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보다는 이성의 믿음을. (출35:30-36:1)
출애굽기 강해 (66)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출35:30-36:1)
역사상 최초의 예배당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명하신대로 성막과 관련 기구들을 제작하는 중입니다. 자기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려나온 뒤 약 500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들만의 성전에서 자기들의 신을 섬길 수 있다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은금과 짐승 가죽을 비롯한 자재들을 쓰고 남도록 기꺼이 드려서 모세가 더 이상 갖고 오지 말라고 명령할 정도였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신이 아닙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 만사를 통치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입니다. 비록 조립 이동식이긴 해도 역사상 최초로 이 땅에 세워진 예배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재료들 특별히 가장 귀한 금과 은을 애굽에서 조달해주었습니다. 또 오늘 본문 31, 35절 말씀대로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충만히 부어주어서 정교하게 성막을 제작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뜨거운 열정과 믿음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이 하나에서 열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유명한 IKEA 조립식 가구처럼 누구나 쉽게 도면만 보면 제작이 가능한 것처럼 아무에게나 성막 제작의 일을 맡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4장에서 망대를 건축할 때에 소요 비용을 미리 계산해보라고 했고, 또 전쟁을 칠 때에 상대의 전력과 비교해서 승산이 없으면 화친을 청하라고 했습니다. 예컨대 수련회에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자신의 자질과 능력은 전혀 감안하지 않고 목회자로 서원하는 청년들이 나옵니다. 목회자들이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합니다.
또 기도를 뜨겁게 하면 하나님이 크게 부흥시켜 주실 것이니까 교회 형편은 전혀 생각지 않고 교회 건축을 빚을 내서라도 무리하게 진행시킵니다. 주님은 그런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장 영적인 사역인 전도 여행에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돈과 음식은 휴대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고 당부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당신께서 주도는 하셔도 신자의 이성적 분별력이나 현실적 실력을 무시하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주관하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수행할 자는 신자입니다. 그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신자가 져야 합니다.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
오늘의 본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처럼 지혜롭게 자기들 책임 하에 성막을 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30절에서 하나님은 지명하여 브살렐을 불러내었습니다. 선착순이나 무작위 추첨으로 일꾼을 선발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사고로는 그 사람의 인격, 특성, 장단점, 자라온 배경 등 모든 것을 개인적 체험적 관계를 통해 안다는 뜻입니다. 평소 브살렐의 성품과 믿음은 두말할 필요 없고 그 일을 맡을만한 실력이 있음을 하나님이 알고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모세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가 지명하여 불렀다고 해서 하늘에서 “브살렐아!”라고 부르는 직통계시의 음성이 들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었다면 성경은 반드시 그 전후 과정을 직접 설명하거나 그 현상을 알 수 있는 언급을 합니다.
대신에 구약성경을 볼 때에 한 가지 꼭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범사를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주관하거나 그 배경에서 역사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인간이 행한 일도 마치 하나님이 행한 것처럼 기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애굽의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이 완악하게 만드셨다고 표현했지만 실은 바로 스스로 완악해진 것입니다.
모세가 성막에 대한 청사진과 소요 자재에 대해서 여호와께 계시를 받아서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러자 재물이 있는 자들은 헌물을 했습니다. 재물이 없고 재주만 있는 자들은 요즘 말로 재능기부를 자원했습니다. 고대에도 지금처럼 불루 컬러 기술자 계급은 가난했을 터이니 말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외에도 36:1에 보듯이 기술 봉사로 자원하여 성막제작에 참여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모세는 그 중에 책임자가 될 만한 후보자 몇 명을 골라 하나님에게 누가 가장 적임자인지 가르쳐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 중에 직접적으로 모세에게 지명해주셨든지, 성령의 미세한 음성을 듣고 브살렐이 적임자라는 확신이 든 것입니다.
모세는 평소에 브살렐의 됨됨이와 실력을 알기에 자기 기도의 응답임에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오홀리압은 그런 설명이 없기에 아마도 자기를 도와줄 부책임자 겸 많은 자원자들을 교육시킬 담당자로 브살렐이 지명했을 것입니다.(34절)
그리고 성막을 제작하는 과정에 하나님이 실제로 참여한 것은 그들에게 당신의 신을 부어주신 것뿐입니다.(31절) 성령으로 모든 제작 과정을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여태껏 없던 재능을 갑자기 생기게 해준 것이 아닙니다.
기왕에 실력자라면?
성령이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일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지혜와 총명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갖고 있는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는 실력을 뜻합니다. 여러 상황과 조건을 분석, 비교, 판단, 선택, 결정, 시행, 평가하는 등의 사고활동을 더욱 원활하게 작동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브살렐이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했다고 합니다.(32절) 이미 보석 세공 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언약궤, 예물을 진설하는 상, 일곱 꽃받침이 있는 등대, 놋 바다 등은 처음 만들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헌물로 바쳐진 장신구, 그릇, 장식품 등을 녹여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모양과 치수대로 만들 방법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요컨대 브살렐 본인은 금속세공에 이미 수준급의 실력자였던 것입니다.
신자도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현실적 실력을 자기 서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 쌓아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하고 전도도 더 잘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그래야만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뜻도 전혀 아닙니다.
지난주에 신자는 신자가 되기 전에 건전한 시민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신자도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만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항상 접촉하며 관계를 갖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좋은데 실력이 따르지 않으면 즉, 뜨거운 열정만 앞서고 이성적 분별력이 뒷받침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칫 광신자로 몰릴 수 있습니다. 솔직히 모든 종교 중에 개신교가 그런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도에 제일 큰 열심을 내면서도 오히려 그 열심이 전도에 장애가 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신자가 실력을 쌓아야 하는 이유는 불신 이웃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며 그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문에서 살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느냐입니다. 브살렐은 이왕에 갖고 있는 실력으로 새로운 노하우를 개발했습니다. 그럼 꼭 성령을 안 부어주어도 가능한 것 아닙니까? 불신자들도 새로운 기술들을 잘 개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의 첫째 역할
출애굽기에서 금송아지 우상 숭배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브살렐이라는 이름의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금으로 신상을 만드는 일에 금세공 실력자인 그를 아론이 왜 부르지 않았을까요?
만약 그 때에 참여했다면 하나님께 진멸당한 이천 명 안에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무슨 뜻이 됩니까? 금을 다루는 실력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못 미쳤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신상 같은 신전의 큰 기구들을 제작해본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장신구 정도를 만드는 기술자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성막 기구를 제작하는 노하우를 그가 스스로 고안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32절)
그런데 그 사건에서 그가 어떤 것을 깨달았겠습니까? 자기보다 실력이 좋고 경험이 많은 자들은 다 자기 눈앞에서 심판을 받아 칼로 도륙을 당했습니다. 자기도 자칫하면 그런 심판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 친구가 벼락을 맞고 죽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충분한 실력이 되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 사건에 참여 못하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로선 “하나님이 바로 이 성막을 만드는 일을 하라고 나를 살려 남겨두셨구나!”라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자기 기술은 물론 전부를 바쳐 헌신하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한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성령이 가장 첫째로 하는 역할입니다.
창세기 4:22에 두발가인이 동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금속을 다룰 줄 알게 되어서 문명의 발달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가인의 후예였고 그들의 후손 모두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원죄 하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모든 재능을 우상을 만들고 바벨탑을 쌓는 데에만 활용했습니다. 그런 인간 본성이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마저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아주 고귀하고 엄청난 재능입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 얼마든지 무엇이든 장엄하고 화려하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인간의 위대함만을 스스로 칭송하려는 것들뿐입니다. 바벨탑처럼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인간을 대신 앉히어서 높이는 일만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인간은 그 실력을 자기 주변을 풍요하게 만드는 방향과 목적으로만 사용합니다. 성령이 임해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목적하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게 됩니다.
신자더러 현실적 실력을 갖추라는 것은 이웃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성령의 충만한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럼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되어져 가는 방향, 목적, 의미, 가치가 전부 하나님 쪽으로 향하게 만들어 줍니다. 정말로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경건한 모습보다 착한 행실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이 땅으로 인생이 끝인 줄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룩한 힘이 보이는 세상을 주도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이 땅이 전부가 아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들을 섬기려면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현실적 외모로 다가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모는 현재 자기가 위치하고 있는 여건에서 하고 있는 일에서 브살렐 같은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모습이어야 합니다. 다른 이를 지도하는 것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도와줄 수는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그래서 “저렇게 실력이 좋으신 분이 어떻게 저렇게 겸손할 수 있지? 저렇게 바쁜 분이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마치 가족 일처럼 시간을 내서 돌봐줄 수 있지?”라는 반응을 들어야만 합니다.
단순히 수고하고 희생하며 경비를 들여서 도와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문제와 사건에 힘을 보태주고 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도와준다는 인식이 생기게 해야 합니다.
나라는 사람 자체를 불쌍히 여기고 나라는 사람을 인정해주면서 순전한 관계를 맺길 원한다는 진정성이 묻어져 나와야 합니다. 힘든 일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힘든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상대의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를 포용하여 한 인격체와 한 인격체로 대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합니다.
흔히들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차원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정말로 저 사람이 사는 방식이야말로 내가 꼭 살고 싶었던 모습이야. 그전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저렇게 살아야만 돼!”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과 태도로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인 이기적 탐욕이나 자존심 자랑 등이 전혀 타나나지 않아야 합니다. 보통사람에겐 도무지 불가능한 모습의 섬김입니다. 불신자가 볼 때는 신자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힘이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바로 이런 섬김이 성령의 인도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박사나 교수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고 또 교회 다닌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가 먼저 “예수 믿는 분이 맞지요?”라는 물어올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종교로 접근하면 마음 문을 닫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자가 실현하는 사랑의 섬김을 통해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명했습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마5:16) 너희의 바리새인들 같은 경건한 모습을 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착한 행실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것이지 않습니까?
작은 고민에서 깊은 상처까지
신자는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모든 실력을 동원해서 불신 이웃의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어쨌든 그들의 작은 고민거리 하나를 해결해주는 셈입니다. 그럼 점차 그들의 큰 문제에 접근이 가능해집니다. 그들이 울 때에 함께 진정으로 울어주어야 합니다. 한숨을 쉴 때에 함께 한숨 쉬어야 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과 영은 통합니다. 그래서 불신 이웃이 이 사람에게는 나의 더 큰 고민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도움이 아니라면 조언이라도, 아니 기도라도 받고 싶다는, 최소한 모든 것을 털어놓기만 해도 내게 위로가 되겠다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신자가 정확히 구체적으로 인식은 못해도 신자에게 내주하는 성령의 신령하고 거룩한 권능이 역사한 결과입니다. 그런 섬김을 받은 불신 이웃으로 점차 내면의 깊은 상처, 분노, 눌림 등을 드러낼 수 있게 만듭니다. 근본적인 치유의 광선으로 오신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로 한 걸음 한 걸음씩 그들을 이끌게 됩니다.
상대가 돈을 비롯한 현실적 도움만 원한다 해도 신자로선 끝까지 그런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가 택함을 받았는지 아닌지, 또 택함을 받았다면 언제 구원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택함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신자의 그런 섬김에 반드시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신자가 잘나서가 아니라 성령의 첫째 역할이 하나님 쪽으로 방향 전환을 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생이 시공간으로 제한 받는 물질계 안에서 묶여 있습니다,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입니다. 현실의 테두리에 묶여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 뿌리박지 않는 영성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삶에서 실제로 겪는 고통과 문제와 모순과 다툼에 신자는 적극적으로 동참 공감하며 도와야 합니다. 최소한 그들과 함께 있어주어야 합니다.
그럼 예수 십자가 복음의 생명력이 반드시 역사를 합니다. 왜냐 하면 성령은 바로 예수님의 영으로 성령이 충만하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신자에게 충만히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동안에 성령의 충만으로 불쌍한 이웃을 섬겼듯이 신자도 그럴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을 먹든 마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술로도 섬겼다면?
오늘의 본문은 한마디로 예술(art)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예술은 현실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게 하고 따뜻하게 격려 위로하는 역할만 합니다.
예술 재능으로 성막을 제작했다고 해서 하나님만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전적으로 성막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정국가를 지향하기에 성막이 바로 현실의 삶이었고 또 삶이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보듯이 백성들은 성막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고통을 주님께 호소하고 있기에 성막을 아름답고 정교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긴 것입니다. 예술로도 이웃을 얼마든지 섬길 수 있다면 인생살이에 직접 연관이 되는 일로는 더더욱 현실적 실력으로 이웃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뜨거운 믿음과 간절한 기도는 신앙의 절대적 두 기본 요소입니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장점이자 자랑입니다. 그러나 신앙에서 그것만이 전부이고 현실적으로 이웃을 섬길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교회 중심의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교회 근처에 살아야 복을 받는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 봉사 충성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누릴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이 유독 한국교회에만 성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우리 교회, 우리 기독교, 우리 구역, 우리 가정으로만 묶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우리 스스로 축소 제한시키며 예수님을 교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꼴입니다.
종교가 삶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삶이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이 땅의 인생 특별히 소외된 자들을 현실 삶을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답게 바꾸는 데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자는 그 일을 하라고 세상에서 불려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자들이 주관해서 통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서 불려낼 필요가 없습니다. 죽기 전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서부터 구원의 확신을 심어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단순히 택한 자를 죽은 후에 구원해주면 그만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인류 최초의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열성이 고취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중에 헌신된 자들이 자기 재능과 실력과 소유한 모든 것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불쌍한 이웃을 섬겼다는 기록입니다.
주일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로 영적 재충전을 얻는 것입니다. 나머지 6일은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처럼 특별히 불신자들과 어울려 살며 섬겨야 합니다. 교회로 모이는 것은 앞에서 설명 드린 그런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일을 우리끼리 먼저 연습해보라는 것입니다. 연습은 반드시 실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실전을 치르지 않으면 연습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끝 날까지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을 했겠습니까? 신자들끼리 교회 안에 모여 있다면 그런 권능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나가 불신자들과 매일 부딪히며 살라고 그런 권능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고 승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겪는 힘든 일을 기도하여 이기라고 주신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즉, 현실적 실력을 쌓고 이성적 분별력으로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예수님 사랑으로 불신 이웃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8/12/20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