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은 아벨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였다.
창세기 강해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2-8)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성경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뜻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기본적인 것 두 가지만 들면 문자적인 뜻 그대로라는 것이다. 첫째 성경은 정말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죄에 빠진 인간에 대한 뜻과 계획을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셨다. 그래서 하나님 그분을 깊이 알아나가며 그분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둘째는 인생살이의 일상적 여건에서 발생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더럽고 추악한 일마저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난해한 철학이나 심오한 종교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일상사라는 것은 시대마다 동일하기에 오늘날의 나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결국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셈이기에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
따라서 성경을 대하는 바른 자세는 그 모든 말씀이 바로 나에게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지금 나에게 말씀해주세요 제가 듣고 그대로 따르겠나이다.”라고 해야 한다. 만약에 그런 자세가 아니라면 아무리 성경 66권의 내용을 줄줄이 꿰고 중요 구절은 암송하고 있어도 여전히 성경은 기록된 문자로 남을 뿐이다.
창세기 4장부터 인간이 타락한 역사를 본격적으로 기록한다. 그 첫 절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아담과 이브가 에덴 안에서 동침하였고 에덴 밖에서 득남했다는 것이었다. 생명이 잉태 출산한 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간은 감사만 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이 인간이 에덴 밖에서 처음 저지른 타락의 확대 양상이다.
이 기사를 접하는 모든 신자들은 참으로 씁쓸하고 비참한 기분을 금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타락이 절정에 이른 21세기에도 친형제 살인은 아주 드물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기독교의 제2세대의 선조인데 이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기사로 인해 기독교마저 조금 부끄럽게 여겨질 정도다. 혹시 성경이 죄에 대한 혐오감과 공포감을 조장해서 인간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려는 종교적 의도가 개입된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라고 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평생토록 친형제를 죽일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예배도 아벨처럼 성심을 다해 경건하게 드린다. 옷을 깨끗하게 입고 헌금도 이왕이면 은행에서 빳빳한 신권으로 바꿔서 바친다. 예배 중에 절대 졸지 않으며 목사의 말씀이 조금 지루해도 은혜로 아멘 화답한다.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열납 하실 것이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벨이지 결코 가인이 아니다. 성경이 인간의 일상사를 기록했다고 해도 형제 살인 같은 천하의 패륜은 나에게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형제를 죽여 보았는가?
여러분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형제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있는가? 물론 전부 No일 것이다. 다시 바꿔서 물어보자. 형제를 죽이고 싶도록 미운 적이 있었는가? 이 또한 No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를 미련한 바보라고 욕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다.(마5:22) 바로 앞 절과 연결하면 그것은 살인죄에 해당된다.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해보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 살인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가 없는가? 저부터도 하루에 몇 번씩 범했다. 그럼 과연 나는 가인이 아니라 아벨이라고 떳떳이 자랑할 수 있는가? 거기다 다음 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아벨의 믿음이 견고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에게 죄의 본성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주 순진한 생각이다.
형제를 살인한 죄로 복역하는 죄수를 인터뷰하면 이런 대답이 나올 수 있다. 평소 동생이 전혀 형 취급을 하지 않았다. 공부 조금 더 잘한다고 나를 바보라고 놀렸다. 서로 시비가 붙어도 아주 영악해서 부모님에게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양 고자질하는 바람에 나만 야단맞았다. 하루는 너무 심하게 굴어서 참다못해 욱해서 야구공을 던졌는데 피하면서 발을 잘못 디뎌 대리석 바닥에 미끄러져서 머리가 부딪혀 죽었다.
수감 중인 죄수들에게 물으면 어느 누구도 교도소 밖의 사람보다 죄가 더 많다고 여기지 않는다. 밖의 사람들은 교묘하고 치사하고 비겁하게 돈과 권력을 사용해 빠져나간 유전무죄이고, 자기들은 가난하고 무식한데다 영악하지 못해 무전유죄가 되었다고 항변한다.
한국의 한 젊은 부부가 전자게임에 며칠을 몰두하다 우유를 주는 것을 잊는 바람에 아기가 죽었다. 얼마 전에는 젊은 엄마가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시끄럽다고 장난감을 집어던져 맞는 바람에 죽었다. 오래 전에 부모 유산이 탐나 집에 불을 질러 누워 자고 있던 한의사 부모를 태워 죽인 사건을 기억하는가? 부모자식간은 1촌이고 형제간은 2촌이다. 부모도 죽이는 판에 형제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라고 본문은 선언한다.
성경 기사는 사실이기에 당시 상황에서 각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 때 인간사회는 아담의 가족뿐이었다. 형제 이전에 인간관계의 전부였다. 따라서 본문의 일차적 의미는 죄가 인간사회에서 만들어낸 첫 결과물이 살인이라는 것이다.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과 상시적 직접적 교통이 단절되고 흑암의 세력이 인간을 얽어매어 노예로 부리는 모습이다.
말도 안 되는 원죄
가인은 부모처럼 하나님이 지어준 가죽옷을 입지 않았다. 구원의 체험이 없다. 가인은 원죄 하에 태어난 최초의 인간이다. 말하자면 본문은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의 영적 실상이라는 측면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본문이 너무 패륜적이라 피부에 와 닿지 않고 먼 옛날의 한갓 해프닝으로 여겨지는 것은 원죄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다.
불신자나 타종교인들은 원죄는 말도 안 되는 너무나 이상한 기독교만의 교리라고 비방한다.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아들까지 빨갱이로 모는 연좌제와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그럼 정확히 따져보자. 인류 역사를 통 털어 모든 민족들이 반역죄를 범한 자의 후손들에게 정상사회활동을 아예 금지시켰다. 심지어 팔족(八族)을 멸해 반역의 씨를 몽땅 제거했고 한국도 연좌제가 없어진 것이 겨우 수십 년밖에 안 되었다.
모든 인간 사회에 인간이 연좌제를 인간 스스로 고안해서 시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따지면 이미 인간이 원죄 하에 있다는 증거이지 않겠는가? 죄는 대물림 된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지 않는가? 연좌제는 인간 이성이 깨이고 인권과 자유가 보장된 극히 최근에 와서야 시정되었다.
그럼에도 비슷한 유형의 연좌제는 여전히 실행되고 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색 인종은 대대로 열등하고 죄를 많이 짓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기독교적 용어로 정리만 안 되었을 뿐 원죄 사상이 무의식적으로 작용된 것이다.
어떤 형태라도 인종, 문화, 민족, 종교적 차별이 자행되고 있기에 어떤 인간도 원죄의 부당성을 따질 자격이 없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차별을 없애려고, 다른 말로 원죄에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인간이 원죄를 부인하려는 것만큼 원죄 아래 있다는 증거도 없다.
인간이 가장 먼저 짓는 죄
어쨌든 이 원죄는 신자들도 이해하기 어렵다. 신학적으로 설명해보려 여러 방면으로 시도했다. 죄의 본성이 생물학적으로 유전이 되는지 안 되는지, 하나님이 새 생명이 잉태할 때에 부여하는 영이 순전한지 죄로 오염된 것인지 등등 복잡한 이론이 많다.
솔직히 말해 공부할수록 더 미궁에 빠진다. 어떤 설명도 흡족하지 못하다. 신학사상을 탐구하기보다 성경은 과연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야 한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일상사를 기록해 놓았기에 우리의 윤리적 체험에 비추어서 본문의 진술을 잘 살피면 비교적 쉽고도 명쾌하게 알 수 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대적했다. 자기 마음에 하나님을 지우고 인간을 우위에 둠으로써 선악과 금령을 위반했다. 누차 강조했지만 하나님이 없다면 부부끼리 서로 돕는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 인간사회에서 칭찬받을 선행을 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실존이 전제되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가장 큰 죄다. 부모가 자식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어도 부모로 인정하지 않고 부모를 버리는 것이 천하의 패륜이듯이 말이다.
성경은 지금 인간이 가장 먼저 짓는 죄는 하나님을 부인 거역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타고난 본성으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믿지도, 알려고도, 찾지도, 아니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설친다. 죽을 때에 혹시 절대자가 있으면 어쩌나 불안해서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정도다. 그 중에는 고난의 삶을 살게 하고 죽음의 고통으로 밀어 넣는 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는 자도 있다.
영어로 인간사회 법을 어기는 것은 crime,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친 대로 말로 살인하고 생각으로 간음하는 윤리적 죄는 sin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을 부인했던 아담의 원죄는 대문자 S에 정관사를 붙여 the Sin이라고 한다. 범법과 윤리적 죄를 파생시킨 근본적인 바로 그 죄라는 뜻이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인간본성에 자리 잡은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 혐오감을 말한다.
불신자나 타종교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이런 원죄를 인정은커녕 이해도 못한다. 신자가 죄를 crime과 sin 수준에서만 접근하면 사실은 그들과 같기에 기독교 신앙이 형성도 안 된 것이다. 모든 선함과 의로움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 하나님에 속해 그분의 선함과 의로움을 받아 누려야 인간도 의인이 된다. 그분 밖에 있으면 그 선함과 의로움을 받지 못해 필연적으로 죄인이 된다.
이 진리를 정확히 깨달아야만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귀한지 인식하여 누리게 되고 그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 자신의 crime과 sin을 가능한 줄여서 선해지려 노력하려면 일로 오지 말고 절로 가야한다.
하나님은 아벨을 편애했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해달라는 자세로 성경을 보라는 것이 직통 계시로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나를 그 상황에 대입하여 이해 적용해보라는 것이다. 본문을 그렇게 접근하면 참으로 흥미롭다.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지은 죄가 무엇인가? 여학생 고무줄 끊은 것, 친구한테 돈 빌려 갚지 않은 것 등인가? 그것은 기억하는 죄 중에 가장 오래 된 것이지 최초로 지은 죄가 아니다.
기억할 수 없어도 젖을 빨리 안 준다고 보채고 또 괜히 짜증난다고 밤새 울어서 부모더러 한 숨도 못 자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성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이긴 하나 부모에게 걱정을 끼친 불효다. 문제는 오히려 그 다음 두 번째로 지은 죄다. 형제끼리 시기 질투하여 치고 받고 싸웠다.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다. 요즘 아이들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심심찮게, I hate you 심지어 I kill you라고 떠들지 않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가? 동일한 신분 자격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성경기록상으로는 어쩜 가인이 먼저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을 편애하는 것처럼 여겼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벨이 독차지 하는 것 같으니 죽였다.
내주에 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오류, 왜곡, 모순, 불합리는 전무하다. 차별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선악과 금령의 뜻이 그것이지 않는가? 그분은 인간을 오직 두 종류로만 나눈다는 것이다. 당신의 사랑의 품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여부뿐이다 그렇다고 추가로 상이나 벌을 더 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 안에 있으면 사랑을 누리고 밖에 있으니까 못 누리는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이 절대로 편애하는 분이 아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천하보다 더 큰 엄청난 죄
사람은 참으로 이상한 존재다. 아벨이 가인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가인이 섭섭했던 대상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에게 대들어야 하는데 아무 죄 없는 아벨을 죽였다. 형이 부모에게 야단맞으면 동생을 더 괴롭히는 꼴이다. 대체로 동생도 함께 나쁜 짓을 하고도 비겁하게 굴었기 때문이지만 지금 아벨에게는 그런 점도 없다.
형으로선 부모가 최소한 동등하게 대해주길 바랬으나 그러지 못하니 더 억울해서 동생을 괴롭힌다. 그럼 부모는 형을 더 야단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아이들 모두가 자기중심이니까 자기만 억울하다고 여기고 모두가 애정결핍으로 자란다. 커서 사회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다. 인간 사회 전체도 점점 메말라 간다.
원죄를 신학이나 교리에 비추어 너무 어렵게 따질 필요 없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 영적 실태일 뿐이다. 인생살이의 사소한 부분에도 얼마나 그 어둡고 음침한 그림자가 늘어져 있는지 모른다.
가인은 하나님의 뜻과 그분에 대해 무지했으니 자기 생각만으로 판단했다. 억울한 감정에 묶여 하나님과는 더 멀어지고 자기를 높이는 본성만 생생하게 작동했다. 자기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혀 브레이크 터진 폭주하는 기관차 같아졌다.
놀랍게도 성경은 가인이 오래 동안 살인을 모의하여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 충동적 우발적 살인이 아니었다.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라고 했다.(8절) 한참 시간이 경과된 뒤라는 뜻이다. 또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8절)는 동생을 들로 불러내었다는 뜻이다. 아벨은 정말로 가인에게 잘못한 것은 없다. 철부지 요셉이 형들에게 편애하는 것과 꿈 이야기를 자랑해 미움을 자초한 것과 다르다.
죄의 가공할 파괴력이 가인을 완전히 노예로 삼아 제 멋대로 부려먹었다. 하나님에 대한 미움을 동생에게 전가해 그 미움의 대상을 일체화시켰다. 엄격히 말해 그는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인 것이다. 하나님과 멀어진 자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성경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죄인가? 천하보다 더 큰 엄청난 죄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으셨다. 그 이유는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 되게 다스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 소명을 잘 감당하도록 당신의 품 안에서 끝까지 보호 인도하신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것은 그분 안에서다. 그분 밖에 거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분류로 호모 사피언스 즉, 단순히 다른 생물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스스로 짐승 수준으로 자신을 격하시키는 것이다.
원죄란 그래서 쉽게 말하면 인간이 짐승처럼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짐승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허락했다.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기본적인 의무이자 축복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관심이 없고 생육과 번성에만 초점을 맞추면 필연적으로 약육강식으로 흘러가며 모든 윤리적 죄가 파생될 수밖에 없다.
지금 아벨과 가인이 먹을 것을 갖고 다투지 않았다. 에덴 밖이었어도 제사를 드린 까닭은 풍족한 소산과 추수에 감사해서다. 가인의 유일한 잘못은 자기를 하나님보다 우위에 둔 것이었다. 하나님과 자기와 분리되었고, 자연히 당시로선 유일한 이웃인 동생과도 분리되었다. 죄로 인한 이런 분리의 최고 정점에는 다른 인간을 살해해 없애는 것이다.
가인이 극도로 흉포했던 탓이 결코 아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자주 형제를 바보라고 놀리는가? 학교에서 어리고 순진해 보이는 학생들이 왕따를 더 만든다. 소셜 미디어로 매일 만나는 급우를 온갖 음해와 상처를 입힌다. 급기야 급우를 자살로 밀어 넣는다.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가인이 있는지 모른다. 교회 안에도 수두룩하며 설교하고 있는 저도 가인이긴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인간의 극명한 대조
아버지 아담은 가인을 낳고난 후에 여호와로 인해 득남했다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은 죄에 빠져 당신에게 대드는 인간을 단 한 치의 수정 변개 감소 없는 사랑으로 다시 품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 그분의 사랑은 타락 전이나 후나, 에덴 안에서나 밖에서나 완전히 동일하게 보장됨을 아담은 체험했다. 하나님이 비록 인간을 에덴 밖으로 쫓아내었어도 하나님 쪽에서 가장 먼저 행하신 일은 새 생명을 주신 것이다.
그 새 생명의 첫 수혜자가 바로 가인이다 그런데 그 가인이 에덴 밖에서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만이 주관하는 고귀한 생명을 죽인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 심히 분해 안색이 변했다.(5절) 이 살인의 근본원인이 하나님 탓이라고 대드는 꼴이다. 지금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 내용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원죄를 안고 최초로 태어난 가인에게 그 원죄가 영향을 끼쳐서 무려 살인을 범하고 하나님께 대들게 만들었다. 모든 인간을 묶고 있는 죄의 파괴력이 얼마나 가공한지 깨달으라는 것이다. 거기다 더 심각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서있지 않으면 종교적 행위로도 살인을 범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원죄가 연좌제처럼 말도 안 되는 기독교의 엉터리 교리가 아니다. 인간의 비참한 영적 실상이 시발된 근거다. 현재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고난, 갈증, 허망함, 죄악의 원인이다. 아담의 예에서 보다시피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무한 사랑만이 그 모든 것에서 인간을 건져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준다. 바로 그런 은혜를 받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자가 바로 신자다.
믿음은 그래서 다른 것이 아니다. 나의 영적 실체가 얼마나 가난하고 초라하며 비참한지 온전히 깨닫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난 후 예배를 드릴 때마저 원죄의 흔적과 오염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정확히 알아나가는 것이다. 삶의 세밀한 구석에서부터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을 찾아내고, 광대하고 완벽한 섭리에 순종하며, 그분의 순전한 진선미를 받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실력이다.
우리 모두 예수 믿기 전 하나님께 대들었던 원죄의 무게는 엄청났다. 가인이 사실은 하나님을 죽인 것처럼 우리 죄 또한 천하보다 더 무거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죽는 은혜를 통해 천하를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천하보다 더 크고 무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 둘의 차이를 제대로 비교 인식할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자유 할 수 있다. 최소한 평강은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원죄의 교리가 말하는 바다. 신자는 본문의 가인의 살인 기사를 통해 비참해지기보다 하나님의 더 오묘하고 풍성한 생명력을 공급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뜻이다.
1/31/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