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출 20:16)
출애굽기 강해 (50) 십계명 (1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신13:6-9)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선서하라.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미국의 재판이나 의회 청문회 등에 증인으로 설 때는 반드시 성경책에 손을 얹고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서시켰다. 청교도들이 세운 기독교 국가였기에 오늘의 아홉 번째 계명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모세 당시로선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 세워지려면 공평과 정의의 실현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은 증인에 대한 규정을 엄격하게 보완하고 있다. 먼저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없으면 증거로 효력이 없게 했다.(신19:5) 혼자선 거짓을 조작하여 모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악인과 연합해 증거하지 말라고 했다.(출23:1) 악인과 같은 패거리면 당연히 피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것이다. 제 삼의 증인이 악인의 협박이나 위세에 눌려서 타협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는 것이다.
셋째는 다수에 따라 증언하지 말라고 했다.(출23:2) 사람들 눈치를 보지 말라는 것이다. 다수라고 다 정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로 자세히 조사해서 거짓 증언으로 판명나면 그 무고하게 모함당한 자가 받을 벌과 같은 벌을 위증한 자에게 내리라고 했다.(출19:18) 지난주에 배운 대로 소를 훔쳐갔다고 거짓 증거 하면 다섯 마리로 갚아야 한다.
다섯째로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자고 즉, 십계명의 첫 계명을 어기자고 권하는 자는 가족 심지어 아내라도 가차 없이 죽이라고 명했다.(신13:9) 단 첫째 증인이 먼저 돌을 들어서 치고 그 후에 백성들이 따라하도록 했다. 아무래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부담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확실한 증거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에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후에 바울로 개칭)이라는 청년 앞에 두었다.(행7:58) 또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행8:1) 나아가 스데반이 피 흘릴 때에 곁에 서서 찬성했다고 재판 중에 자기 입으로 실토했다. 바울은 스데반이 조상들이 믿던 여호와 외의 다른 신인 예수를 믿으라고 전파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찬성했다는 것은 율법의 전문가인 바리새인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 규정을 풀어서 설명해준 것으로 최소한 그 처형을 그가 주도했다는 뜻이다.
이처럼 율법이 증인과 증언에 대해 철저하게 보완 규정들을 둔 것은 거짓 증거를 절대로 대수롭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한 유명한 배우를 대상으로 Me Too 운동이 폭로되자 처음에는 모함이라고 버텼지만 나주에 진실로 밝혀졌다. 그러자 너무나 창피해서 딸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써놓고 자살했다. 본인으로선 안타까운 불행이나 사람들은 가룟 유다처럼 자기 갈 길을 갔다고 즉, 바울이 스데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 사건과 전혀 상관없이 순전한 가정으로 만약에 거짓 증거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죄한 의인을 자살할 만큼 부끄러운 즉, 천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만드는 짓이다. 평생에 이마에 Me Too라는 지워지지 않는 분홍 글씨로 각인하는 것이다.
나중에 무죄로 판명이 나도 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착하다는 데에 아무 관심이 없다. 악인으로 만드는 험담을 즐길 뿐이다. 처음에 누명 쓴 그것만 기억한다. 그렇다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해명할 수도 없다. 남들 보기에 부끄러워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던지 시골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해야 한다.
대중의 기억에서 그 사람은 완전히 잊혀진다. 타인의 존재를 자기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우는 것은 살인이라고 말씀드렸다. 오늘 아침에 미국초등학교 학생이 왕따를 당했다고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봤다. 아무 잘못한 것 없는데도 어린이가 자살하는데 다 큰 어른이 자살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거짓 증거는 인격적 살인일 뿐 아니라 이처럼 실제로도 살인이다.
코람데오의 삶을 살라.
아홉 번째 계명인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재판에 적용된다. 인간사회가 단순하고 규모가 작을 때는 재판만 공정해도 사회 정의가 확립되었다. 지금은 사회가 매우 복잡해지고 규모도 커졌다. 거짓 증거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아주 많아졌다. 또 십계명은 헌법처럼 원론적인 계명이라 삶의 모든 측면에서 항상 진실 되게 살라는 것으로 이해 적용해야 한다.
통계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하루에 열 번 이상 알게 모르게 거짓말 한다고 한다. 집집마다 전화가 있을 때에 광고 선전 전화가 엄청 많이 왔다. 저를 찾으면 제 입으로 없다고 말하고 바로 끊었다. 옆에서 아내가 목사가 거짓말한다고 꾸중도 자주 했다. 다행히 연방정부도 소비자들의 그런 고충을 덜어주려고 “Don’t call register”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등록해 놓으면 광고전화가 차단되었다. 저도 제 이름을 등록함으로써 목사로서 양심을 지킬 수 있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백색의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서너 살 짜이 아이들에게 산타크로스는 없다고 진실을 말하면 천하의 죄인이 된다. 솔직히 100% 진실 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저를 비롯해 아무도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말하는 바는 모든 입을 막는 것이라고 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일 없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의 입부터 막는다. 그래서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고 율법으로는 죄의 깨달음만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롬3:19,20)
이어지는 21, 22절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미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다. 쉽게 말해 우리 모두가 십계명 중에서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조차 제대로 못 지키는 죄인이기에 오직 예수 십자가의 은혜만 소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하루 열 번 씩 거짓말한다고 해서 계속해도 된다는 법은 없다. 성경은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더 거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롬6:1) 법정에서 성경책에 손을 얹고 진실만 말할 것이라 선서하는 사람 중에는 불신자도 분명히 있다. 그럼 기독교 교리에 순종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책이 상징하는 하늘을 바라보고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늘은 절대 속이지 못하니까 오직 진실만 말하라는 뜻이다.
신자는 더더욱 법정에서만 아니라 삶의 모든 차원에서 진실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랑 무슨 일을 하더라도, 특별히 혼자만 있을 때에 남들이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 무슨 짓을 해도 모를 것 같은 그 때에도 코람데오 즉, “하나님의 면전(面前)”에서 행한다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신자는 제사장 나라 시민의 소명을 실현해야 한다. 세상에 속하지는 않아도 세상 안에서 살아야하기에 신자의 모든 삶의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법정이다. 하나님 앞에서만은 절대로 거짓 증거 해선 안 된다. 혼자 있을 때 그래야 한다는 것은 그분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 없도록, 최소한 그분께만은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크게 네 가지만 살펴보자.
죄를 구체적으로 정확히 자백하라.
첫째 자기 죄를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자백해야 한다. 요한 사도는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거짓말했으니 하나님께 거짓 증거한 것이다. 그런 자는 그 안에 진리가 없다고 했다. 대신에 죄를 자백하면 미쁘신 하나님이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케 해주신다.(요일1:8,9)
세상 사람은 삼 세 번은 용서해도 그 이상은 무리다. 우리가 짓는 죄가 세 종류 뿐도 아니요, 같은 죄를 딱 세 번만 짓고 다시는 짖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의 형벌을 다 감당하신 예수님 외에 용서를 받을 방안은 절대로 없다.
심지어 다윗처럼 다른 이에게 당한 억울한 일은 물론 다른 이에게 대한 미운 감정 분노 저주마저 하나님 앞에서만은 토설해야 한다. 상대에게 그럴 수는 없다. 설령 내 잘못과 허물이라도 해도 내가 미처 모르기에 주님 앞에 다 털어 놓아야 한다. 그럼 주님이 내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내 허물과 잘못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고칠지 깨닫도록 해서 내 속의 죄를 깨끗하게 해주시며, 억울하게 당한 일까지 주님이 대신 바로 잡아 주신다.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온전히 자백하지 못하면 아직 예수 십자가의 진리 됨과 그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탓이다. 불완전하고 죄에 찌든 인간끼리는 순전한 용서는 절대 불가능하며 당연히 그 죄들을 깨끗하게도 못한다.
물론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생각은 감히 못한다. 문제는 자기 죄를 구체적으로 자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아실 텐데 여기곤 어물쩍 넘어가버린다. 그럼 고난, 문제, 소원도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아시는데도 왜 기도할 때는 구구절절 자세히 아뢰고 했던 말 또 하고 하는가? 기도도 아무 말하지 않든가 아니면 죄를 자백할 때에도 기도처럼 아주 자세히 구구절절 자백하고 또 자백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신자가 기도하고 회개하기 전에는 그 사정을 몰랐다가 신자의 자백을 듣고서야 판단을 하여 시행을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신자의 마음이 낮아지길 원하신다. 전적으로 당신을 신뢰하는 그 믿음을 보고 싶은 것이다. 주님의 팔복 강화 첫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차지한다고 했지 않는가?
신자도 본인 스스로의 고백을 통해 자기 영혼의 추함과 초라함의 실상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다. 또 그래야 그 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고 비록 더딜지라도 실천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신자가 동일한 죄를 반복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하나님에게 실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의 실상을 모른다. 어쩌면 그 죄를 다시 짓고 싶은 마음이 있거나, 그 죄가 익숙하고 좋아서 빠져나오기 싫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있는지 모른다.
죄를 자백하는 것이 종교적 의무나 책임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미쁘신 주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는 최선의 길이다. 요한의 말씀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 진리라고 말할 때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구원이다. 예수님도 당신이 길이요 진리라고 선언했다. 죄가 없다고 하면 그 속에 진리가 없다고 했는데 결구 예수님의 구원 밖에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우리 모두 주님을 영접하여 우리 속에 모시고 있다. 그러나 신자의 속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주님의 선하심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는 너무나 간단하고 명백한 이치이지 않는가?
믿음과 삶이 일치해라.
첫째로 자기 죄를 자백하고 고치기로 다짐했다면 신자의 둘째 거짓 증거는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 것인데 그럼 이미 행한 그 결단은 하나님 앞에 거짓말한 셈이다. 신자의 삶이 자기가 말한 것과 믿는 것과 달라선 안 된다.
가장 감동적인 설교는 설교한 그대로 살아가는 목사의 삶이라고 한다. 또 목사가 가장 조심해야할 것이 셋 있는데, 여자와 돈과 말하는 것만 깨끗하면 목회는 이미 50% 이상 성공한 것이라고들 한다.
여자 조심은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째 계명이고, 돈은 도둑질 하지 말라는 여덟 번째 계명, 말을 조심하는 것은 바로 오늘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아홉째 계명에 해당된다. 십계명을 풀어서 가르치고 실천의 본을 보일 목사들도 이 셋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율법은 모든 입을 막는다고 했는데 저 같은 목사들 입부터 막는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들더러 자기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실제로 그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권했으니 여자 문제에 깨끗했다. 또 텐트를 만들어 팔면서 자비량으로 선교했으니 돈에도 깨끗했다. 셋째로 고린도 교회의 그의 반대파들이 바울은 말에는 졸하다고, 말솜씨가 없다고 비방했다. 다른 이를 속이거나 험담을 하려면 말솜씨가 좋아야 하는데 바울은 아예 그럴만한 수준이 안 되었다.
그는 예수를 알기 전에는 율법을 믿는바 그대로 행했기에 스데반의 사형을 주도했다. 그러니까 스스로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할 만큼 모든 삶을 여호와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행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더욱 모든 일에서 거룩해졌다. 특별히 부활신앙을 가지고 죽음에 굴복도 두려워도 하지 않으며 제사장 나라 시민으로, 아니 제사장의 삶을 살았다.
그러니까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영적 제사라고 선언한 것이다.(롬12:1) 산제사를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구약의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선포했다.(삼상15:22) 교회 안에서 거룩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교회 밖 실제 삶에서 거룩한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기독교의 위기가 누차 말씀드린 대로 전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기독교만큼 전도를 열심히 하는 종교도 없다. 신자들이 진리를 몰라서도 아니다. 그 아는 진리대로 살지 않고 뒤로 호박씩 까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엄밀히 말해 외부의 그런 비방은 문제될 것 없다. 신자의 인생이 종교적 허물과 치장만으로 절대 충만해지지 않는다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신자의 말이 행동과 다르면, 삶이 믿음과 등지면 반드시 고달프고 괴로워질 뿐이다. 제대로 믿어도 하나님의 복을 받을까 말까이다.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당신의 은혜를 나눠줄 뿐이다. 그런데도 믿는 바대로 행하지 않고도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 아닌가?
침묵의 죄를 범하지 말라.
서두에서 율법의 증인과 증언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살펴볼 때에 일부러 하나 누락시킨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하나님 앞에 거짓 증거 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의 것이다. 본 일과 아는 일을 진술하지 않으면 그 허물을 그에게 돌린다고 경고했다.(레5:1) 하나님은 침묵을 위증죄와 같은 범주로 취급하신다.
우리 생각에는 침묵하는 것이 거짓을 한 것도 모함한 것도 아니며 죄인을 감싸주는 측면이 있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제사장 나라를 세움에 침묵은 결코 선한 것이 아니다. 나치 시대에 유대인을 숨겨주는 차원과는 다르다.
예수님도 포도원을 흔드는 여우같이 교회 안에서 분명한 잘못을 한 자에 대한 치리 방침을 명확히 밝혔다. 처음에는 두세 증인 찾아가 권면하고, 다음에는 장로들이 가서 충고하고, 마지막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권해도 그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출교시키라고 명했다. 포도원 자체,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 전체가 오염되는 것을 막으라는 뜻이다. 또 그래야만 그나마 그가 회개할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침묵의 죄는 특별히 목사들에게 해당이 된다. 사악한 영적 흐름을 분별해서 경고하는 선지자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 마침 이번 주에 한국의 동성애 전력이 있는 청년과 개인적으로 상담을 했다. 어렸을 때에 부모 특히 아버지로부터 말 못할 학대를 받아 큰 상처가 있었다. 삶에서도 많은 시련과 고난이 겹쳤는데 너무 비참해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청년이 교회에 출석하고 예수를 믿고는 옛 습성을 딱 끊었다고 했다.
목사가 교회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선포하지 않으면 침묵의 죄 즉, 거짓 증거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쳐선 안 되고 하나 더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예수님도 치료의 광선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 청년처럼 동성애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치유가 가능하다.
동성애 배척 반대 운동만 열심히 하고 교회에서 동성애자를 수용하여 복음으로 치유 회복시키지 않으면 또 다른 반쪽의 침묵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성경의 계시에 대해 가르치고 실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런 기독교인들보고 동성애자에게 또 다른 성적 갑 질을 하며 차별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자기들도 성적 범죄를 저지르면서 유독 동성애자에게만 그러는 위선자라고 싫어한다.
에스더에게 민족의 위기에 대해 침묵하면 하나님이 다른 방안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만 에스더 너와 너의 아비집이 멸망할 것이라고 모르드개가 경고했다.(에4:14) 하나님은 또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파수꾼이 대적이 침입하는 것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백성이 곤경에 빠지면 파수꾼의 죄부터 먼저 물을 것이라고 선언했다.(겔33:6)
작금의 세태는 불신자들마저 말세라고 한탄할 정도다. 그런데도 교회에 사람을 많이 모을 욕심으로 신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만 하고 또 교회와 목사를 잘 섬기면 복 받는다고 강조하는 목사들이 같은 목사로서 죄송하고 안타깝게도 훨씬 많다. 거의 대부분이다. 이 세대의 영적인 흐름이 얼마나 사악한지에 대해 침묵하는 목사부터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가장 먼저 심판 받을 것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 받을 것이다.
마지막이자 네 번째로 신자가 거짓 증거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8에 예수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만으로는 부족하니 할례, 회개, 제사, 선행 같은 인간의 공로가 더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다른 복음이다.
바울이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할 때에는 여호와 외에 예수라는 다른 신을 전파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다 다마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권능으로 완전히 죽음에서 되살아나는 체험을 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다른 신이 아니라 구약의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임을 깨달았다. 그 후로는 예수님 외에 다른 신을 전파하는 즉, 십자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선포했다.
모든 기독교 이단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에 대한 구원의 길은 열렸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구원을 얻으려면 이런 저런 것을 더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복음을 더 좋아한다. 자기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자더러 인간적인 자기 의를 자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의를 앞세우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아담의 원죄다. 그 원죄에서 구원을 시켜주어야 할 교회와 목사가 거꾸로 그 원죄를 더 부추기는 짓을 하는 꼴이다.
또 자유주의 인본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님은 인간 스승에 불과하기에 주님의 가르침대로 도덕적으로 선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하나님도 그런 자를 구원한다고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를 완전히 헛되고 헛되게 만드는 짓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구원이 없다. 하나님은 천하에 예수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 십자가는 요한복음 1:1의 말씀대로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바로 저 같이 완악하고 교만한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경륜이다. 세상 만물은 특별히 영적 존재인 인간은 예수에 의해서, 예수를 위해서, 예수 안에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죄 중에 있는 인간을 오직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만 사랑하시고 심지어 십자가로만 상대하신다.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수 십자가 구원의 절대성, 완전성, 영원성, 충족성, 특별히 유일성을 조금이라도 부인하거나 훼손하면 다른 복음이다. 하나님에 대해 위증하는 것 중에 가장 큰 위증이다. 바로 예수님 즉, 하나님 그분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 특유의 교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모든 인간이 살고 죽는 문제다. 예수 십자가의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긍휼은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새로운 존재로 바꿀 수 있다. 단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자기 죄를 깨끗케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심령이 완전히 가난해지고 찢어지고 깨어져서 겸손히 십자가 앞에 엎드리면 모든 죄를 용서 받고 영생의 선물을 받는다. 그래서 말 그대로 기쁜 소식 복음이 된다.
십자가 은혜로 힘을 얻고 살라.
십자가 복음은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하고 충족되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자 하나님의 은혜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힘입고 기동하지 않는 어떤 인생도 갈급하고 허망해진다.
바울이 스데반을 처형할 때만 해도 인간 세계에서 인간적 의로는 세계 최고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완전히 깨어지고 그 존재가 뒤집어진 후로는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백했다. 그런 자를 주님은 살리시고 또 사도로 세웠다. 바울도 그래서 자기 대신에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서 평생을 살기로 헌신 실천했다.
주님의 은혜를 갚는다는 보상의 차원이 결코 아니다. 진짜로 예수님의 사랑 외에는 다른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님을 매일의 삶에서 실제로 체험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아그립바 왕이여 쇠사슬에 결박당한 것 빼고는 모든 면에서 자기처럼 되길 바란다고 간곡히 권했다. 또 유대인들이 유독 예수를 믿지 않자 자기는 지옥에서 저주를 받아도 되지만 제발 동족을 구원해달라고 절규했다.
신자들이 세상 앞에 진실 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 더더욱 진실해야 한다. 그분에 대해 결코 거짓 증거를 하면 안 된다. 바울처럼 자기 삶으로 그래야 한다.
솔직히 우리는 예수 십자가 밖은 죽음이요 그분과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실패하는 체험을 쌓아가며 살아가는 정도 밖에 안 된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거룩하게 되는 것은 사실상 너무 힘들다. 매번 두들겨 맞고 다시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주님과 교제 동행하며 신앙생활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고난과 문제를 기도하여 응답 받는 것인가? 상처와 시련을 말씀과 찬양으로 위로 받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초등학생이 부모에게 사탕을 달라고 떼쓰는 정도다. 아무리 억지떼를 써도 여전히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변함없다. 부모에게 사랑스런 자식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 부모도 아이가 중학교만 들어가도 떼를 쓰도 들어주지 않는 일이 더 많다. 스스로 자립하라는 것이다. 신자의 인생도 그래야 한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예수 십자가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최소한 오늘 말씀드린 네 가지 거짓 증거, 그중에서도 특별히 주님과 그 십자가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자 또 전도와 선교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있다면 그 안에 진리가 없다. 예수님의 빛이 신자를 통해 비춰 나오지 않는다면 두 가지 이유밖에 없다. 신자가 그 빛을 막고 있거나 그 속에 예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 것이 정말로 즐겁고 기쁘다면, 말씀과 기도로 그분과 교제하고, 또 같은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으로 섬기며 기도 찬양으로 위로하는 일들이 너무나 신난다면 어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겠는가 말이다. 바로 그렇게 살라는 것이 오늘 아홉 번째 계명의 뜻이다.
3/18/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