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
창세기 강해 (51)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뒤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6:5-7)
의인이 한 명도 없었을까?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어지간한 신자라도 하나님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생긴다. 요즘 살펴보고 있는 노아홍수심판은 그런 인식을 주는 대표적 기사다. 일가족만 남기고 전 인류는 물론 모든 기식 있는 동물을 새까지 몰살했으니 너무 무자비하고 냉혹한 하나님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 그 심판의 원인을 설명하는 내용도 납득이 되기는커녕 하나님이 조금 과장 내지 억지를 부린 것 같은 의심마저 든다.
먼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다고 한다. 빈틈없이 죄악으로 가득 찼다는 뜻이다. 비유컨대 컵에 물이 찰랑찰랑 넘치면 컵 안에는 100% 물밖에 없듯이 세상에도 오직 죄악뿐이었다. 오늘날에도 불신자 중에 의인은 상당히 있듯이 아무렴 그 때에 착한 사람 몇 명도 없었을까 싶다.
그러나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오늘날로 치면 장로 목사가 첩을 둔 것을 넘어 직위와 권력을 악용해서 마음에 드는 대로 남의 아내를 빼앗는 지경이었다. 그런 판국에 나머지 사람들은 볼 것도 없다. 본문에 이어지는 11절에 온 땅에 패괴와 강포가 충만했다고 말한다. 패괴는 완전히 썩어 부패한 것이다. 강포는 잔인한 폭력을 말한다. 외모만 보고 자기들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은 패괴와 강포의 여실한 한 예일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말은 조금 심한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우발적 충동적으로 이뤄지는 일은 없다. 간혹 상대와 논쟁을 하다가 자기를 모욕하고 멸시하는 말과 행동을 해서 ‘욱’해서 죽였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평소에 그 사람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이 없이는 그러지 못한다.
반복적으로 능동적으로 행하는 것은 오랜 기간 생각하고 계획한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래서 어떤 거리낌도 없이 당당하게 즐긴다. 첩을 두거나 남의 아내를 빼앗는 일은 절대 우발적 행동이 아니다. 악한 생각의 계획을 실천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마저 그런 일을 아무 죄책감 없이 떳떳이 즐겼던 것이다.
아내를 억울하게 빼앗긴 자는?
혹시 남의 아내를 빼앗는다면 무력, 재력, 권력을 지닌 일부 특권층만 범한 죄이지 않는가, 빼앗긴 사람은 억울하고 아무 죄가 없다고 여겨지면 너무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은 생각이다. 지난주에 모든 성경해석은 그 헌법이 되는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봐야 한다고 했다. 일부 강포한 사람의 죄 때문에 인류 모두를 심판하면 그야말로 불공평하고 포악한 하나님이 된다. 믿고 따를만한 완전한 절대자가 아니다.
성경은 노아 홍수 직전은 무법천지라고 선언한다. 쉽게 말해 모든 사람이 칼을 빼들고 예쁜 여자 빼앗기 시합을 벌린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면 여전히 자기 연인이나 아내를 지키려다 죽은 의로운 남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보다는 성적 문란의 도가 지나쳐서 모든 가정의 울타리가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남편과 아내의 구분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성경의 의문은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롯 한 가족만 남기고 모든 주민을 몰살시키는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의 상태는 어땠는가? 남성의 모습을 한 세 천사를 온 동네 사람들이, 그것도 남성이 남성을 윤간하려고 덤볐다. 롯도 크게 나을 바 없어서 남성 손님을 보호하려고 시집 안간 자기 두 딸을 폭도들의 성적탐욕의 희생물로 주려했다. 소돔과 고모라 주민들은 여성을 상대하는 데는 이미 아무런 흥미를 갖지 못해 거절했다. 성중의 모든 여자를 모든 남자들이 다 상관했던 것이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소돔과 고모라나 지금 노아 홍수 직전이나 모든 사람이 개들처럼 아무나 성관계를 가지는 지경까지 된 것이다. 이방 우상 신들의 신전에서처럼 난교 파티를 하는 것이 일상화 되었고 동성애는 만연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사람 지은 것을 한탄했겠는가?
노아 홍수 직전과 방불한 미국
문제는 21세기 세계 최고선진국인 미국에서 지금 노아 홍수 직전과 방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이단처럼 성급한 종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한 번 냉정하게 따져보자.
간음이 죄가 아닌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죄라고 지적하면 거꾸로 인권과 자유를 훼방하는 죄로 간주되다 못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당한다. 그 뿐 아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행하는 성적문란의 절정인 동성애가 고무 장려 되고 있다. 이 또한 죄라고 지적하고 가르치면 감옥에 갈 판국이다. 소돔과 고모라 주민들이 롯에게 우거하는 주제에 감히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느냐 너부터 죽이겠다고 덤벼든 꼴과 하나 다르지 않다.
본문 5절을 다시 보자.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했다. 강조어법이 몇 번 사용되었는가? 모든 계획, 항상 악함, 악할 뿐, 세 번이다. 비교법 표현이 없는 히브리어법상 세 번 반복은 최상급이다. 세상에 죄악에 관영한데, 그 이유는 각 개인의 마음에도 오직 죄악뿐이라고 말한다.
이는 과장이나 억지가 결코 아니다. 지금 단순히 생각의 계획이라고 하지 않고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라고 표현했다. 마음은 생각을 조절 지배하는 인간의 더 깊고도 근본적인 내면이다. 말하자면 가치관이다. 서두에 인간의 모든 행동이 생각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그 생각은 평소에 옳다고 믿고 삶의 방향과 인생의 목적으로 고착시킨 가치관에 따를 수밖에 없다.
노아 시대에 가정의 울타리가 없어졌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에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고 아름답고 활기차게 다스릴 직분을 부여했다. 그 통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방안이 가정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전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순전한 사랑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을 이루라는 것이다. 또 후손들도 그런 가정을 이어가게 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는 것이 창조의 첫째 목적이었다.
지금 그런 소명을 완전히 무시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아예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가치관이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자 주인이라는 인본주의가치관으로 완전히 전도되었다. 더 정확히 말해 자기가 최고이고 절대적 선이고 법이 되었다.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고 그 대표적 실례가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창6:2) 것이었다.
개인주의가 도달하는 종착점
개인주의가 필연적으로 자동적으로 도착하는 종착점이 어디인지 아는가? 가정의 파괴다. 미국은 개인의 자유가 최고로 보장된 나라다. 간음이 죄가 아니게 된 연유가 무엇인가? 간음의 당사자인 부모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내 사랑은 내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지 않는가? 아무리 자식이라도 이 문제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나도 네 이성 친구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내 개인적인 감정을 존중해줘. 나도 짧고 한 번뿐인 내 인생을 내 뜻대로 살고 싶고 또 소중하게 가꿀 권리가 있어.
부모들이 각자 애인을 두다가 급기야 이혼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아야 하는 자식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 인생이 완전히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부모들도 아이들이 힘들어 할 줄을 모를 리는 없다. 그래도 갱이 되던 마약을 하던 그것도 네가 택한 네 인생이고 네 책임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이를 낳기만 했지 올바르게 양육할 책임은 완전히 외면했다. 기껏 후손을 증식시키는 것으로 그치는 짐승들의 행태다. 동성애의 또 다른 사악한 차원이 있다. 급기야 후손을 증식시키는 일조차 귀찮다는 뜻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불신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교회와 목회자들이 아무 죄가 아니라고 아니, 더 선하고 의로운 일이라고 가르쳐지고 있는 판국인데 과연 오늘의 본문이 과장 억지라고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성경과 하나님을 자의로 자기 가치관에 맞추어 편집 왜곡 아니 저작하고 있다. 하나님을 종으로 부려먹는 짓이다. 성경의 진리와 계명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정통교회의 신자들마저 간음이나 동성애에 대한 이런 변론과 핑계에 뭔가 일리가 있는 듯이 여겨지는 이유가 뭣인지 아는가? 인간이 인간을 높이는 내용인지라 그럴싸하고 호감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그래서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모습이 너무 냉혹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담이 범한 원죄의 그림자가 인간의 심령에 얼마나 교묘하고도 끈질기게 남아서 인간을 묶고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인류의 먼 미래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공상과학영화 중에 가장 섬뜩하고 묵직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도 매드맥스(Mad Max) 시리즈일 것이다. 핵전쟁으로 환경이 완전히 파괴된 먼 미래에 살아남은 자들의 행태를 그린 것이다. 그 시리즈가 가장 두드러지고 공통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바로 폭력과 성적문란이다. 오늘 본문으로 치면 패괴와 강포다.
원작자와 감독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성경적 진리와 상당히 비슷하다.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는 것은 인간의 대표적 본성이 그렇다는 것을 모두가 시인했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장래 소망이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그 동안 숨겼고 또 인간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제어해왔던 본성을 마음껏 발산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으니 더 이상 제어할 필요가 없다.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나, 그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나, 그 영화를 보고 공감하는 저 같은 사람이나, 모두 괴물도 네피림도 악한 천사도 그 후손도 아니다. 그저 보통사람일 뿐이다. 아무 소망이 없으니 절대적 선악의 기준이 있을 필요도 없다. 완전히 자기중심이 되어서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자기 기분에 따라서 행할 수밖에 없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는가? 노아 홍수 직전의 인류의 상태를 설명하는 오늘의 성경본문과 그 영화가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하지 않는가? 시간적으로도 인류가 번성하기 시작할 무렵과 번성의 극치를 맛보고 난 먼 미래의 상황이 동일하다. 거기다 인본주의만 표방하고 하나님의 정반대 쪽에 서있는 허리우드가 그 영화를 만들었다.
그럼 성경과 영화 둘 다 틀렸거나, 둘 다 옳거나 둘 중 하나다.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가 매드맥스 영화에 공감했으니 둘 다 옳다. 그럼 성경의 진리가 증명된 셈인데 왜 불행하다고 말하는가? 작금의 미국이 노아 홍수 직전의 상황과 같다는 분석도 옳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기독교인들까지 소돔과 고모라의 행태를 아무 죄책감 없이 자행하고 있지 않는가?
절망뿐인 인류(?)
그럼 인류에게 소망이 전혀 없는가? 예수님의 재림이 곧바로 닥쳤는가? 아니다. 인간의 절망했다고 하나님이 절망하는 법은 절대 없다. 인간의 절망이 깊어지고 사방이 꽉 막혀 탈출구가 없을수록 하나님의 소망과 권능은 커지고 그분의 역사는 시작된다.
성경이 말하는 바가 세상에 패괴와 강포가 가득해져서 성적으로 문란해지고 그래서 노아 한 가정만 빼고 몽땅 심판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7절까지의 내용일 뿐이고 8절 이하도 함께 읽어야 한다. 노아 한 가정을 빼고 모두가 그 마음에 하나님을 지우자 온 땅에 패괴와 강포가 충만해졌는데 도무지 회개의 여지가 없어서 노아 한 가정을 통해 이 땅을 다시 새롭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거한 인간의 마음의 생각이 계획하는 바는 항상 악하다. 항상 악하면 스스로 바로 잡을 수 없다. 하나님이 육체가 된 사람에 생기를 불어 넣는 작업을 다시 시작한 것이 노아 홍수다. 인간이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든 이 땅에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한 것이다. 실제로 노아로 방주를 백 년 동안 짓게 했다. 모두가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려 주셨다. 하나님의 무자비함은 눈 닦고도 찾을 수 없다. 정말로 인간의 패괴와 강포만 컵에 물이 찰랑찰랑 찬 모습이지 않는가?
제가 잘 아는 지인 한 분이 예수를 믿게 된 계기가 특이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의 의신칭의 교리를 배우기도 전에 성경의 하나님, 특별히 구약의 하나님에게 완전히 항복했다. 거의 모든 신자들이, 목사인 저마저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구약은 잘 읽지 않는데 이 분은 정반대였다.
대신에 단호하고 엄격히 심판하는 하나님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적 능동적으로 범죄했다. 마음의 생각이 악한 계획에 따라 떳떳하게 우상숭배를 했다. 하나님의 아들들도 우상 신전에서 난교 파티를 했다. 심지어 자기 자식을 산 채로 불에 태워서 몰렉 우상에게 바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하나님은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끝까지 용서하며 구원을 베풀었다. 이분은 너무나 큰 자비의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이런 사랑의 하나님을 어찌 안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안 믿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잘못이라고 겸허히 인정한 것이다.
본문 6절의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는 표현도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고 걱정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애통해하셨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전체의 결론으로 말라기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전혀 회개하지 않으니 성전 문을 닫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사백 년간이나 하나님은 침묵하셨는가? 하나님은 인간 특별히 당신이 택한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당신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너무 기가차고 애통해서 말문이 막힌 것이다.
또 그러니까 당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그들에게 당신께서 직접 오셔서 가르치기로 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시쳇말로 때려 죽여도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실 하나만이라도 제발 똑똑히 알라고 호소하셨다.
매드맥스 시리즈가 정작 강조하려는 주제가 또 하나 있다. 폭력과 성적문란 가운데 사람들은 구원자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불신자들도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고 점차 살만한 가치와 의미가 없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는 죽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때려 죽여도 자기를 높이고 치장하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의 그런 점을 두고 성경은 마음의 생각의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하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 믿는 특권
여러분과 제가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 실감할 수 있는가? 우린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다. 우리에게 의롭고 선한 구석은 눈곱만큼도 없음에도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 행위로는 구원 받을 자가 없다는 교리 이야기를 하려는 뜻이 아니다.
매드맥스 영화, 오늘의 본문, 소돔과 고모라와 방불한 미국에서, 실제로 모든 이들이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인정하며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가운데 있다. 노아 홍수 같은 심판이 그들에게 임해도 우리는 노아의 방주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완전한 절망에서 완벽한 소망으로 바뀌었다.
예수 믿는 인생에는 이 땅에서부터 절대로 절망에 다시 떨어질 수 없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소망이 100% 충만하기 때문이다. 죄악으로 관영했던 심령에 그분의 사랑과 권능으로 관영해졌다. 실감나지 않는가? 실제로 성령님이 임재해 영원토록 내주하지 않는가?
사람은 결국 두 부류로만 나뉜다. 인생살이는 누구에게나 고달프다. 사방이 막혀 자기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하늘을 향해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는 자와 동일한 곤경을 겪다 못해 비록 늦은 감이 있어도 그래도 하늘로 두 팔을 벌리는 자다. 하늘에서 땅을 보고 계신 하나님이 땅만 바라보고 있는 자에겐 은혜를 베풀 수 없다.
불신자는 세상에 믿을 놈 아무도 없다고, 남편과 아내는 물론 자식도 아무 소용없고 결국은 내 혼자뿐이다가 그 인생의 결론이다. 신자도 그런 결론에는 동일하게 이른다. 그러나 자기 자신부터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죄에 찌든 것을 절감하기에 사람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접었다. 자신의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항상 악함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진리만 소망하게 되었고 실제로 그분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고는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버려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남아 있을 자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진리가 아니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어찌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있는가?
5/8/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