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 강해 (5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滅絶)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창6:13-17) (본문은 짧게 인용했지만 8장까지 노아 홍수 전반에 관해 살펴볼 것이므로 성경을 펼쳐서 함께 추적해보기 바랍니다.)
의심되는 노아홍수 기록
교회 밖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노아 홍수 심판의 역사성 즉, 실제로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지구적인 홍수가 있었고 그 결과로 지각과 기후의 변동이 있었음을 일반학계에서도 인정한다. 전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에게 고대의 대홍수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지질학과 생물학적인 증거가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저는 실제로 그 증거를 목격했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처음 살았던 유타주 솔트레이크시는 아주 높은 산들로 빙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거의 민둥산들이었는데 정상 가까이 똑 같은 높이로 모든 산들에 일직선으로 침수된 흔적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 때는 아직 평신도였던 터라 노아홍수 발생 여부에 대해 찜찜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의심을 말끔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교회 안에선 홍수의 역사성에 대해선 의심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과연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사건이 전개되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을까? 후대의 성경 기록자가 지어내었거나 부풀린 것은 없는지 의아심을 갖는 자는 꽤 있다.
영국의 로이드 선급협회라고 선박구조의 표준규격을 공인해주는 기관이 있다. 계몽시대에 과학이 발달되고 대양을 항해하기 시작할 때에 설립되어 역사가 꽤 길다. 이 협회가 1609년 본문 15절의 길이 300 넓이 50 높이 30을 실제 실험을 통해 태풍과 파도를 이기며 순항할 수 있는 최적의 비율이라고 확인하고 등재했다.
놀랍지 않는가?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들은 바다와 거리가 먼 자들이다. 예수님 당시도 바다라곤 갈릴리 내륙호수를 말하고 고기잡이배도 겨우 서너 명이 타서 투망할 정도의 소형이었다. 대형선박을 건조한 경험이 전무 하다. 노아 당시에 배가 있어야 기껏 카누 정도 아니었겠는가?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알다시피 홍해를 걸어서 건넜고 양치기가 전문이었다.
엄밀히 말해 성경의 이런 기록에 놀라고 신기해하는 것은 우리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반증이다. 그 비율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직접 지시한 것 아닌가?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시고 그분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도 당연히 그럴 것 아닌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교리로 혹은 관념적으로 막연히 인식하고 치워선 안 된다. 실제 삶에서 기도하며 정말로 오묘하고 너무나 풍성하고 은혜 넘치는 오직 그분만이 행할 수 있는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그 체험을 성경의 진술과 정확하고도 세밀하게 대조 추적하여서 절대적 진리인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 정말로 자기 전부를 걸만한 진리인지 확인하고서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다.
노아 홍수는 언제 시작해 언제 끝났는가?
여러분에게 하나 질문해보겠다. 노아 홍수가 시작되어 얼마 만에 끝났는가? 누구나 쉽게 40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노아가 방주에 승선해서 하선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가? 거의 모두 대답하지 못한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증거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도 정확히 모르면서 노아 홍수의 역사성과 성경 기록의 정밀성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은 큰 모순이다.
박사논문을 심사하는 교수들은 사실 그 분야에서 논문작성자보다 훨씬 더 전문가이지만 논문을 세밀히 읽어야만 제대로 질문다운 질문을 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해 의심과 질문을 하려면 마찬가지로 제대로 읽고 난 후에 질문다운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정말로 제대로 정확하게 읽었다면 그 엄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고꾸라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인생이 반드시 뒤집어진다.
노아가 600세 생일 되는 2월17일에 홍수가 시작되었다.(창7:11) 노아는 참으로 특이한 역사상 최고의 생일선물을 하나님께 받았다. 모든 기식 있는 생명체가 멸절을 당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구원받았다. 문자 그대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첫날을 방주에서 보냈다. 그 후 40일 만에 폭우가 그쳤지만(7:17) 150일간 땅에 물이 창일했다.(7:24) 증발이 더디고 강과 계곡과 호수로 물이 아직 빠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방은 물뿐이었다.
물 위에 이리저리 떠다니던 방주는 7월17일에 홍수발생 후 다섯 달 만에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8:4) 정상에 배가 걸린 것이 아니다. 아라랏 산의 어떤 부분이 방주 밑에 암초처럼 걸려서 떠도는 것이 멈춘 것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다섯 달이나 배 속에서 지냈으니 땅 냄새가 무척 그리울 텐데도 방주에서 내릴 형편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이 점점 줄어들어 10월 1일에야 비로소 주변 산들의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8:10) 그러나 아직도 너무 멀고 자그맣게만 보여서 그 40일 후 11월10일 경에 까마귀를 내보내었다.(8:6-7) 이어서 비둘기를 내보냈어도 접족할 땅을 찾지 못해 공중에 배회만 하다 돌아왔다.(8:8-9) 그 칠일 후 11월17일에 비둘기를 다시 내보내자 감람나무 새잎을 물고 돌아왔고(8:10), 또 그 칠일 후인 11월24일에는 배를 떠난 비둘기가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8:12) 삶의 보금자리를 찾은 것이다.
해는 바뀌어 노아 나이 601세 정월일일에 물이 다 빠졌다.(8:13) 그래도 땅이 다 마르는데 두 달이 더 걸렸고(8:14) 2월27일에야 노아 가족은 방주에서 나올 수 있었다.(8:16) 간단히 다시 정리하면 폭우가 40일간, 산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기 시작한 것이 그 후 약 6개월, 물이 빠지는데 그 후 세 달, 땅이 마르는데 그 후 두 달이 걸렸다.
노아의 항해일지
지금 홍수 규모가 엄청났다는 이야기를 다시 하려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6:13-8:19는 노아의 항해일지다.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결코 지어낼 수 없는 기록이다. 특별히 까마귀와 비둘기를 순서대로 내보낸 것이 더 그렇다. 노아는 왜 까마귀를 먼저 내보냈을까? 까마귀는 들짐승의 시체를 깨끗이 먹어치우는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이 창조했다. 미국에서 여행하다 짐승을 치게 되면 까마귀 떼가 날라 와 깨끗이 청소해준다.
그런데 8:7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고 말한다. 배로 돌아왔다는 진술이 없다. 무슨 뜻인가? 물에 짐승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는 것이다. 까마귀는 그것들 먹어 치우느라 방주로 돌아올 필요가 전혀 없었다.
현재 세계 곳곳의 깊은 바다 속에서 육상동물의 화석이, 그 정반대로 고산 지대에서 바다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전 지구적인 홍수가 있었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최근 과학계가 노아 홍수를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근거다. 또 그래서 동물의 시체들이 방주 주변에 있었다는 것은 방주가 폭우와 큰 파도는 겪었어도 그 격심했던 지각 변동에선 하나님이 피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노아가 까마귀 다음으로 비둘기를 날렸는데 비둘기는 알다시피 통신수단으로 사용할 만큼 오래 동안 멀리 날 수 있다. 성경은 “저녁때에”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다고 말한다.(8:11) 하루 종일 걸릴 만큼 아주 먼 산까지 갔다 온 것이다. 동물은 생존 여건을 본능적으로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자동적으로 무조건 먹이부터 찾는다. 비둘기는 높은 산이 아니라 산자락 아래쪽에서 자라는 올리브 나무 새 순을 입에 물고 왔다.
노아는 방주 주변에 동물의 시체가 있는지 알아보려 까마귀를 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비둘기는 멀리 떨어져 보이는 산들에 물이 얼마나 빠졌는지 또 식물이 새로 자랄 형편이 되었는지 알아보려 내보냈다. 바로 곁의 아라랏 산에 내보내지 않았다. 아직 물 아래 있거나 산의 아주 높은 부분에 바위만 보였던지 아님 너무 진흙탕이었던지 했을 것이다.
이런 정밀한 기록은 후대에 지어내거나 과장해서 덧붙일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노아의 생일이 언제인 지는 노아 본인 밖에 모른다. 후대에 이왕에 보태려면 노아의 생일에 방주에 승선했고 그 다음 생일에 땅에 발을 디뎠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지 않을까?
그가 배 속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군대 말년에 제대를 얼마 안 남긴 고참병은 날마다 달력에 표를 해가며 제대 날짜를 목 빠지게 기다린다. 노아도 어서 빨리 홍수 심판이 끝나고 땅에 내리고 싶어서 정확하게 항해일지를 작성했을 것이다. 종이가 없으면 나무에 바를 정(正)자를 파가며 날짜를 세었을 것이다.
더 놀랍고 세밀한 하나님의 은혜
노아 홍수 기사에서 성경의, 다른 말로 하나님의 정밀성을 따져볼 부분이 하나 더 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향해 나의 신이 영원히 함께 하지 않아 육체가 될 것인데 그들의 날이 120년이라고 했다.(6:3) 홍수 후에 지구 생태계가 완전히 바뀌어 인간의 평균수명이 그만큼 대폭 줄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 선고가 직접 해당되는 일차 청중은 당시에 성적으로 극히 문란해 심판을 받을 자들이었다. 그들을 향해 너희는 앞으로 120년 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다. 홍수 심판이 120년 뒤에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노아는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곧이곧대로 그 자리에서 시행했던 의인이다. 그렇다면 그가 방주를 지었던 기간은 120년이 된다. 현대적인 제제소가 없어서 원시적으로 도끼로 나무 자르고 톱으로 썰고 하려면 그 정도의 기간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5:32에 따르면 노아는 500세에 세 아들을 낳기 시작했다. 홍수 시작은 그가 600세 되던 해 생일날이었다. 그럼 첫 아들을 낳고 100년 뒤다. 아들을 낳기 20년 전부터 방주를 짓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참으로 놀랍지 않는가? 이런 구절을 자세히 살펴 소름끼치도록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미국 남침례교단에선 성인이 되지 않아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자녀가 있으면 해외선교사로 파송하지 않는다. 자녀교육이 우선적이라는 것이다. 노아더러 가족의 구원이나 자식 양육에 대한 부담감 없이 방주 짓는 일에 몰두 할 수 있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였다.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은 노아 일가족으로 새 인류의 선조로 세워 이 땅을 구원할 역사를 노아 모르게 훨씬 이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가장 적합한 때에 그 계획을 시행하려는 것이다. 가장 적절한 때라고 심판하기에 모든 형편이 부합한 때라는 뜻이 아니다. 패괴와 강포가 충만한 이 땅에 대해 참고 참으며 또 참다가 그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시첨이다. 거기에다 120년을 회개할 마지막 기회로 더 추가하는 은혜를 베푸셨다.
소름끼칠 만한 은혜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노아가 방주를 짓기 전에 살았던 기간이 방주를 건축한 기간의 4배 이상 길었다는 점이다. 지금껏 우리는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에 사람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비방과 멸시와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만 강조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만히 있던 노아에게 500세 되던 해 갑자기 “뿅!” 하고 계시를 준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당세에 완전했고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고 있었다.(6:9)
노아는 성인이 된 이후로 근 500년 동안 이 땅이 더럽고 추하게 타락해가는 모든 과정을 죽 지켜봤다. 그 땅을 안고 눈물로 기도했다. 방주를 짓는 120년을 견딘 것도 대단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전에 500년의 핍박을 견딘 것이 더 대단하다. 또 그랬기에 120년을 거뜬히 견딘 것이다. 기쁘게 그 일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과 소명감에 불 타 거뜬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소망이 사라진 것을 절감했다. 인생을 살아갈 가치와 의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남자는 물론 여자까지 모두가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꼴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의로운 분노에 휩싸여 주변 사람들에게 점잖게 충고 권면하다가 화도 내어보고 애걸복걸도 했을 것이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설득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하나님을 믿으라, 너희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전도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로 인간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모습인지 잘 따져보라고,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다름없지 않느냐고 눈물로 호소했을 것이다. 어쩜 처음에는 그들도 양심에 찔렸을 수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자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께 기도 응답 받은 노아
그런데도 노아가 500년간 호소하고 120년간 방주를 짓는 동안에 단 한 명도 회개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당장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수명이 엄청 길었는데도 나쁜 일이 전혀 생기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에 풍족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랜 세월 죄에 너무 익숙해져 자기 몸에 아주 잘 맞는 옷처럼 죄가 함께 들어붙었다. 몸에 너무 잘 맞으니 원래 그렇게 살도록 지어진 것처럼 여겼고 그것이 더 편했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했다. 문명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발전시킨 양 자부심에 가득 찼고 그 문명을 라멕처럼 살인에 이용하고도 자랑할 정도였다.
모든 일이 너무 신나고 즐겁기만 했고 아무 문제없이 굴러가는 데도 노아 혼자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꾸 귀찮게 굴었다. 나중에는 방주까지 짓고 있으니 왕따를 시키다 못해 아예 미친 사람 취급했을 것이다.
그 모든 풍족함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셨다는 인식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은 인류를 번성케 하려면 장수시켜야 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생존환경을 최적화 해놓았다. 자연 재앙이 생길 리 없고 공해도 없었고 세균감염도 없었다. 땅은 기름져서 무엇이든 심기만 하면 곡물 야채 과일이 지천에 늘리게 자랐다. 그러니 하나님은 아예 필요 없었고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오던 삶의 방식을 포기는커녕 수정할 이유도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지금의 미국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처럼 말이다.
노아는 가정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죄송하지만 모든 인간이 인간이길 거부하고 개처럼 성적으로 타락했고 어린이들마저 그 타락에 동참시키는 모습에 절망을 느꼈다. 사람들을 설득 권면하는 동시에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이다. “정말로 이 땅을 이대로 계속 두고만 보실 것입니까? 저 혼자로선 도무지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저들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면 전할수록 오히려 역효과만 납니다. 이젠 정말 기도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날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노아는 결국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6:8) 쉽게 말해 그 오랜 기간의 울부짖는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다. 원어의 뜻이 “여호와의 눈에서 자비를 발견했다.”는 것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다. 하나님이 자기 기도에 침묵만 하고 이 땅에 타락상에 대해 수수방관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더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불신자들에게 심판을 선고했다고 말하고 같은 문장 안에서 신자인 노아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았다고 선언하고 있다. 노아는 현재까지 단 한 명도 회개하지 않았어도 추가로 120년의 유예 기간을 받았기에 최소한의 희망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더 중요하게는 그 기간에마저 단 한 명도 회개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그럴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자기를 통해 새 세대를 형성할 하나님의 깊은 뜻은 깨달았다.
아들을 낳기 시작한 노아
그 계시를 받자마자 노아는 방주를 짓기 시작했고 더 중요하게는 그 후 20년 뒤부터 아들도 낳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도무지 소망이 없어서, 비록 당시는 노년에 아이 낳는 것이 일상적이었지만 노아의 경우는 분명히 그런 타락의 땅에서 아이를 낳아야 아무 의미가 없어서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자녀들이 그 추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제대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과 결혼만 해도 기괴하고 추한 모습으로 타락해져 가는 판국이니 말이다. 방주를 짓기 전에는 즉,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기 전에는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이 땅과 인간을 향한 궁극적인 뜻은 재앙과 심판이 아니다. 오직 구원과 생명이다. 하나님을 찾고 믿는 자가 거의 다 사라지고 이 땅의 역사를 종결시키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궁극적 목적은 심판이 아니다. 죄인은 언제든 심판하실 수 있다. 그 때까지 노아 시대처럼 신자가 단 한명만 남아 있어도 그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서 영광스런 구원의 완성을 시키러 오시는 것이다.
최근에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과 한국에서, 말하자면 세계에서 1, 2위의 기독교 국가에서도 솔직히 말해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느냐? 도무지 아이 키우기가 겁나고 그들 장래 또한 비관적이지 않는가? 그럼 지금이 노아 홍수 직전이라고 분석했던 제 말씀이 목사로서 과장이나 공갈협박이 아니지 않는가?
이런 지경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아처럼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되어서 이 땅을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하는 수뿐이다.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가능하다. 그 외에는 소망이 결코 없다. 노아는 평생을 이 땅의 죄악상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던 자다. 방주 짓기 전 500년을 기도했다. 방주 짓는 120년 동안 못을 하나하나 박을 때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박았을 것이다. 방주 안에 갇혀 있던 1년 10일 간 그가 할 수 있었던 일도 기도뿐이었다. 방주야말로 금식기도원이었고 주야로 기도했을 것이다.
물론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 이 땅을 끌어안고 항상 기도하는 노아처럼 의인이 되지 못한다. 모두가 목사가 선교사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일이 절대 먼 미래의 남의 일이 아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벌써부터 불안하고 염려되고 있지 않는가? 당장 우리에게 닥친 우리의 일이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른이 되었을 때, 또 그들이 자녀를 낳을 때의 이 땅은 어떻게 될 것인지 빤하지 않는가?
제게 두 손녀가 있는데 너무나 깜찍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얼굴만 봐도 모든 스트레스가 해소될 정도다. 그런데 마음 한쪽 구석으로는, 제가 너무 과하게 앞서간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저들이 앞으로 부딪혀서 살아갈 세상의 형편을 생각하면 너무 안 되었고 짠한 감정이 생긴다. 거기다가 예수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은 더더욱 애처롭고 불쌍하기만 하다.
그래도 기억하실 것은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단 신자들이 하나님의 눈에서 소망과 자비를 발견할 때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신자는 어떤 절망이 닥쳐도 이 땅을 고쳐달라고 하나님의 소망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만약에 신자의 그런 기도가 끊어지면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이 땅에 임할 수 있다.
5/22/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