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이 정말로 무엇인지 아는가?
출애굽기 강해(43) - 십계명(3)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종교는 인민의 아편
아주 친한 친구 중에 이전의 저처럼 극렬한 안티 크리스천이 있다. 그 이유가 특이한데 예수쟁이들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해서 생기는 고난도 하나님의 뜻이요, 자기가 열심히 일해 생긴 성과도 하나님이 주신 공짜 선물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성찰해서 성장시킬 생각은 않고 자기 위로와 핑계로 믿음을 동원하는 것이 가식적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창시한 칼 막스도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무산대중을 종교인들이 달콤한 환상과 경건한 명제로 현혹시켜 현실의 고난과 문제들을 망각시키게 만든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한다. 무슨 뜻인가? 비록 인간의 눈에 세상의 뭇 종교들이 아편처럼 보일지라도 기독교는 결코 그런 신앙이 아니라고 최소 3500년 전에 확실히 밝혀 놓았다는 것이다. 그 정반대로 인생살이에 많은 고난이 필연적으로 따르긴 해도 거의 대부분이 타락한 인간들의 분쟁 때문으로 생긴 것이며 또 그래서 너의 실패, 허물, 죄악에 대해 스스로 핑계 대거나 망각하고 위로할 목적으로는 절대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말라는 뜻이다.
첫째 계명은 ‘너에게’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했고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라고 시작한다. 다른 신들이 무엇인지 설명하겠다는 뜻이며 바로 우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은 실존하지도 않고 신도 아니다. 따라서 둘째 계명의 실질적 의미는 우상 숭배를 금지한다는 것보다 우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우상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 새긴 우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인간 스스로 상상한 것이다. 예컨대 얼굴은 인간인데 몸은 사자에 날개를 달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슈퍼맨이 되고 싶다는 뿌리 깊은 욕망이요, 인간인 주제에 신이 되려고 시도하는 너무나 큰 죄의 본성이다.
둘째는 위로 하늘, 아래의 땅,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으로 만든 형상이다. 하늘, 땅, 땅 아래는 히브리인들이 세상을 셋으로 구분했던 우주관이다. 물질계 안에 실재하는 어떤 존재라도 그 모양을 본뜨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 생각에 신기하고 장엄하고 강력해 보이는 해와 달 같은 것을 형상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고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아도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존재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여호와 한분만 섬기라는 첫째 계명을 재확인한 셈이다. 피조물은 당연히 신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고대인들은 몰라도 현대인의 이성으로는 모두가 그렇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럼 오늘날의 신자에게는 이 둘째 계명의 의미가 훨씬 달라야 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하나님 당신을 절대로 인간 상상의 산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십계명처럼 절대적 계시로 성경을 주셨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넘어서 당신을 파악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만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인간이 그분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땅 안에 제한되는 자신의 삶을 복되게 특별히 거룩하게 영위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을 만큼 그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단순히 고통과 문제를 해결해주는 존재로 진통제나 도깨비 방망이처럼 접근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단순하고도 절대적인 명령
십계명을 주신 형식에도 주목해야 한다. 절대적 명령의 형태다. 이렇게 저렇게 해주면 좋겠다는 권면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을 기독교인의 첫째 사명으로 삼는다는 식의 신조나 교리도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 하라, 하지 말라고만 한다. 그 명령에 대해 타협, 변개, 유보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독선적 강압적인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십계명 강해 첫 시간 서론에서 말했듯이 모든 인간이, 정확히 말해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라면 반드시 준행해야 할 사항이다. 하나님 당신 쪽에서 필요해서 소망하고 요구하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게 만드는 최소의 규범이다. 종교 교리다운 신령하고 심오한 내용이 없다. 나중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이 십계명을 풀어서 더 자세히 가르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라는 것은 둘, 하지 말라는 것이 여덟 개로 구성되어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잘못한 것을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식의 고상한 내용이 아니다.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살인, 간음, 도둑, 거짓 증거 같은 것뿐이다. 이런 것들만 하지 않아도 거룩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두 가지 하라는 것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신자들이 쉽게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이 종교적 계명으로, 효도가 윤리적 규정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둘째 계명 이하 십계명 전부는 항상 또 반드시 첫 계명의 제한을 받는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또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뿌리인 부모를 공경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자라면 누구나 아는 말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말하면 첫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나머지 아홉 계명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모든 인간이 첫 계명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실상을 하나님은 너무 잘 아시기에 더더욱 절대적 명령의 형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5,6절)이라고 해서 인간 상상으로 만든 그리스신화에서 신들끼리 서로 연애하고 결혼해 살면서 생기는 인간 식의 질투가 아니다. 당신이 받아야 할 경배를 빼앗아 가는 다른 신들에 대한 시기도 아니다. 다른 신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시기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하나님을 그렇게 폄하해선 안 된다. 인간을 그만큼 너무나 사랑한다는 뜻이다.
질투라는 초기감정은 선한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데도 질투하지 않으면 이혼하지 않고 아무리 한 집 한 방에서 함께 살아도 이미 그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난 것이다. 질투란 무너져 내리는 관계를 다시 회복하라고 주시는 감정이다.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 천 대까지 복을 주고 섬기면 삼사 대까지 벌을 준다고 했다.(5,6절) 아버지가 잘못한 것으로 아들을 벌을 준다는 연좌제가 아니다. 부모의 신앙유산이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특별히 자식이 잘한 일을 칭찬하고 사랑하는 것이 잘못한 일에 벌주는 것보다 훨씬 효력이 크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잘못을 벌주는 공의보다 잘한 것을 상주는 사랑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이다.
진리처럼 타당해 보이는 비난
이 둘째 계명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데 초점이 있다. 우리 중에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거기다 칼 막스나 제 친구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성경적 진리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구체적인 신학적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반발할 수 없고 타당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현실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제 친구의 경우, 신자들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들 종교의 착각이고 또 그런 착각을 가진 끼리끼리 모이는 것에 구태여 시비를 걸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왜 주일 교회에 주차할 스페이스가 없다고 남의 가게 앞에 몇 시간 때로 하루 종일 주차해놓아 가게 오는 손님들 차까지 못 대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럼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냐? 웃기고 있네!”라고 비아냥대는데도 도무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칼 막스의 비판도 마찬가지다. 신자들이 본문 말씀대로 계명을 잘 지켜 천 대까지 기쁨을 누리는 모습은 눈 닦고 봐도 없다. 힘들 때만 교회 가서 눈물콧물 쏟으며 기도 찬양하고 그러다 금방 모두 다 해결 된 양 멀쩡해진다. 그러나 잠시 뿐 다시 걱정한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그런 일을 반복하니까 그들 눈에는 기도와 찬양이 마치 아편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문제가 아니다. 신자들이 그런 비난에 주눅이 들고 제대로 변증하지 못한다. 십계명의 뜻이 무엇인지, 지금 이 둘째 계명만으로도 그런 비방이 말도 안 된다고 확언하는데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 계명을 준행할 일차 대상이 누구인가? 우상숭배가 만연한 애굽과 가나안의 백성들이 아니다. 방금 출애굽으로 여호와의 큰 권능과 은총을 맛본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우상 숭배의 맛을 들였기에 그 습성을 완전히 씻어버리라는 것이다. 또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온갖 우상들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 일차적인 뜻이다.
이스라엘은 아직 여호와의 자체 신전은 물론 제단도 없다. 그러나 출애굽에 역사 하신 여호와를 회상해보면 우상을 만들어선 안 되고 만들 상상도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오직 말씀만으로 역사했지 어떤 형상도 보여주지 않았지 않았다. 죽음의 사자가 고센 땅을 휩쓸고 지나갈 때에는 문을 걸고 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했다. 혹시 곁눈질로도 하나님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모세와 대면한 하나님은 이름도 없었다. 하나님 당신을 아예 형상화 할 수 없고 그럴 가능성을 당신께서 스스로 철저히 차단시켰다.
더 중요하게는 이스라엘이 나라가 없고 노예 살이로 고난을 겪고 있는 중이지만 그 생활에 사백 년간 타성이 젖어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하나님 당신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실천하려고 출애굽으로 구원했다. 이스라엘이 힘들 때마다 여호와를 아편처럼 찾은 적이 없고 그럴 때마다 오히려 애굽의 우상을 그리워했다.
출애굽의 여호와를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분과는 살아 역사하는 생명의 말씀만으로 교통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나아가 첫 번째 통로로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대체하는 우상
인간 이성이 깨이고 과학이 발달된 현대의 신자들이 깎아 조각한 상에 절할 리는 만무하다. 교회에서 익히 배운 대로 하나님의 위치와 권능을 대체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대표적으로 돈, 권세, 명예, 지성 등인데 그것들이 궁극적인 안전과 만족을 우리에게 줄 수 없기에 그것들을 우상으로 삼아선 안 된다. 그러나 여기까진 누구나 잘 알고 있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그런 것들이 둘째 계명이 말하는 우상의 실체가 아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먹고 걷고 자는 것 같은 것을 빼고는 반드시 본인의 생각에서 나온다. 먹는 것도 실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먹을까 다 생각한다. 자동차가 절대로 저절로 움직이지 않고 반드시 운전수가 있는 것과 같다. 상상하여 고안하든 실재하는 것의 형상을 만들든 어떻게 할지 오래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디자인해야 한다.
본문은 곧 바로 “너를 위하여”라고 시작한다. 무슨 뜻인가? 우상이 너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 생각 속에서 나온 것이기에 바로 네가 우상이라고 선포한 셈이다. 십계명 전체는 첫째 둘째 계명에서 보듯이 ‘너희’라는 복수가 아닌 ‘너’라는 단수 즉, 신자 개인에게 주는 절대적 명령이다. 우상들 중에 가장 강력하고 끈질기고 교묘한 우상이 바로 신자 본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위로, 핑계, 심하게는 아편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죄에 찌든 인간이 고안한 우상이나 종교는 그럴 수 있고 또 아무 힘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둘째 계명은 신자 본인 자체가 우상이라고 말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상이 우상에게 어떤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대체하는 자기 밖의 우상에 대해선 재물을 필두로 미모 건강 지성 심지어 배우자 자식들에 대해선 아주 조심한다. 그러나 자기가 우상이리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성경은 바로 그 점을 엄숙하고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제 친구가 비판한 그 신자의 경우 주일 오전에 남의 가게 앞에 주차하면서 분명히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다, 주차 위반 딱지가 날라 와 벌금을 물 수 있고, 가게 주인이 견인해버리면 그 비용도 어마하다는 점을 절대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곳에 주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어도 예배에는 참석해야 하고 또 예배시간에 절대 늦을 수 없다는 뜻이다. 틀림없이 교회에 중직을 맡은 자다. 그 사람 속에 품고 있는 종교적 열성이 우상이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다.
나만 안락하고 사치와 풍요를 누리는 것은 죄이자 우상임을 알기에 넘어질까 다들 조심한다. 이처럼 흔히 좋은 믿음이라고 칭찬받는 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은 잘 모른다. 주일예배를 온전히 드려서 지난 일주간의 죄책감을 씻고 평강을 얻어야겠다는 것 자체는 선한 것이며 신자라면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주목적이 되면 우상이 되고 교회 밖에서 종교를 아편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제 생각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의 마태복음 5:23의 가르침을 대언한 것뿐이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주일예배를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남의 가게 앞에 영업 방해가 되도록 주차한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예배를 중지하고) 형제와 화목한 후에(영업 방해 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차를 멀리 옮긴 후에) 예배를 드려라.
지금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주일 예배 오기 전에 얼마나 자주 부부끼리 다투고 자식에게 짜증과 화를 내는가? 교회에서 만날 꼴 보기 싫은 사람과 그 사람에게 상처 받고 무시당한 일이 생각나서 이런 저런 시험에도 들지 않는가?
물론 우리가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니까 더더욱 주일예배를 더 경건하고 신령하게 드려야 한다. 그러나 예배를 드린 후에는 형제와 서로 용서하며 화목해야 하고 사랑을 회복해야 하지 않는가? 단순히 예배만 드리고 가면 즉, 예배만을 위한 예배를 드리면 예배가 바로 자기를 위한 우상이 된다. 불신자의 원망을 들으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른 것이며 또 참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은 것이 된다. 셋째 넷째 계명까지 위반한 꼴이다.
내속의 우상의 실체는?
하나님은 물론 남을 위하는 것조차 자칫 우상이 될 수 있다면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또 아직도 연약하고 욕심이 많고 죄의 본성이 살아 있는 우리가 우리 속의 우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그 방안은 의외로 간단하다.
십계명의 나머지 아홉 계명을, 특별히 첫 계명을 따르는 일을 자꾸 교묘하게 방해하고 주저하게 하고 잊게 만들고 심지어 반대편으로 이끄는 뭔가가 내 속에 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마지노 선 같은 것이 우상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려 들면 꼭 뒤통수를 잡아끄는 것이 있다. 다른 것들은 비교적 쉽게 포기하는데 자기가 자신을 봐도 이상하리만치 이해가 안 되지만 죽어도 이것만은 절대 양보 못하는 것이 있다. 또 양보 못하는 바람에 큰 낭패를 겪어서 후회하고도 계속 붙들고 있는 것들이 사람마다 여럿 최소한 한두 개는 갖고 있다.
성경에 아주 좋은 예가, 그것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있다. 그의 우상은 무엇이었겠는가? 바로 외아들 이삭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삭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백세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문자 그대로 자기 몸에서 난 약속의 외아들이었다. 얼마나 소중하고 귀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인생 말년에 바로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이 사건은 나중에 골고다 언덕에서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위해 예비하신 어린 양인 당신의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 한다. 그러나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더러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는 따로 어린 양을 하나님이 제물로 미리 준비해놓았지만 분명히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본문의 둘째 계명의 뜻대로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 아브라함을 가로막는 최후의 것 최고 강력한 것 무엇이겠는가? 바로 이삭이지 않는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지금 버리라고 요구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이삭을 위해서 혹은 대신해서 죽으라고 명했다면 큰 망설일 것 없이 죽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으로선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자기 생명을 바치라는 것보다 더 심한 명령이다.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너 자신을 따를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아들의 생명을 걸고서 결정하라,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명한 것이다. 너를 따르는 순간 바로 우상 숭배라는 것이다.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기에 무엇이 우상숭배인지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정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인 이삭을 하나님의 위치와 권능을 대체한다고 믿고 섬긴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이삭이 주는 삶의 기쁨과 행복이 하나님이 주는 그것보다 분명히 더 크다고 여긴 적은 많았을 것이다. 하나님 외에서 삶의 만족을 찾은 것이며 그것이 우상이 된다.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것이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 골고다 십자가를 예표 한다고 말씀 드렸다. 하나님 쪽에서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지 않는가? 나를 대신해 죽음으로써 그분의 의로 영생을 얻었다.
당연히 신자의 처음과 끝은 오직 예수여야 하고 또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기독교는 절대로 아편은 물론 종교도 아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자 하루하루의 실제적인 삶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어떤 것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다.
인생은 버려나가는 과정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땅의 미련을 하나하나 버려나가는 과정이요 싸움이 인생이다. 아직 창창하게 젊으신 여러분에게 실감이 안 날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미 지금부터 적용되고 있다.
아이들이 처음 태어났을 때 모두 천재 같았고 또 아브라함에게 이삭처럼 천하를 얻은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쯤 슬슬 자식에 대해 실망하고 짜증 분노가 나기 시작하고 그 목표치를 하향조정하기 시작했지 않는가? 구체적으로 의식은 못해도 서서히 이 땅의 것을 버려나가고 있는 중이다.
불신자들 중에도 의로운 자들은 재물, 권세, 명에 등이 결코 인생의 참 만족을 줄 수 없다고, 종교적 용어로 치면 우상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면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의 마지막 종착지가 어디인가? 하나님 앞은 절대 아니다. 끝까지 완악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는 무릎 꿇지 않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버킷 리스트다. 요로(yolo-You only live once)인생이라 평소 해보고 싶었던 것을 다 하려고 한다. 그러나 다 성취하고 나면 인생은 허무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붙든 버킷리스트나 요로인생은 자기를 위하여 자기가 만든 우상일 뿐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절대적 진리가 삶의 근원이 됨을 부인하는 자들, 십계명 그 중에서도 첫 계명조차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인생결산서다.
신자의 경우 자기 속에 있는 우상들 중에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데 끝까지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불신앙인가? 기도와 말씀에 등한히 한 것인가? 제발 종교적으로만 접근하지 말기 바란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정확히 아셔야 한다. 신자의 마지막 마지노선은 바로 자존심이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는 것이 바로 죄의 본성이지 않는가? 모두가 그 죄의 본성에 여전히 묶여 있지 않는가?
우리 모두 매일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다. 자식을 야단치거나 부부 싸움하는 원인도 실은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 자식과 내 마누라라면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여기기에 잘못한 것 있으면 일일이 지적하고 야단쳐서 고치려 든다. 여러분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제가 갖고 있는 우상으로 아직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교회도 최고 큰 일류 교회에 나가야 된다고 여긴다. 사람이 많이 몰려 주차할 스페이스가 없어서 남의 가게 앞에 불법 주차한다. 예배 참석하기 위해 불법주차 자주 했는데 단속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고, 경찰이 내 차만 보지 못하게 눈까지 가려주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식으로 간증까지 하고 다닌다. 그런 헛소리 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단순히 천국보험에 가입되었다는 보장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 유일무이한 사랑을 실현한 사건이다. 도무지 그 사랑과 비교할 존재와 사건은 없다.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최소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능력이다. 그 십자가에 앞에선 세상의 어떤 고상하고 경건한 도덕 철학 교육 종교라도 다 우상일 뿐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다. 자기가 우상을 삼았던 모든 것들을 십자가 앞에서 전부 다 깨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고백 앞에 세상에서 자기가 사랑했고 자랑으로 삼았던 것들을 열거했다. 자신의 자존심을 철두철미 부셨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자신에게 질문해봐야 할 내용이 두 가지 있다. 첫째 하나님께 순종하여 소명을 실천하는 일에 주저하게 만드는 내속에 남아 있는 최후의 것은 없는가? 둘째 그것들을 과연 어떻게 깨트릴 수 있겠는가? 자신의 도덕 믿음 의지로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가능할 것인가를 말이다.
1/28/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