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보다 중심으로 용서하라.
마태복음강해 (#183)
http://youtu.be/b4yIkHbUo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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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21-35)
도무지 불가능한 용서
지난주에 65년을 해로(偕老)한 미국의 한 부부가 같은 날에 11 시간의 시차(時差)를 두고 함께 죽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금술이 너무 좋아서 그럴 리 없었겠지만 만약에 죽기 몇 달 전에 어떤 이유에서건 이혼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결코 화제 거리가 안 될 것이며 그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선 잘못한 자를 세 번만 용서해주어도 의롭다고 여긴다. 베드로는 신자는 일곱 번은 용서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했다. 세상 기준의 두 배가 넘고 7은 완전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바로 전에 예수님이 교회 내에 범죄한 자를 세 번에 걸친 치리 절차가 실패하면 출교시키라고 가르친 줄 잘못 이해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려면 7번은 용서해야지 않는가라는 뜻이었다. 그는 용서의 정답을 아는 양 자신만만하게 질문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항상 그러하듯이 베드로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인간의 생각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주라고 한다.
그렇다고 490번까지 용서하다가 491번째 잘못을 범하면 냉혹하게 정죄하고 복수하라는 뜻은 아니다. 완전 수 7 둘에, 꽉 찬 숫자인 10을 더한 것이 아니라 곱했다(7X10X7=490).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에게나,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어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이다. 예를 든 노부부가 끝까지 사랑했기에 모두가 부러워하는 참 사랑이 되었듯이, 용서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순전히 수치적으로만 따지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란 한 가지 종류의 잘못을 70번 반복하고 또 그런 식으로 일곱 가지 다른 죄를 지어도 끝까지 참으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남편이 외박하면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각서를 쓴다. 그러고도 다시 외박을 하면 먼저 쓴 각서를 찢고 다시 작성하는데 그러기를 70장이 되도록 반복하는 것이다. 또 도박, 폭행 등 일곱 가지 종류의 각서를 쓰고 찢기를 각기 70장씩 되풀이 하라는 것이다. 본문과 평행기록인 누가복음 17:4에선 예수님이 하루에 일곱 번을 잘못해도 용서해주라고 하셨다. 하루 24시간 안에 외박, 도박, 간음, 폭행, 도적 등등 일곱 가지 죄를 범해도 용서해주라는 뜻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도무지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예수님이 아예 불가능한 일이긴 해도 최상의 목표를 제시해서 신자더러 최선을 다해 달성하도록 노력하라는 취지인가? 서두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답변이라고 했다. 불신자보다 신자는 훨씬 더 거룩하고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저라도 할 수 있다. 그런 가르침은 비유컨대 “공부를 열심히 하라” 대신에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밖에 안 된다.
진심(?)으로 용서하라.
베드로는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일곱 번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는지, 용서의 횟수와 방식에 관해 질문했다(21절). 예수님은 그에 대해 35절 결론에서 어떻게 답했는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용서하라.” 단 한 번을 용서하더라도 진심으로 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용서를 했어도 마음에 앙금, 분노, 미움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참 용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간혹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번만은 진심으로 용서하는데 다음번에 또 그러면 그 때는 절대 용서 못해.”라고 말이다. 그럼 처음 용서했던 그 진심도 실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회수가 아니라 진심이다. 잘못한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뜻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용서에 있어서 회수는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불신자들도 용서는 회수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원리를 알고 실천하고 있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심지어 예수님 말씀처럼 사죄나 회개도 하기 전에 먼저 찾아가서 화해를 청하는 자들도 있다. 용서에 가식, 이해타산, 의무감, 등이 개입되면 참 용서가 아님을 그들도 잘 알고 있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속담처럼 이전보다 더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예수님의 용서는 그런 진심의 용서와도 차원이 다르다. 베드로가 용서의 회수를 묻자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고 간단하게 한 절(22절)로 대답하고선 23-34절까지 아주 긴 비유를 하나 들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천국 이야기를 꺼내었다. “천국은 그 종들과 회개하는 임금”(23절)과 같다고 말이다.
갑자기 천국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토의를 시작하게 된 계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지 질문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하나님 앞에 낮추는 자가 크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렇게 낮추지 않으면 천국에 입성하지 못한다고 천국 입성할 수 있는 자의 상태에 대해 가르쳤다. 결국 천국은 어린아이처럼 커진 사람만 들어가는 곳이기에 그곳은 크고 작음이 없다는 것이다. 또 진정으로 낮아진 사람은 이미 천국은 물론 이 땅에서도 사람들 사이의 크고 작음에 대해 전혀 문제 삼지 않게 된다는 뜻이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용서에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 즉, 구원을 받은 신자로서 용서하라는 것이다. 불신자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신분과 입장과 자세로서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얼마나 많이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의 방법에 관해서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그 비유를 통해서 용서의 본질에 대해서 가르치겠다는 뜻이었다.
일만 달란트의 빚?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 특별히 예수님에 해당한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예수 믿기 전의 죄인이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의 약 6천 배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일만 달란트는 액면가로는 약 천만 불이지만 물가상승 등을 감안하면 일억 불(한국 원화로는 천억)이 넘는다고 한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 제국이 유대 전체에서 일 년에 거둬들인 세금이 팔백 달란트였다고 한다. 일만 달란트면 이스라엘 전체 일 년 예산의 12배가 넘는다. 지금 한국으로 치면 수천 조의 돈이다. 말하자면 한 개인이 평생을 두고 모든 수단과 노력을 다 경주해도 도저히 상환이 불가능한 부채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그런 죄인이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다 못해 멸시하고 미워하기까지 했다. 공중권세 잡은 사탄에게 미혹되어서 세상 쾌락과 죄를 즐기며 탐닉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 그분을 알지도 못했고 찾지도 않았다. 찾을 마음이 전혀 없었고 찾을 수도 없었다. 매일 헤아릴 수 없는 죄를 지었고, 정말 문자 그대로 일만 달란트가 넘는 죄를 반복해서 지으면서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다.
스스로 그 모든 죄를 씻을 방도는 아예 없었다. 아니 씻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는 것이 아주 잘하는 의로운 짓인 양 여겼다. 무엇이 죄인 줄도 몰랐고 어둠을 더 사랑했기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럼에도 그분은 우리 죄 값을 십자가에 대신 다 감당하시고 죽으시고 또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참 용서가 어떤 것인지 온 천하 만민에게 보이셨다.
예수님은 저 같이 완악했던 죄인에게도 태초부터 도무지 알 수 없는 무한한 사랑으로 택하신 후에 성령으로 먼저 찾아 와주셨다. 제 속에 있던 사탄의 견고한 진을 성령의 불로 깨트리시고 참 빛을 제 영혼에 비추어주셨는데, 그 순간 주홍같이 붉었던 죄가 양털처럼 희어지는 중생의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은 죄와 사탄과 사망의 철장 권세에 묶여 있던 인간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과 일만 달란트가 넘은 우리 각자 죄악의 짐과 맞교환 시켰다. 죽을 수밖에 없던 천하의 죄인을 인간의 공로 하나 없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천국에 입성하기에 합당한 용서 받은 의인으로 바꾸어주신 것이다.
백 데나리온의 부채?
그런 큰 은혜를 받았던 신자가 자기에게 겨우 일 백 데나리온 빚진 자조차 용서하지 못한다고 비유는 말하고 있다. 데나리온은 이미 말한 대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기에 백 데나리온은 약 석 달치 월급에 불과하다. 그런 자를 목을 잡고(28절) 옥에 가두었다(30절). 고대에는 실제로 빚을 갚지 않는 자를 목을 끌고서 감옥에 처넣었다. 말하자면 가족들더러 집문서를 전당잡히던 자식을 노예로 팔던 어서 빨리 돈을 마련해서 아버지를 감옥에서 빼내가라는 최후통첩이었다.
석 달 치 월급이라니까 현재 미국 돈으로 치면 적게는 수천 불에서 많게는 1,2 만 불정도 된다고 해서 상당히 큰돈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탕감 받은 돈의 육십만 분의 일에 해당된다. 실감나게 말해서 육십만 불 탕감 받은 자가 단 일 불 빚을 안 갚는다고 조폭을 동원해서 생명을 위협하며 빚 독촉을 하는 꼴이다.
더 나쁜 것은 석 달만 기다려 주면 되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29절)고 간청했음에도 아예 감옥에 가두었다. 신자가 교회 안에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모습이, 또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고 멸시하며 실족케 하려는 세상의 불신자들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아예 상대도 않는 모습이, 바로 이 비유의 악한 종과 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를 하나님이 어떻게 한다고 했는가? 처음에 그 많던 빚을 탕감해 주었던 조치를 취소하고 오히려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둔다고 했다. 비유에서 처음에 빚을 탕감한 것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초림을 상징한다. 그 탕감을 취소하고 옥에 가둔 것은 마지막에 죄인을 심판하러 오시는 재림을 뜻한다.
그럼 자기에게 잘못한 자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 못하는 신자의 구원은 취소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성경 해석의 절대적인 첫째 원칙은 문맥 전체의 주제와 연결하라는 것이다. 그 주제를 보충설명하기 위해 예화로 인용된 비유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 이 비유의 주제는 용서, 그것도 불신자와 다른 신자의 용서에 관한 것이다. 구원 여부를 가름하는 내용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35절의 예수님의 결론을 다시 보라. 중심으로 용서하라고 했다. 진심으로 용서하라고 하지 않았다. 언뜻 같거나 비슷한 말 같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진심(眞心)은 거짓, 가식,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마음이다. 나쁜 의도가 없이 선한 동기가 있으면 된다. 그러나 진심으로 용서해야 함은 이미 말한 대로 누구나 알고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아예 참 용서가 아니다.
중심이란 인간의 마음, 영혼 전체를 뜻한다. 말하자면 한 인격체, 그 사람 자체다. 베드로의 질문은 어떤 방식으로 몇 번까지 용서해야만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데에 초점이 있었다.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중심에 따라 용서하라고 했다. 자기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그 중심이 바뀐 자답게,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하여 그분의 자녀가 된 자로서 용서하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불신자들이나 성령의 간섭으로 십자가 진리를 완전히 깨닫기 전인 지금의 베드로로선 어떻게 하면 거짓 없이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다. 자기 힘으로 용서를 제대로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뜻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이미 모든 자를 끝까지 용서해 줄 수 있는 진심을 소유한 자 즉, 그 중심이 완전히 바뀐 자로서 용서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용서를 많이 하려고 애쓰기보다 누구나 용서할 수 있는 중심을 가진 자가 먼저 되라는 것이다. 또 그런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 믿음의 실체라는 것이다. 관건은 우리에게 지금 과연 이런 바뀐 중심이 있는지 여부다,
인간의 한계
인간은 자기 생각으로 알고 있는 것, 옳다고 믿는 바 이상의 행동을 할 수 없다. 자기 속에 형성된 가치관과 인생관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 말씀대로 각각 자기 중심에 따라 용서하게 마련이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너희가 진정으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음을 확신하는가?”, 아니 “실제 그런 체험을 통한 믿음을 갖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또 그래서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잘못하는 일들이 그에 비하면 일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너무나 사소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 잘못이 아무리 크고 중해도, 특별히 인격과 자존심이 완전히 짓밟혀 밤새 끙끙 앓으며 이를 갈고 있는 그런 잘못에 대해서도 말이다.
지금 용서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할 바인데도 용서하지 않으니 너희 양심에 부끄럽지 않느냐고 야단치는 차원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 십자가의 긍휼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십자가 사랑이 없이는 아무 소망도 없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었음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그렇다는 점을 분명히 아느냐는 것이다.
언제 호출되어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사형수들만이 모인 감방에 있으면서 동료 사형수에게 내가 잘났니, 네가 못났니 서로 비방할 수는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또 자기에겐 어떤 자격과 공로도 없는데도 일방적으로 사면된 사형수라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는 사형수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 아니냐는 것이다. 나아가 함께 사면된 동료 죄수가 자기에게 사소한 잘못을 범했다고 당장 조폭을 동원해서 죽이겠다고 협박할 리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잘못한 자를 세 번까지는 용서해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누구나 처음에는 몰라서, 두 번째는 실수로, 세 번째는 오래된 습관을 제대로 통제 못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도 모든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한 것이다. 또 그래서 진심으로 가식, 타산, 앙금 없이 용서하며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실제로 세 번이나 용서했는데도 계속 같은 잘못을 범하면 나중에는 오기가 발동하게 된다. 그래 언제까지 잘못을 계속 하나 두고 보자는 마음이 생긴다. 나중에는 네 멋대로 해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하는가, 자신이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만 점검하게 된다. 진정한 용서는 벌써 포기하고 자신을 성찰하여 성숙시키는 계기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자연인이 자기 양심으로 이를 수 있는 범위는 거기까지다. 그것이 나쁘다거나 의롭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15절에서 용서하고 화해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형제를 얻는 것”이라고 했다. 내 인격을 성숙시키는 일은 분명히 선하고 의롭다. 또 용서하는 과정 중에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으로 용서는 될지언정 중심으로 하는 용서는 아니다. 신자가 가져야 할 진심과는 다르다. 신자의 용서는 반드시 형제를 살려서 얻는 용서여야 한다. 자기만 성숙하면 아무리 그 모습이 거룩하고 선해도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이다. 엄밀히 말해 자기를 높이는 교만의 죄까지 될 수 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라도 끝까지 찾기 위해 함께 모여 기도하여서 땅에서 매고 푸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의 존재 이유도 부인된다.
솔직히 말해 계속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아니 단 한 번이라도 아주 심한 모욕감을 느끼기만 해도 불신자의 경우는 내가 상처 받는 것은 내만 손해이니 아예 상대하지 말고 잊어버리겠다고 결단하지 않는가?
신자의 경우는 예수님 말씀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한 번의 진심어린 용서마저 하기 너무 힘드니까 신앙양심에 자꾸 걸린다. 그래서 “죄 지은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저의 죄부터 용서해달라.”는 기도만 한다. “제가 억울하게 상처 받고 고통당하는 것 하나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또 제가 용서 못하고 자꾸 영적으로 피폐해지면 하나님과 관계도 비뚤어질 텐데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핑계도 함께 대면서 말이다.
신자에게 그런 마음이 들고 또 그런 기도를 한다고 나쁘고 치사하다는 뜻은 아니다. 용서가 안 되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또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정말로 진심으로 기도를 하다보면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성령님이 심어주시기도 한다. 그보다 신자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단 한 번이라도 진정한 용서를 제대로 못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한계이자, 신자가 된 후에도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자기부터 불쌍히 여겨라.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사실상 불가능한 숫자의 용서를 말씀하신 까닭은 그만큼 모든 인간이 항상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용서하고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 사회가 온전히 유지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용서가 안 되는 인간의 연약한 한계에 갇힐 때마다 십자가에서 행하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한다. 단순히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기위해서 신자답게 더 많이 더 진심으로 용서하도록 용서해야지라고 생각하면 그것 역시 인간의 한계에 갇힌 모습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것이 단순히 무죄라고 선고한 것만이 아니다. 성령으로 우리의 영을 변화시켜 십자가 사랑 안에 온전히 들어오게 만들었다. 성육신 하신 말씀이자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진리가 우리의 영혼육 심령 전부를 찔러 쪼개어서 만물을 상관하시는 자 앞에 벌거벗겨 드러나게 하셨다. 자신부터 철두철미 죄인임을 온전히 깨닫게 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죄책감과 영적 부담감만 생기게 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중심, 모든 생각의 방향을 오직 그리스도께로만 향하게 만들어 주셨다.
그 결과 나부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워야할 부부 사이에도 온전한 참 사랑은커녕 참 용서도 못하고, 심지어 내 몸에서 난 자식마저 때로는 원수처럼 미워하고, 집사 장로 목사가 되어서도 교회 안에 형제들마저 조금만 잘못해도 미워하다 못해 하나님 앞에 원망하기 바쁜 그런 존재밖에 안 됨을 인정하게 해주었다. 예수를 모르고는 전혀 깨닫지 못하던 부끄러운 우리 모두의 실상이다.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자기부터 가장 불쌍히 존재이므로 주님의 긍휼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된 것이 신자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불쌍하게 여기지 못하면 다른 이도 불쌍히 여기지 못한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자기는 예수님 사랑 없이는 영혼의 소생이 절대 불가능함을 철두철미 체험한 자라야 다른 이에게도 오직 그분의 사랑이 최우선적으로, 절대적으로, 유일하게 필요하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신자는 자신의 인격, 도덕성, 양심, 종교성, 영성으로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이 범죄한 그 형제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여 달라고 간구부터 한다.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와 나 사이에 임하여 함께 불쌍히 여겨주시고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신자의 용서는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채워진 중심을 갖고 잘못한 형제의 중심을 터치하는 것이다. 한 인격체가 자기 전부를 걸고 다른 인격체 전부를 살려내는 것이다.
신자가 진짜로 상대를 용서하고 싶고, 진짜로 상대를 얻고 싶고, 진짜로 상대를 불쌍히 여겨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 신자의 진심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된 중심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마음이다. 그래서 신자의 용서는 나라는 인간 전부를 던져서 상대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그렇게 용서했듯이 말이다.
신자도 여전히 인간의 한계에 갇혀 있기에 주님과 같은 온전한 용서를 하기는 심히 힘들다. 주님이 당신을 따르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한 까닭이다. 물론 신자가 최선을 다해도 평생을 두고 100% 온전한 용서를 제대로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중심이 바뀌어져 있다면 최소한 교회 안에서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업신여김은 바로 죄의 출발이다. 만약 그런 일이 없어지면 죄도 줄거나 없어질 것이다. 서로 용서할 일 자체가 원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적 노력으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중심을 당신의 십자가 긍휼로 가득 채우라는 것이다.
9/1/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