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이유
창세기 강해 (43)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2-8)
하나님이 원인을 제공한 살인?
인간이 에덴 밖으로 쫓겨난 후에 최초로 저지른 죄악이 친형제 살인이었고 가인은 천하 패륜아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그러나 지난주에 살펴 본대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죄가 아니다. 예수님이 형제를 미련한 바보라고 욕하는 것은 지옥 불에 떨어지는 살인죄라고 선포했다.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상 지을 수 있는 죄다. 단순히 말로서 인격적 살인을 하는 정도가 아니다. 실제로 순진무구해야 하는 초등학생들조차 사랑해야 할 급우를 왕따 시켜 종종 자살로 이끌지 않는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동기는 오히려 흥미롭다. 우리처럼 부모나 친구들의 사랑을 독차지 한 것을 시샘하는 것과는 한 차원 높았다.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열납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두고 질투한 것이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성경공부하면서 목사의 칭찬을 독점하는 성도가 꼴 보기 싫어 죽인 셈이다.
가인의 살인은 율법으로도 사형에 해당하는 엄청난 죄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어쨌든 하나님 때문에 살인했다. 지난주에는 그의 살인을 형제관계를 넘어서 원죄로 인한 이웃 살인이라는 측면에서 따져 보았다. 당시의 이웃은 아담가족뿐이었다. 즉 인간 본성에 따른 인간 쪽에 책임이 있는 살인이었다. 오늘은 하나님이 원인을 제공한 살인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증오도 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따지면 가인은 죽도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소망했다고 볼 수 있다. 동족을 위해 살인한 모세는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 때문에 나사렛 예수 이단들을 죽이는데 앞장 선 바울도 신약의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그럼 가인의 영성과 믿음의 참 실상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과연 우리는 가인만큼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지 또 그런 마음이 설령 부정적 결과를 낳더라도 실제 행동으로 옮겨진 적이 있는지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민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
성경은 추상적인 종교철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지금 바로 우리 일상사에 적용이 가능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 하나님 때문에 살인이란 불신자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만 저지르는 죄다. 특별히 이민교회 교인들이 종종 가인의 자리로 떨어진다.
이민자의 삶이 전반적으로 고달프고 외롭다. 그 중에도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가? 바로 교회 문제다. 그것도 교회내의 폭행, 사기, 도둑, 간음, 살인 같은 추악한 범죄 때문이 아니다. 재정 비리도 아니다. 목사로 인해 영적 충전이 안 되어서 서로 인격적인 상처를 주고받으며 교회가 쪼개지는 일이다. 그럼 심령이 갈가리 찢긴다. 상대 쪽의 목사든 장로든 솔직히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경험을 했지 않는가?
대신에 목사로부터 말씀의 은혜를 공급받으면 교회는 안정이 되고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가 풍성이 넘치게 된다. 그럼 아무리 이민생활이 힘들어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시기 가운데 영적인 질투로 인한 다툼의 파급 효과가 가장 크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인간은 영적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당신의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었다. 인간 존재의 뿌리와 시발이 하나님의 생기다. 그런 생기의 공급이 차단된 불신자는 세상업적을 아무리 거창하고 화려하게 쌓아도 평생이 허망하고 갈급할 수밖에 없다. 신자에게 그런 생기의 공급이 부족하거나 왜곡되면 교회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개인의 삶도 메말라지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미래학자들조차 예측하기를 삼차세계대전은 종교 갈등 때문에 일어날 것인데 가장 잔인하고 참혹해질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IS에게서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성경에도 마지막 때에 가장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 즉, 기독교 내의 분리와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으로 사람을 미혹한 후에 대환난이 따를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는가?
결국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 등짐으로 일어난다. 지금은 하나님이 더욱 필요한 세대인데도 오히려 그분의 실존 자체마저 부인하는 판국이니 인간세상은 더더욱 메말라 갈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모두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지니까 하나님도 당신의 긍휼을 베풀 여지가 점차 주는 것이다. 정말로 영적으로 깨어 분별할 때다.
영적으로 깨어 분별하는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바로 본문의 가인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사랑이 대단해도 그분을 향한 시기로 이웃을 살인하는 것 같은 죄를 범해선 안 된다. 대신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았던 이유를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피부에 와 닿게 이야기 하면 이민교회의 분쟁으로 심한 가슴앓이 하는 것까지는 오케이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말고 과연 가인에게서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었던 점이 무엇인지 깨달아 우리 중에서도 제거해야 한다.
제물의 종류 때문인가?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까닭에 대한 보편적 해답은 그 제물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11:4a)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b)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 죽음으로 영단번의 구원을 이루기 전인 구약시대에는 가인은 아벨처럼 양의 제물을 드렸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언뜻 성경이 뒷받침하는 정답 같지만 조금 부족한 해석이다. 모든 신앙적 과제도 5+2=7 이 옳으려면 7-5=2가 되어야 하듯이 역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예물의 종류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았다면 제물의 종류만 일치하면 반드시 열납해야 한다는 것도 성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은행의 신권으로 바꿔서 정성껏 헌금해도 “창기의 번 돈이나 개 같은 자의 소득”(신23:18)은 하나님은 받지 아니하시고 그분께 가증한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수양과 송아지 제물의 피에 배불렀고 너희들이 보이러만 와서 성전 마당만 밟고 간다고 한탄했다.(사1:11-13) 성전 안에도 못 들어간 셈이니 피 뿌리는 양의 제물인데도 전혀 열납 되지 않았다.
지금은 율법을 수여받기 전이다. 동물에 죄를 전가해 대신 속죄하는 규례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물론 부모로부터 하나님의 가죽옷 사건에 관해선 이야기 들었을 것이다. 동물의 피 흘림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다는 원리는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았다. 지금의 제사는 원칙적으로 속죄제가 아니라 추수감사제다.
가인은 농경을, 아벨은 목축을 생업으로 삼았다. 하나님이 선호하는 직업의 종류가 따로 없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동물의 이름을 지어서 하나님이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청지기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아담이 동물뿐 아니라 각종 채소와 과일나무의 이름도 지었을 것이다. 가인이 아벨과 다른 제물을 바쳤기에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해석이다.
본문 안에 해석의 열쇠가 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는 힌트가 명시되어 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바쳤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바쳤다. 성경이 구태여 ‘첫’이라는 수식어를 첨부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역으로 말하면 가인은 첫 소산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3절 서두에서 말하지만 추수를 몇 번 거친 후에 제사 드렸다는 뜻은 아니다. 추수를 하거나, 양의 새끼를 낳으려면 몇 달 씩 걸린다. 두 사람 다 이마에 땀을 흘려 얻은 첫 해의 소산으로 제사 드렸다.
아벨은 첫 새끼를 낳자마자 하나님께 드렸다. 가인은 자기 혼자 신나게 배불리 먹고 난 이후에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며칠 후에 아차 하고 생각이 나서 제사를 드린 것이다. 묵은 곡식 중에 적당히 골라 하나님께 바쳤다.
첫 열매가 가장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것을 대표하기에 그 전부를 바친다는 뜻이다. 양은 일 년에 한 번 한두 마리만 새끼를 낳는다. 만약 새끼가 한 마리였다면 일 년을 다시 기다려야 얻는데도 바쳤다. 아벨은 자기가 생업을 통해 소산을 얻게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가장 기본적이고 순전한 믿음이었다.
반면에 가인은 농사하고 추수한 것이 전부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간주했다. 하나님은 간혹 비를 내리고 태풍을 막아준 것뿐이라고 여겼다. 자기 스스로 다 알아서 농사지었고 하나님은 어쩌다 조금 힘을 보태준 정도였다. 어쨌든 그분께 감사해야 내년에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일부 신자들이 헌금 봉사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큰 질병과 우환은 막아줄 것이라고 믿는 정도와 같다. 현재의 내 소유와 여건 모두를 하나님이 마련해주었다는 인식이 가인에게 전혀 없었다.
하나님이 두 형제에게 받은 것들을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했고 “가인과 그 제물”은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4,5절) 아벨과 가인의 이름이 먼저 나왔다. 그 사람 전체를 열납했는지 여부부터 밝혔다.
쉽게 말해 가인을 받을 수 없었기에 그 제물도 당연히 받지 않은 것이며 반대로 아벨은 받을 수 있기에 그 제물도 받은 것이다. 은행에서 아무리 신권으로 바꿔 바쳐도 부정부패로 번 돈이면 하나님은 받지 않는다. 반대로 막노동하는 자가 은행 갈 시간이 없어 때 묻은 돈을 바쳐도 정당한 노력과 수고로 번 돈이라 하나님은 기뻐 받으신다.
히브리서 11:4의 설명도 11장 전체가 믿음을 주제로 말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믿음의 선배 중에 아벨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아벨의 믿음을 강조하는 구절이지 가인의 제물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아벨의 예물을 증거한다는 뜻도 양의 피 흘림보다는 첫 새끼를 바친 그 믿음을 기뻐 받으셨다는 것이다. 아벨은 자기 실존의 뿌리부터 모든 것이 오직 알파요 오메가인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한 것이다.
가인이 범한 진짜 잘못
여기까진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어지간히 했으면 알고 있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말씀은 7절이다. 하나님은 가인더러 네가 선을 행했으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꾸중했다. 그럼 악을 행했다는 뜻이다.
지금 가인이 악행을 한 것이 있는가 없는가? 아직 살인하기 전이다. 인간적 윤리로 나쁜 짓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어쨌든 정성껏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자 심히 분해 안색이 변한 것 즉, 하나님께 화를 낸 것은 물론 큰 잘못이다.(5절)
그렇지만 그런 일을 당하고 기분 나쁘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다. 가인이 부정한 제물을 바친 것이 아니다. 단지 첫 소산이 아닐 뿐이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정당한 제물을 바쳤음에도 단번에 거절당하니 화가 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두고 지금 악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제물의 종류를 따진 것이 아니다.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극도로 예의 바를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시적언어라서 그렇지 그 내용은 하나님께 대들며 시작하는 것이 태반이지 않는가?
지금 가인이 저지른 유일한 잘못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자기의 전부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분을 진짜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악을 행한다고 한 것이다. 성경이 창세기 1:1부터 요한계시록 22:21까지 일관되게 계시하는 내용이자, 모든 인간이 반드시 알고 따라야 할 진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특별히 죄에 빠진 인간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인 됨이 단순히 인간 소유의 풍성함과 궁핍함에 영향을 끼치고 윤리적 선으로 이끄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기본이다. 정말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주인이어야 한다. 언제든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분이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탄생과 죽음은 죽었다 깨어나도 조절은커녕 계획 예상도 못한다. 그분이 시작이자 끝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으라면 죽는 것이 선이고 그렇지 못하면 악이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그분의 사랑의 품 안에 있으면 선이고 그 밖에 있으면 악이다.
마귀에게 속한 가인
가인은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소원했다. 또 그러려고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여기까진 전혀 하자 없고 좋은 일이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과 대화 교통했다. 나중에 혼자 세상을 유리할 때에 사람들이 천하의 패륜아라고 죽이려 들 수 있으니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 응답까지 받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엄중하게 선언한다. 선을 행치 않고 악을 행한다고 말이다. 네가 나를 절대적인 진짜 주인으로 삼지 않고 수호신 정도로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 가인이 하나님을 정말 주인으로 모셨다면 설령 제물을 열납하지 않아도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겸손히 그 이유부터 물었어야 했다. 가인은 대신에 내가 그래도 정성껏 바쳤는데도 단번에 거절하다니 나를 우습게 여긴 것 아니냐고 화를 내었다. 가인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역으로 네가 나를 너무 우습게 여긴다고 야단친 것이다.
“가인 네는 나의 능력을 빌려 복만 받으려 한다. 네가 찾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주는 복이다. 그러는 것이 바로 악이다.”라고 말이다. 교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봉사해도 근본 마음이 가인과 같으면 악이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있고 심지어 하나님으로 인해 살인을 자행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섰다면 사탄에게 속한 것이다.
지금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요일3:12a) 문맥에서 따지면 악한 자는 마귀다. 하나님께 자기 전부를 바치지 않는 자다. 첫 소산이 아니라 먹다 남은 것 드리며 하나님의 능력만 구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사탄의 자녀다.
예수님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 했다.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하나의 주인을 섬길 뿐이라고 했다.(마6:24) 재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인이면 돈은 그 주인의 뜻을 실현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돈이 주인이 되면 하나님은 돈을 벌어다 주는 수단으로 돈의 종이 된다. 하나님을 맘몬 신의 부하로 전락시키는 짓이다.
이제 얼마나 큰 죄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죄를 누가 범한다고 하는가?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자들, 말하자면 저 같은 목사와 장로와 신자들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은 자기 전 재산이었던 동전 두 닢을 바친 과부의 믿음을 칭찬했다. 재산의 전부를 바쳤기 때문이 아니다. 그 재산 전부의, 아니 자기 전부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보신 것이다. 재산 다 바친 정성을 보고 하나님이 복을 더 많이 책임져주시겠지 기대한 것이 아니다. 오늘 한 잎만 드리면 나머지 한 잎으로 내일 하루 더 연명할 수 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이 주인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럼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전혀 줄지 않음을 믿은 것이다. 지금껏 세상에서 온갖 멸시 천대를 받으며 살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도 하나님과 교제 동행한 은혜가 너무 귀하고 감사했다는 뜻이었다. 또 그래서 주님 품 안에서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과부의 다 바친 예물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이런 믿음으로 예물을 바쳤기에 칭찬한 것이다.
에스더는 동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죽으라면 죽으리라고 순종 헌신했다. 그 전에 모르드개는 에스더더러 네가 그 소명을 따르지 않아도 하나님은 당신의 때와 방식대로 반드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리고 너는 그 때에 하나님 밖에 있는 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과부의 믿음이 바로 에스더와 같았다.
너무 심각한 이야기인가?
하나님이 신자더러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한다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은 없다. 여러분 모두 아프리카 선교사 가야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 왜 이런 일을 저에게 허락하시는지 그 동안 헌금 봉사 예배에 얼마나 성실했는지 하나님 아시지 않느냐 의심 불만부터 생긴 것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라는 것이다.
예물의 종류를 보고 하나님이 열납하고 그 질과 양에 따라 은혜도 달라진다는 사상에서 하나 발전한 것 없다. 아벨은 새끼를 바치면 일 년을 기다려야 했고, 과부는 다 바치고 나면 굶어죽어야 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그분의 주인이 되지 않는 삶은 죽어도 살기 싫다는 뜻이었지 않는가?
서두에 영적인 시기가 질투 중에 제일 강하다고 말씀드렸다. 교회 문제로 골수가 마르고 심장이 쪼여든다.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소망이기에 아주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순수한 시기가 아니라 혹시라도 그 안에 내 자존심이 개입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우선 다른 교회 성도들과 비교해 시기 질투하지 말아야 한다. 내 교회가 최고라는 자랑과 자부심을 죽여야 한다.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와 비교해서 시기 질투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가인처럼 자신과 하나님을 비교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바친 것과 하나님께 받은 것을 비교해서 하나님이 나를 우습게 여긴다는 불만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 한마디로 나를 하나님보다 우위에 올리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전부를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이 종교적 의무가 아니다. 우리 믿음의 열성을 시험해보신다는 뜻도 없다. 이것만큼 은혜가 되는 말씀이 없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직접 계시인 증거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의 전부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전부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 그 후로도 우리가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리면 그분의 완전한 진선미를 제한 없이 누릴 수 있다.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정말로 우리 전부를 바쳐야 한다. 우리 예물이 아니라 실존 존재 전체다.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다. 아벨의 제물을 보고 아벨을 열납한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있든 너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는 겸손한 심정으로 엎드리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 메마른 이유는 오직 하나다. 기도와 말씀이 모자란 탓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그분께서 나의 진짜 주인이 되길 그분이 더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을 모른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지 않는가?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정말로 이처럼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사실을 것을 제발 알아달라는 것이지 않는가? 이 얼마나 큰 은혜이자 권능인가? 세상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고 상상도 못하는 특권이요 사랑이다. 그런데 더 이상 무엇을 걱정 염려하는가?
2/7/2016
어제 또 오디오파일 없이 올렸네요
다시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