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신자들
창세기 강해 (39)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5-17)
이해하기 힘든 성경의 첫 세 장
지난주로 창세기 1-3장을 38번에 걸쳐 살펴봤다. 인간의 범죄에 대한 마무리 조치로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폐쇄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성경의 이 첫 세 장에 대해 불신자들은 기독교가 지어낸 설화라고 비아냥댄다. 심지어 일부 신자들도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분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아주 기초적인 가르침으로 간주하고 치운다.
이는 큰 잘못이다. 이 세 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핵심과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믿음으로 사는 인생의 기초를 바위 위가 아닌 모래 위에 짓는 격이다. 그래서 다시 간략하게 총정리 하여 복습하고 몇 가지 새로 추가하고자 한다.
창세기 1-3장이 인간 기원이 창조와 진화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밝히는 정도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해서 평생 동안 탐구하는 인생의 궁극적 진리가 망라되어 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땅에 그냥 버려진 존재는 아닌가? 이 땅에서 정말로 성실히 살아야만 할 목적과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이 우주 안에서 위치하고 있는 신분과 지위는 무엇인가?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과연 죽음으로 인생은 끝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는가? 등등에 관해 계시하고 있다.
불신자들이 비방하는 것처럼 픽션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신자들이 가볍게 여기는 기초적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다. 사실과 진리이기에 단순히 그 내용이 상징하고 있는 영적 의미만 도출하여 참고할 계제가 아니다. 일점일획도 버릴 것 없는 정미한 기록이다. 특별히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완전하고 유일한 예수 십자가 구원이 그 안에 이미 계시되어 있다.
문제는 창세기 1-3장은 상당한 믿음이 있는 신자라도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록의 진리성과 사실성이 감퇴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유치원생이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진리인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성경의 첫 세 장은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초월하지만 상충하지는 않는 진실이다.
성경이 진실이라는 말은 신화나 동화처럼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니 지어낼 수도 없는 내용이다. 만약 인간이 고안한 내용이라면 인간이 이해하기 쉬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허무맹랑하다고 비난 받을 이야기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선하고 아름다운 미담을 만들어낼 것이다.
예컨대 그리스 신화가 그렇다. 여러 신들이 등장하지만 각기 통치하는 분야가 다르고 제한적이다. 인생살이에는 여러 종류의 고난과 실패를 겪게 마련이다. 고난과 실패는 자기 스스로 의도하고 계획한 것이 아니다. 또 자기 힘으로는 아무리 해도 극복하기 힘들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이 배후에 작동되었다고 추측하여 각 분야에 합당한 신들을 상상해 내었다. 농경의 신, 출산의 신, 바다의 신, 사랑의 신 등이 등장한다.
인간이 고안해 낸 신인지라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 하나만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인간과 똑 같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인간의 일상적 패턴을 따른다. 인간 이성으로 고안해내었으니까 그 수준 이상으로 벗어날 수 없다. 인간 실생활과도 밀접하니까 쉽게 납득하고 감동까지 받을 수 있다.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나님은 인간과는 절대 같을 수 없다. 성품 능력 신분 위치 등에서 인간이 도무지 넘을 수 도 접근할 수도 없는 간극이 있다. 전지전능성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분의 뜻과 계획은 인간이 쉽게 헤아리지 못한다. 전부를 정확히 알 수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당신을 밝혀 드러내어 보여주어야만 한다. 성경은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영원한 원리애 관해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창세기 1:1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무런 사전 전제, 조건, 의도, 계획에 대한 부연 설명이 전혀 없다. 아주 단순하게 만물은 창조되었다는 사실만 간단히 한 문장으로 진술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기원, 생성, 보존, 쇠퇴, 멸망, 완성은 당신께 달렸다고 당신이 선포한 것이다.
천지는 하늘과 땅을 망라하기에 우주 만물이다. 부분적 제한적으로 관장하는 여러 신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천사 같은 영적 존재는 다수 존재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분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 있다. 쉽게 말해서 해와 달과 별이 아무리 크고 또 자연현상이 아무리 장엄하고 신비해도 그 자체가 인간 경배의 대상이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엄청나고 신비하게 보여도 인간에게 가시적으로 인식되는 기존의 존재나 현상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창조주 하나님 외의 어떤 것에도 영광과 경배와 찬양은 물론 능력을 돌려선 안 된다.
창세기 1:1은 그래서 바로 십계명의 첫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이다. 이는 인간이라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평생 동안 마땅히 따라야하는 최소이자 첫 째 가는 삶의 진리다. 만약 이 진리가 납득이 되지 않고 그렇게 실천할 생각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을 이유도 성경을 읽을 필요도 없다. 성경적으로 말해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물질이나 짐승의 수준에 남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절대적 원리
일주일에 걸친 창조의 구체적 과정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록 자체가 신문기사나 과학논문 양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기록은 엄청난 하나님께서 엄청난 계획을 갖고 창조하셨기에 인간에게 엄청난 은혜가 되는 사실만은 정확히 드러내고 있다.
그 규모와 범위만 장엄하고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다. 엄청나다는 것은 경이롭고 신비하다는 것이다. 성경적 용어로는 기묘, 영어로는 wonder에 해당된다. 거대한 macro의 세계나, 미세한 micro의 영역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창조의 방식과 질서는 세밀하고 정미하고 완벽했다. 그 기능과 역할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완전했다. 버릴 것 하나 없다. 피조물의 종류별로 뿐 아니라, 피조물 하나하나의 개체 안에서도 그 조직과 기관에서 필요 없는 군더더기 하나 없다.
이런 창조의 경륜에서 한 가지 절대적 영적 원리가 도출된다. 단 하나 버릴 것 없다. 그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나님이다. 그분이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첫째가는 근본원칙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선 인간이 겪는 고난과 실패는 신의 기분을 거슬린 인간 탓이었다. 그래서 바치는 것만큼 고통이 감해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만물을 직접 만드신 하나님으로선 피조물의 고통이 당신의 고통이 된다. 어찌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아끼지 아니할 수 있단 말인가?
서로 자기 아기라고 주장하는 두 젊은 엄마들의 분쟁을 솔로몬이 간단히 해결해주었다. 솔로몬의 지혜가 뛰어나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식을 절대로 버리기는커녕 아프게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친부모요 우린 그분의 친 자녀 친 백성이다. 그 끊을 수 없는 관계 안에서 물론 훈육 연단처럼 그분의 계획된 혹은 묵인된 고난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바탕에는 하나님만의 엄청난 사랑이 있다.
하나님 사랑의 절정인 선악과 금령
하나님의 이런 사랑이 창세기1-3장에 잘 계시되어 있다. 또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선악과 금령이다. 불신자나 타종교인들 심지어 자유주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이 엉터리 설화라고 비방하는데 제일 쉽게 인용하는 구절이다. 반면에 창조주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절정이 그 안에 녹아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창세기를 그 동안 강해하는 동안에 누차 강조했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에게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죄를 계시해 놓은 것이다. 죄의 본질이자 다른 모든 죄들이 시발되는 근거다. 바로 하나님 당신을 부인 거역하는 것이다.
만약 본문이 인간이 지어낸 설화라면 선악과를 따서 부부가 함께 사이좋게 나눠 먹은 것이 죄가, 그것도 죄의 본질과 시발이라고 선포할 리는 없다. 기껏해야 신의 명령을 어긴 종교적 과실이라고 설명하고 치울 것이다.
성경은 선악과 금령을 어긴 것을 아담과 이브에게만 적용하지 않는다. 그 영원한 후손들의 심판의 굴레가 되는 원죄로까지 연결시킨다.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고 진화를 믿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는 않는 현대인들에겐,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만으로 심판의 구실이 된다고 하니 코웃음만 유발하게 된다.
선악과 금령은 오직 하나님이 실존하고 창조만 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사랑으로 모든 인간의 일생을 거룩하게 주관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할 때만 죄로, 그것도 가장 첫째가는 죄로 성립된다. 그렇지 않으면 죄는커녕 인간의 선행 중에 최고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죄의 출발이 다르다.
이처럼 성경의 기독교는 죄에 대한 인식에서 타종교와 그 출발부터 전혀 다르다. 그러니 해결책도 필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 혹은 덜 심오하거나, 고급 혹은 저급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선악과 안에 독소가 있어서 그것을 먹고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가지를 우위에 두고 그 마음에서 지우자 따먹고 싶은 생각이 났고 불순종이라는 행동으로 진척되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가장 큰 죄요 죄의 출발이라고 하나님이 지금 선포하고 있다. 또 그런 까닭이 하나님 스스로 당신의 권위만 세우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는 근본적이고 절대적 원리가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생명이 힘을 얻고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 사랑을 거역하기에 생명에 힘을 잃는다.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타 종교에서도 죄에 대한 심판과 구원의 길을 가르친다. 죄는 살아 있는 동안에 인간사회의 윤리 기준에 위반에 국한한다. 한마디로 착한 자가 구원 받는다는 원리다. 그 종교인들은 스스로 자기 능력으로 도덕과목에서 평균 이상의 점수를 획득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엄청난 교만이다.
또 인간 홀로 도덕적 자립이 가능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들의 신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도덕 점수만 채점하는 역할만 한다. 대학입시를 치루는 이유는 유명교수의 강의를 듣고 배우려는 것이며 그런 교수를 존경한다. 입시성적을 채점하는 자를 존경할 이유는 전혀 없다. 요즘은 거기다 컴퓨터가 대신하고 있지 않는가?
흥미롭게도 불신자들은 실제로 컴퓨터 같은 신을 섬긴다. 현실생활에서 컴퓨터 능력을 신처럼 의존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후 심판에서 그렇다. 그들은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누가 더 혹은 덜 죄인임을 구분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완전한 하나님 즉, 최고로 정밀한 컴퓨터인 그분에게 채점의 오류는 없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선한 자를 골라낼 수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정실 오차 없이 정말로 냉정하고 객관적이다. 오직 input에 따라 output이 자동으로 결정될 뿐이다. 컴퓨터(하나님) 자체의 긍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작동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종교에선 많이 바치라 바치는 만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불행하고도 죄송하게도 일부 기독교에서마저 작금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기독교의 하나님도 그러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누구나 열 수 있는 쪽문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 그에 앞서 그분을 인간의 마음에서 지우는 것이 죄의 시발이라는 뜻이다. 그럼 그렇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면 되지 왜 꼭 과일을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명시했어야 하는가? 그 과일 안에 사약이 든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미국 주택의 앞마당에는 펜스가 없고 뒷마당에만 있다. 뒷마당은 가족들의 사적인 공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앞마당에서 뒷마당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항상 잠겨 있는데 자물쇠가 채워진 것이 아니다. 문이 닫힌 상태지만 앞에서 고리를 당기면 열리는 장치를 해놓았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열고 들어올 수 있다. 정원사나 수영장청소부처럼 주인과 계약을 맺은 자가 주인이 없을 때도 들어와 작업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 허락 없이 제 삼자가 쪽문을 열고 들어오면 심한 경우 강도로 오인한 주인이 총을 쏘아 죽여도 정당방위로 무죄가 된다. 문을 닫아 놓은 상태에서 오직 주인의 허락을 맡은 자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미국사회에서 통용되는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만약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제 삼자가 문이 닫혀 있는데도 열고 뒷마당으로 들어가면 무슨 뜻인가? 그것도 잘못하면 총 맞아 죽는 걸 알고도 들어갔다. 주인의 프라이버시 공간이며 주인이 술 취한 노아처럼 수영장에서 완전나체로 놀고 있을 수 있다. 집 주인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시쳇말로 총에 맞아 죽어도 좋으니 주인과 맞짱을 뜨자는 꼴이다. 반면에 쪽문이 없거나 있어도 열려 있다면 주인이 언제든 누구나 들어오는 것을 환영한다는 뜻이 된다. 주인의 책임을 등한히 했으니 들어간 사람의 잘못도 아니다.
동일한 원리인 선악과 금령
선악과 금령도 동일한 원리다. 하나님의 본의는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엄하게 명령했다. 아예 선악과를 만들지 말든지 선악과 앞에도 화염검으로 지키면 인간이 아예 먹을 수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인간의 자발적이고 기꺼운 순종은 기대하기 어렵다. 인간에겐 기계적 맹종만 있고 하나님도 독재 폭군이 된다. 선악과를 두고 말로 엄격히 금한 것이 바로 미국 주택의 쪽문 기능을 하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도 처음 선악과 금령을 들었을 때는 왜 먹지 말라고 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더 커서 따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미국 집의 앞의 정원이 너무 예뻐서 뒷마당은 더 아름답겠지 궁금해지지만 쪽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않는다. 주인을 존경하기 때문이고 쪽문을 여는 순간 범죄자가 되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유혹을 받자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과일을 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지 의심과 불만이 당연히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사탄의 설명이 듣기 전부터 그랬을 수 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상태에서 그쳤다면 즉,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는 간단하다. 본문에서 따먹으면 정녕 죽음이라고 했으니 안 따먹었으니 정녕 죽음이 아니다. 죽음이 아니면 바로 생명이다. 하나님도 잠잠히 어쩌면 기쁘게 두고 보시기만 했을 것이며 죄로도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선악과 금령을 말로 명시한 가운데 이처럼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내포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의심과 불만으로 그치지 않고 과일을 따먹는 행동으로 옮긴 것은 쪽문을 열고 무단침입하면서 총에 맞아죽을 각오를 한 것과 같다. 의심과 불만을 겉으로 표출한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과도 시쳇말로 인간이 맞짱을 뜨려고 덤빈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한다는 사탄의 꾐을 듣고는 바로 결행했으니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지 않는가?
요컨대 이젠 내 삶은 물론 마음에도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도 아니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행동으로 내보인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즉사시키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다행 아니 엄청난 사랑인가? 거기다 가죽옷을 지어 입혀 다 용서하고 새 생명까지 주었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만의 구원진리를 하나님이 계시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담과 이브가 아닌 우리 이야기다.
지금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시면서 먼저 찾아와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 전까지 하나님의 대적의 자리에 서서 그분과 맞짱 뜨고 있었지 않는가? 아담과 이브와 똑같이 선악과를 직접 따먹고 있었다.
내가 이 땅에서 출생하여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이 내가 행한 것은커녕 계획한 것도 아니다. 공기, 물, 빛, 자력, 중력은 물론 각종 채소, 과일, 곡물, 육류 등등 호흡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모근 요소를 공짜로 받지 않은 것 하나 없다. 하나님이 태양과 달 같이 엄청난 것 뿐 아니라 미네랄 같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원소 몇 개만 없애거나 잘못 다스리면 우린 즉사하는 들풀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끝까지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있으면 내 눈앞에 보여 봐라!”고 큰소리쳤다. 하나님과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자신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탐스러운 지혜만 추구하여 자기를 치장하기에 바빴지만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다. 도리어 갈급하고 허망한 것을 넘어 수치와 공포는 자꾸 늘어나는데도 하나님 쪽으로는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불신자 시절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선악과 금령은 유효하다. 솔직히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의심과 불평을 품었던가?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최고로 많이 봉사 헌금했고 목사에게 노 한번 하지 않고 섬겼는데 왜 이런 고난이 닥치는지, 끊이지 않는지, 기도했는데도 덧나는지, 그런 의심 불평 속에서 마지못해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 믿음에서 무엇이 빠졌는가? 오늘 말씀드린 대로 선악과 금령의 뜻을 아직도 완전히 모르고 있다는 점 딱 하나다. 그 안에 얼마나 엄청난 사랑이 내포되어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신자들도 창세기 첫 세 장을 마치 동화처럼 대충 읽고 치운 것이다. 믿음의 출발이 온전하지 않다.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른다. 돈을 탐하지는 않지만 종교적 경건만 추구하면 복 받거나 최소한 나쁜 일은 막아 주리라 기대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지 모르니 그 정도 반응밖에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다시 말하지만 그분과 신자는 자식과 부모 사이다. 자식이 부모의 속 깊은 사정을 다 헤아리지 못해 불평불만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대놓고 거역하지는 않는다. 겉으로는 듣는 시늉이라도 한다. 부모도 자식의 불만이 무엇인지 그런대로 타당하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순종하는 자식을 귀하게 여긴다.
부모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자식은 어떤 자식인가? 부모가 내게 해 준 것 무엇 있느냐고 대놓고 말하며 대드는 자식이다. 이웃의 부모와 비교하면서 자기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은 없다. 다른 자식도 동일한 불만을 갖고 있지만 부모이니까 꾹 삼키고 부모로 대접해준다. 이 두 자식은 완전히 천양지차다.
신자도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현실의 고난은 계속되고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가난하고 손해만 본다. 그래도 꾸준히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고 끝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는 신자를 하나님은 너무나 귀하게 여기신다. 또 반드시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고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신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지금도 수시로 선악과를 따먹고 있다. 하나님은 정녕 죽음의 벌을 줄 수 있는데도 연기 유보하고 계신다. 일일이 그에 맞추어 처치하지 않으신다. 이 엄청난 사랑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불평 의심 많아도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고 풍성하게 주시길 그분이 더 원하신다.
믿음이 무엇인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특별히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발견할 줄 아는 실력이다. 또 그에 따라 적절히 반응하는 행동이다. 그 전에 그분의 사랑에 대한 갈망부터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 엄청난 사랑의 절정이 바로 예수 십자가다.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사랑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리 의심과 불만이 많아도 그것을 안고 나오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토설하고 쏟아놓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줄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 대놓고 그분 품에서 뛰쳐나가 세상을 짝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특별히 돈으로 주인 삼지만 말라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 바로 창세기 1-3장 특별히 선악과 금령이 의미하는 바다.
1/10/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