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무시무시한 살인
출애굽기 강해 (47) - 십계명 (7)
“살인하지 말라.”(출20:13)
너무 가난한 영적 실체
십계명이 이스라엘의 고대 유물로 박물관에 가있을 것이 아니라 현대 신자들도 문자적으로 엄격히 적용 실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한 계명씩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여섯 번째 계명이야말로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 아닌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싸움과는 거리가 멀고 학교를 오가며 동네 불량배들에게 돈 빼앗기기 일쑤였다. 남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고 그럴만한 힘도 없다.
그러나 성경해석의 원칙에 충실하면 정반대로 우리의 너무나 가난한 영적 실체 즉, 평소에 알지 못했던 아주 추악한 살인적인 본성과 직면하게 된다. 성경해석학 전체를 강의할 시간과 여유는 없다. 지금 살펴보는 것은 구약이므로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둘만 간단히 설명 드리겠다.
첫째 구약은 미완성의 점진적 계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진리는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구약만 따로 떼서 보면 부족하거나 오류가 있는 해석이 될 소지가 많다. 반드시 신약성경과 비교하여 해석해야 한다.
둘째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구속사적 관점에서 진술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구속사(救贖史)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태초에부터 마련하여서 당신의 백성과 그들의 삶을 이끌어온 것이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인데 쉽게 말해 그 주제가 구원이라는 것이다. 또 그 구원은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에 구약의 구절도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구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요컨대 여섯째 계명은 윤리적 계명으로만 접근해선 안 되고 성경 전체가 살인에 대해 어떻게 진술하는지 따져야 한다는 뜻이다. 특별히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무엇보다 십자가 구원과 연결되는 맥락은 무엇인지 찾아내어야 한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마5:21,22에서 살인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렸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옛 사람’(21절)은 모세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 여섯째 계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22절에서 형제에게 화를 내고, 라가(바보)라고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그 범위를 확대했다.
미련한 놈이란?
노하는 것, 바보, 미련한 놈이 세 종류의 욕이나 저주를 열거한 것이 아니다. 먼저 세 번이나 강조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불신자는 물론 신자들도 저촉되지 않는 자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결코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신자마저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중한 살인죄를 범하고 있다고 말한 셈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단순히 감정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순간적으로 내뱉는 말은 아니다. 어떤 한 사람을 대상으로 반복적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평소에 그 형제를 보는 시각 자체가 아예 그런 것을 의미한다.
“미련한 놈”이라는 원어의 뜻은 영어로 치면 “empty head”이다. 마침 우리말의 욕 중에 “골빈 놈”처럼 들리지만 지성이 모자란다는 뜻은 아니다. 유대인 식 사고와 어법으로는 생명을 주관하는 것이 머리(head)이므로 생명이 없다(lifeless)는 즉, 죽은 놈 내지 죽일 놈이라는 뜻이다.
이해하기 쉽게 바꿔 말하면 이 땅에 살 가치도 없는 놈이다. 우리말에 아주 적합한 표현이 있다. 너를 낳고 너희 엄마가 먹은 미역국이 아깝다. 한마디로 세상에 태어나선 안 될 놈이라고 욕했으니 분명히 살인이다.
예수님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저 세상으로 시쳇말로 골로 보낸 사람 한두 명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너무나 교만했던 제가 제일 많을 것 같다. 모세는 동족을 위한다는 의분에서, 다윗은 일시적 욕정 때문에 살인했다. 아브라함은 두 번, 이삭은 한 번 마누라를 팔아넘겼지만 자기 목숨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훨씬 더 흉악한 살인자일 것이다. 최소한 잠재적으로 언제든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이 너무 심하게 말씀하신 것인가? 이렇게라도 강조해야 그나마 형제를 사랑으로 섬기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뜻인가? 최소한 분노를 내지 말고 미워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인가? 또 모세의 십계명을 새롭게 가르쳤으니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것인가?
여기서 또 다른 성경 해석의 원칙이 하나 나온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를 리 없다. 동일한 한 분이므로 당연히 그 뜻도 같다. 그 뜻을 실현하거나 인간에게 계시하는 방식만 시대에 따라 변하는데 인간의 도덕적 영적 수준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요컨대 모세의 여섯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풀어서 설명한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
십계명 강해를 하면서 첫째로 강조한 것이 무엇인가? 첫 계명이 대전제가 됨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다는 차원에서 나머지 아홉 계명을 해석 적용해야 한다. 세상에 태어나선 안 될 놈, 너 엄마가 먹은 미역국이 아깝다 등의 욕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현재 그분이 다스리고 있는 인생을 감히 인간인 주제에 그것도 죄인인 주제에 판단 정죄한 것으로 엄청난 죄다.
인간 최초의 범죄는?
모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옛날 사람, 아니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창조 직후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놀랍게도 인간끼리의 최초의 범죄는 살인 그것도 친형제끼리의 살인이었다.
그 전에 아담과 이브가 서로에게 잘못을 전가하는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께 범한 죄였지 직접 인간을 상대한 것은 아니었다. 또 그 후의 부부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인 인간 사회의 범죄 1호였다.
설마 친형제끼리 그런 일이 있었을까? 어떻게 살인이 최초의 범죄였을까? 이것도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겁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닌지 의아해 할 필요 없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인간에게 강요 억압 공포를 주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이 저지른 추하고 사악한 잘못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바쁘다. 또 간혹 형벌을 주어도 오직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제사의 의미와 태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관해선 익히 배워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데도 쉽게 간과해버리는 요소가 하나 있다. 동생 아벨이 형 가인에게 잘못한 것 단 하나 없는데도 죽였다는 점이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목축을 했기에 서로 다툴 일이 전무했다. 당시 사람들이 없고 외로워 틀림없이 아주 친했을 것이다. 미국 이민 오면 한국과 달리 친척 친구들이 없어서 형제들끼리 아주 친하게 지내지 않는가?
가인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고 자기 것은 받지 않는데 시기하여 엉뚱하게 아벨을 죽였다. 정작 잘못을 따지자면 부모인 아담과 이브에게 했어야 한다. 가장 먼저 첫 번째 수확물로 제사부터 드리라고 가르치지 않았거나 가르쳤어도 강조하지 않았을 수 있다. 아담과 이브로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지나쳤을 수 있고 부모는 잘 가르쳤는데 가인이 예사로 여겼을 수도 있다. 형 가인이 첫 소산을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던 잘못에 동생 아벨이 책임질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가인이 하나님을 엄청 사랑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사랑하지 않으면 시기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사람이 갖는 시기 중에 가장 세기기 강하고 치사한 것이 영적인 시기라는 것이다. 교회 안의 분쟁이 세상보다 더 추해지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진짜 이유?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했고 부모를 원망했는데 왜 죄 없는 동생 아벨을 죽였을까?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이 모든 집에서 일어난다. 형은 놀기만 하여 학교 성적이 엉망이 되었고 부모에게 야단맞았다. 반면에 동생은 부모 말 잘 들으며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이 좋아 부모에게 칭찬 받았다. 성적이 나빠진 것은 형의 전적인 잘못이자 책임이다. 동생이 시쳇말로 형이 성적 떨어지는데 보태 준 것 하나 없다. 그런데도 형은 부모에게 칭찬 받는 동생이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 미워진다.
그리고 실제로 부모가 없을 때에 엉뚱하게도 동생에게 화풀이를 한다. 부모가 나중에 그 일을 알고 동생과 잘 지내고 보호해주라고 했더니 도리어 해코지만 한다고 야단치면 내가 동생을 돌보는 자가 아니라 부모의 책임이 아니냐고 따지며 덤벼든다. 가인이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즉, 왜 그를 죽였느냐고 하나님이 묻자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고 항변했듯이 말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어렸을 때에 똑같이 경험했던 일이다. 모두가 그랬다면 인간은 원래부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답도 간단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처음으로 주신 영적 계명이 무엇이었는가? 네가 나를 거역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순간 정녕 죽음이 닥치는데 영적인 생명이 죽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 가인과 아벨도 그 영적 생명이 죽은 채로 태어났다. 가인은 영적으로는 죽은 육신만의 생명체로 살고 있었고 그 실제적인 영적 죽음의 파괴력이 죄 중의 죄인 살인죄로 나타난 것뿐이다.
이 사건의 의미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영적 생명이 죽어있으면 얼마나 끔찍한 결과가 생기는지 생생히 알라는 것이다. 성경은 생각보다 쉽게 대할 책이 절대 아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해질 목적으로 성경을 읽어선 안 된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어떤 위치와 형편에 있는지를 말해 주는 책이다. 특별히 하나님을 거역하면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이 땅에서부터 영적 생명은 죽어 있을 뿐 아니라 그래서 살인죄를 수시로 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예수님도 죽은 자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이 육신과 영적으로 다 죽은 시신을 장사하라고 하셨다.
세상의 책들이 어떤 진리를 말하고 또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성경은 전혀 다르다. 사람을 그 내면에서부터 완전히 뒤집어엎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 둘 중에 하나로만 나누는 절대 절명의 책이다. 이미 예수 믿은 신자들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숨을 기꺼이 걸만한 성경의 진리들을 파헤치고 실제로 그 진리대로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살펴본 대로 창세기 2장의 선악과 금령과 4장의 가인과 아벨 사건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친 내용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 무엇이 살인이며, 영원한 죽음이 무엇이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성경은 구약성경의 맨 처음부터 선포하고 있다.
신(神)은 죽었는가?
니체라는 허무주의 철학자가 “신(神)은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신의 실재(實在) 자체가 죽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이, 특별히 기독교 신자들마저 생활하는 모습이 방자하고 교만하고 추하고 더럽기 짝이 없으니 신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부재한 것처럼 행동하니까 역설적 표현으로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십계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첫 네 계명은 하나님을 부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다섯째 부모를 우습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도 그러는 판에 여섯째 계명대로 형제와 이웃을 우습게 여기는 일쯤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생물 중에서 같은 종류 즉, 형제를 시기해서 그것도 영적으로 시기해서 살인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다른 동물은 간혹 번식 시기에 암컷을 차지하려고 혹은 그 지역의 맹주가 되려고 드물게 그러는 수는 있으나 단순한 시기로는 그러지 않는다.
시기란 누차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다. 정말로 사랑할 대상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라고 최소한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라는 목적으로 주신 감정이다. 가인도 하나님으로 인해 아벨을 시기했으면 하나님과 씨름해서 그 문제를 풀었어야 했다. 그럼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일이 가능했으나 부모가 타락할 때 사탄의 길을 따랐던 본성을 이어받아 부모가 실패했던 그 길로 간 것이다. 그것도 먹고 살 것이 풍부하고 여자 문제로 다툴 일이 아직 없는 유토피아 상황에서 범죄 한 것까지도 부모와 판박이다.
살인에 대해 새롭게 정의를 내린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만드신 것에 얼마나 고귀한 뜻과 목적이 있는지 제발 알라는 것이다. 육신의 생명도 소중하지만 영적 생명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고귀하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결코 외모로 차별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는 것만이 네가 정녕 죽지 않고 영적으로 사는 길이라고 선악과 금령을 다시 풀어 설명한 것이다.
예수님이 해선 안 된다는 첫 단계인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까지는 상대를 사랑하고 있거나 최소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셋째 단계인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것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미련하다는 것은 머리가 없다는 것인데 머리란 사실상 인간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이다.
또 말로 표출되는 것은 마음이 그렇다는 것인데, 상대를 실제로 이 세상에선 없어져야 할 놈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상대를 내 마음 속에 완전히 지운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를 철두철미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육체적 살인보다 더 무시무시한 엄청난 살인이다.
가끔 이혼은 하지 않고 또 별거도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다 커서 자립할 때까지만 참다가 아이들이 결혼하면 각자가 갈 길로 가겠다는 부부가 있다.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상대가 나에게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상대에게 마찬가지로 그렇다.
배우자가 아니라 자기 옆에 그냥 돌덩이가 하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영혼이 아니라 그냥 물질이다.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서 지웠다. 문자 그대로 적과의 동침으로 두 살인자가 한 집에서 동거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선 아주 사이좋고 믿음이 좋은 장로와 권사 부부로 행세하다 교회 문만 나서면 쌩하고 찬바람이 분다. 이 얼마나 끔찍한 살인이자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운 심령들이 아닌가? 그들 심령 안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은 맞는가? 예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는 절대로 없지 않는가?
살인이 현저하게 증가하는 현대
모세의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간략하고도 직접적이며 절대적인 명령이다. 당시는 단순히 살인이 흔했고 심지어 단지 분노가 지나쳐도 죽였다. 예수님은 그래서 형제에게 제일 먼저 화를 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율법에서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명령도 그렇다. 당시도 장의사가 있어서 일반인이 시체를 만질 필요가 없는데 길 가에 그만큼 시체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는 인간사회의 도덕의식이 많이 성숙되었고 법치도 엄격히 적용되고 치안이 확보되어 육체적 살인은 많이 줄었다. 대신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무서운 살인은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상대를 내 마음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고귀한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선 절대 그럴 수 없다.
만약에 사람이 물질에서 진화된 존재에 불과하다면 물질이 물질을 죽이는 것은 즉, 육체적 살인마저 사실상 아무 문제 될 것 없다. 오직 물리적 법칙이 작동되었을 뿐이다. 함유하고 있는 열량이 많은 것이 적은 것을 이기고 삼키는 식의 작동일 뿐이다. 그래서 불신 세상에선 권세와 돈이 많은 자가 갑 질하게 마련인 것이다. 갑 질이 바로 상대의 영혼을 죽이는 것 아닌가?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백성들과 그 공동체에선 절대로 그런 갑 질을 해선 안 된다. 시쳇말로 상대를 골로 보내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물질임을 증명하는 짓이다. 상대가 하나님이 창조한 고귀한 영혼임을 부인하는 것은 자기도 똑 같이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럼 자기가 자신을 골로 보낸 것이다. 자신이 자기 영혼을 죽이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고 형제의 잘못을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백 구십 번을 용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수치다. 예수님 당신 말고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상대가 잘못한 일 하나씩 따져서 용서해선 전혀 불가능하지만 상대 그 사람 자체를 무슨 일이 있던 끝까지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이 힘들면 수용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사백 구십 번을 잘못했어도 그 일들을 네 마음속에 전혀 기억도 회상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육신적 생명이 전부이므로 외모로 차별한다. 신자는 하나님이 심어준 영혼을 보아야 하는데 무엇보다 다른 이도 천국으로 함께 가야 할 존재다. 육신의 생명을 끊는 것은 순전히 역설적 의미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품에 상대를 먼저 보내주는 것이므로 상대에게 좋은 일이 된다.
반면에 이 땅에 함께 살면서 상대를 완전히 마음에서 지워서 아예 없는 것처럼 여기면 그 상대는 평생에 마음에 너무나 심한 상처와 모멸감에 파묻혀 살게 만든다. 그렇게 만든 자를 향한 분노와 저주가 끊이지 않는다. 실감나게 말하면 그 삶이 지옥이며 마치 지옥 불 속에 사는 것 같다. 예수님이 그렇게 만든 자는 어떤 심판을 받는다고 선언했는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다.(마5:22) 애꿎은 상대를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했으니 그 형벌은 본인이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그 말씀을 이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받는 제사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다. 특별히 구약은 그 계시의 완성인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한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십계명대로 살 자신이 있으니까 예수 믿을 필요 없다고 큰소리친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너무나 방자하게 교만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에도 착하게 산다고 자부한 유대인들이 주님은 거역하면서 인간 사회에서 소외된 불쌍한 자들을 미련한 놈이라고 욕했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어서 세상에 태어나선 안 될 사람이라고 배척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욕을 듣는 창녀, 세리, 귀신 들린 자, 나면서 불구자들을 하나님인 당신께서 얼마나 사랑하는지 삶 속에서 특별히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다.
창세기 4장의 형식으로 말하면 그들의 제사는 내가 받지만 너희 유대인들의 제사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것은 첫째로 사탄의 농간에 넘어간 것이다. 사악한 제사장들이 돈과 권력이 줄어드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에 동조한 대중들은 은연중에 가인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갈급해하면서 엉뚱한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엄숙히 선포했다. 모세의 십계명이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 여섯째 계명도 첫째 계명에 비추어 잘 따져보라고 한다. 그럼 과연 너희가 하나님과 십자가의 사랑이, 특별히 그 무한하신 긍휼 없이는 한 시라도 살 수 있는지를 말이다. 바로 이것이 여섯째 계명의 참 뜻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2:1-4에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다. 상대에게 분노하지 말고 더더욱 무시는 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에 상대를 나보다 위에 모시고 섬겨야 한다. 그럼 내 기쁨이 오히려 충만케 된다고 했다. 꼭 이웃이 아니라도 된다. 이웃부터 그렇게 하긴 힘들다. 바로 내 남편, 아내, 성도들 심지어 자녀들부터 그래야 한다.
바울의 그 권면이 얼마나 심각하고 진지한 뜻인지 모른다. 바로 이어서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을 잘 살피면, 제대로 안다면, 그 은혜 안에 들어와 있다면, 결코 상대를 내 밑에 깔아뭉개지 못한다는 것이다. 직접 살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이미 살인죄를 범한 것이다. 가인의 경우처럼 그런 자의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는다. 오직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의 예배만 하나님은 받으신다.
겁을 주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만 채워야 한다. 타락했을 당시에 육신적으로도 바로 죽였어야 할 아담과 이브를 살려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의 후손을 번창 하게 한 후에 즉, 바로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그분이 만드신 너무나 고귀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영적생명을 정말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 이 여섯째 계명의 뜻이다.
2/25/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