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호박씨 까지 않는 신자가 되려면?
마태복음강해 (#169)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쌔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관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5-12)


떡만 밝히는(?) 제자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거의 매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스승과 3년 간 동고동락하며 배운 제자들도 예외는 아닌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자 그들이 누룩을 제조 판매하는 것도 아닌데도 진짜 누룩으로 오해했다. 주님은 어떤 것에 들어가면 그 본래의 성질을 변질시킨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누룩에 은유(隱喩)한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의 꾸중을 듣자 뒤늦게야 실제 누룩이 아닌 유대관원들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이처럼 예수님의 추가적인 설명이 있기 전에는 제자들과의 대화가 서로 겉도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에서 보듯이 제자들의 관심이 떡 즉, 이 땅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이 되어있는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생과 구원 같은 하늘의 거룩한 소망에만 초점이 맞추어져서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재물이 악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단지 마음의 보물로 삼지 말라고 하셨다. 또 현실의 삶을 부정, 외면, 도피, 초월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지금도 예수님의 당부대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주의하려면 이 땅의 삶에다 적용해야 한다. 당시 종교생활이 일상화되다시피 했기에 더더욱 현실적 문제에 해당 된다.

본문의 전후경과를 자세히 살피면 제자들이 떡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들의 물질과 현세 중심적 사고를 꾸중한 것도 아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종교적 사상은 정반대였다. 바리새인은 부활과 마지막 심판을 믿었다. 기도하여 귀신을 쫓는 등,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인정했다. 반면에 사두개인은 모세5경만 따랐고 마지막 심판과 부활과 사탄의 실재(實在)를 부인했다. 이 땅에서 인간 스스로 자유롭고 풍성하게 사는 것을 최고 덕목으로 삼은 현실지상주의자들이었다. 만약 예수님이 제자들의 관심이 떡에만 가있다고 꾸중할 양이면 사두개인의 누룩만 조심하라고 했어야지,  바리새인의 누룩도 함께 조심하라고 하면 논리적으로 불합리한 말씀이 된다.

예수님이 야단친 이유

본문은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쌔”(5절)라고 시작한다. 예수님이 유대 쪽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다가 하늘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악하고 음란하다고 야단쳐서 쫓아 보냈다. 이제 곧 그들과의 갈등이 폭발 직전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들이 알아먹든 말든 당신께서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겠다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고했지만, 당장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는 시기상조라고 여겼다. 그래서 다시 배를 타고 잠시 이방 쪽 갈릴리에 머물려고 넘어가는 중이었다.  

예수님의 주된 사역 무대는 대도시가 아닌 시골 한적한 곳이었다. 지금처럼 식당이 곳곳에 있지도 않았다. 항상 제자들과 동행했기에 일행은 최소 13명이나 되었다. 율법이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명했고 실제로 유대인들이 그러했지만, 13명이 넘는 남자 장정들로선 쉽사리 남들에게 신세를 질 수도 없었다.

마가는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8:14)고  기록했다. 제자들로선 당연히 누군가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거나 아니면 배 안에 양식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스승의 점심을 마련해드리려는 사랑의 마음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는 차에 예수님이 누룩을 이야기하자 자연스레 실제적인 떡으로 그 생각이 미친 것뿐이다. 제자들이 항상 떡만 즉, 돈 벌어 출세할 궁리만 한 것이 결코 아니다. 만약 그럴 양이었다면 그물과 배와 가족을 다 버려두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리는 없지 않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야단 친 이유도 “믿음이 적은 것”(8절) 때문이었지 현실을 염려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떡이 없음을 걱정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다. 서로 의논을 하고도 5병2어와 7병2어의 기적을 잊고 있었던 것을 꾸짖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신자들이 쉽게 간과해버리는 측면이 있다. 당신께서 그 많은 이들에게 없는 떡을 만들어서 배불리 먹게 만드신 그 큰 능력을 제자들더러 단지 기억해보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그 두 기적 이후에 유대 관원들과 당신께서 논쟁을 했던 과정과 그 의미를 잘 회상해보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직접 설명까지 해주셨지 않는가? 또 그러자 비로소 제자들이  누룩이 유대관원들의 교훈이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지 않는가?      

주의해야 할 교훈과 그 이유는?

문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조심하라고 하셨지만 그것이 어떤 내용이며, 왜 조심해야 하는지 전혀 설명해주지 않았고 제자들도 그에 대해 반문하지 않았다. 그 현장의 제자들이나, 이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나, 당시 이 서신을 읽게 될 유대인 독자들은 그 교훈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그들의 교훈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오늘날의 신자도 복음서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컨대, 손 씻고 밥을 먹어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하나님께 ‘고르반’하며 바치겠다고 맹세했으면 반드시 지켜라, 기도와 금식과 구제와 십일조에 힘쓰라, 거룩하시며 유일하신 창조주 참 하나님은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은 누룩과 같아 영적으로 오염될 소지가 있으니 함께 교제하지 말라 등등이다.  

비록 율법을 세밀하게 지키려도 보니까 외적 의식과 조상의 전통에 집착하게 되어서 형식적 가식적 모습이 되었지만 그들의 가르친 내용 자체는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아니 거의 다 선하고 의로워서 지킬 만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그들의 교훈을 “듣지 말라”, 혹은 “따르지 말라”고 하지 않고 “주의하라”고 했다. 잘 분별하여 새겨들으라는 것이다.  

그들 두 종파의 사상이 정반대이므로 예수님이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를 택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이미 말한 대로 바리새인들은 율법, 도덕, 은사, 종말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자들인 반면에 사두개인은 인간의 이성, 자유, 권리를 추구하는 기복적 현실주의자였다. 신앙적으로 양극단이었다. 그래서 극단적 신앙을 따르면 믿음이 적은 것이며, 양쪽의 장점만 잘 따져서 취득하면 믿음이 큰 것인가?

좌든 우든 극단을 배제하고 균형 잡힌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본문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키려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참 생명 되시는 당신의 전부를 주러 오셨다.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의 죄 값과 당신을 맞바꾸어서 구원을 베푸러 오셨다.

본문에서 유대관원들의 교훈을 주의해야할 이유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마태복음 23장에는 예수님이 아주 자세히 설명한 내용이 나온다. “화 있을찐저”라고 그들을 야단치면서 어떤 면이 잘못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외식(外飾)한다는 것이다. 또 그래서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고 하셨다.    

요컨대 그들의 가르침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자들더러 “제발 너희들도 외식적 위선적인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목사들은 강단에서 설교한 그대로 살아라. 삶이 가장 강력한 설교가 된다. 신자들도 뒤로 호박씨 까지 말라. 행동보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앞서는 예수쟁이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심각하게 던져야 할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 또한 스스로에게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같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과연 나는 위선적이 아닌 참 목회자요 참 신자인가?” 그러나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저를 필두로 선뜻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성자로 추앙 받는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도 막상 현지인들은 그들에게 아주 쌀쌀맞고 비정한 측면이 있었다고 증언하지 않는가?

성경의 위인도 예외는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걸고 스승을 지키겠다고 큰 소리쳐놓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오순절 성령을 받기 전이라고 변명할 계제가 아니다. 사도가 된 후에도 이방인들과 식사 교제를 하고 있다가 유대인들이 나타나자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다. 곁에서 지켜보던 바울에게서 외식적이라고 야단까지 맞았다.(갈2:11-14)  

그런데 그런 야단을 친 바울도 위선적이긴 마찬가지였다. 로마서에서 어떻게 실토했는가?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도다.”(롬7:19) 자기 생각과 행동이 불일치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작 우리가 따져봐야 할 주제는 신자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외식적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경건하고 하나님을 믿는 열심에서 앞섰던 자들이었는데도 왜 외식적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야 한다. 왜 그들이 예수님께 야단맞은 유일한 사람들이었는지 그 이유다.

그 해답은 성경 안에서, 특별히 본문 사건이 발생하게 된 직전의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악하고 음란하다고 야단쳤다. 즉 악하고 음란한 했기에  외식하게 된 것이다. 악하고 음란한 것의 본질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왜 메시아인지, 이 땅에 육신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 이적을 베푸신 목적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알려고 마음도 먹지 않았다. 요컨대 그들은 하나님의 참 뜻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악하고 음란했던 것이다.

유대관원들의 결정적 잘못

그들이 악하고 음란하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다. 내 구원의 문제를 내가 해결하겠다는 것 때문이다. 내 양심이나 기존의 도덕과 종교로 충분히 내 죄를 씻고 거룩해질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경건하게 앞세웠어도 자기는 즉, 인간은 자충족(自充足)한 존재로 그분이 사실상 필요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준수하며 경건하게 살면, 사두개인은 자기 양심과 이성에 따라 행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내면의 정확한 실체를 한 번도 직시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간 중에 외식하지 않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진리 내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자기들은 어떤 이들보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아주 월등하다고 자부하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물론 하나님 앞에서마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가장 큰 외식의 실상임도 모르는 채 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이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이 단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큰 죄이자 너무나도 어리석은 착각임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다.

어떤 방식으로 그런 깨우침을 주셨는가? 당신께선 평생토록 단 한 번도 위선적인 삶을 사신 적이 없는 모습을 보이셨던 것이다. 정말로 당신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실천하셨다. 인류 역사상 외식적이지 않은 유일한 분이셨다. 주님은 당시 모든 사람이 배척하여 상종조차 않던 문둥병자를 그 고름이 흐르는 몸에 손을 갖다 대시며 치유해주셨다. 반면에 당시 모든 사람이 존경하며 칭찬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하다고 야단치셨다.

이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순수한 심령을 갖고서 무엇이 진리인지 정확히 아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주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셨고  주님도 아버지가 시키는 일만 하셨다. 성령님의 인도에만 온전히 따랐기에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부조화가 생길 수가 없었다.

주님은 또 한마디 말씀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당시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최고로  경건하고 의로웠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아무 죄도 없이 도리어 사랑만 베푸신 주님을  죽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로마총독 빌라도마저 주님께 외식적인 면을 하나도 찾지 못했고 죽일 죄목은 더더구나 발견할 수 없었다.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면 혹시라도 천벌을 받을까 두려워했는데도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주님을 죽였다.
    
그들이 주님을 죽인 이유도 단순히 자기들 기득권 즉, 재물을 지키려는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 중요하게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뜻이었다. 자신들의 외식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외식과는 전혀 무관한 주님을 외식의 천재인 그들이 죽임으로써 악하고 음란한 것의 본질이 무엇임을 온 천하가 알도록, 또 다가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보고 깨닫도록 주님은 십자가에서 아무 말 없이 죽으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역사상 인간이 도무지 할 수 없는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그 동일한 십자가에서 유대관원은 도무지 인간이 해선 안 되는 최악의 범죄를, 그것도 세상에서 의인이라고 칭송받던 이들이 저질렀다. 이 얼마나 큰, 아니 역사상 최대의 역설(逆說, paradox)인가?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결정적 차이는?

예수를 믿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의 공적으로는 전혀 구원의 가능성이 없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어 구원을 선물로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만 붙들고 있다면 자칫 객관적으로 진술된 기독교 교리를 수긍한 것에 그칠 위험이 있다.  

그보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철두철미 깨달았다는 뜻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따져서 나는 죄인이라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아니 내 자신부터 너무나 위선적인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는 것이다. 아무리 겉으로 경건하게 행해도 내면이 그렇지 못함을 자신만은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다. 예수 전에는 그 점을 전혀 깨닫지 못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말이다.  

제부터도 목사이지만, 또 목사이기에 하나님과 기독교에 누를 끼칠 수는 없기에 사람들 보는 앞에선 의롭게 행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막상 제가 저 자신을 되돌아볼 때는 강단에서 설교한대로 살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 통탄해 한다. 말하자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성경(렘17:9)에 기록된 문자적 객관적 교리가 아니라, 자신의 실상임을 매일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자신을 바라볼 때에 너무나 싫고 부끄러워서 애통해야 한다. 또 그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스스로는 도무지 해결할 길이 없어서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며 나와 그분의 긍휼만 구해야 한다. 자신의 구원을 오직 그분의 조건 없는 용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가룟 유다는 스승을 배반해서 팔아버리는 위선을 범했다. 베드로도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외식을 범했다. 이 둘을 죄의 경중(輕重)을 따져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스승의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 살려는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한 행위를 했다는 면에서 근본적으로 똑같은 위선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결정적으로 정반대의 둘로 갈라졌다. 바꿔 말해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를, 교리적이 아닌 진정한 의미를, 이 두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다는 자신의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깊이 뉘우쳤다. 진심으로 회개했다. 그러나 자기 양심에 따라 스스로 해결하는 길을 택했다. 자살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는 대단한 일이다. 자기가 살려고 스승을 죽였으니 이제 자기 생명으로 되갚겠다는 뜻이 있지 않는가? 아무나 쉽게 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이자 한편으로 아주 의롭기까지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신자를 비롯해서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서 잘했다고 말하지 않고 역사상 최고의 배신의 아이콘이자 저주 받을 자의 대표가 되었다. 인간 이성과 양심의 한계다.

베드로도 자신의 위선에 대해 양심의 크나큰 갈등을 겪었다. 자신의 내면이 너무 부끄러워서 밖으로 나가 숨어서 통곡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아무리 자신의 양심과 의를 동원해 회개해도 스스로는 해결되지 않음을 깨닫고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그분 곁에 끝까지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세 번의 용서를 받았다.

그리고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 세례를 받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죄 값을 이미 다 감당하셨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의 벌거벗음과 추하고 더러움과 연약함과 어리석음 모두를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께 내어드리며 성령의 씻음을 받았다. 그분이 주시는 새 생명으로 충만케 되었다. 이전과는 온전히 사람이 달라졌다. 그 후에도 때때로 위선적이 되긴 하지만 그 때마다 주님 앞에 나와 당신의 긍휼만 구함으로써 깨끗케 되었다. 주님의 사랑과 권능의 품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사랑을 받아 누리는 인생이 되었다.

인생 지고(至高)의 복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인가? 자기들이 정한 잣대인 도덕과 종교로만 다른 모든 이의 우열(愚劣)을 판단한 것이다. 도덕과 종교가 나쁘고 중요치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인생살이에서 너무나 선하고도 중요하다. 인간 사회의 전통으로만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인 한 인격체의 정죄와 심판을 자행한 것이 문제였다. 자기들이 정한 잣대를 벗어나는 사람은 열등한 정도가 아니라 가차 없이 구제불능이자 소생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낙인 하여 유대 사회에서 쫓아내버렸다.  

그들이 몰랐던 가장 중요한 진리가 하나 있다. 자기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그 내면에 한시라도 빨리 반드시 채워야만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겸비하게 인정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그간의 모든 수치, 허물, 실패, 죄악을 용서 받는 것이 인생 최고의 복임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일대일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기에 그분께 자기의 모든 것을 의탁하지 않았다. 삶의 매순간마다 그분이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맛보지도 못했다. 그분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며 사는 길 외에는 자기 삶과 인생의 참 기쁨과 행복과 만족이 없으며 그 의미와 가치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진리를 그들은 몰랐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믿음이 적다고 꾸중하신 이유가 단순히 당신의 큰 능력을 못 믿었거나 믿었어도 잠시 잊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불신자들은 자기 생각과 행동이 다를 때에 위선적이라고 말한다. 예수 믿는 신자의 경우는 자신의 믿음과 동떨어진 말과 행동을 할 때에 외식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더러 외식적이라고 탓한 이유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 그분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행했기 때문이다.

신자의 경우는 자기 믿는 바와 행동에 불일치가 생기면 믿음이 적은 것이고, 반대로 일치하면 그 믿음은 큰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정말로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염려와 걱정까지는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자연발생적이라 해도 그분과 그 십자가를 묵상하면 최소한 마음의 평강은 점차 회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주님의 뜻은 제자들이 5병2어와 7병2어의 때에 그 적은 떡으로 그 많은 이들을 먹였음을 기억한다면 아무리 배 안에 떡 하나 밖에 없지만 열세 명이 먹을 떡 정도 못 만들어 주겠느냐는 것이다. 그럼 겸손히 “비록 떡이 하나밖에 없지만 주님은 우리를 배불리 먹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반대로 서로 의논하고도 평강도 갖지 못하고 오히려 걱정만 잔뜩 하고 있으니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또 진짜로 알았다면 제발 그 아는바 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유대관원의 교훈을 주의해야 할 진짜 이유    

예수님이 5병2어의 기적을 보이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와서 손을 씻지 않은 문제를 따졌다. 주님은 그들더러 하나님이 심지 않아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고 경고했다. 제자들은 그들의 미움을 샀다고 스승의 안위를 염려했다. 본문 사건 전에는 이방인을 상대로 7병2어 이적을 베풀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와서 꼬투리를 잡으려 들었고 주님은 그들더러 악하고 음란하다고 야단쳤다. 그리고선 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그럼 어떤 뜻이 되는가? 당신께선 유대관원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보이겠다고 예고한 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참 생명을 소유케 하고 구원의 길로 이끌고 영원한 진리를 알게 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남을 제자들은 장차 당신과 함께 했다는 이유로 유대 관원의 엄청난 핍박을 받을 것이니 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7병2어 기적 이후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안부를 염려해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그 앎 즉, 믿은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당신께선 지금처럼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할 테니, 너희들도 끝까지 당신을 믿고 인내하라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위급한 경우가 생겨도 하늘의 소망만은 절대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비록 요나 표적대로 십자가에 죽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여 너희들의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려 하늘로 올라가니 이 땅에 너희들만 남아 있다 해도 아무 염려 말라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상에선 의인이라 인정받지만 하나님에겐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분께 진정으로 항복하지 않았고 개인적 인격적 대면을 하려는 꿈도 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그들이 너희에게 어떤 핍박을 가해와도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아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는 뜻이었다.

이제 곧 골고다 언덕 십자가상에 요나의 표적이 나타나면 사탄과 사망의 세력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너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조롱거리가 되어 멸시와 핍박을 받을 것이고 개중에는 십자가 죽음으로 내몰리기도 하겠지만 그 박해와 죽음의 현장에도 주님은 함께 할 것이며 썩지 않을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으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협박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뒤로 호박씨 까지 않는 신자가 되려면?

지금 미국의 어떤 주에선 이런 법까지 만들려 한다. 만 18세 전까지는 동성애에 대한 어떤 부정적 교육과 충고는 물론 치료까지 금지하자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성적 정체성 때문에 가뜩이나 혼란스러워하는데 그런 식의 접근은 그들에게 스트레스만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동성애가 정상적 성행위라고 이미 유치원부터 가르치고 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모순이요 궤변이요 독선이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인간의 자유, 권리, 평등을 최대한 보장하자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인간은 스스로 자충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양심과 지성과 이성이 최대한 발달한 결말이 겨우 이런 정도다. 유다가 자살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부인하면 인간의 근본적 문제가 절대로 해결될 수 없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부패한 양심에 근거한 종교와 도덕을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긍휼보다 앞세워선 허망한 실패를 넘어서 사망이 그 삯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무지의 이유는 인간 중에 단 한명도 외식적이지 않은 자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신자라고 외식적인 면에서 불신자보다 크게 나을 바는 없다. 단지 인간이 하나님의 긍휼 밖에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 하나가 다르다. 자신이 외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괴로워할 수 있는 것이 신자라면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불신자이다. 또 그 외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붙들게 되었으며 또 그 사랑의 품 안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겠다고 헌신하게 된 것뿐이다.

원하는 선은 행치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고 자신의 외식을 실토했던 바울이 어떻게 절규했는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4,25a) 외식적일 때마다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진심으로 겸비하게 엎드리자 그분의 다함없는 사랑으로 깨끗케 해주심을 입었다는 체험적 고백이다.    

예수님은 오늘날의 목회자와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목사는 가르친 바대로 행하라고 하시고, 신자는 뒤로 호박씨 까는 짓을 그만두라고 하신다. 또 그러기 위해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말로 인간의 공적이 조금이라도 개입되는 거짓 복음에 대해선 단호히 배격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은 물론 자신부터도 절대로 자신이 세운 도덕과 종교의 잣대로 판단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긍휼을 참 소망으로 삼아야만 외식적이지 않는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5/5/2013


운영자

2013.05.07 19:10:23
*.190.210.70

금주는 녹음 상태가 좋지 못해 You-tube의 오디오는 올리지 못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샬롬!

사라의 웃음

2013.05.08 22:28:02
*.109.85.156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겉돌던 것 처럼, 현실을 탈피하고 하늘에만 소망을 두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누룩도 그저 바리새인처럼 살지 말라심으로 단순히 이해하고 넘기기 일쑤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려 이 땅에 오셨음에도 마치 종교 교리를 가르치시려는 것으로만 해석되어지기에 종교적으로 경직되어지는 경우가 정말 너무 많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에게 심각하게 던져야할 질문, 얼마나 외식적인가? 매일 매일 하는 말과 행동과 생각들 속에서 외식적이지 않은 면이 얼마나 있나를 곰곰 생각하면 얼굴 붉어지기에...정말 이것밖엔 안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앞에 그러할 때 마다 머리 조아려야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이심을 섬세히 너무도 자상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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