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십계명으로 구원받는다.
출애굽기 강해 (4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1-17)
철거되는 십계명 기념비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동남부는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강세로 바이블 벨트(Bible Belt)라고 불린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주정부 청사를 비롯한 공공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십계명 동판이나 기념비들을 철거하라는 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기독교라는 특정종교를 옹호하는 것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규정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십계명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계시 받은 것이라고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십계명이 기독교 고유의 종교적 계명에 그치는지 심각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십계명의 내용은 그리 심오하지 않다. 특별히 후반 여섯 계명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아주 보편적인 도덕률이다. 전도를 하면 자주 듣는 대답이 있다. 십계명을 잘 지킬 수 있고 또 위반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고 한다. 저도 그랬던 사람 중의 하나다.
성경을 잘 모르는 기독교 외부에선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신자들까지 십계명을 유대교의 오랜 유산 정도로 여기고 신약 성도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만 믿고 있고, 미신 같은 우상은 거들떠도 보지 않으며, 오늘 같이 눈이 오는 날에도 교회에 출석했듯이 주일 예배에 성실히 참석하며, 예수 믿은 후에는 더욱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윤리적 죄 값까지 다 감당하신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살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그렇게 소홀히 취급될 수 없고 그 기념비들이 박물관에만 모셔놓을 수 없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고달픈 노예 생활을 종식시키는 데 있지 않다. 시내 산에서 바로 이 십계명을 계시해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유일한 관심과 목적은 그들 각자가 거룩해지는 것이다. 또 거룩해진 개인들이 모여서 거룩한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미 배운 대로 세계가 다 당신께 속했기에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다는 언약을 체결했다.(출19:5,6)
세계는 당신이 만드셨다. 당신의 소유이다. 그 말은 당신의 사랑을 베풀 대상이라는 뜻이다. 십계명은 이 땅 전부를 당신의 사랑 안에 붙들어 주는데 꼭 필요한 반드시 있어야 할 첫째 장치이다. 그분의 사랑의 울타리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삼일 간 정결 의식을 행하도록 한 후에 하나님이 직접 강림하셔서 모세에게 구술(口述)한 것이다.
유토피아의 두 가지 뜻
언뜻 보면 십계명은 피조세계 전체를 통괄하는 계시로는 너무 평범한 것 같다. 불신자 중에 의인이 많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경우에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 불효, 살인, 간음, 도둑, 거짓증거 등이 자기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큰소리칠만하다.
그런데 TV 뉴스에 매일 나오는 내용이 전부 십계명을 위반한 범죄들뿐이지 않는가? 수도 없이 많은 세상 죄들은 어쨌든 이 여섯 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는가? 누구나 쉽게 지킬 수 있고 어긴 적 없다고 큰소리쳤다. 막상 세상의 문제꺼리 전부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뿐이지 않는가? 만약 뉴스에서 이 여섯 가지 범죄가 다 빠진다면 보도할 내용이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스트레스 받지 않고 더불어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모두 실감할 것이다.
요컨대 십계명이 기독교만의 계명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라, 인종, 문화, 전통, 관습, 교육, 사상, 특별히 종교와 시대를 넘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준행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다. 사탄 숭배나 KKK 같은 사악한 집단을 빼고 어떤 종교에도 나아가 모든 공동체에 적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규칙이다. 특정 종교인 이전에 인간이라면 반드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민 의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고 짐승일 뿐이다.
헬라어로 이상향(理想鄕)을 말하는 유토피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그것도 상반된 것이다. 먼저 명사로는 모든 사람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사회, 범죄가 없이 서로 사랑하는 최소한 공존이 가능한 사회다. 이 말의 어원이 된 동사의 뜻은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는가? 고대 헬라는 인류 철학의 발상지인데 그때부터 유토피아는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었다는 것이 말이다.
사도행전 17장 후반에 따르면 바울이 아덴을 방문했을 때에 온 성에 우상이 가득했다. 자기들이 고안해 낸 신들을 숭배했고 새로운 사상에 대한 관심만 지극했다. 바울을 청해 예수 부활의 도를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 참 하나님 창조주에 대한 믿음은 전무했던 무신론자들이었다. 바울이 전도에 실패한 유일한 지역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자연적 성품 그대로도, 기독교식으로 말해 죄에 찌든 본성만으로도 인간 사회의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이상향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이는 또 십계명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이 인간들이라고 시인한 것이다.
형제를 매일 살인하는 신자들
십계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그 구조와 순서부터 살펴야 한다. 익히 배워서 아시는 대로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신자 개인과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다섯째부터 열째까지는 인간사회에서 인간끼리의 수평적 관계를 말한다. 수직적 관계가 먼저 나오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워야 인간관계도 바로 선다는 뜻이 된다.
또 그래서 신자들이 새벽에 큐티를 통해 기도하고 말씀 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세우려 한다. 큐티를 한 날과 하지 않은 날의 하루의 삶의 양상이 달라짐도 실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정도 갖고 십계명을 제대로 이해 적용하고 있다고 자부해선 크게 부족하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다. TV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을 볼 때에 저런 죽일 놈들 천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반응부터 먼저 나오면 아직 십계명을 모르는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해 아직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알고도 잊고 있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겼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가르쳤는가? 옛 사람 즉, 모세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들었으나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자마다 어떻게 된다고 하셨는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했다.(마5:21)
형제의 원어는 가족이나 교회 안의 성도들만이 아니라 같은 조상과 같은 나라를 가진 사람들까지 포함한다. 매일 정겹게 만나는 이웃은 물론 TV에 나오는 범죄자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죽일 놈”도 아니고 단지 바보라고 비하하는 것만으로도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정죄했다.
또 간음치 말라고 너희가 들었으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고 선언했다.(마5:27,28) 살인과 간음은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는 죄의 대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일차적 의미는 죄란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고 말과 생각으로 지은 것까지 포함한다고 죄의 개념을 확장시킨 것이며 또 죄의 본질을 더 깊이 있게 해석한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입에서 나오는 것
예수님 가르침에는 더 중요한 의미가 따로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자 율법의 정결례를 위반했다고 시비를 걸어왔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했는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때문에 더럽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이다.(마15:9) 놀랍게도 십계명의 여섯 계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악한 생각은 부모를 모시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마지막 훼방은 남들의 물건을 탐내며 탈취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형제를 욕하는 것이 살인인데 지금 살인은 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럼 TV에 나오는 자들을 보고 저 죽일 놈이라고 욕하는 것이 남들보다 우월한 도덕성, 종교성, 영성을 가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 속이 완전히 시커멓게 오염되어 있기에 네 자신 전부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정신과 영혼을 순결하게 보존시키라는 것이 일차적 뜻이 아니다. 너희 정신과 영혼이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했다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당신보다 육백 년 전에 선포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며 구체적으로 설명해준 것뿐이다.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아프고 찔리는 선언이지만 엄연한 사실임을 직시해야 한다.
예수님이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정확하게 십계명의 여섯 계명과 일치함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십계명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TV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와 지금 교도소 안에 갇힌 죄수들과 그들을 보며 죽일 놈이라고 큰소리치는 놈이나 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O. J. 심프슨이 유전무죄(有錢無罪)가 된 것이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이다. 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사거나, 권력에 기대어 판결을 굽게 하거나, 영악하게 법조문의 문자적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치사하고 교묘하게 구는 것이 앞으로도 영원히 인간 사회에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일 뿐이다.
혹시라도 아직 나는 그 정도까지는 타락하지 않았다고 항변하는가? 솔직히 교양, 예의, 도덕, 종교로 위장했다 뿐이지 누구라도 언제 어떤 상황이든 살인 간음을 밥 먹듯이 행할 수 있다. 제 주장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그렇다. 솔직히 저부터 너무나 교만했고 아직도 그 교만을 완전히 떨치지 못해서 형제를 바보라고 하는 살인죄를 가족 안에서부터 심심찮게 범하고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뜻은?
제자들이 형제들이 범죄 하면 얼마까지 용서해주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물었다. 형제의 뜻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 뜻한다.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490번을 용서해주라고 했다.(마18:21) 이는 현실적으로 도무지 불가능한 숫자임을 우리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교회 안의 성도들끼리는 절대 정죄하지 말고 모두 은혜로 넘어가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 믿는 신자니까 일반인이나 타종교인보다 도덕적 수준이 월등 높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극한의 인내심을 훈련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뜻도 아니다. 속에 있는 배알은 전부 버리고 줏대 없이 살라는 뜻도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더러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다. 이 말씀의 뜻을 정확히 아셔야 한다. 십자가가 감당하기 힘든 현실의 고통이거나 부담 주고 싫은 사람을 참아내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는 예수님 경우에 보듯이 사형수 본인이다. 매일 아침 큐티 할 때에 자신을 십자가에 올려서 죽이라는 뜻이다.
자기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부터 보면 결코 용서가 쉽지 않다. 490번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 대신에 네가 형제를 살인한 일이 겨우 490번뿐이겠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저처럼 가족을 바보라고 수도 없이 비난하면 몇 달이면 그 정도 살인하고도 남는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정죄할 자격과 조건이라곤 추호도 업다. 너희가 원수를 사랑을 하지 못하면 이웃이라도 사랑하라, 그 사랑이 안 되면 용서라도, 용서가 안 되면 정죄라도 하지 말며, 정죄를 않는 것이 안 되면 판단이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 중에 그럴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고 목사라도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네 자신을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십자가에 죽이라는 것이다.
십계명의 구조 자체가 십자가를 상징한다는 것이 참으로 오묘하지 않는가? 모세 당시에 예수 십자가 대속구원의 진리를 설명해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제 막 노예 살이를 벗어났고 시내 산에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벅찬 희망으로 차있다. 율법을 받기 전이라 동물제사도 시행해 본 적이 없어 그 뜻이 뭔지 모른다. 너희 모두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가르치기에는 너무 시기상조다.
그래서 초등학생이라도 알아먹을 만큼 간단한 계명 열 개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예수 십자가를 그대로 예표 한다. 첫째 계명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다. 오늘은 십계명 전체에 대한 서론이고 앞으로 한 계명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는 순간 그 간단해 보이는 여섯 계명도 절대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쉽게 말해 그것만 지켜도 인간 사회에 유토피아가 된다는 것이다. 헬라인의 분별력은 분명히 옳았다. 하나님의 진리에 거의 접근했다. 인간 세상의 가장 현자라고 칭송 받을만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전혀 겸손하지 않았다. 끝까지 그분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십계명은 십자가다.
신자가 TV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을 향해 저런 죽일 놈이라고 욕하면 자신은 십계명 정도는 가뿐하게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하는, 정확히 말해 착각하는 자들이다. 바꿔 말해 착한 자들이 천국 가야 옳다고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다. 범죄자가 잘했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인간 그것도 내 자신의 영적 실상을 정확히 깨닫는 것이 예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 받은 자의 첫째 반응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십자가 처형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성경에서 산상수훈만이 최고 아니 거의 유일한 진리로 꼽는다. 또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자부한다. 인간끼리 자신들의 선한 성품에 의지적 노력을 보태면 유토피아 건설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을 더럽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입에 넣지만 않으면 된다고 한다.
인간끼리 유포피아를 건설하기 위해선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다원주의에 영합하고 교회 통합 에큐메니칼 운동을 벌리는 것이 필연적 순서가 된다. 수천 년 전에 하나님은 전혀 모르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헬라인들도 깨달은 진리조차 그들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서, 그것도 산상수훈이 최고라 여기면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엄연히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작금 그런 자들이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결국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인간을 오직 두 부류로만 나누고 계신다. 나는 십계명을 얼마든지 지킬 자신이 있으니 하나님이 필요 없다든지, 하나님 없이도 잘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자다. 그러니 예수 십자가는 더더욱 말이 안 된다.
반면에 하나님 없이는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가 가르치는 도덕률 단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겸손히 인정하는 자다. 그 사망의 몸에서 건져줄 수 있는 길은 예수 십자가뿐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 전 존재를 걸고 체험적으로 고백하는 자다. 십계명은 형식뿐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십자가 복음이라는 뜻이다.
십계명 기념비를 철거하려는 진짜 이유
세상 사람들이 십계명 기념비를 철거하라고 아우성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인간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당신은 죄인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 지킬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만 사실은 모두가 예수님 가르침 그대로 아주 교묘하고 치사하게 살인 간음 도둑 거짓 증거 남의 물건 탐내고 있다는 점을 다른 이 앞에 안 그런 척 하지만 자기만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이 쓰레기통에 버려진지 오래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나 자기에게 일어나는 현실적 정황이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느냐고 불평한다. 불공평하고 악에 눈감는다고 하나님에 대해 분노에 차있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
독립심을 키운다는 구실로 부모부터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 대부분이 어려서부터 상처와 분노를 안고 자란다. 체면 때문에 겨우 가정의 틀은 유지하지만 매일 바보라고 비난하는 인격적 살인이 가정 안에서 자행되고 있다. 가정이 파괴되고 사랑이 실종되었다. 부모 사랑마저 잃어버렸는데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밖에 소망이 없다. 그런데도 죽어도 십자가는 거부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불쌍한 세대인가? 너무나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런 판국이니 미국의 바이블 벨트에서조차 십계명이 무슨 필요 있느냐는 반발이 생긴다. 가뜩이나 볼 때마다 찔렸으니 아예 없는 것이 낫겠다고 여기는 것이다. 때마침 자유, 평등, 인권 등이 지금 미국에선 십계명은 물론 도덕적으로 최고의 우위를 점하게 되자 그 핑계로 옳다구나 철거하려고 덤비는 것이다.
지금 불신자만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신자들부터 십계명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적용을 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다. TV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에게 죽일 놈이라는 반응만 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모든 기준, 특별히 도덕과 종교로 사람을 절대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십자가의 첫째 뜻이지 않는가?
나아가 교양과 예의로 자신의 실상을 감추지 말아야 한다. 교양과 예의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그마저 없으면 지금 당장 멸망할 것이다. 매일 아침 하나님 앞에서 큐티 할 때는 아무 필요가 없고 당연히 다 벗어던져야 한다.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이 내 골수와 심령과 관절을 찔러 쪼개어 십자가 앞에 완전히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큐티 하며 문제와 고난과 상처에 위로되고 힘주는 말씀을 붙드는 것도 아주 귀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부터 십자가에 올라가 죽어야 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남을 용서하기 위해서다. 그 정도 용서하려면 아무래도 매일 부딪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물론 그러기에는 아주 힘들다. 십자가 복음을 정확히 알고 그 은혜 안에 들어오면 맨 처음에는 완전한 절망으로 이끈다. 그러나 완전한 절망에 빠져야 완전한 소망이 생기는 법이다. 예수 십자가의 진리를 매일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긍휼 안에 내 자신부터 완전히 잠겨야 한다. 힘들 때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하나님뿐이어야 한다.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을 예수 그리도 안에서만 확인해야 한다. 그럼 날마다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결국에는 세상 사람들은 절대 하지 못하는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십계명이 십자가 복음이고 십자가 복음이 십계명이다.
1/14/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