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방법
출애굽기 강해 (58)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33:12-17)
모세의 두 가지 요구 사항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배역 사건은 하나님의 격노를 샀다. 적극 가담한 3천 명이 칼로 도륙 당하는 심판을 받았다. 나머지 백성들도 우상이 새겨진 장신구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호렙 산 이후로는 부착하지 않았다. 그 후 비로소 가나안으로 진군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그럼에도 모세는 세 번째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장신구를 떼면 너희들에게 어떻게 할 것을 정해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출33:5) 아직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세가 알고 싶었던 사항은 두 가지였다.
먼저 12절 후반부대로 이 백성더러 올라가라 했는데 나와 함께 갈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모세가 출애굽 소명을 받을 때에 성격이 급하고 말이 어눌하고 미디안 광야 40년 도피 생활을 한터라 애굽 사정을 잘 몰랐다. 그래서 하나님이 형 아론을 동역자겸 대변인으로 붙여 주었다.
그러나 아론은 이번 금송아지 사건의 주역이 되는 바람에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 어떻게 임할지 몰랐다. 일종의 대기 발령 상태였다. 그래서 아론 대신에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부터 시중을 든 여호수아를 세워주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니면 아무리 아론이 죽어 마땅한 엄청난 죄를 지었어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이 정도로 그치고 형을 용서해달라는 마음도 반반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가나안 진군을 허락하면서 당신의 사자는 먼저 가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당신은 동행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셨는데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모세는 그래서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간구했다.(13절) 하나님이 제발 동행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친히 올라가겠다고 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너로 편하게 해주겠다고 했다.(14절) 그렇다고 하나님이 직접 모세의 시종이 되어서 모세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되게끔 마치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약속은 아니다.
그런 응답을 듣고도 모세는 다시 하나님이 친히 올라가지 않으려면 우리더러도 올라가라는 말씀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15절) 하나님이 가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주의 백성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동행만 걱정 염려했기에 하나님은 그 걱정을 덜어서 모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인 까닭
이번에도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된 연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모세는 “하나님은 제 이름을 아시지 않느냐?”고 했다.(13절) 모세는 세 번에 걸친 기도에서 일관되게 이름을 걸었다.
하나님은 맨 처음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모세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했다. 모세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손상되지 않느냐 그런 일을 왜 하시려 하느냐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하여서 진멸을 면했다. 두 번째는 그 남은 백성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는 대신에 동족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여서 가나안 진군을 허락받았다.
이번에도 하나님에게 내 이름을 알지 않느냐고 따졌다. 첫 번째 기도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둘째와 셋째 기도에는 자기 이름을 걸었다. 하나님과 자기는 서로의 이름을 아는 사이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모세는 실제로 처음이자 유일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답을 얻었다. 그 이후로 모세와 하나님은 일대일 인격 대 인격으로 항상 교제 해온 사이다. 시쳇말로 계급장을 떼고 맞장 뜨는 그런 자세로 주님 앞에 선 것이다. 각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로를 속속들이 모르는 것 하나 없이 너무나 잘 아는 관계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람들이 친구에게 하듯이 모세와 직접 이야기하신다고 했다.(출33:11)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직통계시를 주었다는 뜻이 아니다. 또 모세가 죄와 허물이 하나 없는 최고로 경건한 상태로 기도했다는 뜻도 아니다.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문장으로 서로 대화했다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기가 정작 무엇을 왜 요구하는 지도 잘 모른다. 긴급한 환난의 경우는 빼고는 대체로 그렇다. 형식적 종교적으로 두리뭉실하게 기도하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만 한다. 일단 회개라도 하면 나쁜 일은 생기지 않게 해주시겠지 막연하게 바랄 뿐이다. 친구 사이의 가장 큰 특징은 체면 차리지 않고 못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기도는 육하원칙에 따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기도해야 한다.
모세는 자신의 간구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응답도 구체적인 문장으로 받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직통계시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 요구를 쏟아놓기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이 넓이 높이 길이부터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또 그런 앎이 절대적 진리인지 현재 진행되는 사건에 대입해서 체험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특별히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을 통해 그분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단순히 고난과 문제가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깨달은 그분의 생각을 내 마음에 채워서 내 마음의 쉼을 얻는 것이 기도의 응답이다.
모세 이름을 누가 지었는가?
모세가 하나님께 자기 이름을 아시지 않느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도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 먼저 모세의 이름을 누가 지었는가? 부모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다.
바로의 공주가 물에서 건진 아이라는 뜻으로 지은 애굽식 이름이다. 성경은 또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전수 받아 교육시킨 자기 민족 최고 믿음의 영웅의 이름을 애굽 식으로만 표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엄청난 사실이다.
실감나고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하나 들겠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했다. 또 당시는 다까끼 마사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순전히 가정이지만 졸업 후에 독립군 대장이 되어 일본 육사에서 배운 전술과 전략을 활용하여 일본군을 열 번이나 무참하게 패배시켰다고 하자. 그런데도 한국 역사책에 다까끼 마사오라는 이름으로만 기록해 놓은 것과 같다.
이런 일은 인간 사회에서 어느 민족에게도 절대 있을 수 없다. 성경 외에는 그런 예도 없다. 가뜩이나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데 당연히 유대 식 이름으로 바꿔야 이치에 맞다. 그리고 다니엘서에서처럼 애굽에 있을 때에는 모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 구절만 보충 설명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은 모두 모세라고 즉, 다까끼 마사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는가? 아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출애굽기를 누가 기록했는가? 모세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다섯 권을 모세가 저작한 것으로 보는데 모세 본인이 자기 이름이 그렇게 불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애굽에서 바로의 왕자로 자란 것을 자랑했을 리도 없고, 출애굽의 공로를 앞세우려는 뜻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표기한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그 이름으로 알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두 가지 가면 쓴 모세의 인생
몇 번 강조한 대로 성경 기록은 인간 사회의 순리대로 접근하여 당시의 상황을 이해한 바탕에서 해석해야 한다. 모세가 미디안에서 40년 간 양치기로 있으면서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결혼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미디안 식 이름도 있었을 것이고 그 사회에선 그 이름으로 통용되었을 것이다. 결국 모세는 지난 80년 간 자기 이름은 하나 없이 지난 꼴이다.
이름이란 원래 부모가 자식에게 큰 기대를 갖고 중요하고도 선한 의미를 담아 짓지 않는가? 모세에게 그런 이름이 없었다. 말하자면 모세는 부모, 친척, 친구, 동족도 없고 자기 정체성은 완전히 상실 된 채 남이 정해준 인생을 대신 산 것이다. 본명이 없는 빈껍데기 인생이요 애굽과 미디안 사람의 모습의 가면 둘을 번갈아 쓴 연극배우 같은 인생이었다.
그 기간이 무려 80년이었다. 그 인생은 완전히 실패였다. 그는 하나님을 찾다 찾다가 지쳤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 바로의 왕자로 자라게 한 것은 동족을 위해 큰일을 하라는 뜻인 줄은 알았다. 그러니까 동족을 위해서 애굽 관원을 살인까지 했다.
그러나 80년이 흐른 후에는 그 소명의식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도 완전히 접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기도했어도 하나님의 응답은 전혀 없었다. 뭔가 나아질 움직임은커녕 징조 하나 안 보였지 때문이다. 그런 판국에 어떻게 믿음이 유지되겠는가? 신앙이란 절대로 자기 혼자서 도를 닦으며 성찰 각성하는 도덕적 사상적 훈련이 아니다. 실제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사는 것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은 물론 자기 인생마저 포기했을 것이다. 그 나이가 되니까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쇠약해졌다.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 죽으리라고 생의 의욕도 거의 남지 않았다. 촛불이 마지막으로 꺼질락 말락 하는 그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어느 날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이 먼저 모세를 찾아와서 만나주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야, 모세야”라고 두 번 애굽식 이름으로 불렀다.(출3:4) 모세는 애굽 말을 거의 잊고 있었을 때다. 그러나 그에게 어떻게 들렸겠는가? 당연히 “물에서 건진 아이야, 물에서 건진 아이야!”라고 들렸을 것이다. 말이란 처음에는 문자적 의미부터 들리는 법이다.
그 때까지 사용했을 법한 미디안 식 이름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너는 이전에는 모세로 불리었으나 앞으로는 히브리 식으로 예컨대 여호수아로 이름을 바꾸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바로의 공주가 붙여준 바로 그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모세야, 모세야!
무슨 뜻인가? 간단하다. 하나님은 자기를 물에서 건짐을 받아 바로 공주의 양아들로 입양될 때의 그 아이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아니 그 때에도 아니 그 이전에도 주님이 바로 곁에서 모세와 항상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모세의 인생에 대한 완벽한 계획을 다 마련해 놓고서 말이다. 지난 80 년간 모세 곁을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정작 본인 모세는 그 이름을 잊었고 잊고 싶은 이름이었다. 아니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이었다. 그 얼마나 치욕스런 이름인가? 그 이름 때문에 평생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동족은 물론이고 부모의 생사조차 모르는 천하의 불효자가 되었다. 미국에 이민 와 있는 우리로선 모세의 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치가 떨리는 이름이다. 그 이름을 다시 쓰면 내 성을 간다고 즉, 부모를 바꾼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모세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부모에게 받은 성을 바꾼 것이었다. 단순히 애굽 식 이름이라는 뜻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드려보겠다. 모세에게 히브리 식 이름이 과연 없었을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왜 그런가? 생모의 젖을 먹으며 자랐지 않는가? 유아시절 양육은 친 엄마에게 받았다. 그럼 아빠나 엄마가 히브리식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을 리는 없다.
모세는 또 엄마에게서 히브리 민족성과 관습을, 특별히 아브라함의 언약을 익히 배워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동족을 위해서 애굽 관원을 죽일 생각을 했지 않는가? 그리고 모세의 엄마는 모세라는 이름은 바로의 궁정에서만 사용하고 너 이름이 여호수아임을 절대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것이다.
이름은 남이 불러줘야만 이름으로써 역할을 한다. 모세의 히브리 이름은 엄마와 자기만의 비밀이었다. 사람들 앞에선 숨겨야 했고 절대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모세로선 하루 속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스라엘이 독립함으로써 자기 이름을 맘껏 부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 때 이미 출애굽은 개인적으로도 필생의 과업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하나님은 그를 “모세야, 모세야!”라고 두 번이나 그 원망스런 이름으로 불렀다. 너의 정체성은 어느 나라의 이름으로 불리든 그에 달린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바뀌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미국에서 아브라함 제임스 등의 미국식 이름을 붙여도 여전히 한국인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은 또 네 이름을 네가 정하는 것도 아니요, 네 인생은 네 것이 아니다. 너는 출생 때부터 나의 은총을 입은 자요 지금도 그 안에 잠겨 있다는 것이다.
모세가 물었을 때 하나님이 가르쳐준 당신의 이름은 사실상 없었다. 우리가 배운 대로 단순히 그냥 “내다!”였다. 너와 나 사이는 이름조차 필요 없다. 서로 통성명을 하며 격식을 차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만 해도 나의 뜻을 온전히 가르쳐서 너로 나를 온전히 믿고 모든 것을 의지하는 사이로 내가 이끌 것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모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런데 미디안식 히브리식이 아닌 애굽식 이름으로 불렀다. 출애굽 소명자로 세우고 그렇게 기억하고 그렇게 인도하겠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이 애굽 사람도 사랑하고 미디안 사람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워 당신의 이름을 증거케 하고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할 자가 모세라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겐 헬라인처럼 전도했다는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모세의 반응은?
“모세야!”라고 즉, “물에서 건짐을 받은 아이야”라고 두 번 듣는 순간 모세에게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이 무엇이었겠는가? 히브리 남자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어야 했는데 자기만 하나님의 기적적 섭리와 주권으로 살려준 은혜를, 그 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다.
또 지금 애굽으로 돌아가라 너를 찾던 자들이 다 죽었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소명을바았을 때는 어떠했겠는가? 그 동안 바로의 궁정에서 자란 것이 애굽의 심장부에서 선진문물을 익힐 뿐 아니라 바로 이 소명을 위한 준비였음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 동안에 하나님께 품었던 의심, 불만, 원망, 불신앙 모두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 거의 꺼져가던 생의 의지도 되살아나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소명의식이 다시 활활 불타올랐을 것이다.
비로소, 무려 80년이나 지나서야 모세라는 자기 이름이 얼마나 귀한지 깨달았을 것이다. 바로의 공주가 붙여준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붙여주신 이름이었다. 하나님이 그 이름으로 자기를 알고 그 이름으로 지난 80년을 주관하시고 그 자리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세상에서 이름조차 없이 지냈던 지난 80년이 결코 허송세월도 실패도 아니었다. 바로를 상대하고 광야를 통과할 지도자로 훈련 받은 것이었다. 모세에겐 단 하루도 눈물과 한숨이 마를 날이 없었으나 그 모두가 정작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자기처럼 그렇게 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도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모세가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동족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자기는 이름 없이 죽어도 좋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이름 없이 지난 80년을 살아온 터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준다는 즉, 아브라함의 언약을 달성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진멸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진멸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내 이름을 아시지 않느냐고 기도한 것도 나를 출애굽 소명자로 세웠지 않느냐?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나도 가지 않을 터인데 그럼 저 목자 잃은 양떼는 누가 돌보느냐는 것이다. 나아가 제사장 나라로 세운 계획을 포기할 것인가? 그럼 저 불쌍한 애굽과 미디안 사람에게는 당신의 이름을 누가 증거하겠느냐고 따진 셈이다.
하나님이 동행해주지 않으면 모세라는 이름은 가룟 유다보다도 더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동행해주었기에 모세는 구약 최고의 영광스런 이름으로 남을 것이며 모세 같은 선지자인 예수님 오심의 상징이 된 것이다.
모세처럼 기도하는가?
우리의 기도하는 자세가 아니 하나님 앞에 나오는 믿음의 내용이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저 박진호입니다. 저 아시지요? 저 입술의 말과 마음의 생각가지 열납 되고 있는 줄 압니다. 오늘도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 상처, 억울함 모두 하나 숨김없이 토설하겠습니다. 하나님도 저를 친구로 여기신다면 하나님의 속사정을 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그대로 어김없이 따르겠습니다.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또 그렇게 실현하고 있는가 말이다.
모세는 세 번이나 같은 방식으로 기도했다. 처음 출애굽 소명 받을 때는 다섯 번이나 반문해서 하나님께 꾸중을 들을 정도였다. 지금도 동행해준다는 말씀을 듣고도 다시 다짐했다. 참으로 끈질긴 믿음이다. 팔십년이나 하나님이 부재했던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인가? 세심한 성격 탓인가? 둘 다 아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도했다.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면 이후에 그는 그분이 세우신 자기 인생에 대한 계획만 붙들었다. 사실 출애굽은 그 이전부터 그의 평생을 지배한 그의 개인적 소망이기도 했다.
끈질기게 기도한다고 횟수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든 고난이 닥치면 하늘이 무너지고 인생이 끝난 것처럼 방방 뛴다. 강박증 신경성 환자처럼 그저 구해달라고 했던 말 또 하고 수백 번이나 기도한다. 물론 그래야 하지만 기도할수록 염려만 늘어난다.
그러는 것이 끈질긴 믿음이 결코 아니다. 먼 장래를 보고 자기 존재와 일생 전부를 거는 것이다. 그분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의 고난이 불편하긴 해도 오히려 느긋해져야 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모세의 전반 80년은 인간적으로 따져 그만한 실패와 치욕은 없었다. 차라리 애굽의 노예로 있었던 것이 나을 뻔했다. 그러나 모세는 드디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그것도 너무나 크게 은총을 입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인생도 그럴 것임에 전혀 의심치 않았다. 그런 바탕에서 기도했고 그렇게 살았다.
여러분에게 지금 겪는 긴급한 일은 물론 그전의 모든 실패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확신하는가? 좋은 일이 생겨야만 은총이라고 여기면 기복신앙이다. 또 그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좋을 일만 하나님 은총이니까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지 않는다고 믿는 셈이다. 내 인생의 전부가 그분의 은총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럼 또 내 인생에 대한 그분의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본문 식으로 하면 그분이 내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의 기도를 그분이 응답해줄 리가 없지 않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세에게 친구이듯이 우리에게도 친구가 되신다.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도 그분께 불경한 것도 결코 아니다. 그분이 친구가 아니면 온전한 믿음도 아니요 엄밀히 말해 구원 밖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친구란 평생 믿고 의지하며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서로 위로 격려해주는 사이이지 않는가? 그런데 만약에 내 급한 일이 생겨야만 친구를 찾아서 제발 도와달라고 요구하여 친구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한 후에는 친구와 연락을 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중에는 그 친구 쪽에서 먼저 절교하자고 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우리가 지금껏 행해 온 신앙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비겁하고 치사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 않는가? 그분의 보혈의 피를 함께 나눴지 않는가? 이제는 주님과 친구가 아닌 그 이상의 형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하나님의 은총인가?
3/10/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