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치기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
마태복음 강해 (191)



http://youtu.be/M9Eu0irY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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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19:30-20:16)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주님은 마지막 심판 때에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다. 또 그 때에는 버린 것의 여러 배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것으로 그쳤다면 큰 위로와 기쁨이 되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마19:30) 단서를 붙이는 바람에 뭔가 찜찜해졌다. 포도원 주인과 품군의 비유를 통해 그 의미를 설명한 후에 다시 결론(마16:20)으로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단순히 그런 사실을 알라는 차원을 넘어 강하게 경고한다는 뜻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하니 약속의 내용을 수정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단지 복 받는 순서만 바뀐다면 두 번이나 강조할 필요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들이 받을 것은 분명히 영생이라고 했고(19:29), 또 비유의 주제도 천국이다. 그럼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구원을 받았어도 잘못을 범하면 취소된다는 뜻인가? 이런 저런 궁금증이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가 각각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는데 몇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에 대한 네 가지 오해

첫째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와 같은 내용이라고 보는 견해다. 그래서 부자나 기득권을 가진 지배층은 심판을 받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는 구원의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로 차별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상충되는 해석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가 선하고 부자가 악하다는 공식도 없다.

둘째는, 먼저 된 자는 유대인이고 나중 된 자는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10,11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과 부합하기에 언뜻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구원의 경륜을 인간의 역사 속에 전개할 때에 중요한 역할을 맡기 위해서 선택된 것은 맞다. 그러나 전 민족이 구원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구원은 항상 개인별로 이뤄진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모세 외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구원 받았고, 심지어 쌍둥이인데도 야곱은 구원을 받고 에서는 그러지 못했지 않는가? 비유에서도 포도원 주인은 품군을 개인별로 불렀지 특정 집단을 고용한 것이 아니다.

셋째는, 제자들끼리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다툼과 연결시켜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가 먼저 된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열두 제자 모두에게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동일한 권세를 약속했지 높고 낮음은 없었다. 거기다 제자 중에 한 명은 주님을 배반했고, 수제자는 세 번 부인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갔다.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하나님조차 제자 중에 누가 높고 낮은 지 판단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넷째는, 유대인들은 현실에서 형통하여 재물과 권력이 많아진 것을 하나님이 그를 더 사랑하여 은총을 더 많이 베푼 것이며 죽어서 천국에 가도 그렇다고 믿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려 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비유의 뜻과 가장 비슷하지만 예수님은 천국과 구원에 관해서 더 깊은 차원으로 설명하셨다.  

가장 합당한 해석

마지막으로 가장 합당한 해석은 먼저 된 자를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같은 유대 종교지도자들로 보는 것이다. 그들은 기도와 금식과 구제와 십일조에 열심이었다.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성실히 준행했다. 천국 가는데 전혀 하자가 없다고 자타가 공인했다. 자기들 스스로도 가장 선하고 의롭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의 영적 실상이 얼마나 가식적인지 밝히 드러내었다. 금식한 표시를 얼굴에 드러내었고, 시장 어귀에서 모든 사람이 듣도록 큰소리로 기도했으며, 어떤 모임과 잔치라도 상석(上席)은 당연히 자기들이 차지했다. 율법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는 부자 관원만 해도 희년 제도를 지키지 않아 부자가 된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여유 돈으로 구제 조금한 것으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한 의인이라고 자부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동족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오히려 외면했다.

그 무엇보다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단지 종교 권력을 다툴 경쟁자로만 여겼다. 거기다 자기들의 잘못과 심령 깊숙이 숨겨진 죄까지 예리하게 통박했다. 영적진리에 대해서도 자기들이 전혀 대꾸를 못할 만큼 깊이 알고 있기에 극도로 싫어하고 미워했다. 아무 죄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사람들 눈에는 분명히 천국 문에 가장 먼저 도착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도리어 맨 꽁무니에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반면에 그런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하나님께 저주 받았기에 아예 구원 밖에 있다고 매도당한 자들이 있었다.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 만나 교제했던 창녀, 세리, 불구자, 문둥병자, 간음한 여인, 사마리아인, 이방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난하고 불쌍해서 구원해 준 것이 아니다. 열 명의 문둥이를 고쳐주었더니 결례를 마치고 예수님께 감사하러 돌아온 자는 한 명뿐이었지 않는가? 반대로 유대 지도자들이라고 해서 다 심판한 것도 아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들 신분에 닥칠 위협과 손해를 다 무릅쓰고 예수님을 좇았다.  

나중 된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일대일 개인으로 서서 자기 전부를 깨트리고 자기야 말로 정말 무익한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조차도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자들이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낮아져서 오직 그분의 긍휼만 바라는 자들이다.

인간 사회에서 그 외모로 봤을 때는 천국 문을 향한 행렬의 맨 뒤에 선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여기는 너희처럼 부정한 자들이 올 곳이 못 된다고 욕하며 돌을 던지기에 슬슬 눈치만 보며 멀찍이 떨어져 서성거리는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순서를 바꿔 그들을 맨 자리에 서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구원에서 새치기를 허용한 것이다.

구원의 취소가 아니라 차별 없는 구원이다.  

누가복음 13:24-30의 천국잔치 비유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시면서 먼저 되었다가 나중 된 자에 대해 정의(定意)를 내렸다. 천국 잔치에 관심이 없어서 천국 문이 닫히는 바람에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28절)들이라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구원 밖에 있던 자들이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만 높인 자들이다. 따라서 먼저 되었다 나중 된 자가 구원을 받은 후에 상급이 적거나 없을 것이라는 뜻도, 또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 취소된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전혀 생뚱맞은 말씀을 할 리가 없다. 부자 관원 사건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 그가 전 재산을 팔아 구제하지 않았다고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보다 이 땅의 재물이 더 귀해서 좋아했기 때문이다. 밭에 숨겨진 보화이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에 베드로는 인간적 관점에서 선행은 그보다 훨씬 적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은 깨달았다. 정확히 말해서 예수님이 그를 선택하고 심령을 변화시켜서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로 치사한 실패를 범했음에도 주님은 성령의 간섭으로 그로 자신의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영적 실체를 보게 만들고, 또 밖으로 뛰쳐나가 심히 통곡케 했다. 십자가 앞에 자신을 철저하게 깨트리게 하는 역사를 통해 그를 구원으로 이끄신 것이다.  

이 비유를 문맥에 비추어 해석하면 천국은 구원 혹은 영생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품삯을 계산하는 청지기(8절)는 예수님이다. 특별히 19:28과 연결하여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을 상징한다. 비유 전체의 의미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기로 작정한 자를 당신께서 찾아 나서고 부르셔서 당신의 뜻대로 영생을 선물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포도원 주인에게 불평은 했지만 한 데나리온을 받았기에 구원을 받았다고 해석할 여지는 없다. 비유를 해석할 때는 핵심 주제만 찾아야 한다. 구절이나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하다보면 사공이 많아 배가 산에 오르는 꼴이 된다. 실제로 본 비유에서도 주인이 세시, 여섯시, 아홉시, 열한시에 품군을 부르러 나간 것을 두고 그런 식의 해석을 한다. 인류 역사의 시대적 구분, 또는 이스라엘 성전의 예배 시간, 심지어 인생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비추어 심오한 해석을 덧붙인다. 그런 해석은 심오한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 없는  복잡한 해석일 뿐이며 예수님이 강조하시려는 주제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은 구원에서 외모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나 종 같은 세상의 신분, 위치, 재물, 권력 등이 구원에 눈곱만큼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 여러 번 부르러 나간 것은 십자가 복음은 이미 온 천하에 영원토록 선포되어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누구나 아무 구별 없이 구원으로 항상 초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하나님

이 비유에서 정작 주목해서 따져 보아야 할 구절은 따로 있다. 8절을 다시 보라.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 이르되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주라고 명령했다. 결론부터 쉽게 말하면 분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하나님이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잘못한 것은 없다.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 그렇게 계약했고 그 계약을 하나도 위반하지 않았기에 주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13-15절).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지금으로 치면 법정최저임금이기에 아무리 아침 일찍 왔어도 적다고 불평할 계제가 아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계산하다 보니까 품군들이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자가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럼 나는 여덟 시간을 일했으니 여덟 배는 몰라도 최소 두세 배는 주겠거니 기대했던 것이다. 자기가 계약한 내용은 잊고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데 불만이 생긴 것이다. 그로선 아주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반발이며 언뜻 보면 주인이 아주 불공평한 것 같다.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에 처음 온 자부터 계산했다면 자기 계약한 그대로 받았으니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반대로 나중에 온 자들은 두세 시간, 아니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니까 주인이 산수도 못하는 바보인가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얼씨구나 좋다고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 정도도 모를 바보(?)는 결코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도 의도적으로 품삯 계산의 순서를 바꾸셨다. 무슨 뜻인가? 천국과 구원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을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 비유와 동일한 반응을 나타낼 것이라는 뜻이다. 유대의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처럼 착한 일을 많이 한 자가 천국가야 옳지 않느냐고 반발할 것이라는 뜻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입만 앞서는 위선적이라 나보다 훨씬 못한 예수쟁이들이 교회에 모여 박수치며 찬송 부르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는 이유로 구원을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불평할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그런 반발은 도무지 말이 안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내가 내 것으로 즉,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으로 나눠주는데 인간은 불평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방적 독선적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비유처럼 계약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우리 쪽에서 하나님과 구원의 계약을 맺은 적은 없다. 요컨대 아무리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작정해서 주는 구원이라도 하나님 쪽의 하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입에 올릴 수 없는 인간들

부자 관원이 희년 제도도 지키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잘 지켰다고 교만했다. 그보다 더 큰 잘못이 하나 더 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했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은 과연 그런지 따지기 위해서 전 재산을 팔아 나눠주라고 한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말기 암처럼 죽을 병에 걸렸다면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고치려 노력할 것이다. 자기 몸을 그렇게 사랑하듯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분명히 명하셨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선 함부로 그 계명을 지켰다고 큰소리 칠 수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뜻은 사람들이 사랑의 본질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임을 모른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어떤 하자나 잘못이 있어도 또 내 쪽에서 어떤 손해나 희생이 따르고 심지어 이해하지 못할 억울함이 있어도 끝까지 사랑해야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중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음도 아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만이 온전한 참 사랑이다.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바로 제발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그것도 우주에서 유일한 완전한 참 사랑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따지면 전 재산을 팔아서 구제하라는 것은 인간은 그런 사랑을 도무지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니 50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한 번 해보라는 것이 희년 제도다. 인간 개인에게 적용하면 50년에 한 번은 평생에 한 번이 된다. 또 죽기 전에 단한 번의 뜻도 된다. 그렇다고 죽을 때에 전 재산을 팔아 사회에 환원하라고 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부정하게 번 돈만 돌려주고 종들을 풀어주라는 것이다. 자기 본래 재산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정도도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러면서 이웃 사랑을 잘 지켰다고 거들먹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감히 구원을, 아니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평생토록 온전한 참 사랑을 한 번도 하지 못하는 그런 불쌍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아셨던 것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만약에 인간의 평생을 일초도 빼지 않고 그 행동만 촬영한 비디오를 하나님과 함께 본다고 가정했을 때에 수분 내에 쥐구멍을 찾아서 숨지 않을 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살고 있다고 큰소리친다.

하나님은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심령의 깊숙한 곳까지 다 찍은 비디오를 갖고 있다. 시편기자가 한탄한 대로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하나님은 당신과 대적하여 원수가 되어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대신 죽으셨다. 천국과 구원은 물론 선과 사랑의 의미도 모르면서 조금 남아도는 돈으로 자기 의와 이름을 자랑하려고 구제하고선 천국의 로얄 박스를 차지해 마땅하다는 그런 교만한 자들을 위해서도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천국도 사랑도 몰랐던 자들 가운데는 당신께 삼년이나 배운 제자들도 포한된다. 그러니 주님은 정말로 할 말을 잃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길 외에 당신의 참 사랑을 인간들로 보고 알게 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새치기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

비유에 종일토록 놀고 있는 자들이 나오는데(7절) 누구인가? 게으르게 방탕에 빠진 자들이 아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군들을 고르는 곳은, 지금 미국으로 치면 불법체류 멕시칸이 서성거리는 홈디포나 한국으로 치면 남대문 시장에 서는 일용노동자 시장과 같은 광장(아고라)이다. 그럼 아무래도 외모, 체격, 기술, 하다못해 주인의 눈치를 보며 아부하는 자들부터 고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때까지 픽업(pick-up) 되지 못했다면 인간의 기준으로는 완전히 낙제점인 자들이다.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만나 교제한 자들이다. 세상 기준으로는 구원의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한 자들이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던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눈물을 보고 한숨을 듣고 계셨고 그들의 고통과 억울함을 아셨던 것이다. 그들이 착해서, 의로워서, 선행을 많이 해서, 나아가 단순히 불쌍해서 구원해준 것이 결코 아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당시 유대사회의 소외된 자들에게는 공통된 평생의 소원이 하나 있었다. 제사장과 관원들이 그들을 성전 제사에서 아예 제외시켰기에 성소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그들로선 세상 사람들에게 그런 멸시와 핍박을 받는 것까지는 감수했지만, 과연 하나님마저 자기들을 저주하셨는지 평생토록 궁금했다. 순전히 자기들의 외모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면 그것만큼 한이 되는 것도 없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님을 깨닫게 해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러 오신 것이다.  

먼저 온 자들은 율법의 의미도 모르면서 율법으로 따져 하자가 없다고 큰소리치는 자들이다. 사실은 하나님의 율법보다 오히려 자기들 사회에서 자랑하고 대우 받으려 자기들이 정한 장로의 유전을 더 중요시했던 자들이다. 오늘날로 치면 십계명을 다 지켰으니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을 믿을 필요조차도 없다고 큰소리치는 자들이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친 대로 간음과 살인과 도적의 참 의미도 모르는, 무엇보다 마지막 십계명의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제대로 지킬 수 없음은 꿈에도 생각 못하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십계명은 케케묵은 말도 안 되는 계명이라면서 작금 미국 도처에서 그것이 새겨진 동판을 파서 내어버리고 있다. 그 자리에 인권의 보호와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동성애를 죄라고 정죄하는 자들은 법의 이름으로 정죄하겠다는 법조문을 내걸고 있다. 정말로 마지막 때에 밖으로 쫓김을 당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은 꿈도 꾸지 못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은 실제로 천국 문에 새치기 입장을 허용, 아니 계획했다. 포도원 주인이 임금 지불 순서를 의도적으로 뒤집어서 사람들의 반발을 샀듯이 말이다.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이시고 그 사건을 천하 만민들로 실제로 보게 했다. 인간의 선행, 공적, 자격, 노력, 능력 등으로는 절대 구원 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는 자만을 구원하기로 하셨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네와 네 온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든, 세금을 매기며 착복하여 부자가 된 매국노 세리이던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 믿음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수긍하고 믿는 것이 아니다. 오진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임을 철두철미 깨닫는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완악하게 부인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에 그 대신 죽으신 그 큰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베드로처럼 진짜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 택하여서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만 소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버린 것의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좇으면 여러 배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이 땅에서 형통하고 출세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우선 그 말씀은 당신께서 재림하시어 마지막 심판과 관련해서 약속하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텐데, 그 때에는 당연히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은혜와 복락 가운데 살게 될 것 아닌가?

마지막 때나 죽어서 천국 가기 전의 이 땅에서도 그럴 수 있다. 신자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다. 모든 것을 버렸을 때에 반대급부로 버린 것의 몇 배를 주리라 바라고 버린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세상의 것은 영원한 의미와 가치가 없음을 절감했기에 그 대신에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 안에서 교제 동행하는 참 기쁨을 택한 것이다.

세상의 것들이 참 생명이 아님을 확신하기에 다 버리고 예수를 좇아놓고서 또 다시 그런 것에 연연하거나 흔들린다면 말이 되지 않지 않는가? 믿음이란 그래서 예수 이전에 비해서 예수 이후가 수십 배 즐겁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움을 아는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런 은혜를 누리고 사는 것이다. 또 그래서 이 땅에서도 이미 여러 배를 받은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를 이 비유에 비추면 이렇다. 예수 믿기 전에는 만약에 주인이 먼저 온 자부터 계산했더라면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으면서도 아무 차별 없이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니까 무슨 이런 바보 같은 주인이 있는지 속으로 멸시하면서 떳떳하게 받아 챙겼던 자였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으면 7/8은 제가 받을 자격이 안 되니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마땅히 돌려주어야 함에도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다. 구원에 관해 그렇게 치사하고도 말도 안 되는 모순과 잘못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불신자란 뜻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즉,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여덟 시간 일한 자와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의 구원을 주셨다. 그분께서 일방적으로 일시적으로 천국 문의 맨 뒤에 있던 자들을 맨 앞으로, 아니 천국 안으로 새치기 시켜 옮겨주셨다. 현장에서 간음해서 잡혀 왔기에, 세리처럼 부정을 예사로 저지르며 돈을 벌었기에, 그 줄의 꽁무니에 겨우 붙어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도 아무 반발도 못할 만큼 내가 나를 봐도 너무나 초라하고 추했는데도 천국에 새치기로 넣어주셨다. 정말로 새치기로 구원 받은 그 은혜가 너무나 커서 평생을 감사하며 주님의 긍휼만 바라며 자기를 낮추고 낮추며 사는 것이 바로 예수 믿는 믿음의 본질인 것이다.  

먼저 된 자 나중 된다는 말씀을 주님이 두 번이나 강조하셨다. 말세의 엄중한 경고로 주신 말씀이다. 성경으로 기록되어 후대의 모든 이들에게 읽혀질 목적으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당시로선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었다. 말하자면 이미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자들이 이 땅에서 신자로 살아갈 동안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 즉, 새치기로 구원을 얻었음에도 헌금과 봉사를 많이 했는데도 왜 아직 자기를 앞에 세워주지 않고 복을 더 많이 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가지면 마지막 때에 정말로 예수님이 맨 뒤에 세울 수 있다. 구원이 취소는 안 시킬지라도 꼴지에 세워서 벌을 주실지 모른다. 또 교회 안에서 외모로 인해 다른 성도를 업신여긴다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범한 것과 동일한 죄를 짓는 것이다. 구원을 얻어도 부끄러운 구원, 그야말로 천국 문의 맨 꼴찌에서 서성거리게 될지 모른다.

그런 잘못을 범하는 이유는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그분의 참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입술로 주여, 주여 해도 예수님이 안 계신 엉뚱한 곳에서 빈 메아리만 될 뿐이다. 예수님의 참 생명을 모르고 누리지 못한다.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여러 배를 받아 누린다는 것은 이 땅에서부터 세상의 흑암의 세력과 죄악을 당당하게 승리하며 거룩하고 의롭게 산다는 뜻이다. 또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믿음의 본질이다.  

10/2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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