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계명의 뜻도 모르는 신자들
출애굽기 강해 (42) - 십계명(2)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1-3)
절대자는 한 분뿐
일본 주택에는 ‘도꼬노마’라는 특이한 공간이 집집마다 있다. 거실 한쪽 벽에 신상을 모시도록 낮은 단을 만들어 놓았다. 일본 선교하시는 분들이 흔히 일본에는 이백만이 넘는 우상이 있다고, 심지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다른 우상을 섬긴다고 말할 정도다.
지난주에 십계명은 민족과 세대를 초월해 모든 인간이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규정이라고 했다. 그럼 일본은 후반 여섯 윤리계명만 해당되고 첫 네 개의 종교적 규정과는 무관하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불신자들도 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만약 있다면 한 분이어야 한다고 인정한다. 다른 종교인들도 종교마다 이름만 다르지 세상을 통치하는 절대자는 한 분뿐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모든 종교가 같은 하나님을 믿되 그 가르치는 내용과 섬기는 방식만 다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말도 안 되는 억지다. 그럼에도 어쨌든 모든 인간이 절대자의 숫자는 하나뿐이라고 즉, 십계명의 첫 계명을 실질적으로 시인하는 셈이다.
여호와 하나님 또한 많은 신들이 있다고 전제한 후에 그 중에서 당신만 섬기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다른 신들에 대해서 십계명 자체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둘째 계명에서 너희를 위해서 스스로 만든 우상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다른 신들은 결국 우상들을 가리키는데 인간이 만든 신이 신일 수는 없다. 모세 당시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미숙한데다 각 민족들이 고유의 신들이 있다고 믿는 수준에 맞춘 표현일 뿐이다.
인간 사회가 미개한 모습이라도 종교를 갖게 된 근거와 이유는 무엇보다 자연 현상의 가공할 힘 때문이었다. 인간이 최대한 힘을 모아서 맞서도 아예 게임이 안 되었다. 바람, 바다, 번개, 땅 등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슈퍼 파워로 조종하는 신적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려 최상의 희생 제사를 드렸다.
과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인간 이성으로 내릴 수 있는 필연적 결론이었다. 정작 하나님은 그런 신들은 아예 인정도 하지 않았다. 창세기 1:1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으며 이어서 해 달 별들을 만드셨다고 선언한다.
물질계에서 인간에게 최고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해라도 당신께서 만드신 일개 피조물이니까 절대로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모든 인간들이 자연 현상을 신으로 섬겼던 때에 성경은 이미 3500년 전에 그것은 잘못이라고 선언했다. 이것 하나 만으로도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임이 분명하다..
타조 같이 어리석은 목사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우리말 번역의 뜻이 조금 애매하다. 영어로 “before me”라고 번역되어 있듯이 원어로는 하나님 당신보다 앞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순서와 중요도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얼굴이 향하는 부분이라는 장소적 의미가 강하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보는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모르면, 안 보는 곳에서 다른 신을 섬겨도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윗은 주의 앞에서 내가 어디로 피할 수 있겠나이까 하늘에 올라가도 음부에 자리를 펴도 거기에 계신다고 고백했지 않는가? (시139:7,8)
극악무도한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이 너무 싫었던 요나는 당시의 땅 끝인 지중해 입구 스페인 끝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갔다. 일부러 배 맨 밑바닥에서 잠에 떨어졌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추격을 무시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폭풍을 일으키시고 그 원인이 불신자인 이방인 선원들로도 요나 때문임을 정확하게 알게 하셨다.
요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큰데도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솔직히 목사인 저부터도 타조가 모래에 고개를 파묻는 것 같은 꼴로 신앙생활을 한다. 타조가 스스로 눈을 감았으니까 쫓아오는 사자가 안 보이듯이 영적으로 둔해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없다고 여기고 알게 모르게 세상과 죄에 넘어진다. 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사방 눈 닦고 보아도 없다고 불평만 한다. 자기가 모래에 눈을 파묻고서 말이다. 인간이, 아니 신자가 그런 수준 밖에 안 된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와 비슷하게 이 첫 계명의 뜻조차 정확하게 모른다. 심지어 본문 안에 명료하게 설명한 것도 보지 못한다. 십계명을 성경 본문으로 읽고 해석하지 않고 성경 표지 안쪽에 열 가지로 간단하게 정리된 것만 염두에 두어서 그렇다.
더 중요하게는 제가 입이 아프도록 강조해 여러분의 귀에 못 박힐 정도가 된 대로 앞뒤 문맥에 계시된 진리와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한 절씩 따로 떼어서 성경을 보는 습관은 완전히 버려야 한다. 본문 한절씩의 뜻을 모르는 바보는 없다. 또 그렇게 한절씩만 보니까 신약 성도들이 십계명은 자기 신앙생활과 크게 관계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출애굽 시킨 여호와를 믿으라.
본문 2절에서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해낸” 여호와라고 명확하게 전제하고 있다. 출애굽 시킨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출애굽 후에 십계명을 주신 뜻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반드시 출애굽이 십계명보다 먼저 있었어야만 했다.
만약에 십계명을 예컨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시작했을 때에 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이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은 전혀 돌보지도 않고 일방적인 요구만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내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느냐 반발했을 것이다. 그 전에 아브라함에게 계시했다면 그야말로 유일신 사상을 가르치는 종교적 지식에 불과해진다.
지금 바로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성경 표지 안쪽에 기록한 것은 분명히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선한 의도였다. 그러나 본문의 2절은 생략하고 3절만 있으니 출애굽과 무관해져 버렸다. 하나님이 한 분이고 당연히 그분만 믿는 근본적 신앙 수준 밖에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주시고 앗아가는 분이다. 인간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공기, 물, 음식을 무상으로 공급해주시고 온도, 중력 같은 생활환경을 조성해주시는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이다. 각 개인의 존재 삶 인생을 주관하기에 전적으로 그분께 의탁하며 무슨 일이든 기도해야 한다.
우리 신앙의 실체인데 이 정도만 해도 아주 대단한 신앙이다. 불신자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로 하나님이 없다고 끝까지 거역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동일한 한 하나님을 모신다고 주장하는 타 종교인들도 그와 동일한 내용으로 가르치고 실천한다고 반발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또 첫째 계명은 전혀 다른 차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어떻게 인도해 내셨는가? 열 가지 재앙으로 심판하고 홍해를 가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리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시어 구원했는가? 다시 2절을 정확히 보면 애굽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한 여호와를 강조하고 있다. 애굽에서 나온 이후는 구태여 생각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자칫 그것을 보태면 당신을 오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출애굽이라면 불신자 신자를 막론하고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무엇인가? 바다가 갈라져 구원받은 모세의 기적이다. 모든 십계명 영화도 그것이 클라이맥스다. 그러나 홍해는 출애굽 후의 기적이다. 이미 구원을 준 이스라엘을 애굽 군대에 죽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시 애굽으로 돌려보내 종이 되게 할 수도 없다. 앞에는 바다요 뒤는 애굽 군대였다. 그래서 바다를 가른 것뿐이다.
수십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일이었다.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눈 한번만 깜짝하면 된다. 바다를 가른 것은 오히려 애굽을 살리려는 고육지책이었다. 이스라엘만 살리려면 구태여 바다를 가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애굽 군대만 죽여도 된다.
막상 이스라엘 앞에 바다가 갈라지고 맨 땅을 걸어서 건너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애굽 군대는 절대 따라 들어가지 말고 잠시 물러서야 했다. 그전에 있었던 열 가지 재앙을 떠올렸어야 했다. 잠시만 이성에 의지하면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다.
무식하면 고집밖에 부릴 것이 없다. 애굽이 너무 어리석고 완악해서 따라 들어가서 죽은 것이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른 것은 “애굽 군대에서 구원”해 준 것이지 “애굽의 종 된 집에서의 구원”이 아니었다. 그 구원은 다른 방식이었다. 그것을 정확히 알아서 바로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종에서 구원한 방식은?
그럼 열 재앙으로 종에서 건져내셨는가? 그것도 아니다. 이미 배운 대로 열 재앙은 마지막 열 번째를 제외하고는 고센 땅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구원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고 애굽을 회개시킬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애굽에 대해 참고 또 참으셨다. 마지막으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인 벌도 애굽에 대한 당신의 인내의 한계가 찼고 이래도 이스라엘을 풀어주지 않으면 다음에는 다 죽이겠다는 최후 통보였다.
이스라엘은 오직 어린 양의 피로만 종에서 풀려났다. 출애굽 당일 밤에 여호와가 보낸 죽음의 사자였던, 하나님의 권능이 직접 임했던, 하나님이 내리신 죽음의 형벌이 고센을 포함한 애굽 전역을 휩쓸었다. 이스라엘은 인방과 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고 절대 문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문밖에 나오면 너희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는다는 뜻이다.
애굽의 장자만 죽였다고 이스라엘도 장자만 죽인다는 뜻이 전혀 아니었다. 장자는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음에는 전부 다 심판하겠다는 예고일 뿐이다. 출애굽의 저녁에 하나님의 면전에선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동일하게, 단 하나 다를 바 없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부터 가나안 땅에 대한 언약은 뒷전인 채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졌다. 출애굽 후에도 조금만 불편해도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 즉, 음란하게 우상을 숭배했던 애굽의 신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타령만 했지 않는가?
이스라엘을 어린 양의 피로만 구원했다는 뜻을 정확히 아셔야 한다. 이스라엘과 애굽의 유일한 차이는 그것을 사전에 통보 받았고 받지 않은 것뿐이다. 요컨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서 구원 받았고 애굽은 애굽이라서 심판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백년 전에 약속하신 것을 당신의 이름을 걸고 당신께서 성취하셨다. 그러나 단순히 당신의 영광을 스스로 증명하듯이 즉 당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그러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살려내어 제사장 나라로 세울 목적으로 그 선조 아브라함을 이때부터 따져 약 오백 년 전에 이미 선택했다. 하나님 당신에 알고 믿고 따르도록 계시하시고 훈련 시켰다. 또 그 믿음을 후손인 이삭 야곱 요셉에게 물려주도록 했다.
아브라함 위로도 노아, 에녹, 셋, 아벨 등 당신의 아들들을 택하시고 죄로 타락한 인간 역사 속에서 소수로 남겨 보호하셨다. 눈에 안 보이지만 당신의 자녀들의 뿌리를 이어가게 했다. 그들의 일생 동안 전후좌우에 성령으로 두르시고 거룩하게 이끄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제사장 나라로 세운 것은 그들과 맺은 언약의 완전한 성취인 예수 십자가의 개인 구원을 예표한 것이다. 신약 신자 개인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다른 이를 살리듯이 이스라엘더러 열방 앞에 그런 나라로 서라는 뜻이었다.
마귀에게서 벗어난 체험이 있는가?
출애굽 강해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는 고대 이스라엘의 모세라는 한 영웅의 이야기도 또 그들 민족의 역사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애굽을 포함해서, 어떻게 대우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진리를 출애굽기만큼 가장 잘 드러내는 책이 없기에. 그 진리를 깨달아 자신에게 적용 실천해야 한다.
출애굽의 여호와가 없는 첫 계명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뜻이다. 그분을 대체할 존재는 단 하나도 없으므로 그분만 경배하라는 근본적인 뜻에 머문다. 출애굽의 여호와를 믿으라는 것은 그런 한 분의 하나님이 바로 나를 창세전부터 선택해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특별한 계획으로 나를 이끄시어 결국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그분께서 반드시 이끄신다고 온전히 확신하는 바탕에서 이 땅에 사는 동안의 범사에 접근 대응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그분의 능력만 봤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약 신자의 승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붙들기 때문이다.
신자 각자는 애굽에서 탈출한 즉, 마귀의 종 된 집에서 하나님이 이끌어내어 주신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 후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방식으로 쓰임 받고 있어야 한다. 가장 먼저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나를 태초 전부터 택했다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 그 얼마나 큰 은혜이며 권능인가?
물론 우리 모두가 모세처럼 떨기나무 불꽃으로 불려나온 것 같은 초자연적 대면을 다 거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그런 일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전임 사역자로 헌신하는 자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때는 얼마든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아니 그런 만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그분이 직접 먼저 찾아오셔서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 주시고 당신의 구체적인 소명을 주시는 체험을 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평생을 갈 수 있느냐, 고독 상처 실망 고통 때로 분노 등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느냐? 이름도 빛도 없이 땅 끝에서 현실 형통과는 거리가 먼 채 철저하게 외로운 길을 갈 수 있느냐? 미세한 성령의 내적 음성으로라도 하나님의 엄숙하고도 진지한 질문을 들어야 하고 또 그에 대해 기꺼이 이사야 선지자처럼 저를 보내달라는 답을 해야 한다.
전임 사역자가 아닌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교회생활 중에 설교, 성경공부, 기도모임 등에서 일회적이든 점진적이든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십자가 앞에 녹아내려야 한다. 그래서 어쨌든 그분이 먼저 찾아오셔서 어느 누구도 아닌 나를 지명하여 불러내어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었다는 극적 전화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전환이 있기 전부터 지금까지도 인간적으로 많은 슬픔, 한숨, 실망, 분노, 눌림, 멸시, 환난 등을 겪었으나 다 지나고 나니 성경의 진리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절감해야 한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사건 하나하나가, 모든 여건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었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의 전부를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이 신자다. 당연히 앞으로도 이해가 안 되고 힘든 일이 생겨도 반드시 내 인생을 그분의 안성맞춤의 자리에, 내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을 시켜서, 내가 아닌 다른 어느 누구도 세울 수 없는 바로 그 위치로 나를 반드시 이끄시고야 만다는 소망과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택함을 입었다면...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권능과 은혜를 세상 어느 민족도 누리지도 알지도 못했듯이, 하나님과 나만이 알고 나누는 모습으로 매일 그분과 교제 동행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면 나에 대한 계획이 있는 것이며, 나에 대한 계획이 있다면 반드시 그 결말은 선이 아닐 수 없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세상 어떤 인간도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특별히 죄를 씻을 수 없다.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피의 의로 덧입혀져야만 한다. 애굽에서 종 된 집에서 해방시킨 여호와는 바로 십자가 복음이다. 수백만의 우상을 섬기는 일본 사람들에게도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십계명은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해당된다.
정말로 나를 하나님이 택하시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고 24시간 365일 나를 관념하고 계신다면 그만한 은혜가 어디 있는가? 때로 그분이 나를 알고 당신의 계획으로 이끄는 것이 우리의 욕심과 죄 때문에 불편하고 부끄럽고 찔리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그분이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하신 사랑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앞으로 어떻게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는 정답이 이미 다 나왔지 않는가? 최소한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살아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1/21/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