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잘못된 합심(合心) 기도들
마태복음 강해(#182)



http://youtu.be/vfuTQBfl4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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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8-20)


예수님의 공수표(空手票)?

교인 중에 암 환자가 생기면 전교인이 모여 치유를 위해 합심해서 기도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아무 차도도 없이 죽어버리면 참 실망되고 허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사람은 어차피 죽기 마련이니까 하나님이 때가 되어 데리고가셨나보다 체념한다. 또 직장에서 해고되어 끼니도 못 이을 정도로 사정이 딱한 교인을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한다. 그러나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

그러면 본문의 예수님의 약속은 공수표인지, 단지 기도에 열심을 내라고 독려하는 차원에서만 말씀하신 것인지 의심이 든다. 분명히 두세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 않는가?(20절) 두세 사람이 아니라 전 교인이 모였다. 또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어주겠다고 했지(18절) 않는가?

예수님은 거짓을 말하실 분이 아니다. 오직 진리만 말씀하신다. 아니 당신이 바로 진리다. 그런 의심과 실망이 생기는 까닭이 우리가 기도를 간절히 하지 않아서거나,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본문만 따로 떼어서 해석하고 적용하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도 13-17절만 따로 떼어 보면 교회 내의 범죄자를 객관 공평하게 처리하는 방안을 말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출교시키라는 냉혹한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의 일관된 주제와 연결하면 그 해석과 적용이 달라졌다. 교회 내에서는 세상에서 가진 것으로 절대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세 번의 치리절차만으로 끝내라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라도 끝까지 찾아가는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서 전교인이 나서서 설득시키라는 뜻이 되었다.

본문도 마찬가지다. 본문만 따로 보면 예수님이 합심 기도의 중요성과 그 능력에 관해 말씀하신 것 같다. 그러나 문맥에 연결시키면 지난주처럼 신자들이 반드시 교회로 모여야 할 이유와 또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을 강조한 말씀이 된다.  

‘무엇이든지’가 all이 아니다.

본문의 ‘무엇이든지’가 영어로 all, 혹은 everything의 뜻이 아니다. 아주 위급하고 엄청난 일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설마 이런 일까지 기도응답이 될까 기대도 않던 그런 일일지라도, 바로 그래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전혀 예상은 물론 상상치도 못했던 모습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은혜가 부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 일을 너희가 지레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큰일이라도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all의 의미라면 교회 안에 힘든 사람이 한 명도 없어야 한다. 병원에서 포기한 말기 암 환자들이 교회에 나오면 기도로 다 나아야 한다. 또 그러면 이 세상에 예수 믿지 않을 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본문에서의 ‘무엇이든지’는 기도하는 내용이나 일의 종류를 의미하기보다는, 한 가지 일이라도 그 진행되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으로 봐야 한다. 범죄한 형제를 찾아가 일대일로 대면할 때나, 두세 사람이 가서 증참할 때나, 전 교인이 나서서 설득할 때나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진실로 이르노니”라고 기도에 관한 말씀을 시작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을 더 강조하려는 뜻이다. 지금껏 이야기 한 내용이 정말로 중요한 진리이니까 잘 따르라고 새삼 당부하는 것이다.

새로운 주제로 바꾸려면 ‘그러나’ 혹은 ‘그것보다는’ 같은 접속사를 사용해야 한다.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부터 갑자기 ‘진실로’라고 강조하는 법은 거의 없다. 예수님이 주제를 바꾸려면 먼저 18절에서 합심기도를 설명한 후에, 19절에서 “진실로 이르노니”라고,  또 20절에서 “진실로 다시 이르노니”라고 재차 강조하는 형태가 되어야 자연적인 흐름이다.  

예수님이 사용한 땅에서 매고 땅에서 푼다는 표현은 유대인들의 관습적 어법(語法)이었다. 당시의 유대교 랍비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먼저 강경파인 샴마이파는 율법의 계명을 아주 엄격하게 적용해서 하나라도 어기면 출교 시켜버렸는데 매는 것에 해당된다. 반면에 온건파인,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이 속했던, 힐렐파는 융통성을 발휘해서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계명을 어겨도 회개하면 유대사회의 일원으로 계속 남아 있도록 허용했는데, 그 일이 바로 푸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교회에서 출교시켜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와 연결하여 보충 설명하려는 뜻이었다.

본문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그 때에”(21절)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죄를 범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지 물었다. 그로선 예수님 말씀의 초점이 합심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교회 내에서 서로 용서하라는 데에 있다고 이해했다는 뜻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합심기도를 강조한 것으로 베드로가 받아들였다면 그의 반응은 달라져야 한다. 예컨대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일도 합심해서 기도하면 가능하느냐고 물었어야 한다. 그가 가족과 재산과 생업을 완전히 뒤로 한 채 삼 년 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는 오직 로마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새 세상을 꿈꿨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절실하게 소망하거나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부터 기도하기 마련이지 않는가? 아니면 최소한도 이 대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문제 즉, 천국에서 크지는 일도 합심으로 기도하면 되는지 궁금해 했어야 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합심기도의 중요성

물론 실제 신앙생활에선 예수님 말씀의 ‘무엇이든지’를 all의 의미로 해석 적용해도 된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합심기도의 중요성과 그 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예컨대 두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갈망하고 또 그분의 뜻을 알기를 소원한다면 함께 하지 않고 서로 떨어져서 기도해도 어떤 문제에 대해 동일한 응답을 받는다.

합심기도는 공통관심사 혹은 다른 사람의 일을 갖고 기도하게 된다. 아무래도 자신의 개인적 정욕, 이해타산, 죄성이 개입될 소지가 없거나 적어진다. 또 함께 기도함으로써 성경적 지식이 많고 영적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의 지도를 받으며 선한 영향을 얻을 수 있다.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이 갖지 못하는 신자들만의 특권이다. 세상의 어떤 고난, 상처, 죄악, 흑암의 세력에도 당당히 싸워 이길 수 있는 최고로 강력한 무기다.

그래서 본문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감당해야할 가장 근본적인 역할이라는 뜻이다. 두세 사람이 기도하려고 함께 모인다는 것이 교회로 모인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런 모임에 장소, 조직, 체계와 상관없이 주님은 함께 하시므로 바로 그 모임이 교회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하나님께 드린 봉헌사(奉獻辭)에서 가장 강조한 내용이 무엇인가? 당신의 이름을 두신 이곳에서 무슨 일이든 기도하면 응답해달라는 간구였다. 심지어 적국에 포로로 잡혀 갔어도 “전(殿)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왕상8:48) 하늘에서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달라고 간구했다. 봉헌사 전부가 성전에서 기도하면 응답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거룩한 성전을 장사치와 환전상이 더럽혔을 때에 예수님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막11:17) 야단치며 쫓아내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는 성도의 기도로 시작된다는 뜻이다. 신자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임하지 않는다.

합심 기도에 대한 오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은혜롭고 능력 있는 합심 기도를 함에 작금 몇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합심(合心)은 문자 그대로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기도하는 내용이 단순히 선하다고 해서 무조건 합심 기도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컨대 교회 건물을 신축하거나 새로운 사역을 시행할 때에, 엄밀히 말하면 사역(ministry)이 아니라 사업(business)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있겠지만, 교인들 중에는 심중에 반대하는 자들도 많다. 그럼 담임목사의 명으로 함께 모여 합심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합심기도는 아닌 것이다.  

합심은 진정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정말 누구나 공감하는 기도 제목이어야 한다. 도무지 기도하지 않고는 이뤄지지 않을 일임을 절감해서, 또는 어떤 이를 기도해주지 않고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고 위급한 마음이 절로 들어서 목사가 기도하자고 말하기 전에 성도들이 먼저 한 사람씩 기도하려고 교회로 모이는 그런 기도다.

만약에 그런 기도 제목이 아니거나, 모두가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 일을 두고 합심기도를 하기 전에 기도하는 자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부터 해야 한다.  

합심이 되는 데에 온전한 자신이 없으니까 말로는 합심기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합력(合力) 기도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마음이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힘만 합하는 기도다. 새벽기도나 특별기도회에 출석인원이 많아지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소리가 커질수록 그 응답이 보장되고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모일 수 있는 최소의 단위를 말한 것이다. 아무리 적은 모임에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주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다. 동원 가능한 최대의 집단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교회나 목사로선 가능한 많은 신자가 모여서 기도하도록 해야 한다. 아주 선한 일이고 그럴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가능성은 분명 더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히 모여서 기도하는 것보다 교회의 성도들이 진정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더 원하신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합력해서 기도하면 응답이 더 잘된다고 여기는 것은 기도를 응답이라는 결과만 얻으려는 수단으로 전락된다. A라는 input을 넣으면 반드시 (a)라는 output이 나와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함께 모여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된다거나 더 잘 된다고 여기면 실상은 자기들 마음먹은 대로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짓이 된다. 자기들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이 응답한다면 자기가 그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그분은 신자의 종이 된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가 땀방울로 쏟아지도록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그 기도를 거부한 꼴이 되었다. 과연 우리가 새벽기도나 특별기도회에 예수님 같은 열정과 갈급함으로 기도하는가? 그러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합심(합력?)해서 기도하면 응답이 된다고 여기는, 심지어 그렇게 가르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매사에 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기도하는 자세로 사는 것과 기도는 만사형통의 수단이 된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신앙이다.  

누구와 합심해야 하는가?

겟세마네 예수님의 기도에서 보듯이 기도란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지도록 자신의 뜻과 계획을 수정해 나가는 작업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님이 강조하는 합심이란 기도자들 사이에서보다는, 기독자 개인이 하나님의 마음에 자기 마음을 맞추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도 바로 문맥에서 말하는 주제와 연결해서 살폈기 때문이다. 따로 떼어서만 보면 거의 알지 못한다. 이미 말한 대로 예수님은 “진실로 이르노니”라고 앞의 설명과 연결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 20절에서 함께 모이는 신자의 숫자를 두세 명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더니 큰 이적이 생겼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에 더 쉽게 항복할 것 아닌가?

실제로 신자들마저 오순절에 베드로의 한 번 설교로 남자 어른만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사건이 역사상 최고의 부흥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난 것으로 여기지 않는가?  반면에 같은 사도행전의 기록인데도, 바울의 수건만 덮어도 병이 나은 자가 받았을 은혜에는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바울의 신령한 능력에만 신경 쓰지 그 사람이 살아계신 예수님의 권능에 얼마나 크게 놀라며 감격했지 않겠는가? 오순절에 회심한 사람들과 그 사람이 받은 은혜를 개적으로 비교하면 절대 못하지 않다. 아니 훨씬 더 컸을 수 있다.

신자들은 그저 이왕이면 많은 이들이 모여 기도하면 좋다고 여긴다.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하니 가능한 영성이 높아 보이는 사람과 함께 기도하려 든다. 집사나 장로는 물론 부교역자들마저 안중에 없고 어떡하든 담임 목사에게 기도 받으려 하지 않는가?

우연찮게 성경에도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권면이 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長老)들을 청할 것이요.”(약5:14) 그러나 그들의 영성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이어지는 말씀에는 그 큰 기적들을 일으킨 엘리야마저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약5:17)이라고 했다. 특정한 자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이 맡은 직분이나 위치 때문에 기도 응답을 더 잘해주신다는 법은 없다. 누가 되었던 예수를 믿는 신자들끼리라면 진심으로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두세 사람이 모이라고 말한 것은 의도적으로 16절에서 죄지은 자를 찾아가 증참하는 사람의 숫자와 일치시킨 것이다. 찾아가는 사람과 범죄한 자의 마음이 일치할 리는 없다. 찾아가는 사람끼리 먼저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지은 자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그를 회개시켜야 한다는 근본 목적은 동일하나 통상적으로 서로 아주 다른 마음을 지녔다. 장로나 목사님은 가능한 용서하여서 교회에 남게 하고 싶다. 반면에 피해자는 그런 사람을 교회에 계속 나오게 한다면 목사나 교회에 실망하고 더 이상 교회에 나오고 싶지 않게 된다. 충분히 납득될 만한 보상과 사죄를 하지 않는 한 용서할 마음도 없다. 그러니까  피해자를 포함해 증참할 두세 사람까지 온전히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그것도 주님의 마음과 같이 되어야 그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무엇을 합심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피해자가 먼저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찾아가라고 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이라도 끝까지 찾아나서는 예수님의 마음과 합하여서 그 죄인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못 견디는 고통이 재물과 권력의 부족이 아니라 자존심과 인격이 훼손되고 멸시받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그런 고통을 지닌 자가 오히려 그런 잘못을 범한 자를 용서해주려 가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 사람의 자존심과 인격을 살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가? 사실은 지금 죄지은 형제를 찾아가는 모두가, 피해자도 포함해서 이전에는 똑 같은, 아니 더 큰 잘못을 범했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세상에서 대우 받으려고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가능한 많이 쌓을 목적만으로 인생을 살았다. 물론 돈에 환장했거나, 돈만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있어야만 멸시를 당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역으로 따지면 자기가 그런 것을 더 많이 쌓게 되면 다른 이가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모멸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모두 예수 전에는 돈과 권력과 명예가 높아지면 속으로 쾌감과 만족을 느꼈지 않는가?

그러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진리를 깨닫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 누리자 이전에 그랬던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이자 자기 인생의 처참한 실패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피해자, 목사, 장로들도 동일하게 예수님 보시기에 잃어버린 양들이었다. 지금 찾아가는 가해자보다 더 죄에 찌들었을 수 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은혜를 더 받으려고 죄에 더 거(居)할 수는 없다(롬6:1). 그러나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죄를 더 지은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더 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를 더 편애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회개치 않을 만큼 더 완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죄 지은 형제에게 찾아가서 증참할 말이 무엇인가? “당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시오. 진정으로 회개하면 이번만 용서하고 출교 시키지 않겠소. 피해자도 지금 그럴 용의를 갖고 찾아 왔으며, 또 아무도 모르게 왔으니 회개하면 교회에도 절대로 비밀로 지키겠소.”라고 할 참인가? 결코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의 심정과 상황을 이해합니다. 나는 더했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은연중에 온갖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없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소망이 없으며 저부터 그러합니다. 우리는 물론 형제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형제의 지난 잘못을 용서합니다. 아니 이미 완전히 잊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완전히 제 등 뒤로 던져버렸습니다. 저와 우리를 싫어하거나 미워해도 좋습니다. 저희들이 진실로 염려하는 것은 우리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져 실족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사랑으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에게는 그만한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형제에게 풍성히 베풀어져서 형제가 바로 일어서길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진심으로 바라기는 교회와 교인들에게보다 예수님께 먼저 돌아오십시오.”

진정을 담은 이런 권면과 함께 찾아간 자들이 진짜로 합심하여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면 어찌 돌아서지 않겠는가? 얼마나 힘을 합해 뜨겁게 기도하는지, 정말로 공정하고도 은밀한 절차를 거쳤는지 여부는 회개와는 사실상 무관하다. 성도들의 진심이 형제를 변화시킨다. 진심이란 바로 진리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드러난 구원의 진리가 잃어버린 양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찾아간 자들과 가해자들 모두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과 같아질 때에 합심 기도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 바로 그럴 때에 교회에서 쫓아내어야 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자도 변화된다. 자기 의와 자존심이 아무리 세어도, 복음의 진리에 무지해서 완악한 심성을 가졌어도, 평생 남의 말은 듣지 않는 황소 같은 고집이 있어도, 바뀐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만큼 완악하고 흉악한 자는 이 세상에 없다. 두세 사람이 합심해 기도하는 곳에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렇게 두세 사람만이라도 예수님의 마음과 합해 기도하면 전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기 전에 혹은 교회가 치리절차를 시행가지 전에 이미 바뀐다는 것이다.

신자가 서야할 위치

야고보서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 장로를 청해 기도하라는 것이 그들이 영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고 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성정이 같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할 때에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 다시 자세히 보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5:16) 또 그것이 의인의 간구이며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지 않는가? 합심기도를 하기 전에 서로 죄를 고하라고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벌거벗고 엎드리는 자세로 서야 한다. 처음 예수 믿었던 바로 그 은혜가 지금 그 자리에 임하길 소원해야 한다.

본문은 어떤 위급한 일만 생겨도 합력해 기도만 하면 응답된다는 약속이 아니다. 특별히 담임 목사가 시행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으면 무조건 특별기도회로 모이라고 독려하는 근거 구절이 될 수는 더더욱 없다. 참 용서는 절대적으로 참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 화해도 온전한 진심이 전해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죄 중에 있던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해가 바로 그랬지 않는가?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까지 먼저 오셔서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나의 모든 죄 값, 고통, 수치, 업신여김까지 십자가에 다 감당하시고 죽으셨지 않는가? 부활하신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그랬듯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그 사랑을 부어주시어 하나님 앞에 완전히 겸비하게 엎드리게 만드셨지 않는가?

교회는 바로 그런 일을 주님 대신에 하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주님의 그 긍휼한 마음을 갖고 먼저 찾아가야 한다. 특별히 교회 안에 죄 지은 자가 있으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억울한 상처를 입었어도, 그래서 원수같이 미운 마음이 들었어도 찾아가 주님의 심정으로 진정으로 용서해야 한다. 무엇보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대로 먼저 자기 죄를 고해야 한다. 그 동안 형제를 내가 너무 미워했던 죄를 회개하니 저부터 용서해달라고 말이다. 형제의 형편과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제가 잘못했다고 말이다.

세상 모든 것에 실패하고 완전한 절망에 빠진 자가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밤중에 길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십자가 네온싸인이 달린 교회 앞을 지나게 된다. 또 문이 열려 있기에 혼자 들어가 기도하다가 삶의 소망을 다시 찾고 자살을 그만 두었다는 간증이 종종 있지 않는가? 두세 사람이 모이지 않았어도, 심지어 불신자인데도 예수님은 절망한 자의 곁에 함께 하신다. 솔로몬의 봉헌처럼 성전에 가지 않고 먼 타국에서의 기도도 주님은 응답하신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합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역사한다. 먼저 서로 죄부터 고하고 기도해야 한다. 가능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힘을 합한다고 합심기도가 아니며 또 역사가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단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오셨다. 마지막으로 꼭 만나야 할 자를 만나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사방이 완전히 다 막혀 쓰려져 있는 자들, 모두가 업신여기고 부모마저 포기한 자들을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게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직 신자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말도 같은 뜻이다. 신자 모두가 하나님에겐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만날 자라는 것이다. 어떤 기막힌 웅덩이에 빠진 자라도 마지막 구원의 산성이자 피난처는 하나님이시기에 신자 스스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분처럼 마지막으로 만날 자라고 여겨야 한다. 신자가 그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지 않고 외면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으며 어쩌면 당장 자살할 수 있다고 여겨야 한다. 역으로 신자를 만나는 누구에게라도 바로 그 신자가 마지막으로 찾아갈 수 있는 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형제와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일들을 실토하며 의논하고 기도 받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8/25/2013

사라의 웃음

2013.08.26 23:15:19
*.109.85.156

합력기도를 합심기도로 생각해 왔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끝까지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짐짓 잊고 오직 숫자에 매달리는 습성 때문에 그리 생각해 왔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맘, 예수님의 맘을 헤아려 알기 보다는 종교적 열성이, 으쌰 으쌰함이 더 종교성이 있어 보이는 그런 본성들...정말이지 이런 추악한 죄인을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자꾸만 잊는 저의 어리석음을 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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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버킷리스트 1위 항목은? 2014년 부활주일 설교 http://youtu.be/Xi0oww1tUhk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

교인을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목사 (마태복음강해 #215 - 마23:15)

>교인을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목사 마태복음강해 (215) http://youtu.be/L6u3NQ9Kdhc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

목사는 바리새인을 향한 일곱 저주를 설교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14 - 마23:13,14) [1]

목사는 바리새인을 향한 일곱 저주를 설교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14) http://youtu.be/xaxfcxI3j1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

목사도 잘 모르는 순종의 진짜 의미 (마태복음강해 #213 - 마23:8-12) [4]

목사도 잘 모르는 순종의 진짜 의미 마태복음강해 (213) https://www.youtube.com/channel/UCNt3JlSqShQGS5sxosIjeiw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

종교적 일과 하나님 일을 쉽게 구분하는 방법 (마태복음강해 #212 - 마23:1-7)

종교적 일과 하나님 일을 쉽게 구분하는 방법 마태복음강해 (212) http://youtu.be/0-6uYvdNAY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

바리새인들처럼 예수 믿는 신자들 (마태복음강해 #211 - 마22:41-46) [4]

바리새인들처럼 예수 믿는 신자들 마태복음강해 (211) http://youtu.be/4wLv1_udDO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

힘든 자를 돕지 않으면 벌을 주는 미국 (마태복음강해 #210 - 눅10:25-37) [1]

힘든 자를 돕지 않으면 벌을 주는 미국 마태복음강해 (210) http://youtu.be/W0YWCXFbxg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있었다면? (마태복음강해 #209 - 마22:34-40) [1]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있었다면? 마태복음강해 (209) http://youtu.be/bWDIYgI2Mz4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

신자는 화장(火葬)을 하면 안 되는가? (마태복음강해 #208 - 마22:23-33)

신자는 화장(火葬)을 하면 안 되는가? 마태복음강해 (208) http://youtu.be/rHk38vp_SZQ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 마22:15-22) [1]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http://youtu.be/G6UHJnNk0y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

네 나이가 몇 살이야? (마태복음강해 #206 - 마22:15-22) [1]

네 나이가 몇 살이야? 마태복음강해 (206)                      http://youtu.be/5N6l91G_P3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

당신이 정말로 신자임이 확실한가? (마태복음강해 205 - 마22:15-22) [1]

당신이 정말로 신자임이 확실한가? 마태복음강해 (205) http://youtu.be/mLEnl_Tjkeo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

청함에 응했는가? 택함을 입었는가? (마태복음강해 #204 - 마22:1-14)

청함에 응했는가? 택함을 입었는가? 마태복음 강해(204) http://youtu.be/1rrTPesSP7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참으로 두려운 기준 (마태복음강해 #203 - 마21:42-46) [1]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참으로 두려운 기준 마태복음 강해(203) http://youtu.be/G1P1eOMKDS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마태복음강해 #202 - 마21:33-41) [1]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 마태복음강해 (202) http://youtu.be/ialeYLn6HV4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

올해는 창기와 세리처럼 살아라. (마태복음강해#201 - 마21:28-32) [1]

올해는 창기와 세리처럼 살아라. 마태복음강해 (201) http://youtu.be/SZQPKr9_-k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

직무유기에 빠진 교인들 (마태복음강해 #200 - 마21:23-27) [1]

직무유기에 빠진 교인들 마태복음 강해 (200) http://youtu.be/5lkkuMPM9QU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마태복음강해 #199 - 마21:18-22) [3]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마태복음 강해 (199) http://youtu.be/8IkUF6fSgw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하나님의 심판에 기도로 동참할 수 있다. (마태복음강해 #198 - 마21:18-22) [2]

하나님의 심판에 기도로 동참할 수 있다. 마태복음 강해 (198) http://youtu.be/ScHdExNJdSk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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