하다.
반면에 본문처럼 말로 엄하게 야단을 치고 약속을 다시 상기키면 죄에 대한 처리는 이젠 끝났다나 보다 여기게 된다. 더 이상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가보다 안심할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당신을 벌을 주면 엄마는 그 규칙과 약속을 이처럼 귀하게 여기는가보다, 정말로 우리에게 소중한가보다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정미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마지막에 엄마가 자기를 벌주는 순서가 없었다면 아이들이 다음에 동일한 죄를 지어도 말로만 야단치고 말겠구나, 다른 말로 그 규칙은 어겨도 큰 벌이 없을 만큼 별로 중요하지 않은가보다 오해할 소지가 있다. 대신에 아이들부터 백 대를 때리면 실제로 죽을 뿐 아니라, 산다고 해도 자기들 죄 값을 다 치렀기에 아주 떳떳해진다. 자기들 잘못을 다시 상기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거역한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를 엄하게 야단치면서도 따뜻한 사랑의 기운이 풍겼을 것이다. 거기다 그분의 말씀은 따로 보장이 필요 없을 만큼 그 자체로 권능이 있다. 말하자면 당신과의 관계 복원하는 절차를 당신께서 다 마쳤다. 그런 후에 양을 죽임으로써 선악과 금령을 문자대로 실현했다. 그럼 선악과 금령을 당신께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또 아담과 이브에게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 계명인지 그들의 뇌리에 완전히 각인되었을 것 아닌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말한다.
항상 가장 중요한 내용은 맨 마지막 결론에 드러난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지막 구절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작 아담과 이브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엄하게 야단 친 형벌의 내용이 아니다. 당신의 품을 절대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실패와 절망을 넘어서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당신을 순종하라고 종교적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려면 말로 타이를 필요 없이 죄를 지을 때마다 회초리를 직접 때리면 누구라도 순종한다. 양을 대속 제물로 죽일 때에 아담과 이브는 자기들 유익을 위한 것임을 절감했다. 선악과 금령이 정말로 생명과 죽음으로 나눠지는, 구원이자 심판을 보장하는 약속임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자가 의무감 죄책감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려 해선 허사로 시간낭비일 뿐이다.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요 정작 자신의 성장도 없다.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약속이란 신자로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진짜로 죽음이요, 그분이 함께 하면 진짜로 생명임을 아는데 어찌 자기 전부를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담과 이브는 양과 일체화 되는 제사의식을 통해 실제로 죽었다 살아났다. 그 후의 그들의 믿음은 설명하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오직 한 가지만 요구하신다. 인간을 향한 유일한 관심이자 소망이다. 당신의 자녀를 다스리는 절대적 원리 하나를 체험적으로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내 품 안에 남아 있는 한에는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풍성하게 베푼다는 것이다. 사치하고 화려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인간답게 참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며 살 수 있는데 절대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아버지를 죽이고 재벌 회장 자리를 차지하려는 망나니, 아니 천하의 패륜아도 정식으로 회장 자리에 앉혀 주신다는 것이다. 자기 옛 사람이 죽었다면 말이다. 또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자기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한 자라면 저절로 하나님의 그 사랑에 항복할 수밖에 없다.
성경이 말하는바 한 가지.
결국 성경의 창조 기사는 선악과 금령으로 시작해서 선악과 금령으로 끝나는 셈이다. 너희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그 중에는 간음 도적질 폭행 심지어 살인을 해도 딱 하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을 깨끗이 용서해준다는 것이다. 동산 과일을 다 먹어도 되는데 선악과만 따먹지 말라고 했지 않는가?
창조의 기사가 인간의 기원이 진화가 아님을 밝히는 정도가 아니다. 선악과 금령으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은 예수 십지가로 시작해서 예수 십자가로 끝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인종, 피부색깔, 언어, 문화, 심지어 종교로 절대 차별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죽기까지 사랑하는 이 십자가의 사랑만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럼 나도 너희들을 있는 그대로 용서해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예수 십자가 구원을 예비해 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여서 마지막에 가죽옷까지 입힌 것은 미리부터 계획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 인간을 구원하려 창조했다. 예수에 의해서 예수를 위하여 그래서 예수 안에 머물게 하려고 창조했다.
창조의 기록이 모호하지 않고 더 자세히 되었다고 해서 진화론자를 전도하지도, 코를 납작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창세기 1;1의 창조선언은 다른 말로 지금부터 예수 십자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뜻이다. 성경은 예수 이야기에서 시작해 예수 이야기로 끝난다. 인간이 인간으로써 참 생명을 누리는 길은 예수 안에서 뿐이라는 것이다.
금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주일이다. 진짜 생일은 아닐지라도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그분의 오심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나름의 분명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성탄절을 단순히 축하해선 안 된다 교회에서 찬양예배하고 성찬을 나누는 것으로 그쳐선 큰 의미가 없다.
정말로 심각하게 신자 각자가 또 그 소속한 교회가 예수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올 한해에 한 순간이라도 그분의 품을 벗어나지 않았는지 따져봐야 한다. 고난과 문제 있었을 때보다는 풍요로웠을 때를 더 더듬어봐야 한다. 주일마다 예배에 성실히 참석했고 교회의 직분을 맡아 열심히 봉사했고 심지어 매일 아침 큐티를 한다고 예수 안에 있다고 섣불리 확신해선 안 된다.
자신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선악과 금령과 가죽옷에 숨겨진 진리와 은혜에 따라 온당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리를 알고 있고 그것이 자신의 전부를 걸만한 기쁨과 만족이 되어있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이 바로 당신의 생명과 내 생명을 맞교환하기 위해서 아닌가? 실제로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내 옛 사람은 주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지 않는가?
신자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은 그 가죽옷이 피부가 되었기에 당신께선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다.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 있는 신자의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 그분 쪽에선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어찌 그분께 모든 것을 믿고 의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12/20/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