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영생은 없었다.
창세기 강해 (3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2-24)
일방적으로 취소된 연극 공연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에게 형벌을 선고한 후에 에덴동산을 폐쇄함으로써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뒤처리를 완료했다. 이 기사를 접하는 신자들로선 참 아쉽고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비유컨대 장엄하고 감동적인 드라마가 막을 올리기 직전에 남녀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다른 극단에서 출연료를 두 배로 주겠다는 꾐에 넘어가 출연에 펑크를 낸 꼴이다. 감독이 공연을 취소하고 무대소품과 장치를 다 치우고 극장까지 닫은 듯 한 느낌이다.
거기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 이유를 설명한 본문의 말씀이 너무 어렵다. 지금껏 어떻게 배워왔는가?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상태로 생명나무 과일을 먹으면 그 상태로 영생을 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으로서도 구원해줄 방도가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생명나무 과일에 어떤 기능이 있고, 하나님이 원래 목적했던 영생은 어떤 상태를 말하며, 하나님으로선 정말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지 등등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그런 구체적 설명 없이 전통적 해석만 배운 신자로선 어떤 드라마가 단지 아주 재미있다는 소문을 듣고 극장에 왔더니 주연 배우사정으로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안내문만 덩그러니 붙은 것을 보는 것 같다. 그 드라마의 스토리는 어떤 것인지 팜플렛도 없고 주연 배우의 사정이 무엇인지도 전혀 언급 없어서 영문도 모른 채 허무하게 발을 돌릴 수밖에 없는 그런 기분과 방불하다.
지금 “Star Wars” 최신판이 세계적으로 히트치고 있다. 마침 본문에 나오는 화염검 같은 무기인 레이저 광선 검이 나온다. 영화를 보고 나온 아이가 그런 장난감 검을 선물로 받아서 갖고 놀다 가구를 부러트리고 자기 손에 부상도 입었다. 아버지는 또 다시 부상을 당할까 그 검을 압수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이 과연 부상방지 뿐일까? 영원히 그 검을 갖고 놀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아니다. 언젠가 돌려줄 것이다. 노는 시간과 공부하는 시간을 아이 스스로 조절할 줄 알고 또 흥분된 감정을 절제하며 성숙해지는지 아버지는 지켜본다. 공부 열심히 한 후에 잠시만 갖고 놀겠다는 약속을 잘 지킬 태세가 되면 돌려준다. 돌려주는 이유도 부상염려가 없어진 것 때문만이 아니다.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상상력과 창의력이 신장 되고 자신을 절제하는 훈련에 더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아버지가 아이가 또 부상당할 것을 염려하여 레이저 검을 빼앗은 정도로만 그친다. 사실상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문자적 해석에 불과하다. 장난감을 압수한 아버지에게 더 깊은 뜻이 있었듯이 본문에 대해서도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전통해석이 틀린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을 근본적 전제로 두고 해석해야 한다. 아빠가 부상을 염려해 아이의 검을 압수한 것까지는 확실하니까 말이다.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
전통적 해석에서 제일 먼저 살필 것은 만약 생명나무 과일을 먹으면 영생하므로 하나님도 구원을 해줄 방안이 없다는 설명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 속성, 인간을 대하는 원칙 등에 비추면 무리한 해석일 뿐 아니라 상당한 모순을 노정한다. 하나님을 너무 축소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당신이 법칙을 제정했다면 그 법칙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분도 하나님이다. 물론 하나님만이 어떤 규칙이라도 완전하게 단 한 치의 오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도 하다. 원칙적으로 당신의 규칙 자체가 완전하고 거룩해서 그대로 지키신다.
그러나 그 규칙을 당신의 더 큰 목적과 영광을 위해 깰 수도 있다. 간단하게 기적이 바로 그런 의미다. 말기 암 환자를 전혀 치료하지 않고 기도만으로 완치시켜 주거나, 자동차가 전파되는 교통사고에서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게 멀쩡하게 지켜주는 일이 지금도 종종 일어난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천하의 흉악한 죄인도 선하다고 간주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선에 대해 폭넓고 정확한 이해다. 하나님은 세상 어떤 것에도 제약은커녕 영향도 받지 않는다. 비록 스스로 당신에게만 묶이지만 그것조차 그분만의 완전한 자유와 주권으로 행하신다. 그분이 구원의 길과 생각은 인간 우리의 생각과 길과 다르다. 구원을 줄 방도가 없어서 생명나무를 옮겼다는 이해는 아무래도 미흡하다.
그런 해석은 과일 자체에 마치 비아그라처럼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먹기만 해도 영생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지만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또 선악과를 먹은 후에 그 과일의 악한 성분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우위에 두고 자기 마음에서 지워버리자 거역하고픈 생각이 들고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따라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실질적인 영혼의 죽음이라는 뜻이었다. 과일 자체의 독소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동일한 성경에서 동일한 저자가 동일한 책에 기록한 동일 주제의 문맥에서 상이한 기준으로 접근하여 해석하면 성경해석학적 오류가 발생한다.
치사하고 비겁한 하나님(?)
만약에 전통해석처럼 생명나무 과일 자체에 영생의 능력이 내포되었다면 선악과 금령의 법적 효용성과 하나님 언약의 신실성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선악과 금령은 동산의 과일 모두를 먹어도 좋지만 선악과만 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 모든 과일 안에 생명나무 과일도 마땅히 포함되어야 한다.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타락 후 지금까지 그 과일을 먹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럼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에덴동산에 둘 때에 그 나무에 대해서 미리 설명해주었을지 안 했을지 숙제가 대두된다.
첫째 가능성인 미리 설명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말할 것도 없다. 천하 바보가 아닌 다음에 아담과 이브는 가장 먼저 그 과일부터 먹었을 것이다. 그 설명을 등한히 듣고는 나중에 천천히 먹으려고 제쳐두었을 리도 없다. 아담은 타락 전부터 하나님 대신 청지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계시를 받은 판국에 영원히 사는 생명나무 과일을 먹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 역으로 말해 하나님 품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영생하게 되므로 타락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진다. 성경 기록이 달라져야 한다.
만에 하나 아담과 이브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않았을 가능성을 따져보자. 하나님이 설명해주지 않았거나 쉽게 못 찾도록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셈이 된다. 그러나 숨긴 것은 본문에 와서다. 타락 전에는 에덴동산에 잘 보이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숨겼던 설명하지 않았던 흔히 매매계약서에 판매자가 면책조항을 깨알 같은 글씨로 맨 구석에 적어 놓는 것 같은 치사함을 하나님이 보일 수는 없다. 지금은 면책조항을 크게 잘 보이게 기록하고 또 그것을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이해했다는 서명까지 받아야 법적으로 유효해진다.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세속의 법보다 열등할 리도 없다.
아예 설명하지 않았거나, 구석에 숨겨서 못 찾게 했든 간에 지금 와서 옮긴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혼자서 생명나무 만들고 아담과 이브는 그 나무의 존재와 목적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영생할까봐 일방적으로 옮겨버렸다. 그럼 생명나무는 대체 왜 만들었고 왜 옮겨야만 하는가? 또 성경으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도 너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영생과 영원
성경이 말하는 영생을 시간적 차원으로만 이해하니까 이런 불합리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흔히들 태초부터 영원까지 무한대적인 시간대 안에서 생존이 지속되는 것을 단순히 영생이라고 이해하고 치운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다르다. 상식적으로만 따져도 그런 영생은 너무나 불합리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 계획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간이 무한대로 생존이 가능하면 어떻게 되는가? 성품과 능력에서 부족해도 어쨌든 신과 같은 존재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 교섭으로 후손을 번식할 필요가 없다. 이 땅에 생육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실 이유도 없다. 그 명령은 선악과 금령을 주시기 전 창조할 때부터 주신 것이지 않는가? 본문 23절도 “그(아담)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했다고 말한다. 아담의 구성요소가 땅에 있는 원소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땅의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없지 않는가?
영생하는 부모가 영생하는 자식까지 계속 출산하면 그야말로 멜데스의 인구론이 적용된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느는데 반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이 땅에 벌써 인간이 발 디딜 틈도 없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폭행은 물론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법률과 윤리를 제정할 필요나 의미가 전무해진다.
하나님은 분명히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존하신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그것과 무관한 존재다. 시간은 물질계에만 적용된다. 하나님이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을 만들어 사시와 연한 즉, 시간을 조성했다.(창1:14) 우주의 모든 행성(지구)은 큰 광명(해-항성)과 작은 광명(달-위성)에 따라 그 행성 특유의 시간이 결정되어지고 각 행성마다 시간 개념이 다르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직접 개입 즉, 시간대 안에서 가시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실제로 성육신하여 물질계 안에 당신을 제한시켰듯이 말이다. 그와 동시에 영이신 그분은 우주전체는 물론 천사와 사탄 등 영계도 통치하신다. 그래서 신자가 가장 먼저 기도할 내용도 주님은 하늘에서 이뤄진 뜻이 땅에서도 이뤄달라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늘의 영원한 가치와 계획이 자기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시간에 제한받는 물질계와 그렇지 않는 영계를 넘나든다는 것도 당신께서 만드신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분임을 증명한다.
신자도 죽으면 육체는 이 땅에 남아 썩지만 영은 영계, 하나님의 영이 계시고 시간을 초월하는 시간 밖의 곳에 들어간다. 그곳은 시간의 시작과 끝 자체가 아예 없다. 시간이 무한대로 계속되는 ‘everlasting’이 ‘영생’이 아니고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 밖의 차원인 ‘eternity’ 가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다.
인간의 시작과 끝은 오직 삼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그분이 알파요 오메가다. 그분에게만 그래서 시간적으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 땅에서 시간적 영생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는 처음부터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인간은 이 땅에선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의 완벽한 조합 운행에 따라 그 삶이 제한받아야 하고 각자는 하나님이 정해준 수명에 따라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자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생명나무가 옮겨진 곳은?
에덴의 생명나무가 옮겨진 곳이 어디인가? 지구상의 물질계가 아니다. 아무리 지구 오지에, 심지어 바다 깊숙이 숨겨놔도 Google의 위성 카메라를 벗어날 수 없다. 화염검이 두루 둘고 있으면 더더욱 금방 들킨다. 요한이 예수님이 주신 계시와 환상을 통해 천국을 보았는데 생명수 강이 있고 그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었다.(계22:1,2)
문제는 이미 천국에 입성해 영생을 누리고 있는 신자가 그곳에서 구태여 그 열매를 먹을 필요는 없지 않는가? 전통적 해석대로 과일을 먹으면 영생하기 때문에 옮겼다는 것은 불합리 하지 않는가? 그보다는 아이에게 레이저 검을 압수했지만 곧 돌려주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더 살펴야 하지 않는가?
전통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이 제시한 영생의 길은 두 가지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과 생명나무 과일을 먹는 것이다. 우선 하나만 행하면 되는 것인지 둘 다 해야만 하는지부터 헷갈린다. 하나님은 그렇게 혼잡한 분이 아니다. 질서의 하나님, 특별히 구원의 진리만큼은 인간에게 자명하게 계시하는 분이다.
창세기 기록을 자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하니까 먹지 않으면 정녕 죽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영생을 주신다는 계명이 아니다. 단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만 따르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살면서도 실질적 죽음 영혼의 죽음을 맛볼 것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본문에서 하나님이 정작 염려한 내용이 무엇인지?, 정말로 인간에게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영생이 필요 없는 천국으로 왜 영생 나무를 구태여 옮겼는지? 등에 관해 지금과는 다른 맥락에서 접근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또 그래야만 하고 신자들이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은 지난 창세기 강해 동안에 이미 다 배웠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적 죽음보다 이 땅에서 영혼의 실질적 죽음을 정말로 가장, 아니 유일하게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이다. 육신의 죽음은 그분에게 문제가 아니다. 부활의 영광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절대로 가져선 안 된다고 염려했던 그 실질 죽음은 선악과 금령을 어기고 먹은 과일 안에 독소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 사랑의 품 밖으로 스스로 뛰쳐나간 인간의 너무나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자신과도 분리되고 결국 모든 이웃과도 분리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수치와 공포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생기고 인간적 수단 방법을 모두 동원해도 제거 되지 않는다. 교육, 훈련, 윤리, 사상, 철학, 종교 그 무엇으로도 그런 절망의 상태를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죽음이자 본문이 말하는 영생의 반대다.
그럼 역으로 그 상태의 반대가 생명이자 영생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나뭇잎 치마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절감하는 것이다. 흑암 속에서 혼자 속수무책으로 있었는데 하나님이 먼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찾아오셔서 야단치는 가운데도 성령의 간섭으로 창조의 원래목적을 상기시키는 회개를 하게 하여 당신의 자녀로 받아서 처음 맡았던 위치와 신분으로 복직시켜주셨다. 사실은 복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범죄 전과 후과 전혀 변함없이 동일함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그분을 거약한 죄도 양의 대속제사로 씻으시고 성령이 영원히 내주하는 징표로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이 바로 참 생명이자 영생이다. 하나님 품 안에 있어야만 정녕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생명나무 과일의 역할은?
따라서 생명나무 열매의 역할은 하나님이 주시는 활력 생명력을 공급해주는 것이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일종의 정력제다. 타락 전에도 먹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소원과 그 힘이 계속 유지 증가시켜 주었다. 하나님의 품 안에 계속 남아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쪽에서 베푸시는 성령의 보호와 인도인 셈이다. 오늘날로 치면 신자가 말씀과 기도로 깨닫고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다.
마찬가지로 타락 상태에서 생명 과일을 먹으면 죄가 유지 증가된다. 알기 쉽게 비유하면 아이가 갖고 놀던 레이저 검을 작동케 하는 배터리인 셈이다. 공부 마치고 마당에서만 갖고 놀기로 약속하고 부모가 사줬다. 아이는 처음에는 그렇게 했다. 그러다 차츰 재미를 붙여서 집안에서 공부해야할 시간 중에도 갖고 놀다 가구를 부러뜨리고 자기 손도 다쳤다. 아버지는 칼을 압수하면서 혹시라도 그 칼을 훔쳐 갖고 다시 놀까봐 아예 배터리도 빼낸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이 메시아 예수가 동족으로 왔음에도 잘 믿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려 하심이로다.”(롬11:32) 본문의 생명나무를 옮긴 이유를 하나님조차 영생을 줄 방도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그분에 대한 너무 좁은 소견이다. 이스라엘에게서 잠시 칼을 회수하며 배터리를 빼냈을 뿐 곧 돌려주신다고 말한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길 원하시기에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완전한 구원을 주신다.
주지해야 할 사항은 아담이 타락 전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넘치는데도 사탄에게 넘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도 죄와 사탄을 못 이긴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담이 자기를 하나님보다 우위에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생명력보다 인간적 힘이 더 주도하게 되었다. 더 특이하고 신나게 놀려고 처음 끼어져 있던 하나님의 배터리를 스스로 제거한 것이다. 생명나무 과일이 너무 일상적이라 포식하다보니 그 은혜와 효력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란?
그럼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주어지는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님이 직접 설명하신 말씀이다. 당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고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예수의 기독교 창시자 됨을 믿었다든지, 의신칭의 교리를 동의하고 납득하는 수준이 아니다.
예수님이 때가 차매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와서 우리 죄 값을 감당하며 십자가에 죽으신 구원의 경륜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선악과 금령에서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본문에서 생명나무를 옮기신 것 뜻과도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 아니 바로 본문의 말씀과 같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참 생명이신 그분이 신자 속에 영원히 내주하게 된다. 예수를 믿고 아는 것은 바로 참 생명은 참 하나님만이 주시므로 그분의 참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영생을 얻은 것이다.
우리 모두 아담의 타락 후에 원죄를 안고 태어났다. 하나님을 경배는커녕 두려워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싫어하고 미워했다. 내 혼자만의 만족과 행복과 기쁨을 얻으려 수단방법 가리지 않았으나 평강도 얻지 못했다. 갈급하고 허망하기만 해서 나무 사이에 꽁꽁 숨었다. 실제로 우리도 아담과 이브처럼 행했던 자다. 인간적 교양, 재물, 권력, 외모, 지성으로 치장하고 사람들 앞에 가식적 행동을 하며 자신의 너무나도 가난한 실체를 숨기며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만족과 자유가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주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부르셨다. 죽을 수밖에 없던 천하의 죄인을 너무나 추하고 비참한 벌레 같은 존재를 당신만의 사랑으로 품어주셨다.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십자가의 구원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예수를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안다는 것은 지식적 앎이 아니라 체험적 앎이다.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통해 실제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하며 사는 것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이전의 자기 본성을 죽이고 말씀과 기도로 그분과 교제 동행하는 것이 바로 참 생명이다.
지금도 생명나무 과실을 먹고 있는 신자.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천국으로 옮겼다고 해서 그 과일을 더 이상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배터리를 다시 장착한 자다. 본문의 생명나무 열매는 배터리이되 충전식이다. 말씀과 기도로 매일 충전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신자는 이 땅 즉, 시간제약이 있는 물질계 안에서 예수를 앎으로써 사실은 생명나무 과일을 먹고 있다.
이 땅에서부터 먹고 있다는 것은 또 그 상태로 시간 밖에 있는 영계와도 영원한 생명과 자동으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서 미리 맛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 땅에 하늘의 뜻이 신자를 통해 실현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 이미 하나님과 연합했기에 나 자신과도 연합할 수 있고 특별히 이웃과도 그럴 수 있다. 이웃과의 연합에도 내가 가진 인간적 의와 동정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만 채울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건설하여 함께 영생을 누릴 수 있다.
본문의 뜻이 아주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간단하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 그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엎드리는 자에게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이 있는 천국으로 생명나무를 옮긴 뜻도 무엇인가? 계시록 그 말씀에 따르면 열두 그루다. 모든 지파를 상징한다. 달마나 과일을 맺는다고 한다. 사시사철 구원을 베푼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국을 소성시킨다고 한다. 로마서 설명대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즉 땅 끝까지 모든 족속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 가르침을 지켜 행하게 할 것(마28:19,20)이라는 것이다.
이번 주는 2016년 새해가 시작된다. 어떤 신년 결심을 하셨는가? 기독교적 경건을 많이 실행하겠다는 것인가?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난지 실제 체험으로 확신하는 바탕에서 결심을 해야 한다. 신자는 몸은 이 땅 안에 살아도 그 영혼은 이미 시간 밖에서 시간을 초월해 사는 자다.
그래서 이미 영생을 얻은 자를 이 땅에 남겨두는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아직도 흑암 속에 있는 자들 앞에 빛으로 서라는 것이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실행 확장하라는 그 한 가지 이유다. 올해의 계획이 나만의 형통, 비록 영적 성숙을 목표로 하더라도 내 주변에 하나님 나라 실현과 확장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그 신년 계획은 아무 소용이 없고 실현조차 아예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1/3/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