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찬양 집회
출애굽기 강해 (32)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15:1-11)
하나님의 능력보다 섭리
이스라엘이 홍해의 마른 땅을 걸어 건넜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전부 수장됨으로 출애굽의 대장정은 마무리 되었다. 본문은 홍해를 넘어 애굽 반대편 땅에 안전하게 도착한 이스라엘이 모세의 선창(先唱)에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여호와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라고 세 번이나 강조하며 하신 약속이(출14:13) 성취된 것에 대한 감사의 찬송이다. 지금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를 바다가 막고 있다. 또 병거와 군대와 장관이 홍해에 잠겼다.(4절) 최정예 전차군단이 괴멸되었고 총사령관과 많은 장교들이 전사했다.
애굽 군대는 히브리 신의 너무나 큰 권능을 확인했다. 나머지 군대를 재정비하여 배를 타고 추격할 의지는 아예 사라졌다. 히브리 신을 인정하기 가장 힘들고 내키지 않았던 군대지만 막상 그들이야말로 가장 진심으로 완전하게 항복했다. 힘을 가진 자라야 상대가 가진 힘의 진가를 정확히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홉 번의 재앙은 자연현상의 모습이었고 인명 손실이 전무했다. 열 번째 장자의 죽음도 한밤중에 침상에서 누워 자던 채로 당했다. 애굽의 일반 백성들은 히브리 신의 권능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했고 또 측정할 기준이 없어서 크게 실감하지 못했다.
반면에 애굽 군대는 세계 최강의 최신 무기가 전혀 작동하지 못했다.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이스라엘을 눈앞에 빤히 보고도 칼과 창 한번 휘둘러보지 못한 채 바닷물이 삼켜버렸다. 이스라엘에게 진 것이 아니다. 히브리신에게 직접 패배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다고 묘사했다.(5절) 돌은 일초도 떠있을 수 없고 다시 떠오를 수도 없다.
나아가 애굽 군대가 두려워했다면 블레셋, 에돔, 모압 같은 작은 나라들은 더더욱 이 기적을 전해 듣고 더 크게 떨 수밖에 없다.(14,15절) 모두가 앞으로 이스라엘을 대적할 족속들이다. 출애굽에서 여호와의 크신 능력을 이야기하려면 입만 아플 뿐이다. 그보다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에 더 주목해야 한다.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병거를 타고 추격해오자 이스라엘은 죽게 되었다고 여호와께 울부짖었다. 정작 하나님은 애굽 군대와 바다라는 장애물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도 성취할 준비를 미리부터 하고 있었다.
그 땅으로 가는 중도에서 만날 나라들과 가나안 땅의 족속들에게 히브리신이 어떤 신인 줄 미리 알려 준 것이다. 당신의 엄청난 권능을 똑똑히 보여준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해 미국이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세계 최강 최신 폭격기 수백 대를 동시에 출격시켜 무력 시위한 셈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은 당신께서 증명하신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 단순히 능력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고대 신들의 힘겨루기 시합에 여호와가 참여할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 신들은 아예 실재조차 하지 않는 허상들이다. 당연히 승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미리 확정되어 있었다. 그분을 대적할 존재는 이 우주에 단 하나도 없다.
그럼 하나님에게 문제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승리를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답게 이뤄내느냐는 것뿐이다. 그분의 역사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에서도 당신의 선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모습이다.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열매를 맺는 방식으로 증명하신다. 특별히 또 반드시 당신의 언약 백성들로 그 결실을 거두고 누리게 하고 주변에 나눠주게끔 당신께서 이끄신다.
성경에 기록된 이런 그분의 역사는 지금도 동일하게 이뤄진다. 신자의 주변에 신자가 반드시 싸워야 할 대적인 세상, 죄악, 사탄, 사망의 세력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 앞에 초개같이 벌벌 떨고 있다. 신자가 담대하게 맞서기만 하면 하나님의 승리는 이미 보장되어 있다. 신자에게 남은 일은 하나님이 맺어준 선한 열매를 이웃과 나누고 그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뿐이다.
인류 최초 최대의 찬양집회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찬양했다는 성경 최초의 기록이다. 창세기에 노아, 멜기세덱,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 야곱의 처 레아 등이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중에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입술로 시인한 적은 있다. 그러나 본문 1절에서처럼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를 여호와께 노래했다고, 오늘날 예배 때 드리는 찬송의 형식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힌 것은 처음이다.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도하지도 않았다. 자발적으로 모두 참여했다. 그래서 가장 순전한 찬양이었다.
출애굽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기적이었다. 이백 만이 넘은 한 민족이 4백년이 넘게 다른 나라의 노예가 되어 압제를 받다가 해방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소식을 라디오로 통해 들은 한국인들 모두는 장롱 속에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 36년만의 해방에 그랬는데 출애굽은 4백 년 만의 해방이기에 그 열 배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해방의 감격을 우리 세대는 잘 실감하지 못한다. 그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2002년 서울 월드컵에서 4강을 달성한 날의 감격을 떠올려보라.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었는가? 사람들의 신분, 재산, 지위, 학력은 물론 남녀노소 전혀 상관하지 않고,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서로 쳐다만 봐도 즐거웠다.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사람끼리도 어깨동무 하여 밤새 노래하고 춤을 췄다.
애굽 군대가 추격해올 때만 해도 출애굽이 물거품이 되는가보다. 저들 칼에 우리 모두 꼼짝없이 죽었다는 공포와 절망감에 빠졌는데 도리어 애굽 군대가 몰살했다. 단순히 크고 기쁜 일이 아니다. 나라가 해방되는 차원도 넘어선다. 각 개인이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완전한 죽음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옮겨졌다.
아직은 가나안 땅을 차지할 꿈에 부풀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를 그 땅에 건설할 소명감도 부족했다. 심지어 애굽의 우상 숭배에 참여했던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바로 이틀 전까지 모세를 원망했고 하나님을 의심했던 일에 대해 부끄러울 여지도 없었다.
히브리인들이 모세에게 광야에서 죽느니 차라리 애굽에 남겠다고, 말하자면 하나님을 대신해 차라리 바로를 섬기겠다는 하나님께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 말을 한 까닭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믿음이 형편없고 완악했다는 뜻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두려워서라도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그만큼 출애굽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지금 눈앞에 일어났다. 보고도 못 믿을 지경이라 서로 꿈인지 생시인지 꼬집어 봐야할 정도다. 그 큰 기쁨을 누리는 동안 지난 세월 동안에 애굽에서 당한 고난과 수치와 모멸 등이 오버랩 되어서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채 찬양을 했을 것이다. 가슴에서 샘이 솟듯이 쉴 새 없이 찬양이 절로 터져 나왔을 것이다.
찬양의 첫째가는 요소
이 찬양의 축제를 하는 순간에는 이스라엘 모두는 100% 진심이었고 100% 순전한 믿음이었다. 또 2백만 명 전부가 완전히 한 목소리로 찬양했다. 그럼 순전한 찬양이 되는 첫째가는 조건 내지 요소는 무엇인가?
믿음이 가장 순전하고 성숙해야 하는가? 모두가 합심해야 하는가?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찬양해야 하는가? 감정도 최고조에 달해야 하는가? 그 모두가 옳다. 그러나 첫째 요소는 아니다. 아주 간단하다. 본문처럼 저절로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은 또 실제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건이나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 갔더니 찬양이 너무 뜨겁고 좋아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엄격히 말해 틀린 말이다. 이미 은혜를 받아 뜨거워진 가슴으로 찬양을 하는 것이다. 또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찬양을 하기 마련이다. 음악의 장르, 곡조, 리듬, 악기, 인도자의 실력, 멘트로 감정이 고양되는 것은 은혜 받은 것과 별개다.
물론 찬양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이다. 지난주에 기쁜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문제는 잔뜩 생기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와 음해를 받아 자존심은 너무 상했고, 가족 간의 불화와 갈등이 폭발 일보직전까지 갔다. 너무 괴로워서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었는데도 도무지 힘이 나지도 않고 기도할 힘마저 잃었다. 하나님은 이해도 되지 않고 도리어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평만 잔뜩 안고 주일 예배에 나왔다.
그런데 마침 찬양의 가사 내용이, 곡조가 분위기가 아니라, 이전에 체험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일치했다. 그래서 이번 고난에도 전과 똑같은 은혜가 임할 것이라는 믿음을 회복하게 되면 그때까지 자기 심령을 누르고 있던 모든 영적 압박에서 풀려나고 저절로 눈물이 흐르게 된다.
심지어 찬양은 따로 내 절망도 따로, 예배 중에 아무리 찬양을 해도 은혜가 생기지 않을 때도 있다. 여전히 심령은 눌려 있다. 그러다 다른 성도들과 허그(hug)하며 인사를 나누면서 위로를 받으면 또는 다른 성도가 밝은 얼굴로 찬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눌린 심령에서 놓일 수 있다.
어려운 일을 두고 함께 기도해줄 성도가 바로 이웃에 있음을 재확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이는 공동체 안에 자기기 속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하나님이 줄로 그어준 구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공동체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절대적 진리를 확인하고 또 그분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함에 얼마나 큰 권능이 임함을 알기에 평강과 안도감을 회복하게 된다.
주와 같은 이는 없나이다.
모세의 찬양의 시작부터 전반부의 내용은 전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이 행한 일 즉,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경이롭고 거룩한 일이 바로 나(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신자 쪽의 노력, 능력, 공로, 자격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믿음이나 사랑하는 열정과도 전혀 무관하다. 신자 쪽에서 지금 일어난 크고 좋은 일에 예컨대 단 0.5%라도 영향을 끼쳤다면 그 자체가 신자의 공로가 된다. 하나님께 100% 순전한 찬양이 되지 못하고 그 0.5% 빠진 부족한 찬양이 되어서 결과적으로는 내가 나를 찬양하는 꼴이 된다.
출애굽에서 이스라엘과 모세의 공적과 자격은 완전 제로였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만투성이였다. 나아가 우상 숭배의 죄까지 범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이라는 유일한 이유 때문에 그 큰 은혜를 베풀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능히 다 행하신다. 전지전능하시다. 그러나 딱 한 가지 행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무엇인지 아는가? 당신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어기는 일이다. 당신의 신실하심을 수정 거역 포기하는 일은 절대 하지 못한다. 출애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일방적 주도적 능동적인 역사였다.
따라서 모세 찬양의 전반부의 결론 격인 11절에서 주와 같은 이가 없다고 선언했다. 또 후반부에서도 여호와의 다스림이 영원무궁하다고 했다. 찬양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주가 어떻게 했고 또 주는 어떤 분이라고 하나님에 대한 설명과 묘사뿐이다.
특별히 13절에는 주께서 주의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여 주의 힘으로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주어가 모두 주이고 이 짧은 문장에 주가 네 번이나 등장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흑암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는 것이다.
찬양은 곡조 달린 경배라고 할 수 있다. 경배(worship)는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받을 수 있다. 인간에게 드릴 수는 절대로 없다. 그분은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의 찬양을 받아 합당하신 분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찬양을 받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럼 하물며 그분의 자녀가 된 신자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인정하기 싫은 진실
서두에 본문의 찬양이 100% 순전했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그렇다. 그 순간만은 그랬다. 그러나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내주에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그 효과가 3일도 지탱하지 못했다. 마라의 쓴 물을 만나자 다시 하나님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알다시피 그 후에 광양에서 방황할 때에는 심심하면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는 타령만 반복했다. 급기야 예레미야 선지자 시절에는 일부 유다 사람들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나님은 오늘 본 애굽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실제로 그대로 이뤄주셨는데도 말이다.
이백 만 명이 참가한 역사상 최대의 찬양집회가 단 3일 만에 역사상 최대의 불평잔치로 급변했다. 우리 모두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리인 모든 인간이 원죄 아래 있게 된 본성 때문이다. 인간은 생명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도 쉽게 하나님을 배반한다. 고난이 닥치면, 아니 조금만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해서 불편하기만 해도 당장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평 의심한다.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한 심령이다.
그럼에도 본문의 찬양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순전한 찬양이었음은 틀림없다. 우리도 주일 예배에는 순수한 찬양을 드린다. 그러다 당장 저부터도 3일도 안 되어 하나님께 드렸던 찬양과 달리 또 다시 넘어진다.
인간은 절대로 우리가 자신하고 있는 만큼 아니 기대하고 노력하고 소망하는 만큼 선하지도 않고 믿음도 강하지 않다. 최소한 나는 이 정도의 사람은 된다고 최대한 양보하여 정한 마지노선마저 지키지 못하고 그보다 훨씬 더 아래로 떨어진다. 때때로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깜짝깜짝 놀랠 때가 있지 않는가?
자꾸만 인간을 비하하여 모멸감을 안기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우리의 영적인 실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 죄에 찌든 인간들끼리 아웅다웅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녹녹치 않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아라.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나아가 시공간의 제한이 없이 인간의 여건이나 마음의 상태와도 무관하게 인간을 넘어트리려는 사탄의 음흉한 노림수 앞에 인간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인간에게 절망과 좌절뿐일 것이다. 인간의 자아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도록 깨어지고 스스로 낮아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신실하심 거룩하심 완전하심을 알게 되고 발견하여 누릴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순서가 바뀌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나의 영적인 실상을 보게 되고 또 하나님에게 더욱 순전히 완전하게 의탁하게 된다. 그래야만 기도도 순전하게 할 수 있다.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의가 0.1%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깨어지는 것만큼 최고의 복은 없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을 100% 온전히 받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눈물로 제단을 쌓는 자가 기쁨의 화관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찬양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일어난 그대로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 찬송이다. 의도적으로 과장할 필요는 전혀 없다. 여호와 같은 신이 없다는 것이(11절) 무슨 뜻인가? 단순히 숫자적으로 유일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 같은 신이라고 했다. 그분의 행사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겪었던 모든 우상 신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능력적인 측면이 아니다. 애굽의 주술사도 일부 흉내는 내었지 않는가? 여호와가 그들 신과 다른 점은 그 차원이 다르다. 당신의 백성이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고 또 애굽에 그냥 남겠다고 하는데도 여호와는 그 죄를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또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출애굽을 시켰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그것도 당신의 언약 백성이 바치는 정성과 제물에 비례해서 당신께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께 많이 바친다고 많이 받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전혀 바친 것이 없는데도 역사상 최고의 복을 받은 사건지이 않는가? 역으로 말하면 반대로 열심히 바쳤어도 화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며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의 모습이 예수님 당대까지도 그랬다.
신자가 거룩해지고 믿음이 좋아지는 것과도 상관이 없다. 모든 일에 하나님만의 고유하고 원대하며 영원한 뜻이 있다. 가나안 족속으로 본문에서부터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이 여호와 이레의 예비하심이다. 더 멀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이끌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무슨 일에든 당신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신다. 그분 역사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든 절대적으로 선하다. 인간의 이해 수용 여부와도 무관하며 그 사실과 그 진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찬양이다. 인간더러 무조건 맹목적으로 그분을 경배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분의 선을 온전히 깨달아 온전한 찬양을 드리게 하려는 뜻이다.
로마서 5:3이하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고 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내, 연단, 소망 세 단어 모두 구체적으로 장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미리 안다는 뜻은 전혀 없다. 캄캄한 중에, 특별히 현실적으로 고난이 닥쳤을 때에 찬양하라고 했다.
역사상 진짜로 최고 순수했던 찬양 집회
역사상 최고로 순수했고 하나님이 가장 기쁘게 받으신 찬양 집회는 따로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데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초대교회에서 로마의 핍박을 받던 신자들이 콜로세움에서 단체로 불에 태워죽거나 돌에 맞아 죽거나 맹수에 산채로 물려 죽으면서 눈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일이다.
처음 돌에 맞거나 불길이 닿거나 맹수에 물렸을 때는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 사건에서 보듯이 금방 성령이 강력하게 임재 하여 레이저 막처럼 그들을 감싸는 바람에 고통은 사라졌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의 영혼이 하늘의 빛 가운데로 들리어 올려가면서 그때까지 이 땅에서 누리지도 알지도 못했던 평강 안락 자유 기쁨을 충만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순교해야만 했던 이유는 아주 간단한 하나였다. 로마의 황제가 절대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이라는 고백 때문이었다. 또 그렇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근거도 하나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는 믿음이었다. 당신의 신실하심을 깨는 일은 그분이 절대로 할 수 없음을 알기에 천국에서 부활한다는 소망을, 아니 확신을 가졌다.
출애굽 기사대로 하자면 오늘 본 애굽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해준다는 그분의 약속을 철저히 믿은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예수가 없고 로마 황제의 통치를 받는 옛 인생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기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순전한 찬양은 반드시 받은 은혜가 있어야 하고 그래서 저절로 찬양이 나와야 한다고 했지만 엄격히 말해 사실은 부족한 진술이다. 좋고 기쁜 일이 이미 발생했는데 감사 찬양 못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지 못하거나 않으면 신자를 떠나 인간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것은 인생 전체를 통 털어 최대의 은혜이다. 거듭났다는 것은 이미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된 것이다. 복음으로 새 사람이 되어 그분의 구원 은혜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평생을 두고 감사 찬양해도 모자란다. 신자는 평생토록 찬양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이다. 그 존재, 삶, 인생 자체가 찬양의 존재, 찬양의 삶, 찬양의 인생으로 이미 바뀐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찬양하도록 창조했다는 그 창조 목적을 회복한 셈이다.
하루 종일 찬양 테이프 틀어 놓고 들으라는 뜻이 물론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서나, 특별히 고난 중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인정하라는 것이다. 결국 출애굽 사건의 결론은 너희는 잠잠히 있어라 여호와가 대신 싸워서 그분의 큰일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붙들 때만이 참으로 순전한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신자는 이미 찬양의 존재로 바뀌었기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10/1/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