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노아가 왜 완전한 자인가?
창세기 강해 (5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 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세에 죽었더라.”(창9:18-29)
성경이 인간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제외한 자연인 중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노아가 유일하다. 그는 의인이자 당세의 완전한 자라고 했다.(창6:9) 패괴와 강포가 충만한 이 땅과 인간을 홍수로 심판한 후에 새 인류의 선조로 세울 만한 자격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실제로 방주를 짓는 120년간을 포함해 근 600년을 세상 사람들의 온갖 멸시 비방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 땅의 죄악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다. 또 사람들에게 제발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했었다.
오늘의 본문은 그렇게 완전했던 노아가 술에 취해 큰 실수를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완전하다는 것은 타락과 실패는 물론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상태다. 완전했다가 불완전해지면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외에는 완전한 존재란 없다. 성경이 노아를 완전하다고 말한 것부터 착오가 아닌가? 어쨌든 원인 제공은 본인이 해놓고 아들 함만 저주하면 더 이상하지 않는가? 오류가 없는 성경인데 과연 노아를 어떤 면에서 완전하다고 말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이 사건의 자초지종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아비의 하체를 보았다는 뜻은?
노아는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를 심었다.(20절) 하나님이 땅이 있을 동안에 심음과 거둠을 쉬지 않게 하여 인간의 생존환경을 풍요롭게 보존하겠다는 약속이 성취되는 모습이다. 그런데 포도주에 만취해 장막 안에서 발가벗고 잤다.(21절) 술에 취해서 몸에 열이 났는지, 계절이 여름이었는지, 장막 안이라 그런지 어쨌든 굉장히 더웠던 것 같다.
아들들이 들락날락해도 몰랐다.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이 깨서야 알 정도로(24절) 인사불성이었다. 아들들이 맘 놓고 들락거렸으니 대낮인가 보다. 밤이면 자기들도 자야 하므로 아비의 장막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갔으니 더운 낮이라고 봐야 하고 그러니 더욱 옷을 벗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때 아들 함이 아비 노아의 “하체를 보았다”는 표현이다.(22절) 하체는 생식기의 완곡한 표현이다. 노아가 우리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은 잘못을 범한 것 같은데도 아들 함을 저주한 내용이 너무 심하다. 그래서 그의 잘못을 더 강조하려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문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 해석이 있다.
먼저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죄를 꾸중하면서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다고 했는데(겔22:10) 아버지의 첩과 관계를 할 정도로 성적으로 타락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함이 아비 노아의 첩과 관계를 맺었다고 본다. 그러나 당시 노아 일가족뿐으로 노아에게 첩이 있을 리가 없다.
둘째는 아버지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함은 천지가 개벽되는 홍수심판을 직접 목격했고 그 심판의 중요원인이 동성애 같은 성적타락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노아로부터 신앙교육도 철저히 받았을 것이므로 그럴 리는 없다.
대체로 성적관계를 말하는 표현은 하체를 범했다 혹은 더렵혔다고 말한다. 본문은 하체를 보았다고 했다. 문자 그대로 하체를 본 것이다. 형제인 셈과 야벳의 행동과 비교해보면 함이 잘못을 범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옷을 어깨에 맨 것은 시야를 가리는 것이다. 뒷걸음질해서 옷으로 아비의 하체를 덮었는데 얼굴을 아예 반대쪽으로 돌려서 하체를 보려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함이 일부러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니다. 무심코 아비의 장막에 들어갔다가 대자로 뻗어 자고 있는 아비의 하체가 그냥 눈에 들어온 것뿐이다. 말하자면 함의 잘못은 아비의 하체를 본 것 때문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는데 곧바로 셈과 야벳같이 옷을 덮어두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두 형제에게 고한 것(22절)이 잘못이다. 아버지의 실수를 고쳐주거나 모른 척하지 않고 흉을 본 것이다.
노아로선 분명히 옷을 입고 잤는데 깨어보니 하체는 벗었고 겉옷이 입혀진 것이 아니라 덥혀져 있음을 알고 어떤 연유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아들들에게 경위를 물어보곤 함이 한 짓을 알게 되었다. 만약에 함 혼자 얼떨결에 아비의 하체를 보았어도 형제들에게 비밀로 하고 혼자 뒷걸음쳐서 옷으로 덮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노아가 깨서 그 경위를 듣고선 함에게 저주는커녕 축복 위에 축복을 더했을 것이다.
결국 지금 성경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술에 취하지 말라, 술을 마시지 말라도 아니고, 심지어 술 마시고 벌거벗고 잔 것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 태도와 근본 마음의 자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에선 아버지의 성함도 박자, 진자, 호자라고 각각 떼어서 말한다. 이름이 단순히 법적 신분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격 나아가 그분 전체를 대변한다고 본 것이다. 그 이름을 자식이 함부로 거명한다는 것은 큰 불경이다. 미국처럼 아버지를 “Hey Jinho!”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아버지의 하체는 요즘은 공동목욕탕에서 아버지 아들이 함께 목욕하지만 저희 때만 해도 평생을 볼 기회가 없다. 함이 이름도 부르지 못할 아버지를, 그것도 하체를 두고 형제들 앞에 조롱했으니 얼마나 큰 죄인가?
술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런데 본문이 아버지를 조롱하지 말고 존경하라는 가르침으로 그칠 것이면 구태여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는 그런 설교를 하는 곳이 아니다. 행간의 의미를 추적하여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을 살펴야 한다. 서두에 말한 대로 왜 성경이 노아를 완전한 자라고 말하는 반드시 따져야 한다.
성경은 원래 장절의 구분이 없기에 20절과 21절을 이어서 읽으면 어떻게 되는가? 첫 수확한 포도로 포도주를 담았는데 그 맛이 너무 좋아 과음했다는 뜻이다. 평소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노아가 술주정뱅이로서 낮술을 하고 옷을 벗고 뻗어 자는 정도의 위인밖에 안 된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종으로 들어 사용할 리가 없다.
만약 노아에게 그런 습관이 있었다면 함도 함부로 장막에 들어가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회성 사건이었다. 그럼 노아가 과음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첫째 가능성은 너무 오래 동안 술 안 마시다가 오랜만에 마셨거나, 처음으로 술을 마셔 과하게 취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옷까지 벗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포두주가 너무 맛이 좋아 자꾸 더 마셨을 수 있다. 하나님이 극상품 포도를 맺게 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말이다. 홍수 심판 때에 땅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더 풍요롭게 만든 하나님의 사랑을 절감했을 수 있다.
지금 신자도 기쁜 일이 생기면 마음껏 술 마셔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뜻이 아니다. 신자와 술의 관계는 본문의 주제와 무관하니 다음 기회로 미루자. 대신에 꼭 한 가지 집고 넘어갈 문제는 있다. 술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박카스 신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잘 새겨듣고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먹다 남은 보리 빵을 버려두었더니 빗물이 고였는데 차츰 노란 색을 띄고 그 맛이 시원 씁쓸해졌다. 그것이 바로 맥주다. 또 포도 먹고 남은 것도 썩을 줄 알았더니 보라색 액체로 변하면서 그 맛이 알딸딸해진 것이 포도주다.
술을 누가 만들었느냐가 본질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이 먹을 것을 풍족하게 마련해주셨다는 뜻이다. 인간이 똑똑해서 세상에 없던 것을 발명해 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연 안에 이미 풍성히 마련해 놓은 은혜를 찾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포도주를 마신 것은 분명하지만 나체가 될 만큼 과음하는 원인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함이 진짜로 잘못한 것은?
다시 24, 25절을 자세히 보라. 잘못은 분명히 아들 함이 했는데 노아는 불쑥 아들 대신에 손자 가나안을 저주했다.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알다시피 히브리 어법에는 비교급 최상급이 없고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표현한다고 했다. 두 번 반복하면 비교급, 세 번 반복하면 최상급이 된다. 종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했고, 그 종들의 종이라고 했으니 이미 세 번 이상 반복이다. 즉 최고로 비천한 종이라는 뜻이다.
손자란 무슨 짓을 해도 정말로 귀엽고 사랑스럽다. 자식은 직접 양육하다 보면 서로 부딪히는 일이 많고, 또 장래까지 책임져 주어야 하는 부담이 크다. 자식을 키울 때는 아직 힘이 넘치는 청장년기라 의욕과 욕심이 많아서 아이들을 계도 훈육하기 바쁘다.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손자를 직접 키우지 않고 가끔 좋을 때만 보면 된다. 장래 걱정은 아들 부부에게 맡기면 된다.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봤기에 훨씬 포용적이고 너그러워진다. 무엇보다 손자 손녀는 외롭고 쓸쓸한 노년의 기쁨과 보람이 되게끔 무작정 예쁘게 보이는 본성을 하나님이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노아는 대뜸 손자 가나안부터 저주했다. 그럼 무슨 뜻인가? 평소에 함의 행위가 마음에 안 든 것이다. 또 그 아버지에 아들이라고 가나안은 더 개차반이었던 것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워야 할 손자 가나안이 할아버지 노아에게 기쁨과 자랑이 되기커녕 오히려 평소에 걱정꺼리였을 뿐이다.
술이란 기쁜 일로 마시면 어지간해도 잘 취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며 마셨다면 최소한 하나님이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신다. 노아는 걱정 분노에 휩싸여 혼자서 대낮부터 마셨던 것이다. 아들과 함께 마셨다면 나체가 되도록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아는 함과 가나안을 생각하며 걱정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술에 취해 누워 자면서도 그 염려가 가슴을 짓눌러 갑갑해서 옷을 벗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여러분 같이 경건히 살았던 자는 몰라도 세상의 탕자였던 제 경험상 정확한 분석이다.
성경이 노아의 나이를 명기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28,29절) 구백오십 세를 향수했다. 육백 세까지는 인생전반부로 홍수심판을 대비하고 방주를 짓는 일에 매진했다. 홍수 후의 350년은 인생후반기인데 중요한 사건으로 본문에 술 마시고 실수한 것 달랑 하나뿐이다. 노아가 술을 즐긴 것이 아니다. 낮술 마시고 실수한 것은 단 한번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렇다면 더더욱 아들 함과 손자 가나안을 너무 걱정한 나머지 술에 취했다는 분석이 타당해진다.
노아는 틀림없이 자식과 손자에게 여호와 신앙교육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함과 가나안은 별로 관심이 없고 건성으로 듣고 흘리는 모습을 노아는 주시했던 것이다. 대신에 그들의 모든 행동과 말이 오직 자기중심이었다. 함이 아버지에 대한 근본 예의도 안 갖출 정도면 무조건 자기 생각과 기분대로 하는 자라고 봐야 한다. 육신의 아비에게 그럴 정도면 하나님에겐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손자 가나안도 아버지 함에게 매일 보고 배우는 것이 그런데다 자기중심인 사람일수록 자기가족 즉 자식은 끔찍이 위하므로 더 버릇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손자 가나안은 어려서부터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악한 자의 전형으로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아가 완전했던 이유
그런 아들과 손자를 걱정하다 못해 노아는 자기도 모르게 과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추수 감사로 시작했는데 도가 지나치고 하나님께 기도할 문제를 스스로 괴로워하고 술로써 달래며 억지로 망각하려 들었다. 참으로 오묘하게도 노아가 부끄러워하던 바로 그 아들 함 앞에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노아를 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가지 부연설명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창6:9) 첫째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비해 그만 완전했다는 뜻이다. 둘째는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완전의 필수조건을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들고 있다.
당시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겸손히 엎드렸기에 완전한 자였던 것이다. 완전하다는 것이 원어상으로 완벽하다는 뜻도 있지만 진실하고 순전하다는 뜻이 더 크다.
성경은 노아를 완전하다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그를 완전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인간적 평가가 아니다. 인간의 평가 기준과 그분의 평가 기준은 다르다. 본문에서 노아에 대비해 함과 가나안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 하나님과 순전한 모습으로 동행했는지 아니었는지 여부뿐이다.
구원과 심판 즉,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절대적으로 유일하게 주관하는 이는 하나님이다. 탄생과 죽음을 어떤 인간도 스스로 계획 실행 통제 못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럼 그 중간인 이 땅에서의 한번 뿐이고 짧은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이도 절대자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다. 당신과 동행하는 자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다. 동행하지 않으면 죄인이요 불완전한 자다. 인간은 인간을 도덕으로 평가하고 하나님은 종교로 평가한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도덕적으로 따져 하나님 앞에 잘난 자는 단 한명도 없다. 당장 저를 필두로 그분의 재판정에선 우리 모두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도덕 철학 종교는 물론 심지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기독교 믿음조차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구원을 얻는 데는 하나님은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다. 사형수인 인간이 스스로 어떻게 그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이 공짜로 사면해 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분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그 사랑에 항복했는지 아닌지만 보신다.
아우슈비츠의 지옥 실상
가끔 설교에 드는 예화지만 가장 합당한지라 다시 들어보겠다. 한 미국목사가 목사가 된 계기를 이렇게 간증했다. 이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했는데 마침 독일이 항복한 후에 아우슈비츠 유대인수용소를 인계하는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완전히 지옥이었다. 발가벗긴 유대인 시체를 남녀 구분 없이 기차 화물칸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방금 개스실에서 나왔는지 온기가 남아있는 시체마저 있었다. 더 많이 실으려고 층층이 머리와 발을 교차로 해놓았다. 너무나 큰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나치와 히틀러가 사탄이라고 여겨져 저주를 퍼부었다.
독일 패잔병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대장이 누가 호송할지 물었다. 마피아 갱단 출신으로 평소에 고문관처럼 손도 깜짝하지 않던 가장 험악한 동료가 제일 먼저 자원했다. 그가 트럭을 몰고 산을 넘어 다른 부대로 향했는데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고 금방 다시 돌아왔다. 죄수들이 도망치려 해서 모두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대장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속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마피아 출신의 그 군인이 독일군의 행태에 분노가 치밀어 그냥 학살한 것이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고 구체적 경위도 묻지 않았다. 목사가 된 그 미군도 속으로 통쾌한 기분을 느꼈고 자기라도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불현 듯 그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 알게 되었다. 독일 병사에겐 아무 죄가 없었다. 전쟁 중에 상관의 명령을 불복하면 현장에서 총살당하는 판에 그냥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 죽은 독일군이 사탄도 악인도 아니었다. 반면에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 그 군인이 또 그것을 속으로 통쾌하게 여긴 본인이 오히려 더 악인이요 사탄의 하수인임을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했다.
이 목사가 절감한 의미가 무엇인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다. 독일군이나 미군이나 악의 희생자요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배후에 그들을 농간하고 미혹하고 조종하는 흑암의 세력이 분명히 실존함을 알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죄란 단순히 잘못하는 행동, 말, 심지어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나 끈질기고도 교묘하며 음흉하게 모든 인간을 노예로 묶어서 한쪽 방향으로만 끌고 가는 가공할 힘, 습관성, 방향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 방향이 어디인가? 오직 하나님의 반대쪽이다. 그는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선 그 존재 자체가 철두철미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자부해왔는데 도리어 그것만큼 큰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절망에 빠져 있는 인간은 자기를 절대 스스로 건질 수 없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조건 없는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길만이 소망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 그 미국 목사는 그 점을 뼈저리게 체험으로, 자기의 너무나 더럽고 추한 영적 실상을 보면서 알게 되어 예수님 사랑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헌신한 것이다.
기독교는 사람들더러 착한 일 많이 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회 나오지 않아도 종교가 없어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부패되어 추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모르고 있는데 제발 그 사실 하나만 겸허하게 시인하고 그 바탕 위에서 모든 일을 행해나가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출발이자 전부다.
본문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는 술 취해 실수했어도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세상에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아도 하나님 보시기엔 죄인이다. 그분이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할뿐이다. 사람의 칭찬에 취해서 하나님은 물론 사람들 앞에서 더 교만해지니 더더욱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공동묘지를 보고 핑계 없는 무덤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자기 계획대로 살아서 성공한 인생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다 실패했다고 불신자들도 솔직히 시인했다. 또 나이 들어 본문의 노아처럼 노인이 되면 하는 넋두리가 무엇인가?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자식들이 잘 못된 것이 모두 내 탓이고 내가 죽을 죄인이지!”다.
단순히 겸양의 미덕이 아니다.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보고 나니까 나부터 죄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내 잘못으로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한 적이 정말 많더라는 것이다. 나아가 도덕적으로 따져보니 누구 하나 완전하지 않고 점수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딱 하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는 진정으로 겸손히 항복하지 않는다. 끝까지 십자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순히 교회에서 박수치고 찬양하는 그런 모습만 본 것이다. 본인이 시인하고 고백한 바로 그 내용이 기독교 믿음의 본질인데도 그 점을 모르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자기만은 핑계 없는 무덤 즉, 성공할 인생을 꾸릴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곧 죽음이 닥치면, 아니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 이 얼마나 무모하고 겁이 없는 짓인가? 그러니 더더욱 예수님 사랑밖에 소망이 없지 않는가?
성경은, 아니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인간에게 한 가지 질문만 하신다. 본문의 노아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 남아 있을 것인가? 함과 가나안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품 밖에서 갈급하고 허망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칠 것인가?
6/26/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