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해방을 소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강해 (195)
http://youtu.be/RU-_SvdrA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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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21:1-11)
복음 안에서 승리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러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다. 일주일 후에는 인류 구속의 사역을 완성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이 타락한 죄의 형벌로 인간에게 내린 사망을 뚫고 부활 승리하실 것이다. 당신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사건을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이라고 칭한다. 유대 대중들도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서 환영했다. 고대 왕들을 영접하는 의식인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모신 셈이다. 최소한 메시야로 인정하고 기쁨과 감격으로 맞이한 것이다. 고난 주간이 시작하는 일요일을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 부르며 이 일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린다.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는 당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한 것이다. 금요일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안식일인 토요일 후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셨다. 지금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우리는 주일마다 부활의 감격을 누려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 평소에도 승리의 삶을 누려야 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예배에서 그런 기쁨을 누리며 삶에서 승리하고 있는가? 예수 믿은 지 오래인지라 정서적인 충만함이 없다하더라도 승리를 체험하고는 있는가? 최소한 그런 확신은 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헛된 죽음으로 축소되지 않겠는가? 교리적으로 심각하게 따질 필요까지 없다. 신앙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는가?
물론 우리에게는 십자가와 무려 2천년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차이가 있다.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유대인들조차 승리를 맛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들이 실패한 이유를 안다면 우리가 그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 이유는 익히 배워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로마 지배에서 해방시켜주는 현실적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그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조용히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더 근본적 잘못은 따로 있었다.
로마 해방이 궁극 목적이 아니었다.
한국이 일제 치하에 있을 때에 전 국민의 소망은 해방이었다. 그러나 독립을 쟁취하는 방안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둘로 나뉘었다. 독립군을 조직해서 직접 일본과 전쟁을 벌이자는 측과,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면서 국민을 계몽하여 내적 실력을 배양하자는 측이다. 그런데 각기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절대 상대를 일본 경찰에 밀고하지는 않는다. 개인적 치부에 눈이 어두운 친일파가 아닌 다음에는 말이다. 같은 민족인데다 공통의 목표 달성을 위해 서로 돕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모든 국민이 예수님을 로마에 고발했다. 또 처음부터 예수님 옹호파와 반대파 둘로 나뉘었다. 그럼 공통의 목표가 로마 해방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열렬히 옹호하는 무리(8,9절)와 예수님이 입성하자 “이는 누구뇨?”하며 온 성이 소동하는(10,11절) 무리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니엘조차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요1:46) 했듯이 주님을 멸시 비방하는 말이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정통주류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기에 메시야는커녕 랍비 수준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대중들의 폭발적 인기를 얻자 시기 질투한 유대지도층들의 반응이다. 자기들의 권력과 재력에 손해를 볼까 염려한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로마에 반기를 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면 바로 자살 행위인줄 너무나 잘 알았다. 실제로 가야바 대제사장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할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요11:50)라고 설득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계속 받으면서 자기들의 특권과 신분을 향유하려 했다. 북한의 김씨 세습 왕조에 빌붙어 있는 권력층과 똑 같다.
길에다 종려나무 잎을 깔며 열렬히 환영했던 대중들도 일주일 만에 입장이 돌변했다. 예수님이 로마를 무찌를 시도는 전혀 하지 않고 저항은커녕 말 한마디 않고 잡혀 오는 것을 보았다. 동족인 예수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로마의 힘을 빌려 십자가에 죽인 것은 제사장들의 선동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 선동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너희가 로마에 반역하면 군대가 와서 진압할 텐데 과연 이길 수 있겠는가? 너희만 죽고 고통을 당할 텐데 저 아무 힘도 못 쓰는 사람을 따를 것인가? 시쳇말로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도 몰랐던 한국민족도 하지 않는 악을 범했다. 역사상 최고로 사악하고 비겁한 살인을 자행했다. 유대 지도층과 대중들 모두의 궁극적 관심은 로마 지배의 종식이 아니라 자기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만 가있었다.
하나님이 출애굽의 큰 구원을 베풀자마자 그들 선조도 그랬다. 해변 길로 가면 군대를 보고 두려워할까 잠시 광야로 우회시켰는데 고기와 물이 부족해지자 당장 모세에게 어떻게 불평했는가? 차라리 애굽에 남아 있었더라면 신체적으로 고달플지는 몰라도 고기와 부추를 먹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광야에서 죽느니 애굽의 노예로써 죽는 것이 낫다고 했다. 지금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해방시켜달라고 그렇게 설치다가도 북한식 표현으로 쌀밥에 고기 국 먹을 가능성이 없어지자 당장에 로마의 지배를 자청했다. 1500년 전의 이스라엘에서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인간의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
예수님은 로마 지배를 종식시키지 않아서, 혹은 그 해방하는 방식이 달라서 유대인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만약 로마에서 해방을 시켜주었어도 나중에 또 다른 종족의 침입으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로마 제국과 교류를 못해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 당장 로마 시대가 더 좋았으니 차라리 다시 로마의 식민지가 되겠다고 아우성칠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로마에 전혀 항거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도모할 계획도 짜지 않았다. 아니 유대인들에게 그런 문제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다. 요즘 식으로 민족주체성 교육은 시키지도 않았다. 인간이 갖고 있는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인이 그것이 아니라면 로마에서 해방도 당연히 해결책이 아니다.
유대인 지도자와 대중 모두가 그랬으니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조차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도 바로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먹고 마시는 것의 결핍이라고 본 것이다. 풍족하게 살면 아무 문제도 없고 죄도 짓지 않으며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것이 결코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제발 깨달으라는 뜻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출애굽한 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첫 관문인 가데스 바네야에서 동일한 사건이 있었다. 인간끼리의 믿음의 다툼이라기보다 더 본질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씨름이었다. 유대인들은 승리할 확률은 1%도 안 되고 패배가 99% 기정사실이라고 여겼다. 즉 먹고 사는 문제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 하나님을 배역했다.
그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광야를 40년간 유랑해야 하는 벌을 받았다. 그 유랑의 기간 내내 인간들은 애굽이 더 좋았다고 불평했다. 반면에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하나님은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신8:4)고 지적했다. 조금 고달프긴 했지만 하나님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해 주었다는 것이다. 굶겨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 하는 일 없는데도 말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가장 바라는 바인 무위도식을 시켜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호해준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신8:3) 떡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떡을 우선으로 삼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삼는 두 부류로만 나뉘는데 이스라엘을 택하여 출애굽으로 구원하신 뜻이 그들로 둘째 부류의 사람으로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갈렙과 여호수아 외의 모든 사람들이 떡을 우선으로 하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얻지 못했다.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떡을 우선으로 하거나, 떡을 많이 하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려 드는 자들은 이방인과 동일하게 취급하겠다고 말이다. 그들 곁에 함께 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다.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하는 자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마6:33)는 끝까지 돌봐주신다. 어떻게? 내일 일을 염려치 않는 자가 되게 해주신다. 장래에 먹을 것을 풍성하고 화려하게 쌓아놓게 해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굶어죽게는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야인 까닭?
유대인들이 로마 지배의 종식을 바란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자기만 안락하고 풍요롭게 살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또 그 일을 방해하는 어떤 세력이라도 하나님은 당연히 물리쳐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가데스 바네야에서와 같이 예수님이 오히려 그 일을 방해한다고 여겨지니까 의도적, 능동적, 적극적으로 배역하고서 인간이 하나님 독생자인 메시야를 죽였다.
인간은 철두철미 자기중심적이다. 자기만을 사랑한다. 온 세계가, 주위 환경과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오직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하고 자기를 섬겨야 한다고 믿는 존재다. 유대 대중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린 이유는 한마디로 “에이! 메시야가 아니었잖아!”였다. 메시야마저도 자기들 소견에 좋고 합당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기대하고 예상했다.
주지해야 할 사항은 그 생각 자체가 사악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정말로 먹고 마실 것이 절실했던 자도 있었을 것이며, 또 먹고 마실 것을 우선해도 사치와 탐욕에 눈이 어둡지 않은 자들도 있으며, 무엇보다 로마에서 해방을 바라는 것은 선한 생각이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가 난 것을 회복하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개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맨 위 대제사장에서부터 맨 아래 소경 문둥병자까지, 그것도 예수님의 이적으로 치유 받았으면서도, 자기가 최고이며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님도 자기 뜻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선악의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 자기가 그 기준이 되었고 나아가 자기가 바로 심판자요 구원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나님더러 자기를 섬기라고 요구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스가랴서의 예언(9:9)을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구약의 예언을 성취했으니 메시야라고 이해하고 치우면 안 된다. 그보다 나귀 새끼를 타야만 했던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 그 이유와 목적이 충족이 되었기에 메시야라고 인식해야 한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간단하다. 그 나귀를 타는 모습 그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것이다. 말을 타고 전쟁치는 왕으로 구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화평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인간들은 원수와 대적을 물리쳐야만 구원이 이뤄진다고 여긴다. 반면에 예수님은 로마도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니 항거하지 않은 것이다. 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당신을 비방 멸시한 자들마저 구원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를 용서하고 품어주는 모습으로 즉, 원수까지 사랑하는 모습으로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유대 대중이 로마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요구는 분명히 선한 것이다. 일제 치하에 있던 한국이 독립을 소원한 것도 선하다. 하나님도 원하시는 의로운 일이다. 문제는 그 일을 하나님이 반드시 이뤄줘야 한다는 고집에 묶여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생각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일을 예수님이 방해하는 듯이 여겨지자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친 것이다.
인간의 근본 문제가 먹고 마시는 것의 결핍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자다. 신자는 거기에서 하나 더 나아가 오직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만 하는 사고를, 이는 불신자에게도 당연히 또 더 해당되긴 하지만, 여전히 버리지 않는 것이다. 한국 민족 전체가 일제 치하에서 동족을 배반하는 치사한 죄악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처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가운데 예수님이 오시어 성경 기록된 대로 행하면 한국인들도 유대인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똑 같이 저지를 것이라는 뜻이다.
저희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하시리라.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 오시기 약550년 전의 사람이다. 그보다 약 250년, 예수님 전 800년에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있었다. 그 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에 빠졌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 고멜이 혼외정사로 낳은 아들과 딸의 이름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심판할 것을 선언했다. 그 이름의 뜻은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 나도 너희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 등이었다. 하나님을 배역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이며 엄중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지 깨달으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런 와중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호1:7)고 했다. 바로 어린 나귀 타는 모습으로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앞에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다고 했다. 구원은 당연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왜 이런 말씀을 덧붙였겠는가?
저희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저희가 멋대로 생각하는, 자기 소견대로 기대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그렇다면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즉, 말과 칼의 구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저희의 온전한 하나님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제대로 온전히 알아서 그대로 인정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끔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당신의 긍휼하신 성품에 따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떡을 우선으로 삼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삼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종교적 율법을 준수하고 도덕적 선행에 열심인 자가 아니다. 그 이전에 선악을 정하는 절대적 기준을 하나님에게만 두는 자다. 하나님을 정말로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자신의 중심에 모시는 자다. 하나님을 밀어내었던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을 다시 모셔드리는 자다. 인간의 영원한 살고 죽음이, 또 인생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하느냐 아니냐에 달렸음을 믿고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정말로 인간이 기대했던 메시아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을 사셨다. 유대인들은 지상최대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매직 쇼를 기대했었다. 모세가 애굽에서 행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더 크고 어마어마한 기적들을 보여주리라 예상했다. 예수님이 비록 나귀 새끼를 탔어도 로마 군인이 주둔해 있는 병영으로 먼저 가리라 믿었다. 말 대신에 나귀를 타고 신나는 활극으로 무찌르면, 마치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하듯이, 정말로 그 능력이 더 뛰어나 보이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 병영이 아니라 오히려 성전으로 향해 성전의 부패상을 지적했다. 로마에서 해방을 요구하는 의로운 유대인들을 도리어 죄인이라고 선포했다. 그들의 의로운 민족해방전선에 전혀 동참하지 않았다. 그 의로운 일을 메시야가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훼방한다고 보았다. 자기들 뜻이 완전히 무시당해 자존심이 극도로 상했던 것이다.
예수님보다 550여 년 전의 스가랴 때나, 600여 년 전의 이사야 때나, 800여 년 전의 호세아 때나, 거슬러 올라가 아담이 타락한 직후나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은 똑 같았다. 자신의 죄로 인해 부패된 세상에서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는 광야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그 광야에서 인간의 살 길은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을 절대로 신뢰하고 또 절대로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정말로 하나님답게 모시고 그분의 인도만 따라야 한다.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부터 그것이다.
주님은 고난주간 동안 인간의 기대에 전혀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그분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다우심에 단 한 치의 손상도 없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망하고 실패한 이유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십자가 구원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요컨대 인간은 자기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을 모르기에 바로 그것을 깨우쳐 주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신자가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은?
신자가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가? 교회 생활에 충성하지 않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뒤로 호박씨 까는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는 삶을 사는 것인가? 아니다. 여전히 내 기대대로, 내 생각대로만 하나님을 믿고 있거나 믿고 싶은 것이다. 자기 뜻과 계획을 하나님 앞에서마저 끝까지 고집스럽게 버리지 않는 것이다.
자기 소원과 계획을 오랜 동안 기도했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사태는 오히려 악화되면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만을 품고, 싫어지고, 부인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끈질기게 울부짖었으나 아무 응답이 없으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광야 유랑 때와 고난주간 동안의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사태가 진행되어지지 않으면 믿음은 떨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식어져서 형식적 의무적으로 신앙생활을 겨우 이어가는데 어찌 승리를 맛볼 수 있겠는가? 복음이 복음답게 전혀 역사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인 이유는 무엇인가? 너무 교리를 앞세워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어 내 죄를 다 사해주셨다는 원론적 답변을 하지 말라. 정말로 십자가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내 생각과 내 길과 다른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복음인 것이다. 내 기대 예상대로 구원해주지 않았기에 복음인 것이다.
한번 가정해보라. 우리의 이 어리석고 무지한 생각대로 구원해 주셨다고 말이다. 마병과 칼로 로마에서 해방시켜주듯이 말이다. 그럼 또 다른 위험과 고난이 닥치면 당장 이전으로 돌려달라고 아우성치지 않겠는가?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하며, 거짓되고, 변덕이 많은 우리 생각대로의 구원, 나아가 죄에 찌든 모습의 구원 밖에 더 되겠는가?
인간은 예수님이 자기들 소원을 훼방했기에 즉,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여겼기에 십자가에 죽였다. 하나님의 뜻과 길은 전혀 달랐다. 정반대로 그런 오해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제발 알라는 뜻이다. 창조 때부터, 아담이 타락했어도, 호세아, 이사야, 스가랴 때에도 단 한 시도 인간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온전히 알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본문의 승리의 입성 기사에서 예수님의 승리에 대해선 사실상 크게 주목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주님의 십자가 부활 승리의 권능과 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승리 외에는 없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든 반드시 큰 승리만 이룬다. 인간이 이해 못하고 오히려 불평할 정도의 상황에서도 반드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시며, 다 끝나고 나면 신자에게도 가장 유익한 승리가 된다.
문제는 신자들이 그런 승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신자의 승리는 자신의 실상을 온전히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가장 큰 문제가, 또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승리할 것은 너무 당연한 이치이지 않는가?
자신을 가장 잘 알기 위해선 하나님부터 깊이 알아야 한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경에 절대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성령의 깨우침을 구하여 온전히 깨달아야 한다. 또 그 앎을 실제 삶의 세밀한 부분에서부터 꾸준히 적용하고 순종하며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받는다. 자신의 그릇을 그분의 은혜가 채어질 수 있도록 자꾸 비우고 고쳐나갈 때에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신자가 하나님을 모르는 만큼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내 생각대로 하나님이 이뤄주어야만 성공이라고 여기는 바로 그 고집스런 생각 혹은 경향부터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다리는 것은 실패뿐이다.
11/24/2013
하나님의 진행해 가심, 인도하여 주심 속에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음의 축복이 실은 가장 커다란 축복인 것과 예수님의 그 따뜻한 숨결과 손길을 느끼며 동행함의 축복 속에 진정의 순종이 무엇인지를 더 곰곰 묵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