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대들만한 믿음이 있는가?
출애굽기 강해(56)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32:10-14)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모세
모세 같은 구약 최고의 믿음의 영웅이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해도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과 계획에 변화는커녕 영향도 전혀 주지 않는다. 그 실천하는 시기와 방식에 일부 수정은 간혹 있을 수 있다. 본문 10절에서 이스라엘을 진멸하겠다는 것은 몰라도 모세의 후손으로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계획은 하나님이 분명히 14절에서 철회했다.
어쨌든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끈질기게 기도해서, 흔히 말하듯이 기도의 양이 채워졌기 때문에 응답된 것은 아니다. 지금은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가 기도한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모세는 크게 세 가지 사항을 두고 하나님께 따지듯이 간구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원망 불평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산 아래의 백성들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해낸 신이라고 선포하고 음란하게 섬기고 있다는 통보를 해주었다.
모세는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잘 알았다.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피 뿌림의 의식을 거행한 십계명의 가장 중요한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어겼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몽땅 진멸하고 모세로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하니 아직 그 실상을 보지 못한 모세로선 전 백성이 과연 그랬을까 의구심이 들었을 수 있다. 일부만 그랬다면 전부 진멸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배교 현장을 직접 목격하자 그도 대노했다.(19절) 하나님이 손수 새겨주신 십계명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트렸고 금송아지를 불에 태워서 그 가루를 물에 타서 모두 마시게 했다. 이스라엘을 진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진노가 모세의 가슴에도 그대로 가득 채워진 것이다. 또 그래서 하나님 대신에 스스로 그들에게 심판을 결행했다.
하나님도 자기가 새겨준 돌 판을 깨트렸고 당신께 묻지도 않고 백성들에게 벌을 주었음에도 모세에게 추궁은커녕 전혀 문제도 삼지 않았다. 불에 탄 금 가루를 마시게 한 것은 하나님께 배교하여 우상 숭배한 사악한 죄의 오염과 폐해는 물론 그 흔적조차 철저하게 깨끗이 지우려는 조치였다.
하나님께 백성들을 진멸하지 말아달라고 간구했던 그가 도리어 적극적으로 죄악을 진멸했다. 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실제로 삼천 명을 칼로 도륙하는 심판을 수행했다. 그 후에는 자기를 버리더라도 동족을 용서해달라고 즉, 자기로 큰 민족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재고해달라는 동일한 맥락의 기도를 다시 드렸다.
모세가 기도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한 가지 분명하게 밝혀야 할 사항이 있다. 기도의 응답을 잘 받을 수 있는 방법론적 접근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방법이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신자에 대한 소망과 계획이 각기 다 다르기 때문에 그 역사하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모세의 기도 내용을 통해 그의 믿음과 인생의 지향하는 목표와 자세 등을 배워서 나에게 적용해야 한다. 모세 같은 믿음이 있어야 그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지, 모세처럼 기도한다고 해서 그와 같은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첨부터 그러지 말았어야지요?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놓고 왜 다시 진멸하려는지 따졌다.(11절) 그럼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출애굽 시킨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기업을 주어서 제사장 나라로 세우게 하려는 당신의 친 자녀이지 않느냐고 대든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아니 믿음이 이런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하늘에 시민권자로 삼아서 영원한 기업을 주시려고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있던 데에서 구원하시어 당신의 친 자녀로 삼아주었다는 확신 말이다. 신자 본인에게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어야 하고 또 자기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는 절대적 진리로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단순히 힘든 문제나 고난을 해결해 주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그치지 않고 바로 나의 아버지여야 한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은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그분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들이 다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 죽으셨고 그 후에도 어떤 허물과 잘못을 범해도 징계는 해도 심판 즉, 부자 관계를 절연하지는 않으신다. 영원히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서 나로 거룩하게 변화 성장시키며 이 땅에서 나의 인생을 통해 반드시 받으실 그분의 기쁨과 영광이 있다. 또 지금 그런 방향으로 나의 삶을 이끌고 계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야 한다. 아니.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 믿는 믿음의 본질이다.
모세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지금 그런 말씀은 아예 성립도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거역할 수 있어도, 아버지는 아들을 진멸하는 것은 설령 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했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들은 아버지를 낳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아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해도 아버지 하나님이 그 아들 이스라엘을 버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진 것이다.
우리에게 모세처럼 하나님과 맞장 뜰 배짱이 있는가? 크게 불경한 것도 아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복을 주지 않으면 즉, 이제 가나안 땅으로 건너 갈 텐데 나를 죽이려는 형 에서에게서 지켜주지 않으면 절대 보내줄 수 없다고 밤새 씨름해서 이겼지 않는가?
물론 매번 하나님께 따지듯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아무리 강력한 사건과 사람 앞에서도 아버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뢰하기에 요동치 않는 평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 것이 확실한데 무엇에나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애굽에게 부끄럽지 않습니까?
모세는 둘째로 그러면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다고 따졌다.(12절) 애굽에게 열 재앙을 내렸고 마지막 열 번째는 모든 장자를 죽였다. 장자를 죽인 것은 고대인의 사상으로는 가문의 대가 끊긴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일시에 모든 장자를 죽인 것은 애굽 민족을 진멸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비록 이스라엘이 열 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지만 출애굽 시킨지 겨우 일 년 만에 진멸하면 애굽 사람이 볼 때에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따졌다. 히브리인들의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이기에 자기 백성들마저 다 죽이는가라고 비방할 것이라는 뜻이다.
모든 애굽의 신들이 히브리인의 신 여호와에게 무참하게 패배했다. 그래도 애굽인들은 때로 나일 강의 범람을 막아주고 메뚜기에서 보호해서 자기들에게 풍요를 주는 신으로 믿고 있다. 물론 그들로선 우상이 실존하지 않기에 우연의 일치인 줄은 전혀 모르기에 자기들이 바친 치성을 그 신들이 흡족하게 받은 보상이라고 착각한 것뿐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신은 하루 저녁 일탈한 것으로 자기 백성을 다 죽이는 죽음의 신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출애굽 시킨 이유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방과는 다른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해서 여호와는 전혀 다른 신임을 증명토록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을 진멸하면 그 일은 누가 할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물론 모세의 후손을 통해서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하나님으로선 얼마든지 그 일을 가능케 하신다. 그럼 애굽의 장자들만 그야말로 억울하게 죽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또 여호와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 백성이든 아니든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아주 악한 신으로 이방 족속들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 아니 믿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이 최우선적인 목표가 되어 있는가? 아니 그분의 체면을 살려주려거나, 최소한 훼손만 안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가?
십계명의 셋째 계명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사고로는 이름은 그분의 전 인격체를 의미한다. 육신의 아버지도 그 이름에 누가 안 되도록 언행에 조심하는데 과연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아버지 되신 하나님에게 누가 안 되게끔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있는가?
작금의 현실은 솔직히 어떠한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은 좋은데 예수쟁이는 싫다고 말하는 단계는 벌써 넘어섰다. 신자와 교회가 행하는 행태 때문에 그 좋았던 예수마저 싫어져버렸다. 기독교는 가장 신뢰성을 잃은 종교요 목사는 가장 존경 받지 못하는 성직자가 되었다.
오늘날의 신자도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다. 예수 십자가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세상 앞에 증명해야 한다. 우리부터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신자를 잔해하러 가는 바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었다. 신자들을 보호해준다는 뜻만이 아니라 신자와 당신을 동격화(同格化) 했다. 모든 신자에게 예수님은 정말로 성령으로 내주해계신다. 신자가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과 순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그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주위 사람이 볼 수 있게끔 그분의 영광의 빛이 새어나오게 마련이다. 또 이전의 우리 같이 목이 뻣뻣했던 주변 사람이 그 빛을 보고 영혼의 찔림을 얻어 예수 십자가로 마음 문을 열게 된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까?
모세는 세 번째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한다면 그들과 하신 약속을 지키라고 하나님께 독촉했다.(13절)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고 그의 모든 신앙생활이 그 약속의 말씀을 바탕으로 행했다.
지금껏 교회에서 익히 배워온 바 그대로다. 그런데 실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는 뜻이 조금 잘못 가르쳐져 왔고 그래서 적용도 잘못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말씀을 들 수 있다.
단순하게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하나님이 기도 응답해주어야 마땅하다고 믿고 또 응답이 지연되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인데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고 원망 불평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바울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일 뿐이다. 앞뒤 문맥에서의 뜻도 자기가 정한 계획대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엇이든 이뤄준다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오늘의 주제와 상관없으니 다음 기회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바울의 고백이긴 해도 성경에 기록되었으니 마땅히 하나님의 계시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신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영적 원리이지 약속은 아니다. 본문의 13절과 비교해보면 왜 약속이 아닌지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언제 어떻게 주겠다고 구체적으로 아브라함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직접 말씀하셨다. 그 약속이 이삭과 야곱에게 전승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나, 장자권을 무시하고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는 그 약속의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
반면에 이삭의 장자권을 사모한 즉, 아브라함의 약속에 반드시 참여하고 싶었던 야곱은 결국 그 장자권을 차지했지만 형의 위협을 피해 도망을 가야 했다. 그 첫 날 밤에 하나님이 그의 꿈에 나타나 반드시 이곳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오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고 야곱을 참여시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도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시켜 창성하도록 보호했다. 후손들도 사백 년이 넘게 그 약속이 실현되기를 기도하고 또 소망했다.
개인적인 약속을 받았는가?
이처럼 신자가 기도할 때에, 아니 믿음 생활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만 주신 구체적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에게 주셨고 자신이 아니면 실현할 수 없는 그런 약속이어야 한다. 또 그것을 실현하는데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
하나님께 받은 구체적인 약속이 아직 없다는 것은 어떤 신자라도 해선 안 되는 구차한 변명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너희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로 삼아 당신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렇게 하면 당신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제자들이 가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제자들에게 승천 직전에 주신 약속이라면 주님의 유언이다. 육신의 부모의 유언도 최선을 다해 지키려 노력하지 않는가? 정말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고 내가 그의 친 자녀임을 확신한다면 이 유언을 안 지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정말로 그 유언을 지키고 싶은 소망과 열정이 있는 신자는 이미 하나님에게 받은 자신의 재능과 은사는 물론 자신이 처한 현재 여건에서 가장 적합한 구체적 사역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을 개인적 소명으로 삼아서 자신의 일상적 삶과 인생 계획에 접목하여 실현할 수 있다.
모세가 우리보다 특별히 더 신령하거나 경건했던 것은 아니다. 모든 성정이 우리와 동일했다. 그는 평생토록 자기 전부를 걸만한 소명을 찾았고 그대로 묵묵히 실현한 것뿐이다. 하나님이 강제로 시키거나 억지로 갖다 맡긴 종교적 의무나 부담이 전혀 아니었다. 그것이 정말 자기가 의미와 가치를 성취하고 기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스스로 확신하고 결단 헌신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최소한 구체적인 소명을 발견하려고 노력은 해야 한다. 사실은 구태여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아직도 사탄에 미혹된 영혼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되 부득불 하지 말고 진심으로 그래야 한다.
정말로 그 영혼이 불쌍하기에 나에게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그들을 섬겨보라. 그럼 주님이 참된 기쁨으로 나에게 넘치도록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또 순종하면 할수록 그분의 은혜를 더 충만하게 받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그분의 일에 충성하게 된다. 아무리 그분 일을 해도 피곤치 않고 신나기만 하고 그것에 자신의 전부를 기꺼이 걸게 된다. 그래서 모세처럼 나를 죽이더라도 대신에 저 불쌍한 사람은 살려달라는 애끓는 기도도 할 수 있게끔 된다.
모세와 바울의 공통점
신약시대의 바울도 모세처럼 자기를 하늘의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더라도 동족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여호와와, 바울은 하늘로부터의 찬란한 빛과 음성으로 임재하신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대일 개인적으로 대면했다.
그 만남으로 그들은 무엇을 깨닫고 믿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자신들을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이미 그들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오래 전부터 마련해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님 쪽에서 먼저 찾아와서 성령으로 자기들의 인생을 뒤집어놓으셨음을 깨달았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내 산에 강림하신 여호와를 강력한 불꽃과 우렁찬 음성으로 대면했다. 그랬으니까 목숨 걸고 십계명을 지키겠다는 피 뿌림의 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신약의 성도들도 마가의 다락방에 오순절 날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후로는 누구라도 주님을 진정으로 겸손히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성령이 역사하여 거듭나게 해주신다. 그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신다. 썩어질 옛사람은 죽고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과 연합되어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럼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발적으로 결단 헌신하게 된다.
구약성경에는 성령이 개인적으로 간섭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신약시대에는 더 확실하고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주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할 수 있다. 그렇게 주님을 영접한 자는 모두가 하나님의 소명자로 세움을 받은 것이다. 아니 본인이 그런 결단을 자연스레 하게 되고 여러분들도 침례 받을 때에 그랬다.
그런 체험적 대면을 통한 소명자 의식이 없다면 입술로만 주여, 주여 부른 것뿐으로 주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신자이면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아무 관심이 없이 자기 안위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예수쟁이일 뿐이다.
주일 날 정말로 당당해져라.
모세가 행한 본문의 기도는 구약 최고의 믿음의 영웅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우리 모두 평생 신앙생활 하는 동안에 반드시 지녀야 할 믿음이자 그 실현하는 자세다. 구약시대에 벌써 모세처럼 살다 간 믿음의 증인들이 구름처럼 허다했다.(히12:1) 신약시대에도 사도는 물론 스데반 빌립 같은 이방인 집사들 뿐 아니라 이름도 없이 순교한 초대교회 신자들이 허다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그런 것이 있어야 할 줄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고 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무 염려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실현할 소명이다.
그렇다고 이곳 멤피스의 한인 사회 전부를 복음화 시키겠다고 거창하게 안 나서도 된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래서 아주 간단하다. 제발 이제부턴 너희 자신을 위한 기도는 그만하고 남을 위한 기도부터 하라는 것이다.
우리에 대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더 정확히 알고 계시고 보호 인도해주신다. 더 이상 정죄함도 없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기에 아버지 뜻대로 사는 것이 의무나 책임을 넘어서 기쁨과 보람이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의 일을 하면 그렇게 된다.
정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 죽었음을 확신하는가? 그 진리가 개인적 체험으로 내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고 있는가? 정말로 성령 하나님이 내 곁이나 주변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심을 믿는가? 아니 그분과 교제 동행을 체험하고 있는가?
정말로 그렇다면 어떻게 소명대로 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소명을 실현하려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그럼 하나님이 그런 신자를 끝까지 보호하지 않거나 그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혹시라도 그럴 기미가 보이면 모세처럼 하나님이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고 당당하게 따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매주 신자들이 주일 교회에 나오면서 지난주의 죄 몇 개 지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기가 죽은 표정을 짓는 일은 이제부터 정말 그만 두어야 한다.
지난주에 믿지 않는 이웃 한 사람을 위해 한 번이라도 기도한 적이 있다면 당당한 얼굴로 나와야 한다. 또 예배 마치고 나가면 다음 주는 두 사람을 위해서 혹시 주변에 그럴 사람이 없다면 한 번 기도할 것을 두 번 기도하면 된다. 그럼 신자로서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주 간단하다. 평소에 공부 열심히 하고 모든 면에서 성실하고 착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공부를 좀 더 잘하기 위해서 이 것 저 것 필요하다고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고 그럼 아버지는 얼마든지 그 요구를 들어준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아들에겐 아들이 요구하기도 전에 부모가 알아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마련해주신다는 뜻이다.
5/20/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