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법(法)을 뜯어 고친 예수님
마태복음 강해 (184)
http://youtu.be/fRnmQwkgm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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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런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1-9)
밥 먹듯이 하는 이혼
미국에선 밥 먹듯이 이혼한다. 이젠 이혼하면 위자료가 부담이 되기에 정식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만 하는 경향으로 흐른다. 그러다 상대가 싫증나면 마치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새 애인으로 교체해버린다. 한국도 최근에 이혼율이 근 50%에 육박한다고 들었다. 가정주부가 애인이 없으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불륜이 일상화 되었다고도 한다.
고대에선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여자를 재산이나 종으로 취급했기에 싫어져도 구태여 이혼할 필요가 없었다. 정확한 데이터가 없지만 이혼율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관행 중에도 옛날보다 도덕적으로 앞선 측면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고대에는 여자가 이혼을 요청할 권한이 아예 없었다. 남편의 불륜이나 잘못은 이혼 사유가 아니었다. 반면에 지금은 여자도 이혼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이혼 절차가 상당히 공정해졌다. 서로 합의가 되지 않으면 법원이 나서서 객관적으로 판단 주관해준다.
그렇다고 현대에 성적 순결성이 개선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 반대로 옛날이라고 더 성결했던 것도 아니다. 현대는 여성의 활동 공간이 확충되고 권리와 자유가 신장되었다. 그동안 제도와 관습에 억눌렸던 여자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덩달아 여자들 속에 있던 죄의 본성도 함께 고삐가 풀렸다. 여자들도 Free Sex 대열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죄의 본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할”(창8:21) 뿐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간음과 음란이다(마15:19).
바리새인의 간교한 흉계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당시의 남성 위주의 이혼 관행에 대해서 옳은지 여부를 예수님께 물었다. 그런 관습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고치겠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3절)라고 기록된 대로 예수님에게서 이단의 꼬투리를 잡으려는 뜻이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난 뒤에 유대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전국적으로 최고로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유대 공회로선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손상당할 것을 염려하여 공식적으로 이단 조사단을 파견했다(마15:1).
예수님 사역 초기에 여러 이적을 일으켰을 때는 예수님의 출신, 신분, 정체성을 문제 삼았다.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날 리가 없다고 비방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라고 매도했다. 그러다 예수님이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세 있게 가르친다는 소문이 돌자 모세의 율법과 유대교의 계명에 저촉되는지 여부를 심사하려 들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손을 안 씻고 밥을 먹는 일이나 이방인들과 식사 교제하는 문제를 갖고 신학적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본문도 그런 연장선상의 사건이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그랬듯이 자기들 생각에 ‘예’ 혹은 ‘아니요.' 두 가지 답밖에 나오지 않을 질문을 했다. 어떤 답을 하든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비판을 할 작정이었다.
먼저 예수님이 아무 연고나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답하면, 불쌍한 사람을 사랑으로 보살피라는 평소의 가르침과 위배된다고 할 참이었다. 가르침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라고 비난하려는 뜻이었다. 반대로 아내를 내어버려선 안 된다고 답하면 아내의 수치를 발견하면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보내라는 율법(신24:1)도 지키지 않는 이단이라고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예수님이 그들의 계교를 모를 리가 없었다. 예수님 또한 항상 그랬듯이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대답을 하셨다.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한 신성한 제도로써, 아담과 이브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맺어준 상대를 인간이 나눌 수 없다고 답했다. 이혼을 허용치 않는 것이 자기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이 대답을 듣는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럼 어찌하여 모세의 율법은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하느냐고 사전에 모의 된 대로 반문을 던졌다. 율법을 위반했으니 이단의 누명을 덮어씌울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혼 허용이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라 인간들의 마음이 완악하기에 임시로 취한 조치일 뿐이라고 답했다.
이 말씀을 자칫 오해하면 안 된다. 이혼 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완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완악한 짓이지만 예수님의 설명은 완악하게 아내를 내어버리는 일이 너무 많으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임시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오히려 아내를 함부로 내어버리지 말도록 취한 조치가 이혼증서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창세기의 라멕처럼(창4:23) 폭력으로 유부녀를 탈취해 자기 아내로 삼거나, 싫어져서 내보내 놓고는 다시 데려와 종살이를 시키거나, 자기는 싫지만 남을 주기는 아까워 재혼을 방해하거나, 아예 아내로 대우하지 않아 전혀 동침도 하지 않고도 일만 부려 먹는 등의 악행을 일삼았다. 하나님은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고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는 신분을 부여하게끔 이혼 증서를 주라고 한 것이다.
율법으로 시비를 건 까닭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이 구약성경 말씀을 갖고 예수님께 시비를 건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다. 율법에는 간음의 증거가 확실하거나 현장에서 들키면 사형이라고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또 증거는 없지만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심이 들면 저주의 쓴 물을 마시게 했다(민5:11-31). 만약 간음을 했다면 배가 붓고 넓적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벌을 받는다고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예수님 당시의 힐렐파 랍비들은 성경을 문자적 제한적으로 보지 않고 폭넓게 해석했다. 이처럼 음행에 대한 조치가 분명히 따로 규정되어 있기에 신명기 24:1의 아내의 수치는 일반적 하자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확실한 잘못만 이혼 사유로 적용했겠지만 차츰 아무 것이나 마음에 안 들면 꼬투리 잡는 방편이 되었다.
한국도 이조시대에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남편이 첩을 두는 일에 시샘을 내거나, 본처가 아이를 출산하지 못하는 등의 하자가 있으면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고 정죄하고 친정으로 쫓아버렸다. 남편으로부터 다시 호출이 없는 이상 소박맞은 여인이라는 굴레를 쓰고 평생 재혼도 못하고 늙어야 했던 것과 같다.
모세의 이혼증서는 여자를 학대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규정이었다. 그러데 오히려 여자를 더 학대하고 마음 놓고 이 여자 저 여자 바꿔가며 새 장가가게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율법을 핑계 삼아 따지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대꾸하셨는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절)고 선포하셨다. 참으로 오묘하고도 심각한 말씀이다.
먼저 구약성경이 간음에 대해 사형의 벌을 규정하는데 반해 이혼이라고 그 벌을 경감시킨 셈이다. 모세의 율법을 젊은 랍비 예수가 멋대로 수정한 셈이다. 그럼 바리새인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반발할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어쩌면 그만큼 음행이 일상화 되었기에 이미 일일이 돌로 쳐서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것에 익숙해진 탓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예수님의 뜻은 말씀하신 그대로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을 중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은 간음뿐이라는 것이다. 힐렐파 랍비처럼 요리나 청소를 못한다고 이혼 증서를 내보내는 것은 이혼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도 결혼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여자에게 장가가면 당연히 간음이 된다.
신명기 24:1도 자세히 보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되면 이혼 증서를 주라고 했다. 수치가 발견되는 시점은 결혼한 직후다. 결혼 생활을 한창 하고 있는 중이라면 구태여 이런 수식구절을 붙일 이유가 없다. 그럼 어떤 뜻이 되는가? 결혼 전에 이미 순결을 잃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는 혼전 음행에 해당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율법은 배우자, 아니 아내의 부정에 대해서 현행범은 사형, 의심이 가면 쓴물을 마시게 하고, 결혼 전 부정은 이혼증서를 주어 내어보내는 것으로 규정한 셈이다. 결국 배우자의 음행은 결혼을 지속시킬 수 없는 절대적 사유였다. 예수님은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즉, 음행만이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8절).
물론 이 구절에서 말하는 아내의 수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지금 와서는 아무도 모른다. 예수님 말씀은 하나님이 결혼을 제정한 목적이 이혼증서 규정으로 인해서도 바뀐 것은 단 하나 없다는 것이다. 그 뜻에 비추면 음행 외에는 이혼사유가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혼의 정의(定意)
결혼이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당연히 동성끼리가 아님, 일대일로 평생을 서로 돕는 배필로서 함께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결혼을 유지하는 길도 남편과 아내가 육체, 정신,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뿐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첫째이자 기본적인 축복을 실현시키는 수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만은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축복이자 소명이다. 정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 일을 남녀가 결합한 가정을 통해서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음행을 저질러 가정이 파괴되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 땅에 대한 거룩한 통치가 무너진다. 그 당사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거부한 셈이다. 아담이 이브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것이 하나님이 아름다운 배필을 만들어서 결합시켜 주신 것에 대한 단순한 감탄사가 아니다. 정말로 부부는 하나의 몸이다. 음행은 그 뼈와 살이 갈라지고 찢어져 나뉘는 것으로 그 자체로 이미 죽은 것과 방불하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자 중에는 힐렐파 바리새인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율법대로 이혼증서를 주고 아내를 내어보내고 새 장가를 든 이가 말이다. 그들은 율법대로 충실히 이행했다고 아주 떳떳한 얼굴로 예수님께 따져 들었을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불쌍한 아내를 별 것 아닌 하자로 꼬투리삼아 내어버린 너무나 뻔뻔한 자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너희야말로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죄를 저지른 죄인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율법에 능통했고, 또 바로 그 율법으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들 정도로 머리가 영리한 그들이 예수님 말씀 안에 숨겨진 뜻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는 없다. 요한복음 8장에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엄숙하게 선포하여 오히려 그들이 죄인으로 정죄 받았던 것과 똑같은 결과다.
너무나 완악한 인간들
인간이 얼마나 완악한지 모른다. 하나님이 인간의 완악함을 막으려고 제정한 거룩한 율법으로 그 완악한 마음을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악용하여 더 완악해졌다. 자기들 음욕을 채우는데 사용했다. 그것도 하나님을 잘 알고 율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사람들로부터 가장 의로운 자라고 칭송을 받는 자들이 그랬다.
힐렐파와 경쟁하는 샴마이파 랍비들은 성경을 문자적 제한적으로 해석했다. 신명기 24:1의 하자를 음행에 국한시켰다. 즉 그 구절은 바리새인들 사이에서도 확정적인 해석은 없고 아직도 논쟁중인 주제였다. 말하자면 자기들 반대파를 비방하는 근거 구절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바로 그런 구절을 갖고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가려 했다. 너무나 모순이며 어리석다 못해 웃기지는 짓이다. 만약 예수님이 어떤 연고든 이혼이 가(可 )하다고 대답하면 힐렐파의 입장에 서게 되고, 그 반대로 안 된다고 하면 샴마이파를 동조하는 결과가 된다. 그런데도 어떤 대답을 해도 이단으로 몰아갈 작정이었다. 그럼 자기들이 바로 이단이라고 스스로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꼴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아랑곳 않았다. 어제의 적들이 공통의 적을 만나니 하루아침에 동지가 된 것이다. 그 공통의 적이 사악하거나 사탄의 세력도 전혀 아니다. 순전히 자기들 밥그릇 크기가 줄까 염려되었고, 그보다는 자기들 자존심과 체면이 깎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처럼 완악한 죄인들임에도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 죄와 완악함에서 구원하러 오신 아무 죄 없는 메시아를 순전히 말꼬리를 잡아서 죽이려 들만큼 그들은 완악했다.
다시 말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정말로 율법의 전문가라고 자처한다면 예수님이 간음의 형벌을 사형에서 이혼으로 격하시킨 것을 따져야 했다. 그에 대해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너희야말로 간음을 저지른 사형수 죄인이라는 선고에 스스로 양심이 찔렸다는 반증이다.
거기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의 사건에서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았다면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하면 되는데도 구태여 예수님을 올가미 씌우려 끌고 와서 비슷한 논쟁을 벌이다 실패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속에 품었던 간교한 흉계가 아무 소용없이 그대로 들켜버렸으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다.
거짓은 절대로 진리와 공존하지 못한다. 진리가 밝혀지면 거짓은 그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진리로 오신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 한마디에 그들의 음흉한 심령이 완전히 벌거벗겨져 그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버렸던 것이다.
하나 다를 바 없는 우리들
지금 바리새인들만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사실은 그들과 하나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왜 하필 이 시점에 이혼 문제를 거론했는지 살펴야 한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단 조사관들은 예수님께 제대로 대꾸도 못했지만 철수하지 않고 계속 무리들 속에 섞여 따라 다녔다. 어떻게 하든 올가미를 씌울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 바로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베드로가 죄를 범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지 예수님께 물었고,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주라고 대답했다. 그럼 아내에게 한두 가지 하자가 있어도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보내라는 하나님의 계명과 상충되는 가르침이 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이 잘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 것과 같다고 여겨지니 꼬투리 잡을 구실을 하나 건진 셈이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착각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거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간음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결국 그 뜻은 무엇인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또 하루에도 일곱 번씩 용서해주어야 할 대상이 바로 가족,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자가 있어 보이는 아내라는 것이다.
다른 이라면 서너 번 용서해 주었는데도 계속 죄를 범하면 아예 상종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부부사이는 그럴 수 없다.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간음 외에는 아내를 과연 끝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가장 죄를 짓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만 대해야 할 부부사이인데도 일흔 번씩 일곱 번 또 하루에도 일곱 번씩 용서해 주어야할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생을 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죄를 짓는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구약에선 사형이었던 간음죄의 형벌을 이혼으로 낮추어준 이유가 무엇인가? 구약은 심판의 하나님이신 성부가 정의를 강조했기 때문인가? 신약은 사랑의 하나님인 성자가 긍휼을 강조했기 때문인가? 물론 일부 결과적인 모습은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변함이 없다. 변함이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다. 결혼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완전한 결혼은 불가능해졌다. 어떤 인간도 순전한 사랑을 평생토록 변함없이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죄가 들어오자마자 부부 사이에 서로 헐뜯기 시작했다. 하나님 앞에서마저 잘못을 배우자에게 덮어씌웠다. 서로 자기가 잘 낫다고 우겼다. 아무리 결혼이 하나님이 제정한 신성한 결합이자 언약이라도 타락한 이후로는 사랑만으로 그 결혼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최초의 아담과 이브의 결혼 이후의 모든 결혼은 죄인끼리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을 온전히 유지하려면 사실은 사랑보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는 긍휼한 마음이 더 우선하게 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결혼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타락한 자 안에서 나오는 사랑은 그 자체가 불완전하고 왜곡되어 있다. 인간은 순전하게 사랑하고 싶은 소망은 있으나 불행하게도 이미 그 영혼이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불가능하다. 자신의 지정의를 하나님의 뜻에만 맞추어 순종하도록 작동되지 않는다. 부부 사이에도 하루에 일곱 번씩 용서를 해주어야 할 만큼 다툼이 생기게 된다.
구약의 하나님이 모세의 이혼증서 같은 임시조치를 제정한 까닭도 그러하다. 인간의 완악한 심성을 인간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간의 심령이 완전히 새롭게 되기 전까지는 그 완악함이 고쳐지지 않음을 아셨다.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지기 전까지 아내를 마음대로 내버리고 재혼까지 막는 그런 완악함이라도 막으려는 어쩔 수 없이 취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또 그런 율법을 통해서라도 인간이 자신들의 죄악과 완악함을 깨달으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부부가 행동으로 간음하는 것보다, 속으로 서로 배반하여 속이며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간음을 더 자주 범하며 더 큰 죄임을 깨달으라고 가르쳤다. 이 세상에 율법을 제대로 경건하게 지킬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음을 그분만은 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때가 차매 예수님을 보내어 당신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죄인을 용서하는 긍휼을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거룩한 율법을 수호해야 할 자들마저 그 율법을 자기들의 음욕을 해소할 수단으로 악용할 만큼 모든 인간이 썩고 또 썩었던 것이다. 율법이 실패했는데, 심지어 율법에 가장 정통한 자들이 그랬기에, 그런 인간의 심령을 새롭게 할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이런 완악한 죄마저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그 형벌을 다 감당하시고 용서해주셨다. 요한복음 8장 사건에서 보듯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죄는 사형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 밖에 없다. 모든 인간이 온전히 살 수 있는, 그래서 순전한 결혼을 유지할 수 있는 길도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뿐이다.
멸망으로 치닫는 이 세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작금 세상은 완전히 Free Sex의 물결이 뒤덮고 있다. 이미 아무런 죄가 아니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선(善)으로 둔갑되어서 떳떳해졌고 스스로 지성인양 자부할 수 있는 표식이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런 지성인들 사이에서 현대사회가 겪는 모든 문제와 고통과 상실감과 허망함과 갈급함의 원인이 바로 가정이 파괴된 것으로 진단한다는 것이다. 프리섹스로 인한 참 사랑의 실종이 현대의 가장 큰 문제라고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런데도 또 그래서 그들은 정말로 참 사랑을 찾으려고 계속 사랑만 추구한다. 그들의 음욕이 우리보다 강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참 사랑은 끝까지 거부한 채로 참 사랑을 찾으려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결코 참 사랑을 할 수 없다. 불신자들은 이런 진리를 모르고, 아니 완악하게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끝까지 예수 밖에서 참 사랑을 찾고 있으니 어리석다 못해 불쌍하기 짝이 없다.
저를 비롯한 모든 인간은 너무나 연약하다. 이 짧은 인생에서 부부 간에도 온전한 사랑을 제대로 못해볼 만큼 어리석고도 죄에 찌들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가 필요하지 않은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게 서로 용서해주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아무 소망이 없다. 참 사랑이 실종되어서 날로 피폐해져 가는 세상은 회복될 수 없다.
참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자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뿐이다. 자기 심령에 예수님의 긍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긍휼한 자로 바뀌는 것이다. 진정으로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픈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되길 간구하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주신다. 팔복강화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가 다른 이의 어려움과 잘못에 애통해 하고 온유하게 대하면서 긍휼한 자가 되면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본문의 9절 말씀을 많은 신자들이 단순히 예수 믿는 신자가 이혼할 수 있는 근거 구절로만 이해하고 치운다. 아니다. 굉장히 심각하고도 엄청난 말씀이다. 세상은 참 사랑이 실종되고 가정이 파괴됨으로 점점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 그럼 세상을 다시 회복할 길은 가정을 회복시키는 것 말고는 없다. 부부가 각자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그 중심이 완전히 긍휼한 자가 되어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서로를 끝까지 용서해야만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명령은 지금도 예수 믿는 신자에게 유효하다.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신자만이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신자의 가정이, 특별히 부부사이가 예수님의 긍휼로 가득 차서 정말로 아름답고도 풍성하게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불신자들로 보게 해야 한다. 그들로 시샘이 나게 해야 한다. 또 그래야만 지금 신자들이 벌리고 있는 동성애 반대 운동도 힘을 얻게 된다.
9/8/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