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수 같은 엄마의 엉뚱한 믿음
마태복음 강해 (192)
http://youtu.be/jgW9RPWb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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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17-23)
철저한 고독의 여정
예수님은 유월절이 다가오자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공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또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고하면서 이전의 두 번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죽이기로 결안할 것이라고(18절)이라고 했는데, 유대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정식 재판 즉, 피고인의 소명과 변호인의 변론과 증거를 검증하는 절차를 하기도 전에 유죄라고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거기다 사형이라고 형량까지 미리 정해놓았다는 것이다.
또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다는 핑계로 이방인 로마당국에 넘길 것이라고 한다. 로마 제국은 식민지의 고유 종교를 자유롭게 믿도록 허락했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이보다 최하 2-30년 후에야 일어났다. 말하자면 로마는 유대 사회의 종교적 분쟁에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로마에 반란을 도모했다는 누명을 덮어씌웠다. 반란의 죄목이라야 사형을, 그것도 가장 고통이 극심한 십자가 처형을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애굽의 노예 살이에서 구원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유대의 최대 축제의 계절로 모두가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축제를 주관할 유대 지도자들은 역사상 최고로 사악한 모의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마저 스승이 세상 죄를 지고 갈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영단번의 대속 제물로 드려질 것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 혼자서 온 세상이 걸어가는 정 반대의 길로 철두철미 고독한 여정을 떠나려는 참이다. 당시 주님의 심정을 과연 누가 만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겠는가?
푼수 엄마의 개인적 청탁
실제로 주님의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푼수 같은 엄마가 등장했다. 주의 나라에 자기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최고 높은 자리에 앉혀 달라고 개인적 청탁을 했다. 푼수의 뜻이 무엇인가? 현재 진척되어 가는 상황이나 분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완전히 생뚱맞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것 아닌가? 약 열흘 후면 처형당할 사형수에게 도무지 할 수 없는 부탁이지 않는가?
거기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십자가 죽음을 예고했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하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크다고 가르쳤다. 정말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가르쳤는데도 전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야말로 소의 귀에 경을 읽은 셈인데 푼수를 넘어서 소나 말의 수준이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요한의 엄마는 푼수도 비상식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 반대로 완전히 정상적이고 믿음마저 아주 대단했다. 푼수의 첫째 조건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요한 엄마처럼 제자들도 세 번째 수난 예고를 전혀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랬다면 성질 급한 베드로가 “스승이 돌아가실 판국에 무슨 망발이냐”고 야단을 치거나, 최소한 “지금 그런 말할 분위기가 아니라”고 만류했어야 정상이다.
그 대신에 24절에 보면 제자들은 그 두 형제에 대해 분노했다. 푼수 짓을 했다고 화낸 것이 아니다. 푼수 짓은 쯧쯧 혀 차며 불쌍히 여기거나 현재 상황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자기들도 같은 욕심이 있었지만 체면상 말을 못하고 있는데 약삭빠르게 선수를 친 것에 화가 난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당신과 같이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다 그러겠다고 장담했지만 십자가 처형 전날 밤에 모두 도망갔지 않는가?
십자가 죽음으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거룩하고 의로운 참 생명 안에서 살게 한다는 예수님이 세울 나라의 영적 의미를 단 한명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여전히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사방 대적이 침입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다윗왕국의 영광이 재현 되리라 기대했다. 그들이 꿈꾸는 주의 나라는 철저히 현실적 정치적 나라였다.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도 본격적으로 그 과업을 수행할 테니 너희도 목숨 걸 각오를 하라는 다짐 내지 격려 차원으로만 받아들였던 것이다. 만약 요한의 엄마가 푼수라면 제자들 모두도 푼수였다. 그게 아니면 유대 모든 대중의 소망과 기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예수님이 푼수이던가? 예수님이 푼수일 리는 없다. 요한의 엄마는 실제로 푼수였다. 주님의 죽음 직전에 높은 자리를 청탁한 것 때문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푼수였다.
당시 로마제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주변 모든 나라를 정복해서 더 이상 전쟁이 없었다.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의 시대가 실현되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의 황제 아구스도가 그 시대를 열었기에 그가 바로 복음(福音-good news)이라고 불려졌다. 또 그에게 신(神)이라는 칭호가 붙고 황제숭배시대가 시작될 참이었다.
로마는 동쪽 변방의 이스라엘 같은 약소국이, 그것도 예수를 추종하는 수십 수백 명의 무리로 상대할 대상이 절대 아니었다.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 소국의 지방 도적 떼가 미국을 상대해서 이기겠다는 꼴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새끼 나귀를 탔었고, 칼을 준비하겠다는 베드로에게 한 자루면 족하다고 했다. 그런 비무장 종교집단으로선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와도 싸움이 안 된다.
설령 승리했다 쳐도 로마에서 진압군이 오면 이스라엘 전 국민이 나서서 결사항전해도 역부족이다. 실제로 예수님 사후에 로마에 대한 반란이 잠시 성공했지만 AD70년에 디도 장군에 의해 예수님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는 예언대로 처참하게 멸망했다.
높은 자리를 달라는 청탁은 승리는 기정사실로 여긴 것이다. 이처럼 로마를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정말 황당하고 푼수 같은 짓이지 않는가? 저 같으면 아들들이 죽을까 염려되어서 제발 이번 전투에서 빼달라고 사정했을 것이다.
침례 요한보다 더 큰 여인
그런데 요한의 엄마가 그 정도 판단력이 없었던 것은 전혀 아닐 것이다. 그럼 예수님이 감언이설로 세뇌를 시킨 것인가? 성령의 간섭으로 마치 마약 먹은 것처럼 실제와 소망을 혼동하여 환각을 실제로 믿게 만든 것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녀는 정말로 예수님의 승리를 실체(reality)로 믿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예수님이 베푼 기적들이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엄연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오묘하고 신비하며 엄청난 기적을 목격하고 동참하고 직접 체험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불치병이나 불구자를 고치는 차원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도시락 하나로 배불리 나눠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갈릴리 바다에서 수십 년의 잔뼈가 굵은 어부들도 포기한 폭풍우를 말씀 한 마디로 잠재웠다. 어촌 출신의 여배우가 어부들은 이 섬에서 저 섬까지 빨리 가기 수영 시합을 한다는 말을 우연히 TV에서 들었다. 어지간한 파도에는 겁을 내지 않는 그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은 이정도 폭풍우라면 도무지 살아날 수 없음을 체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미동도 않으시다가 폭풍우를 향해 야단쳤다. 자연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결정적으로는 죽은 지 나흘 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했다. 마태의 기록과 요한의 기록 사이의 선후관계가 분명하지 않지만, 나사로 이전에도 주님은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렸다. 무슨 뜻인가? 로마와의 전쟁에서 전사해도 주님이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의 엄마는 예수님이 말씀 한마디로 엘리사 이상의 이적을 보일 줄 확신했다. 아람 군대가 북왕국 사마리아를 포위했을 때에 엘리사는 그들의 군대 숫자보다 더 많은 눈에 보이지 않는 천상의 불 병거와 불 말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또 아람 군인의 눈을 멀게 해서 사마리아 성안에 포로로 잡아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승리했다. 예수님도 지금 로마 군인들의 무기를 말씀 한 마디로 솜방망이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이 푼수(?) 엄마가 이기적 욕심으로 청탁한 것은 사실이지만 본인의 믿는 바에 따라 정상적인 판단과 반응을 한 것이다. 교인들 중에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확신을 못 가진 자들이 많다. 이 청탁만큼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는 구절은 없다. 베드로의 그 위대한 믿음의 고백(마16:16)보다 더 생생하고 확실한 증거다. 믿음대로 행동했기에 더 그러하다.
침례 요한이 옥중에서 자기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인지,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할지 물었다. 메시야라면 군대를 조직해서 비밀리에 군사훈련을 하거나, 산헤드린과 협력하여 로마를 대적할 모의를 하거나, 최소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악인이나 우상 숭배자를 심판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유대 대중의 소망과 기대는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푼수처럼 창녀, 세리, 죄인, 불구자, 귀신들린 자, 병자 등만 만나 교제하고 있으니 속이 탔던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듣고 보는 그대로 가서 전하라고 했다. 소경, 앉은뱅이, 문둥병자, 귀머거리,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말이다. 모두가 21세기 첨단 과학으로도 못 고치는 불치병이다. 인간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이다.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고는 고치지 못한다. 만약 침례 요한이 푼수가 아니라면 그 대답을 듣고 안심했을 것이다. 비록 십자가 구원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해도, 최소한 다른 이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요한의 엄마는 분명 예수님 말씀대로 믿고 그에 맞게 행동했으니 침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었다.
최고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주님은 그 이기적인 청탁을 야단치지도 완전히 거절하지도 않았다. 오직 하나님이 주관 결정할 사항이라고 했다. 당신께서 모르거나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은 그들이 당신을 인간으로 알고 있는데다 성령이 오시기 전이라 십자가 진리를 설명해주어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주관한다고 해서 100%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3절)고 했다. 그들이 누구인가? 예수님이 마실 잔을 함께 마시는 자다.(22,23절) 열두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마19:28)을 다시 확약한 것이다.
예수님이 마실 잔은 십자가 고난으로 흘리실 당신의 피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십자가에 순교할 정도로 100% 충성한 보상으로 높은 자리를 준다는 뜻은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더라도 말이다. 주님의 뜻은 제자들로 그런 자리에 오르도록, 그것도 스스로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당신께서 책임지고 이끄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거나 도망가기 바빴던 그 치사하고 비겁한 자들을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주는 사람으로 바꿔주신다는 것이다. 그 은혜는 현실적으로 형통하고 출세하는 축복이 아니다. 죄에서 씻음 받아 영생을 선물로 얻는, 모든 인생에게 가장 시급하고 소중한 은혜다. 당신이 행했던 동일한 사역에 평생을 헌신토록 만들어 당신처럼 골고다 언덕에 이르는 철저히 고독한 인생길을 땅 끝까지 걷게 만든다는 것이다.
주님은 기독교 교세를 확충하러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과 참 생명으로 이 세상을 완전히 뒤덮으려 오신 것이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새 세상으로 바꾸는 일에 당신의 동역자로 신자를 따로 불러 모으기 위해서 오셨다.
그 일은 종교적 의무로 행할 성질이 결코 아니다. 인간이 다른 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만큼 행복한 일이 없기에 그 일을 기쁨으로 행하도록 해주신다. 예수님의 보혈로 영혼이 깨끗케 되도록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한 죄인을 초대하고, 또 그가 주님을 인생이 변하고, 주님과 함께 교제 동행하는 삶을 살게끔 옆에서 돕고 지켜보는 것만큼 신나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 한마디로 신자로 세상에서 최고로 성공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해주신다.
변덕스런 인간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대중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도 이 푼수 엄마와 똑같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월절 절기인데 모세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축제다. 80이 넘은 노인 한 명이 낡은 지팡이만 들고 말씀으로 당시 세계 최강국 애굽을 상대로 10전 10승 했고 마지막엔 홍해에서 애굽이 세계 역사에 영향력을 더 이상 행사하지 못하도록 결정타를 먹였다. 노인 혼자 그랬는데 지금 젊은 랍비에 수십, 수백 명의 젊은 추종자들도 있지 않는가? 모세 같은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이 모세와 같이 얼마든지 로마제국에 10전 10승해서 이길 것이라고 기대, 아니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다 일주일 만에 등을 지고 돌아선 이유도 아주 간단하다. 완전히 속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너무나 무력하고도 초라한 모습으로 대제사장의 뜰에 잡혀왔다. 온갖 비방과 멸시를 당해도 대꾸하지 않는 것도 아주 비굴해보였다. “이게 뭐야? 지금까지 매직 쇼에 속았단 말인가? 메사아가 아니라 사기꾼이지 않아?”
한국의 연예인들이 말 한마디 잘못해도 그때까지 열광적인 팬이 하루아침에 최악의 안티가 되어서 악플을 달아 자살로 내몰지 않는가? 열정적으로 좋아하던 자일수록 조금만 실망하면 열정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겨우 그렇게 밖에 돼먹지 않은 존재다. 로마를 물리치리라 믿고 새 세상으로 바뀔 기대에 기뻐 날뛰던 자들이 치사하게도 바로 그 로마의 손을 빌려서 죽이려 드는 그런 존재 말이다.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처음의 소망 자체도 과연 진짜였을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인간적 의리조차 아무리 찾으려 해도 없다.
요한의 엄마나, 제자들이나, 유대 대중 모두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못 알아먹어서 푼수가 아니다. 자기들 실상을 정확히 알지 못해 푼수다. 영적으로 파산하지 않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려 오신 것이다. 십자가 구속의 진리는 성령의 깨우침이 없이는 당시나 지금이나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려 시도해놓고 오히려 로마의 손을 빌려 주님을 죽인 것 자체가 사람들이 정말로 벗어나고픈 멍에가 로마의 지배가 아니라는 점을 자기들 스스로 증명했지 않는가? 다른 말로 현실의 질병, 고난, 재물 등이 인간의 평강과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님을 인간들이 무의식적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실체를 자신의 창조주 즉, 부모를 떠나고 그 관계가 파괴되어선 절대로 파악할 수 없다. 자신의 영적 실상을 알지 못하는 영적 푼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해도 갈급하고 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
요한의 엄마가 알고 믿었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거기까지 뿐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알게 해준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 하나 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여 십자가를 마치는 마지막까지 어떠한 가식, 변개, 모략, 모순, 왜곡, 음모, 수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분은 세리와 창녀와 죄인과 어부 같은 자들만 만났다. 산헤드린 공회와 협조하다가 의견이 안 맞아 틀어진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그들이 그렇게까지 미워할 리도 없다. 그분은 처음부터 죄인을 구원하러 왔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선포했다.
그분의 마음과 말과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은 때라곤 없었다. 모든 말과 행동에 그분 전부가 그대로 순전히 드러났다. 변덕 부리고 자기 기분과 소견대로 행한 것은 인간이었다. 제자들마저 자기들을 특혜나 편애를 더 주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대우한다고 불평했다.
그런 그들에게 이 일이 있기 바로 전에 포도원 주인과 품군의 비유로 가르쳤다. 계약대로 행하였기에 하나의 잘못도 없는 하나님이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포도원의 주인으로 신실하게 실행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제로 인간들과 구원의 계약을 맺으셨다. 아담이 타락한 직후에, 아니 태초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예비되어 있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실 은혜를 일방적으로 부어주시기로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하셨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창3:15) 말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짧게는 수 천 년, 진화론자들의 주장으로 치면 수십 억 년이 지난 후에도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한 치의 어김없이 실현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그 크시고 끝이 없는 사랑을 깨닫게 해주려는 뜻이었다.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인간으로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을 유대의 최고 권력 기관과 세계 최강국 로마가 힘을 합해 십자가에 매달았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동원한 것이다. 이보다 더 강력한 수단은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사흘 만에 무덤을 뚫고서 부활하셨다. 인간의 힘을 무력화시킨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인간을 쓸모 없게 만드실 의향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일방적 은혜 언약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보다 사탄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당시 세계 최강 로마 제국은 예수 사건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쪽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을 뿐이다. 대신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치를 떨며 분노하고 두려움에 빠진 것은 사탄이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을 무참히 패배시켰기 때문이다.
지금도 미국을 말씀 한마디로 멸망시킬 하나님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니 당신께서 직접 선포한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었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자, 생명이자 진리다. 성경도, 신학도, 교리 체계도 생기기 전에 푼수 같은 엄마가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진리다.
본문의 말씀대로 신자가 그분이 마신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다면 정말로 그분의 약속대로 당신의 좌우에 앉는 영광을 반드시 누릴 수 있다. 신자는 죽어도 절대 죽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신자를 결코 패배시킬 수 없다. 그 어떤 고난, 질병, 핍박, 시험, 죄악도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잠시 잠간의 고통일 뿐이다.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여 다른 이의 영혼을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것만큼 즐겁고 신나고 기쁜 일이 없다.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이자 최고의 성공이다. 당장에 그러지 못해도 최소한 자기 자신이라도 십자가 은혜와 권능 안에서 주님과 동행만 해도 그렇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 한 마디로 세계 최강국 미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하였어도 니느웨의 육축까지도 사랑하셨듯이 이 미국을 큰 사랑으로 품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 즉, 우리의 부모로서 사랑하시기에 멸망시키지 않는 것이다.
대신에 당신의 말씀 한마디로 이 죄악으로 더럽혀진 미국을 새롭게 거룩하게 바꿀 수 있다. 단 당신의 잔을 함께 마시는 자를 통해서만 그렇게 하신다. 모든 이를 동성결혼 반대 운동에 생명을 걸라는 요구가 아니다.
침례 요한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불치병이 고쳐지는 기적을 보는 대로 전하라고 한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였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말을 절대 잊지 말고 꼭 전해라고 했다. 정작 자신의 메시아 됨의 증거가 그것이었다. 아구스도 황제가 복음이 아니라 당신의 십자가가 복음이라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로마 제국을 물리쳐 준다고 이스라엘이 평강과 안식을 얻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각 사람의 마음에 있는 영적인 로마 제국이 무너져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야말로 가장 무익하고 가장 가난한 자라고 철두철미 고백 회개하여서 낮아지는 자다. 바로 그런 자를 통해서 미국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토록 우리의 아버지로 그 사랑에 전혀 변함이 없으시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떠나가거나 약해 진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그런 사랑을 확신하고서 그 확신한 바탕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주위에 비취게 만들어서 미국을 회복하게 하실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선 똑똑했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푼수였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세상에선 푼수지만 영적으로는 선지자로, 모세 같은 선지자로 세우신다. 주님의 잔을 기꺼이 마시며 평생을 그분을 따라가는 몇몇 사람을 통해서 인류 역사를 이끄신다. 우리 중 대부분이 그런 거창한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자기 가정과 직장 안에서 참 행복, 참 생명, 참 자유, 참 평강을 누리는 최고로 복된 인생은 살 수 있다.
11/3/2013
제자들도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긴 마찮가지였고 환호하던 백성들이 물리치려던 로마의 힘을 빌려 오히려 십자가로 예수님을 몰고가버린 것을 보면 모든 인간들의 문제는 물리치려는 로마가 아닌 자신 안의 로마, 스스로 얼마나 추하고 어리석은지를 모르고 있음이 문제임을 배웁니다.
그러나 저버리지 않으시고 오시어 대신 죽으시며 또 부활하시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어 말씀으로 이루어가시며 만져주시는 그 사랑 때문에 푼수며 생뚱맞기 그지 없고 미워하던 로마의 힘을 빌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와 똑같은 이런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매....이런자를 끝까지 사랑하시매 진정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