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강해 (4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9-12)
흥행불패의 할리우드 영화
할리우드 영화중에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을 거두는 주제가 하나 있다. 아이언맨(Iron Man)이나 뱉맨(Batman)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다. 시리즈물을 계속 내어도 갈수록 더 성공한다. 세계적 인기를 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슈퍼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대리 만족시켰다는 뜻이다. 성경적으로 풀이하면 하나님 같이 되려고 시도했던 아담의 교만한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심겨져 내려왔다는 간접적 증거이다.
그런 슈퍼히어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항상 동일하다. 히어로가 악당을 물리치고 문제를 다 해결 한 후에 경찰은 뒤늦게 등장해 청소와 교통정리 외는 아무 하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만신창이가 된 히어로가 클로즈업 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 또한 원작자가 의도는 하지 않았겠지만 영적 해석이 가능하다. 불신자들은 인간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을 경찰격인 하나님이 온갖 모순, 타락, 질병, 고난 등을 외면 방임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이 더 고달파진다는 생각이 영화에 반영된 것이다.
신자의 경우도 자기 의지로 고난을 인내하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현실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거의 모두 자기가 해결한 것처럼 여겨진다. 물론 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런 결과가 되었다는 신앙적 지식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화끈하고도 풍성하게 도와준 것 같지 않다는 불만은 갖는데 불신자의 것과 상통한다.
이런 식의 불만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범죄하지 않았을 텐데, 선악과를 만들었어도 자유의지를 주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자유의지를 주었어도 범죄하기 전에 미리 막아주었더라면 인생살이가 이렇게 고달프지는 않을 텐데 식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미리 축복해주는 법이 없이 꼭 뒤치다꺼리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신자들마저 지울 길이 없다.
알지 못하면 믿지 못한다.
본문에서도 가인이 살인한 후에 하나님이 왜 그렇게 했느냐고 따진다. 그 전에 나름대로 가인이 정성껏 제사를 드렸는데 그 자리에서 “No”하는 바람에 어쩌면 살인을 조장 내지 방조한 것 같다. 어쨌든 간에 하나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어 보이는데 일방적으로 야단만 치는 것 같다.
신자들이 이런 불만을 갖게 된 까닭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성경공부 열심히 하여 잘 알아 가면 되지 간단히 치부할 계제가 아니다 부드럽게 표현해서 잘 모른다고 했지 사실은 믿음이 없거나 아주 부족하다는 뜻이다. 사람도 아는 만큼밖에 믿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고 나아가 자기 인생을 의탁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을 제정하면서 어기면 정말로 죽는다고 경고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이 맹세할 때의 ‘진실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절대적으로 천지를 걸고, 아니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당신을 걸고 말씀하신 것이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에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여 정복하라는 첫째 계명은 현실적으로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 지금까지도 전혀 어지기 않고 오히려 과도하게 달성되었다. 20세기에 이방족속이라는 핑계로 식민지로 삼아 수탈했고, 21세기에는 풍족한 생활을 위해 자연파괴를 예사로 자행하고 있지 않는가?
반면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두 번째이자, 영적으로는 첫째 계명인 선악과 금령은 첫 세대부터 곧바로 불순종했다. 그리고 결과는 정확히 하나님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처럼 되기는커녕 전혀 계획, 의도, 예상도 못한 수치와 공포가 순간적 불가항력적으로 엄습했다.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 치마로 해소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해 나무 사이에 꽁꽁 숨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현되는 시기와 방식을 구체적으로 몰라서 그렇지 이뤄지지 않고 지나는 법은 결코 없다. 아담과 이브는 타락 이후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실감했고 두 아들에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가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인이 나름의 예배를 드린 것이다.
경고를 듣고도 살인한 가인
지난주 살펴본 대로 가인은 예물을 바쳤고 제사를 드렸다는 행위만으로 하나님에게 복을 받으려는 심사였다. 하나님은 가인의 중심에 당신 대신에 자기를 우위에 두었기에 그 예물을 열납하지 않은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진의를 알려고 생각지도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화부터 냈다.
하나님은 그래서 당신을 걸고 분명히 경고했다. 사탄이 네 속의 죄의 본성을 부추겨서 너를 삼키려 하니까 다스리라고 했다.(7절) 흉포한 살인 의도를 잠재우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과 당신의 사랑에 대한 오해를 없애라는 것이다. 제사를 열납하지 않았어도 지난 일 년 농사를 짓는 동안 얼마나 많이 보호하고 인도했는지 헤아려서 당신에 대해 알라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가인이 당신에 대한 미움을 아벨에게 전가할 가능성을 미리 알고 염려한 것이다. 가인으로선 자기 속내가 들켰으면 정신 차리고 회개했어야 했다. 하나님 말씀의 권능에 대해 부모에게서 익히 배웠지 않는가? 오늘날에 직통계시는 없고 성경과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교통하는 것과는 사정이 확연히 다르다. 하나님이 직접 경고했으면 회개까진 몰라도 살인의 행동으로는 옮기지 말았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 순전하고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의 반응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했는가? 아벨에게 고하고 그 후 들에서 죽였다고 되어있지만(8절) 두 개의 별개 사건이 아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가자고 유인한 후에 죽였다는 뜻이다. 상당기간 살인을 숙고하여 모의한 의도적 살인이다. 거기다 ‘쳐죽이니라’고 했다. 우발적 충동적 실수가 아니라 증오심을 넘치도록 실어서 작심하고 죽인 것이다.
아벨이 가인에게 아무런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니까 가인이 하나님을 죽인 셈이다.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생을 편애하면 동생이 형에게 아무 잘못한 것 없어도 부모가 미워서 동생을 못살게 굴지 않는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네 아우가 어디 있는지 다 아시고도 물었다.(9절) 아담이 범죄 했을 때도 다 아시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듯이 말이다.
사후전말을 다 알고도 묻는 이유는 무엇인가? 형이 동생을 시기해서 때린 것 다 알고도 아버지는 짐짓 왜 때렸는지 묻는다. 대답에 따라서 다르게 대처하겠다는 뜻이다. 형이 이실직고하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네가 무엇이 잘못인지 알고 또 고치겠다고 약속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동생과 화해시키고 둘 다 데리고 나가서 피자를 사 먹이지 않는가?
가인처럼 형이 동생을 돌보는 자냐고 따지면 매를 두 배로 번다. “아빠가 부모 없을 때에 형이 동생을 책임지고 부모 대신에 돌보라고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이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언제 철 들 꺼야?” 가인이 바로 하나님에게 매를 두 배로 벌 짓을 했다.
친형제는 마땅히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들었다. 단순히 부부간에 역할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당시 인간세계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아담이 보통명사로 사람이라는 뜻도 있듯이 모든 인간은 서로 도우며 살라는 뜻이다. 인간은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려야할 소명을 받았다. 오직 서로 사랑해야만 그 일이 가능해진다. 또 이 땅을 다스리는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해서 모든 이로 그 사랑을 알고 누리고 서로 나누라는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죄를 다스리라고 한 것도 단순한 권면이나 경고가 아니다.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문에 엎드려 삼킬 자를 찾는다. 역으로 말해 죄를 절제하지 못하면 완전히 멸망당한다. 가인더러 제발 그런 실패는 발생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하여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면서 먼저 찾아오셨다. 전지전능하신 그분이 숨바꼭질하자는 뜻은 아니지 않는가? 아담아 거긴 네가 있을 곳이 절대 아니다. 네가 있을 곳은 오직 내 사랑의 품 안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면 네 존재와 삶과 인생에 내가 주는 사랑과 권능이 심겨질 곳이 절대 없다. 어서 빨리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애절한 사랑의 고백이자 간절한 호소였다.
지금 가인에게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도 같은 뜻이다. 이미 죽은 아벨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다. 반면에 가인은 살인 현행범이다. 생명의 절대 주관자인 하나님을 대놓고 거역한 큰 죄로 그냥 심판만 해도 된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은 네 생각과 기분대로 따르면 반드시 내 사랑을 오해하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라. 즉 너의 나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일차 경고를 무시했다는 것은 시쳇말로 “하나님은 혼자 지껄여라 나는 내 길을 간다.”는 뜻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내 대적이다. 그 중에 하나님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형이 동생을 돌볼 책임이 있다는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 내가 동생이나 돌보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대들었다.
지난주에 가인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 저는 아직도 하나님 사랑하는 데요”라고만 했어도 하나님이 제사를 다시 열납했을 수 있다고 했다. 본문의 단계에서도 가인에게 아직도 기회는 있었다.
“하나님이 정말 이해가 안 되고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내가 비록 성의 없이 내 먹고 남은 것으로 바쳤어도 그 자리에서 두 말 않고 거절하니까 하나님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아무리 삭이려 해도 삭여지지 않았습니다. 아벨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연상 되어 자꾸 미워졌고 나도 모르게 살인했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이런 나도 용서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솔직하게 실토했다면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죄 짓지 말라고는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 체질이 너무나 연약한 진토임을 잘 아신다. 죄를 다스리되 혹시 실패했으면 있는 그대로 나오면 용서해주신다는 것이 그분의 미쁘신 뜻이요 그 절정이 예수 십자가이지 않는가?
실제로 우리는, 아니 저는 그런 큰 용서의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 웃기는 소리 말라.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소리쳤다 하나님을 내 주먹보다 더 우습게 여겼음에도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셨지 않는가?
땅에서 유리하는 가인
가인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자 하나님은 그에게 땅이 너를 저주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유대인적 사고 즉, 구약성경의 기본사상은 흙에서 인간을 만들었듯이 생명은 땅에서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또 생명은 피에 달렸는데 살인으로 피를 흘린 것은 생명의 근원인 땅을 오염시킨 것이므로 땅의 저주를 받게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따라서 땅에서 유리한다는 것은 창조주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분리되어 항상 갈급하고 허망한 상태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인간사회에서 살인자라는 주홍글씨가 이마에 박혀 평생을 멸시 핍박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 안에 돌아오길 거부하고 스스로 박차고 나갔으니 그분 은혜와 권능은 전혀 받지 못하고 오직 세상 법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다. 가인은 사탄의 먹이가 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은 따르지 않고 내 멋대로 살겠다는 작정이었다.
그런데도 가인의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 따른다. 하나님이 그렇게 싫었다면 아예 상종을 말았어야 한다. 교회 문에 얼씬도 말아야 한다.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혹시 사람들이 나를 살인자라고 죽일지 모르니 제발 내 생명을 지킬 보호 장치를 달아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한다.
너무나 뻔뻔한 짓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거추장스럽고 그 계명대로 사는 것은 죽어도 싫고 단지 능력만 내 멋대로 빌려 쓰자는 심보다. 하나님은 그마저 들어주신다. 그럼 결국 어떤 상황이 되었는가? 하나님이 뒤치다꺼리 하게 된 것이다. 비록 마지막에 결정적인 한 방의 도움을 주긴 했지만 어쨌든 모든 사건이 다 벌어진 후의 조치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될 한 가지 사항은 그런 난장판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바로 가인이지 않는가? 그는 부모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철저히 교육을 받았다. 하나님의 직접적 경고, 아니 애절한 호소도 들었다. 회개할 제2, 3의 기회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허사였다. 완전히 물이 엎질러지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손을 벌렸다. 그리고 요구대로 응답 받자 또 다시 하나님과는 빠이빠이 했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마지막 공통점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의 공통점이 또 하나 남았다. 이 또한 성경적 진리를 아주 잘 대변하고 있다. 만신창이가 된 슈퍼히어로 뒤로 악당 조커나 그 아들이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다. 다음 속편이 곧 나온다는 복선이지만 성경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 슈퍼히어로 즉, 인간끼리 모든 힘을 모아 인간사회의 모순과 잘못을 하나 해결해도 여전히 동일하거나 다른 문제가 곧바로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죄가 문에 엎드렸는데도 인간이 죄를 다스리지 않기 때문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청상과부가 바늘로 자기 허벅지를 찔러 욕정을 잠재우거나 세상의 번뇌를 잊으려 묵언수행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가인처럼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대들거나 아예 무시하고 제 기분대로 행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 잘난 맛으로만 살고 있다. 자기를 최고로 삼는다. 최고는 오직 한 명이어야 한다. 문제는 당장 집안에만 부부 아이들까지 네 다섯 명이고 문밖에 셀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문에 엎드린 사탄이 유별난 것이 아니다. 자기를 최고로 세우려는 자존심끼리 부딪히는 것이다. 시기 질투 분쟁이 끊일 새가 없다. 세상의 모순, 불합리, 질병, 고난, 타락 그 모두가 인간이 어지럽힌 결과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탓이다. 정확히는 그분의 사랑을 오해한 탓이다.
정말로 화끈한 하나님의 도움
가인과 하나님이 상호 교통하는 모습을 죽 살펴봤는데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인간은 한 결 같이 나를 간섭하지 말라 하나님이라도 이래라 저래라 말라며 버틴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하나님은 한 결 같이 그런 인간더러, 심지어 당신을 죽이려 들었음에도 용서하고 또 용서하면서 제발 내 품안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한다는 것이다.
인류역사 초기에는 직통계시로,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으로, 당신이 보낸 대언자 선지자로 계속 호소했건만 인간은 끝까지 거역했다. 그런데도 가인처럼 난장판을 벌린 것으로 혹시 벌을 받을까 제사는 계속해서 드렸다. 하나님이 그 피에 배가 부르다고 할 정도로 드렸다. 그러나 인간의 중심에 당신을 향한 진정한 사랑은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제사 드리는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한탄했겠는가?
실제로 계시가 끊겼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향한 사랑이 변함없음을 보여주었다. 주님은 십자가에 숨이 넘어가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저들이 자기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간구했지 않는가?
지금 가인이나, 불신자나, 기복신앙을 가르치는 기독교 지도자들 탓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저를 비롯한 우리 이야기다. 서두에서 불신자나 신자나 하나님은 화끈하게 미리 도와주지 않고 뒤치다꺼리만 한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고 했다. 과연 우리가 그런 불만을 가질 수 있는가 말이다. 그 전에 난장판으로 만든 것은 우리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그런 뒤치다꺼리도 안 해주었다면 우린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우린 계속 거역해도 그분은 아무 말씀 없이 끝까지 우리를 품어주셨다. 그런 사랑은 인간 세상에 없다. 의인을 위해 죽는 자는 간혹 있어도 원수를 위해서 죽은 십자가 은혜야말로 최고로 화끈한 사랑이다.
솔직히 급한 일이 생겨야 겨우 하나님 찾고 기도하지 않는가?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급하니까 더 기도해야 한다. 정말 가인처럼 하나님 앞에 뻔뻔할 수도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그분께 요구 못할 것이 없으며 언제든 나가지 못할 때도 없다.
그러나 가인이 범한 한 가지 잘못만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위급하게 된 즉, 내 삶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은 바로 나이기에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부터 잘 살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의심과 불만이 생기는 까닭이 정말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갖은 유일한 소망이 무엇이겠는가? 예물 많이 바치고 제사 열심히 드리라는 것이 아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아 지금 네가 한 행동이 무엇이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고 오해해서 혹시라도 내 품을 벗어난 것은 아니냐? 제발 다시 돌아와 그 안에 머물라. 단순히 교회 안에 남으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풍성히 아는 만큼 우리 영혼과 삶이 더 큰 기쁨으로 풍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그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2/21/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