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 강해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9-15)
성경기록이 역사가 아니라면?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창세기 1-11장을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전래되어 내려온 설화나 인간 저자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케 한 그분의 절대적 계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은 12장의 아브라함의 사건부터 사실로 취급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기록에서도 초자연적 기적은 전부 인정하지 않는다. 어려운 용어로 성경을 탈신화화(脫神話化)해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화 같은 부분은 빼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성경 기록 상호 간에 모순과 상충이 있다는 것이다. 또 과학적으로 따지면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본문도 그런 주장을 하게 되는 근거의 하나로 꼽는다. 구체적으로는 가인이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14절b)라고 말한 것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성경기록을 살피면 당시의 인간은 아담 가족뿐인데 어떻게 가인이 땅에서 방황하는 동안에 만날 사람들이 있는가, 또 그들이 가인이 살인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죽이려 드는가라고 반발한다. 많은 신자들도 미심쩍어서 곤혹스러워하는 과제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과 반대편에 있는 보수 진영에선 성경은 하나님의 오류가 없는 절대적 말씀이므로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광대하고 오묘한 뜻을 어리석은 인간이 다 알 수 없으니 일부 이해가 안 되고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기록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변증한다.
말하자면 믿음은 이성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따지는 것은 믿음에 방해만 되고 오히려 그나마 있던 믿음을 약화시킨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성은 안 좋은 것이라고까지 가르쳐져 왔다.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린 것은 분명하지만 보수주의자의 변증 또한 너무 궁색한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을 잘 이해하려면?
인간 이성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나님이 특별히 인간에게만 주신 아주 좋은 은사요 선물이다. 짐승에겐 없는 것이다. 짐승은 본능으로만 행동한다. 인간은 본능과 이성 둘 다 갖추고 있는 것이 짐승과 다른 점이라고 성경은 정확히 진술하고 있다.
동물은 식욕과 성욕 둘만 충족되면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 어떤 창조적이 새 일을 구상하고 계획을 세워 성취하지 않는다. 장래 일도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 개미가 식량을 미리 모으고 곰이 동면하기 위해 미리 많이 먹지만 실은 당장 그 한 해만 생존하려는 본능이지 장래를 대비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동물에게 식욕과 성욕 밖에 없는 것은 그들에겐 생육, 번성, 충만 하라는 복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창1:22) 종족 보존 외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조성하지 못한다. 반면에 인간은 생육 번성 충만은 물론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을 받았다. 하나님 대신에 그분의 이 땅을 거룩하게 유지하고 가꾸라는 것이다.
동식물이 아무 하는 일 없이 그저 생존만 하는 것은 인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동식물을 비롯한 다른 모든 피조물을 인간의 삶을 윤택하고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여건으로 미리 마련한 후에 인간을 만들었다. 그 모두가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를 높여주는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자연보호의 당위성에 대해서 성경은 수천 년 전부터 명확하게 밝혀 놓았다.
인간만 이성을 가졌기에 그분 대신 다스리도록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그에 맞게 장래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자신과 자기 주변 여건을 그 계획이 달성될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 이성이다. 쉽게 말해 사리를 분별 선택 분석 판단 결정 시행하고 특별히 평가하여 수정할 수 있는 종합적 사고 활동이다.
짐승은 갖지 못하고 인간만 갖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고, 가장 인간답게 만들고,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특성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닮은 점에 인간의 도덕성, 종교성, 영성 외에 이성도 마땅히 포함되어야 한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하나님도 이성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수다. 알지 못하고 무조건 믿으면 맹신이고, 잘못 알고 믿으면 미신이고, 믿는 방식이 틀리면 광신이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이성이 작동되어야 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대로 본문이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니까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이성적으로 접근해야만 이해가 되고 온전히 믿어지는 것이다.
최초 인간이 생육 번성하려면?
본문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이성적으로 따져볼 사안이 하나 있다. 아담과 이브는 물론 에덴동산의 유적과 유물이 없기에 그 실존조차 의심스러운데도 기독교인들은 어리석게도 그 설화를 무조건 믿는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세속의 역사는 실체적 증거가 없어도 역사적 기록 하나만으로 사실로 인정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인간 이성으로 문자로 기록을 남겼다는 자체가 증거로써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고대사에 대해 기록해 놓은 옛날 책 중에 성경만큼 정미하고 많은 기록도 없다. 가장 오랜 책이라고 보는 호머의 오디세이보다 성경은 근 2천 년이나 앞섰지 않는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이성을 사용해서 따져 보자. 모든 인간의 족보를 삼각형 모양으로 거꾸로 추적해 올라가면 반드시 한 꼭지 점에 이른다. 즉 최초의 한 부모를 만나게 된다. 그들이 바로 아담과 이브다. 성경은 아담을 고유명사라고 명확히 밝히기 보다는 남자와 사람이라는 보통 명사의 뜻으로 훨씬 많이 사용했다. 이브의 별칭 하와도 여자라는 뜻이라고 성경은 이미 밝혀 놓았다. 또 그들이 공중이나 바다 속에 집을 짓고 산 것이 아니다. 땅에서 거주했던 특정지역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신자들은 이런 점을 잘 변증하고 어떤 비난에도 당당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최초 인간 둘이 생육하고 번성하려면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수밖에 없다. 죄송하지만 오누이끼리 결혼 즉 근친상간을 해야 하는 것이 그 첫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진화가 아니라 창조되었다. 말하자면 자웅 간의 생식만으로 종 안에서 후손이 생기지 다른 방안은 절대 없으니 초기에 번식하려면 이 방식 외는 없었다.
또 초기의 인간들은 수명이 아주 길어야 한다. 지금처럼 60-70년 수명에 자녀를 몇 명만 낳았다면 당시의 사고나 맹수의 위험 때문에 번성 충만은커녕 겨우 생존하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전지전능해도 단번에 수십 억 명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수십억 명 분량의 식량도 필요하다. 하나님에겐 그 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인간 이성이 개발 진보를 이루어 땅을 다스릴 필요가 전혀 없다. 짐승처럼 그저 그냥 놀고먹고 후손만 번식시키면 된다.
하나님은 남녀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식으로 후손을 증식시키길 원하셨다. 이웃 또한 사랑으로 서로 돕고 섬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었다. 요컨대 하나님은 인간은 짐승과 다르게 인간으로 인간답게 만든 것이다.
비록 초기에는 근친상간과 장수로 생육번성을 이루게 했지만 번성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자 율법을 주셔서 근친상간을 금지시키고 수명도 짧아지게 만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플랜이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 그분이 당신의 계획대로 주관하신다. 영어 문자 그대로 그분의 이야기(His Story)가 역사(history)다.
성경은 인류 전체나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어떻게 개입했는지,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어떻게 계시했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책이다. 신학용어로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를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의 원리가 또 도출되는데 반드시 하나님의 관점과 뜻에 맞추어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 성경
본문을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가인을 죽이려는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근친상간과 장수의 방식으로 생육 번성한 가인의 혈족이다. 창세기 5장에서 족보가 지루하게 계속되고 아주 장수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바로 본문 14절을 해명하는 간접적 증거이다.
또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경을 따져봐야 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중에 인간이 꼭 알아야만 될 필요가 있는 내용만 기록해 놓았다. 즉 14절 이전에 가인의 혈족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에 집집마다 몇 명씩의 후손이 생기고 이 때쯤에는 총 몇 명 정도의 인구가 생겼다고 성경이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본문은 오직 가인의 행적에만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제사, 특별히 그 믿음을 열납 하는 기준과 죄인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 원리를 밝히려는 뜻이다. 이런 성경 해석 원리를 무시 아니 모르니까 본문에서 모순되고 상충되는 점만 부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자유주의신학자들이 가장 앞세우는 모토가 바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보고 도무지 납득이 안 되니 믿지 못하겠다고 비방한다. 그럼 오히려 그들이 문자적 해석에 얽매였고 그래서 스스로 자가당착을 범한 꼴이지 않는가? 이해가 되는가? 물론 그들은 처음에는 이성을 동원해 따져 보려다가 성경은 오류가 많은 고대의 인간적 기록일 뿐이라는 자기들 선입관에 묶이어 이성을 버리고 감정에 끌리는 판단을 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이성을 무시하라고 하면서 믿음만 요구한 적이 없다. 이성적으로 분별이 될 때에 오히려 더 굳건한 믿음 위에 설 수 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마음 밭을 잘 갈아서 가꾸라는 것이 기도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지라는 것이 기본적인 뜻이지만, 앞에서 말한 맹신과 미신과 광신에 빠지지 않도록 이성적으로 잘 분별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아담과 가인의 다른 점
본문 14절이 5장에 의해서 이성적으로 타당하게 설명된다는 사실은 성경의 의심은 성경 안에 해답이 있다는 뜻이다. 성경은 반드시 서로 대조 비교해 가며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구절이 또 하나 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12절a)라고 선언했다. 바로 앞에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11절)라는 심판의 구체적인 양상을 부연 설명한 것이다. 가인은 알다시피 농사짓는 자인데 그럼 씨를 뿌려도 싹이 돋지 않거나, 싹이 돋아도 다 시들어 죽는다는 뜻인가? 그래서 가인이 굶어죽을 판이라 농사를 때려치우고 이곳저곳 다니면 장사를 할 것이므로 땅에서 유리방황한다고 말한 것인가?
성경 안에서 해답을 얻어야 한다. 바로 창세기 3:19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어떤 형벌을 받았는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럼 가인은 굶어죽어도 하나님은 몰라라 방치했고 아담은 비록 인생살이가 힘들어도 굶지는 않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 뜻인가? 또 그럼 두 사람의 지은 죄의 질과 양에서 차이가 있어서 그랬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표면적으로만 따지면 가인은 인간관계를 파괴했지만 하나님께 나름대로 제사는 드렸다. 아담은 아예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그분을 부인 거역했다. 아담이 더 큰 죄를 지은 셈이다. 가인이 하나님에게 안색이 변해 분노했고 자기가 동생을 돌보는 자냐고 대들긴 했다. 그러나 아담도 하나님이 만들어 붙여준 이브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면서 대들긴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따지면 둘 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지웠다. 하나님 그분을 죽인 셈이다 죄의 질로 따져서 누가 잘나고 못나고 없다. 하나님 앞에선 둘 다 그분의 진노를 받아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 둘의 차이는 딱 하나다.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 아담은 돌아왔고 가인은 그럴 기회가 수차례나 있었지만 끝까지 돌아오길 거부하고 하나님의 반대편에 섰다는 점이다. 아담의 인생에 하나님이 있었고 가인의 인생에 하나님은 없었다. 가인과 아담의 생활 여건은 동일했다. 인생살이가 고달프긴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 아담은 끝까지 하나님 안에 남아 있었다는 것 단 하나만 달랐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고달픈 인생길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려는 이기적 목적 때문이 아니었다. 때로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아 의심과 불만이 생겼어도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 권능을 몸으로 체험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심도 피부로 실감했다. 현실의 고난과 문제보다 비록 이해가 안 되고 점점 시련이 더 겹치더라도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은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담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겸손히 인정한 것이다. 반면에 가인은 하나님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모양 이 꼴로 계속 버려두는 하나님이 싫고 미워서 그분을 믿고 따를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큰소리치며 스스로 박차고 나간 것이다.
가인이 받은 형벌
가인은 하나님과 어떤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아예 소통이 불가능했다.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평생을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평생 무슨 일을 해도 갈급하고 허망하게 지내다 마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라고 인간에게 당신의 형상을 심어주었다. 이제 가인에게는 그 형상이 원래의 특성과 능력대로 발휘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본능이 지배하는 짐승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지금 가인이 하나님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제가 어떻게 해야 다시 믿음을 회복 할 수 있을까요, 내 죄를 사함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내 인생에 대한 뜻과 계획이 무엇이에요, 등등에 관해선 일절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오직 내가 죽는 것만 면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살해당하지 않고 자연수명 대로만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나머지는 모두 내 멋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지배하는 원리와 방향과 힘이 오직 속에서 솟구치는 욕심과 감정대로 따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동물에게 약속한 첫 번째 복인 종족 번식만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가인을 굶어주게 하지 않았다. 친형제를 엄밀히 말해 당신을 살해한 그를 살려 주었고 회개할 기회도 여러 번 허락했다. 마지막으로 너무나 뻔뻔한 요구마저 들어주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가인이 고집 부리는 대로 놓아두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믿음을 강요 강제하지 않는다. 이미 허락하신 이성과 자유의지를 동원해 하나님과 교통하며 분별하여 당신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믿지 않는다고 따로 벌을 주지도 않는다. 하나님 없이 혼자 살아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갈급하고 허망한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큰 목표를 달성해도 그 기쁨은 잠깐이요 오히려 금방 더 허무해지는 것을 인간 이성이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인간의 속에 양심과 이성의 형태로 있고 또 그 만드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는 것이다.(롬1:19,20) 하나님 없는 삶은 하나님 당신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정녕 죽음이다. 그것을 구태여 길게 설명할 필요 없는 절대적 진리다.
그분 없이 사는 자는 자기 이성으로 자기 인생의 갈급하고 허망함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벌이며 믿지 않는다고 추가로 벌을 주지 않는다. 가인이 땅에서 유리방황하게 된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었지 하나님 탓이라고 핑계 댈 수 없다.
믿음이 필요한 영역은?
믿음은 이성과 상충하지 않는다. 이성을 초월할 뿐이다. 초월한다고 해서 둘이 따로 작동되는 별개의 차원이라는 뜻은 아니다. 믿음은 이성을 포함한다. 단 이성만으로 알 수 없고 하나님만의 너무나 광대하고 오묘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영역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영역이 있음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믿음이 아니라 바로 이성이다. 잘 들으셔야 한다. 인생살이는 누구에게나 고달프다. 아담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모든 사람이 자기가 최고라고 고집하여 분쟁이 생기고 사탄의 시험이 겹쳐져 문제투성이다. 그 문제에서 신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판단 계획 실천했지만 도무지 앞으로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두세 번은 있게 마련이다. 이성이 전부가 아님을 이성으로 인해 깨닫게 된다. 이성만으로 해결 되지 않는 차원이 인생에서 종종 발생함을 이성으로 알게 된다.
아담과 가인도 동일한 인생의 장벽에 혈혈단신으로 벌거벗고 섰다. 아담은 하나님의 너무나 크신 사랑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 안에 자기를 다시 소속 위치시켰다. 가인은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자기 길을 선택했다. 여기까지 분명히 인간 이성이 작동된 결과다.
그럼 믿음은 언제 동원되어야 하는가? 정작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 안에 들어가 있을 때다. 고난 중에 헤맬 때다. 사방에 출구가 다 막혀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졌을 때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있을 때다. 그럴 때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이 나락에서 다시 올라올 수 있는지에 관한 최선의 아니 유일한 해결책이 바로 믿음이다.
신자는 이성이 벽에 막혔을 때에 믿음으로 승화하며 그 벽을 이겨낸 자다. 이성만으로 끝까지 해결해보려고 고집하다 도무지 해결책을 얻지 못하면서도 계속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다 인생을 마치는 자가 불신자다.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그런 상황에 이미 빠져 있을 때에 그분의 광대하고 오묘함을 알기에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만 붙드는 것이 믿음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그분의 시각과 입장에서만 범사를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당신의 자녀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무조건 옳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자녀에게 나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행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나에게 주신 그분이 다른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최대한 광대하게 붙드는 것이다. 믿음이 좋은 것이 기도 말씀에 능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더 크게 많이 붙들수록 믿음도 더 큰 것이다. 더 크게 붙들려고 기도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 매사가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결국에는 실패할 것 같은 염려가 있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신자에게 유익하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기어코 드러내신다. 이런 확신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자유로워지고 평강을 유지할 수 있다. 최소한 요동치 않게 된다.
물론 요동치 않는 것마저 너무 힘들 만큼 우리 체질은 연약하다. 그러나 아담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붙들 힘도 없다면 그분을 떠나지만 않아야 한다. 아니 하나님 쪽으로 방향만 틀어도, 아니 눈길만 돌려도 된다. 가장 좋고 순전한 믿음이 어떤 것인가? “하나님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못 합니다. 하나님 알아서 하세요.”라고 완전히 모든 것 내려놓고 항복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정말로 그 때부터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신다.
2/28/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