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재림의 때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법
마태복음강해 (222)
http://youtu.be/3u4Zz324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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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23:37-39)
호칭을 바꾸신 예수님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를 일곱 번 질책한 후에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다. 앞에서 일곱 번 꾸중할 때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고 지칭하면서 시작했다. 지금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37절)라고 부르셨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유대 종교의 본산이다. 또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백성들로 타락케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꾸중에서 지적한 대로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 것이다. 거기다 백성들 안에도 탐욕과 방탕이 가득 찼기에 거짓 가르침에 부화뇌동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 친 것은 백성들이었다.
유대인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회당에서 율법 교육을 받는다. 조금만 영적으로 깨어 있어도, 아니 기도만 열심히 했어도, 아니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뒤로 물러서서 기본 양심에만 비춰 봐도 선지자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몰라도 죽이기까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인간 영혼의 타락상은 스스로의 상식과 이성과 양심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할 정도다.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사탄이 조종하는 집단적 광기에 휩싸일 뿐이다. 이는 예수님 오시기 직전과 당대에만 아니라 모든 세대에게 해당된다. 지금도 예수님의 초림 때와 그 영적 실상이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예수님은 이 결론에서 유대 지도자에 대한 앞선 일곱 꾸중을 이스라엘 백성 전부에게, 또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시켰다. 어느 인간도 그 질책에서 벗어날 수 없고 직접적인 대상은 신자들, 특별히 목회자들이다.
그래서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38절) 될 것이라고 했다. 집도 성전과 국가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유대 성전은 파괴되고 이스라엘 나라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인데 알다시피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미래의 역사를 사전에 경고하여서 국방력을 증가해서 외적 침입에 대비하라든지 이민 갈 준비를 하라는 뜻이 아니다.
속수무책(束手無策)인 하나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주어의 위치에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 인간끼리의 다툼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다. 그 이전에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심판인데 그 주체가 바로 주님 당신이라는 뜻이다. 당신께서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으려 한 적이 몇 번이냐고 하셨다.(38절)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껏 핍박 받고 순교한 선지자들 모두를 당신께서 보내셨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 쾌락과 우상 숭배의 죄에서 돌이키게 하려는 것이다. 이스라엘더러 하나님의 선민(選民)으로서의 본래 위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공평과 정의가 물 같이 흐르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주위 열방들에게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어둠이 더 좋아 참 빛이신 주님을 죽여 버렸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소명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자기들 탐욕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실현하려 했다.
그래서 너희는 “버린바”(38절) 된다고 했다. 성전이 로마에 의해 짓밟히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는 차원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린바 된다는 것이다. 선민으로써 특별한 지위와 신분이 박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죽였으니,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서도 속수무책이다. 그들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하나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실망하여 분노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이 싫거나, 아예 자포자기했거나, 앙갚음 하려고 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감히 나를 십자가에 매달다니 지옥에 보내고야 말겠다는 식의 의도나 감정은 추호도 개입되지 않았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실감나지 않지만 원문표현법으로는 비탄을 시로 표현한 애가(哀歌)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아를 거푸 두 번이나 애끓는 심정으로 부른 것이다. 하나님에게 속수무책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아예 없다. 이스라엘이 원치 않고 제 발로 걸어 나간 것이지 당신께서 버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버린바 된 것이다.
앞선 일곱 번에 걸친 예수님의 질책도 저주가 아니라 마지막 완전한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의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며칠 후면 골고다 십자가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니 실제로 모든 피를 쏟으며 하나님께 제발 돌아오라고 온 몸으로 호소할 것이다.
결론 중의 결론
주님은 결론 중의 결론인 39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고백할 때까지 당신을 보지 못한다고 하셨다. 당신을 보길 원하지 않아 십자가에 매달 테니까 앞으로 보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영원히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고백을 하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원하지 않았던 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필연적 결과였다. 다시 볼 수 있다면 그 타락한 본성의 멍에를 벗어나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고난주간 첫 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동일한 찬양을 했지 않는가? 그럼 비록 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이 분명히 권세 있게 가르쳤고,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하는 능력을 드러냈음을 인정했다. 모세마저 못한 죽은 자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했다. 대중들은 주님을 메시아로 인정했다.
문제는 주님이 자기들 소원과 요구는 전혀 거들떠보지 않아서 심사가 뒤틀렸던 것이다. 예수님은 과부, 고아, 창기, 민족반역자인 세리와 사마리아 여인, 문둥병 같은 불치병 환자, 나면서 소경 같은 불구자, 귀신 들린 자들과만 상대하고 교제했다. 거기다 갈릴리 변방의 무식한 어부들을 제자로 삼아서 사역했다. 보통사람들이 세상에서 풍성하고 고상하게 살게 해주는 일에는 도무지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대신에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밥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며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율법을 외우며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라고 가르쳤다. 자기 동족을 배반하는 세리나 사마리아인과는 상대하지 말며 할례를 받지 않고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인과는 식사 교제도 말라고 하니 예수님보다 훨씬 신령해 보였다.
또 비천하고 추해서 죄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높은 직분의 사람들과 교제하니 자기들도 덩달아 이전보다 더 의롭고 경건해진 것 같다. 여러 경제적 정치적 도움도 받을 수 있다. 자식들을 율법 교육을 잘 받게 하고 필요하면 로마에 유학을 보내어 선진 학문과 기술로 출세시킬 기회도 많다. 어쩐지 아주 익숙한 사고요 행태 같지 않는가? 오늘날 대형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심정과 너무 비슷하지 않는가 말이다.
예수님을 언제 다시 볼 수 있는가?
유대 백성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큰 능력에 감동을 받아서 그분의 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다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이 그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들보다 더 무력해 보이니까 며칠 만에 방향을 바꾸어 유대 지도자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그들의 실패는 주님을 메시아로 몰라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감당할 사역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고난주간 첫날에 불렀던 찬양은 불완전했던 것이다. 마치 외국인이 한국 가곡을 가사 대로는 부르되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타락한 영혼에 중생의 씻음을 베푸는 것만이 인간이 참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럼 예수님을 언제 누가 다시 볼 수 있는가? 주님의 재림은 언제 이뤄지는가? 신약성경에 계시된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깨달아 그 진리 안에 살아가며 그 진리로 자유하게 된 자다. 이전에 종교를 가졌던 안 가졌던, 하느님 혹은 천지신명 어떤 이름으로 불렀던 절대자에게 이 땅에서의 출세와 형통을 위해서 빌었다. 그러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부턴 이전에 빌었던 그 소원과 요구가 얼마다 헛되고 틀린 것인지 철저하게 인식하게 된 자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으로 자기 인생의 목적과 소망으로 대체한 자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그랬던 것처럼 소외되고 비천한 자들을 먼저 찾아가 사랑으로 섬기고 있는 자다. 그 일이 인생에서 다른 어떤 풍성하고 화려한 일보다 최고의 의미와 가치와 기쁨이 있음을 알아서 실제로 실천하며 누리는 자다. 한마디로 하나님 쪽으로 자기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돌린 자다. 그래서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세상살이가 소중하지 않거나 의미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것이 더 이상 목적과 소망이 되지 않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땅에서 한 번뿐이고 그것도 아주 짧아 유한한 인생이기에 너무나 소중하고 의미가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 아니 유일하게 소중하고도 의미가 있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깨달아서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만 회상해도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속에서 39절과 같은 고백과 찬양이 솟구치며 눈가에는 저절로 감사의 눈물이 맺힌다. 주님을 다시 본 것이다. 하늘의 영원한 참 생명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된 것이다.
화해가 불가능한 이스라엘과 아랍
이 일곱 저주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시편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새 노래”를 부르며 영접하지 않으면 어느 세대 어떤 인간도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이 결코 냉혹하고 비정한 선언이 아니다. 불신자들이 흔히 비판하듯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벌을 주는 차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님의 포도원과 농부의 비유를 쉽게 바꿔 보겠다.
원수가 된 두 집안이 있었다. 아무 잘못이 없는 완전 100% 피해자 가족 측에서 먼저 화해를 요청하려고 종들과 아들들을 보냈는데 가해자 측이 다 죽여 버렸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찾아가 지난 잘못은 절대 묻지 않을 것이며 피해 보상도 필요 없고 아무 조건 없이 제발 이전의 사이좋았던 관계로만 돌아가자고 호소했는데도 그 아버지마저 죽여 버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린 막내아들만은 숨겨두었다. 그 아들이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장성했고 다시 그 원수의 집안을 찾아갔다. 곧바로 복수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여전히 이전과 동일한 메시지를 전했다.
본문 39절 말씀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그 순전한 찬양을 부르는 자를 찾으러 오신다는 뜻이다. 이런 사랑과 긍휼과 은혜와 축복이 도대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거푸 부른 것이 주님의 이 애끓는 심정의 표현인 것이다.
인간 사회에선 방금 비유한 이런 일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아들 한 명만, 아니 종 한 명만 죽여도 철천지원수가 되어 대대로 복수가 이어진다. 그 전에 피해자가 먼저 찾아가 화해를 요청하는 법도 거의 없다.
아브라함이 첩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추방했다. 본처 사라가 후손을 보기 원해서 자기 몸종인 하갈더러 남편과 동침하기를 허락하여 얻은 아들이다. 그 은혜를 잊고 주인인 사라를 멸시했기에 쫓아냈다. 그 사건 이후로 이스라엘과 아랍은 4천 년이 넘도록 도무지 화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이 Map-Out 즉,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절되어야만 겨우 해결될 문제다.
이 두 민족은 어떠한 민족인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민족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알라와 여호와에게 기도한다. 비록 상대적이고 불완전하지만 각기 나름대로의 엄격한 도덕률을 철저히 준행하고 있다. 예컨대 동성애나 간음한 자는 사형으로 다스릴 정도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비춰봤을 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인간적 탐욕과 방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참 생명이요 참 빛인 주님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선지자를 보내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39절 찬양의 의미를 제대로 완전히 알고 부를 수 있을 때에 재림하시겠다고 약속했다. 그 때까지는 죽어 마땅한 이스라엘과 전 인류에 대한 심판을 유예하겠다는 뜻이다. 그 동안에는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면서 선지자를 계속 보내겠다는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지금도 사도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구약시대처럼 인간 선지자의 모습으로 보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온전하게 계시해놓은 신약성경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바로 선지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목사가 그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면 선지자의 역할에 동참하는 것이다.
온전하게 전하고 가르쳐진 십자가 복음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여 항복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다시 볼 기회는 영원히 차단된다. 반대로 그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면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동행해 주신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와 목사가 이런 하나님의 선지자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초자연적 계시나 능력을 드러내는지 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십자가 복음을 맡은 자로서 과연 복음을 참 복음답게 가르치고 실천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더러 주님을 새 노래로 찬양하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십자가, 구원, 죄, 지옥, 심판, 같은 말은 교인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문장이 아니라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않으려 한다. 강단에서 십자가 복음의 외침의 소리가 작아지다가 아예 소멸되려 한다. 예수님이 일곱 번 질책한 윤리적 종교적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둘째 문제다. 십자가 구원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외치는 자들은 앞뒤가 꽉꽉 막힌 보수 꼴통이라고 매도한다.
교회와 목사가 절대 범해선 안 되는 죄가 무엇인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다. 성령의 첫 째 가는 역할은 한 죄인의 영혼을 거듭나게 해서 예수를 주라고 시인케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라고는 분명히 인정하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분이 어떤 메시아이며 무슨 사역을 감당했으며 그 결과가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그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온전하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 바꿔 말해 참 복음이 전파되는 것 즉, 성령의 첫째 핵심 역할을 훼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 신약성경의 진리의 말씀을 죽이는 결과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두 가지 목회철학
예수님은 이 일곱 저주로 모든 세대의 모든 목회자에게 직접 목회철학을 가르친 셈이다. 목사들이 이 일곱 잘못만 범하지 않아도 영적 부흥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교회가 성장하든 안 하든, 목사의 이름이 높아지던 아니든, 하나님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케 하고 그 십자가 은혜 앞에 온전히 항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소망이다.
엄격히 말해 이 일곱 질책은 주님의 목회철학이 아니다. 이런 저런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니까 잘 봐주어야 소극적 수동적 목회철학일 뿐이다. 주님의 첫째 꾸중이 무엇이었는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천국 문을 닫고 자기들은 물론 백성들도 못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천국 문 밖에 있는 자들로 사실상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국 문 안에 들어간 이후라야 온전한 목회를 할 수 있다.
목사가 적극적 능동적으로 수행해야 할 주님의 온전한 목회철학은 따로 있다. 바로 산상수훈 첫 머리에 나오는 팔복강화다. 이 또한 감탄문의 찬양 시 형태로 말씀하셨다. 복 중에서 진짜 최고의 지복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 첫째 복으로 심령이 가난해지면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고 했다. 천국 문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심령이 가난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도리어 자기들 심령이 풍성히 넘치기에 가난해질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소망해본 적도 없었다. 천국을 자기 것으로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 겸손하고 검소한 생각을 갖는 도덕적 의미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은 완전히 무익, 완전히 무력, 완전히 무자격, 완전히 무공로임을 철두철미 시인하는 것이다. 깨어지고 깨어져서 더 이상 깨어질 것 없이 완전히 깨어지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더 이상 낮아질 곳 없이 완전히 낮아진 심령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나오면서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일하게 필요하고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뿐임을 고백하는 마음이다. 바로 본문 39절의 고백을 하는 목사가 되라는 것이다. 그럼 천국이 저희 것이 되며 또 교인들로 동일한 찬양을 부르게 하여 주님을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예수를 만나 믿고 난 후에는 자기 심령의 가난함을 애통해 하고, 성품이 온유해지고, 의에 주리게 되며, 이웃들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을 청결케 가꾸고, 죄인들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만드는 자로 자라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단계의 지복까지 받을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핍박받고 순교하는 자리이다.(마5:10-12)
주님의 일곱 저주에서 유대 지도자들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이자, 천국 문 밖에 있는 자들이 그 문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 범한 바로 그것이다. 선지자들과 예수님마저 죽임을 당한 그 자리에 이르는 것이 신자의 복 중에 최고의 복이라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신 십자가 순교의 바로 그 자리에 이르렀으니 그 얼마나 큰 영광인가? 박자, 음정, 화음 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한 새 노래로 찬양할 수 있는 때와 장소 바로 주님이 재림하는 곳이다.
스데반, 바울, 베드로 등 기독교 믿음의 선조들이 도달한 곳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부터 낮아지려 하지 않았다. 선조들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선지자들의 무덤만 크게 만들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비석 장사를 한 셈이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것이 일곱 저주의 마지막 즉, 목사가 범하는 최악의 죄라고 선언했다. 반면에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치사한 베드로는 스승처럼 십자가에 달리는 것도 자기에겐 너무나 과분하다고 여기고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팔복 중의 최고의 복을 누린 것이며 신자로써 최고 영광의 자리에 이른 것이다.
본문은 먼 미래에 있을 주님의 재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 세대의 신자와 목사를 꾸짖는 말씀이다. 일곱 질책을 받을 잘못은 지금 당장 중지하라는 것이다. 대신에 팔복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라는 것이다. 죽은 후에 영생과 영벌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인생의 방향을 병아리가 어미 닭의 품으로 들어가듯이 예수님 쪽으로 완전히 바꾸어서 참된 의미와 가치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자기 이름을 높이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심판을 유예시키는 뜻을 정확히 깨달아서 제대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신자들로 십자가 복음의 은혜 가운데로 온전히 들어오게 해서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6/8/2014
세월호 사건으로 유병언의 구원파가 뉴스의 일면을 차지하고 거기에 구원파 성도라는 사람들이 나오는데요....
이들을 보면서 눈이 있어도 보지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구나 ...하면서도 그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기성교회들도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종교인이 봐도 너무나 잘못된 길을 가고있는 대형교회 목사들...그러나 그곳에는 그목사를 따르는 수많은 신자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