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꼭 가져야할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지혜
마태복음 강해(230)
http://youtu.be/hy8pTp1qZ4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 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은 율(律)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4:44-51)
악한 종의 실상
종말을 대비하는 신자의 자세에 관한 예수님의 첫째 당부는 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 종말이 반드시 임하므로 자기 세대의 영적 징조들을 잘 분별하라는 것이다. 오늘 살필 내용은 둘째 당부로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44절)
깨어 있는 것은 영적으로 각성하라는 뜻이다. 예비하는 것은 그렇게 각성한 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다. 영어로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하다. 깨어있는 것은 ‘watch’로, 예비하는 것은 ‘prepare’로 번역되었다.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46절)이라고 했듯이, 주님이 언제 다시 오더라도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살고 있으라는 것이다.
주님은 종말을 예비하고 있는 모습을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으로 대조해 각각의 대표적 행위 하나씩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악한 종은 세상 쾌락을 즐기며 지내는데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비하지 않는 원인이 잘못된 종말관 때문이라고 밝혔다. 반면에 충성된 종은 주위에 선행을 베푸는 모습이긴 해도 특별히 종말을 따로 예비했다는 언급이 없다. 그럼 윤리적으로 선하게만 살면 종말을 잘 예비하는 것인가? 신자는 어떻게 종말을 예비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49절 말씀을 다시 보자. “친구들과”라고 하지 않고 “술 친구”들과 먹고 마신다고 했다. 세상 쾌락을 즐기거나 금전적 성적 죄에 탐닉하는 잘못을 지적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표현이 아니다. 예수님도 포도주를 마시며 사람들과 교제를 나눴다. 본문은 술 자체나 음주 행위의 선악 간을 논하려는 뜻이 아니다. 친구들이 전부 술 친구들 뿐이라는 것이다.
종말이 더디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차츰 안 올 수도 있다고 생각이 바뀌게 된다. 내 생애에는 없겠지 하다가 종말을 잊고 무시하게 된다. 그러다 심판은 아예 없고 이 땅의 삶이 전부라고 여기는 불신자들과 항상 어울리게 된다.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하나님을 알기 전과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몸만 교회 안에 있지 마음은 완전히 세상에 가있는 자다.
동무를 때린다고 했는데(49절) 술 먹다가 감정이 격앙되어 시비가 붙었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은 동무를 때리는 것을 술 마시는 행위보다 먼저 말씀하셨다. 멀쩡한 상태에서 행한 것이다. 세상의 것으로 시기하며 다투다가 강자가 약자를 핍박하고 수탈한 것이다. 또 그 수탈한 재물로 끼리끼리 모인다고 비슷한 동류끼리 모여 매일 술판을 벌린 것이다. 이와 대조하면 선한 종에 대한 설명이 더 분명해진다. 정당한 재물로 서로 돕고 섬긴다는 뜻이다.
지금 예수님이 감람산 강화에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종말에 어정쩡하게 유보되는 중립지대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구원과 심판 둘 중 하나로 나뉜다. 데려감 아니면 버려둠을 당할 뿐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갈린다.
본문도 “주인의 모든 소유를 받을 자”(47절)와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律)에 처할 자”(51절)로 나뉠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칭하면서 일곱 번이나 “화가 있을찌어다.”라고 질책하셨다. 모든 인간이 천국 영생이 보장된 자와 하나님의 영벌을 받을 자로 나누려고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종말신앙이다.
악한 종이 비록 더디 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재림이 아예 없다고는 믿지 않았다. 종말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다가 없는 것처럼 살게 된 것이다. 종말이 정말로 불시(不時)에 닥칠 수 있다는 확고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깨어 있으라는 첫째 당부를 무시한 것이다. 깨어 있지 못하면 예비할 수 없다. 정말로 깨어 있다면 당연히 예비하게 된다.
본문의 두 종이 전문 목회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주에 살핀 대로 밭을 매는 자는 남자, 맷돌을 가는 자는 여자로(40,41절) 모든 인간을 통칭한다. 또 사람들이 통상적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때에 종말이 임한다.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당장에 종말이 임할 수 있다. 결국 “깨어서 예비하고 있는” 것은 신자가 평소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할 믿음의 자세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그래서 종말론적 신앙이다. 종말이 반드시 있다는 것부터 출발된다. 역으로 말해 주님이 더디 오신다는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신앙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종말의 시기를 단정하여서 혹시 휴거에서 누락될까 불안하기에 세상의 것 모두 정리하고 집단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종말주의자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세상 속에서 성실히 열심히 살되 천국 영생을 소지한 자답게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반드시 종말과 재림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바로 올바른 종말관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드릴 질문이 몇 가지 생겼다. 가장 먼저 종말이 불시에 임할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있는가? 동일한 내용이지만 질문의 형식을 조금 바꿔보자. 내가 지금 당장 죽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가? 육신의 죽음은 그 개인에겐 바로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게 불시에 주님이 데려가셔도 하나도 억울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할 자신이 있는가? 질문이 하나 더 남았다. 그렇게 죽은 후에 곧바로 하나님의 보좌 앞 주님의 품 안에서 눈을 뜨리라고 확신하는가? 혹시라도 갈수록 “yes.”라는 대답 소리가 작아진 것은 아닌가?
믿음이 객관적 진리에 동의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그 객관적 진리가 반드시 자신의 절대적 체험으로 겪어져야 한다. 또 그래서 앞으로 더 확실하게 겪게 될 것이라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어야 한다. 선한 종은 주인의 모든 소유를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47절) 주님이 왜 ‘모든’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겠는가? 이 땅에서부터 그 소유의 일부를 미리 소유해본 자라면 나중에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음도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계획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의 과정을 생각해보라. 내 모든 죄악을 내 스스로는 도무지 씻을 길이 없었다. 철두철미 하나님을 반대하며 그분과 원수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그 모습 그대로 품어주시고 용서해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항복케 하고 주님의 보혈로 덧입혀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성령이 역사하여 거듭나는 체험을 한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몰랐던 이전의 나로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 확고히 섰다.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방향전환이 일어났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
그 변화는 내 쪽에서 수고도, 계획도, 심지어 소망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다. 하나님이 태중에서부터 나를 택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꿇어 엎드리게 만드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도하신 그분의 은혜임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 후 지금까지 동일한 권능으로 완전히 붙들어주시고 계심을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실제로 체험하며 살고 있다.
쉽게 말해 내가 하나님을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가 믿기 훨씬 이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 이 자리의 이런 모습으로 이르게 된 것이 하나님 쪽의 수고요, 계획이요, 소망이었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계획대로 내 인생이 이끌리고 있음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기에 죽은 후에도 내가 눈을 뜰 곳이 예수님의 품 안이 아닌 어떤 다른 곳이 절대로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 불시에 닥칠 것처럼 나도 언제든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신자는 이미 예수님의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소지하고 있기에 억울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 한마디로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된 것이다. 또 그것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가장 기본적인 뜻이다.
죽음은 육신의 생명의 마감이자 지상에서의 호흡과 심장 박동이 멈춘 것에 불과하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완전히 멸절된 것이 아니다. 이 땅에의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귀하고 아름답고 순수하며 풍성한, 나아가 예수님처럼 영원하고 신령한 생명이 죽음 이후에서부터 시작됨을 알게 된 것이 바로 기독교 믿음이다.
죽음이 두렵다고 신앙과 상치되지 않는다.
물론 육신의 죽음은 어느 누구도 두 번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아무도 구체적으로 가르쳐 줄 수 없다. 간접적으로 대리체험조차 할 수 없는 유일한 사안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는 체험이다. 너무나 생소한 일이다. 대개의 경우 육신의 기력은 소진하고 질병의 고통 중에 죽게 된다. 두려울 수밖에 없다.
거기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친지 등과 내 의지, 바람, 계획과는 전혀 무관하게 강제적인 이별을 당하는 것이다. 슬프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죽음을 가능한 미루고 이 땅에 더 오래 남아 있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든다고 해서 종말론적 신앙과 절대 상충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이 땅이 싫어서 당장에 천국 가고 싶다는 것이 잘못된 신앙이다.
바울은 이 땅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장막이 예비 되어 있기에 어서 빨리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고 고백했다.(고후5:1-8) 그와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입신(入神)하여 천국을 실제로 다녀왔다. 그곳에 슬픔이 전혀 없고 희락만 있는 것을 보고 왔다. 하나님 보좌 앞에서 24장로가 흰 세마포를 입은 수많은 성도와 함께 거룩, 거룩, 거룩, 장엄하게 찬양하는 소리를 듣고 왔다.
반면에 이 땅에선 보통 사람은 한번만 맞아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는 등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었다.(고후11:23-27) 말년에는 로마의 지하 감옥에 갇혀 십자가 처형이 언제라도 시행될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땅보다 천국을 강하게 소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초대교회를 설립하고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확정해야 하는 역사상 한 번뿐인 특별한 소명을 받았던 자다. 그래서 남들은 감당도 못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십자가 복음 안에서 천국 영생을 이미 소지했기에 담대하게 이겨내는 모습을 불신 세상 앞에 보여주어야만 했었다. 그의 일생은 물론 그 순교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뜻 안에 있었다.
하나님은 저를 비롯한 오늘날의 신자들 모두를 그런 특별한 계획으로 부르지 않으신다. 본문 식으로 표현하자면 종말을 대비해서 깨어서 예비하는 모습이 바울처럼 특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다. 세상 종말에 대한 징조와 시기를 분별하기 이전에 자기 개인의 종말을 잘 예비하라는 것이다. 과연 죽음 이후를 염려하지 않는지, 아니 죽음 이후가 오히려 인생의 소망이 되어있는지 항상 점검하라는 것이다. 요컨대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확실하게 되어 있는지 여부다.
언제 불리어갈지 모른다면 천국 가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로 잘 사는 길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죽을 준비가 확실히 되어 있지 않으면 제대로 살 준비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인지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육신의 죽음이 두렵고 생소하기만 해서 이 땅에 가능한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이 결코 헛된 욕심이 아니다. 반대로 종말을 대비하는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있다. 단 예수님과 항상 동행하면서 천국의 궁극적 영광을 이 땅에서부터 일부를 맛보고 있다면 말이다. 바울이 어서 빨리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고백한 후에 결론을 어떻게 내렸는가?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예수님이 가르치신 종말을 예비하는 모습.
예수님은 종말을 예비하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45절)다. 그 집사람은 종의 가족이 아니다. 주인이 맡기고 떠난 주인집의 사람들이다. 그 안에는 당연히 종의 가족도 포함된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 종말을 대비해서 비상식량을 쌓아놓고 조금씩 나눠주어 끝까지 잘 버티게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때를 따라 나누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우선 다른 이에게 “꼭 필요할 때”를 말한다. 여기서 종은 먼저 믿은 신자로 믿음이 성숙한 자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과 함께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서로 격려 위로하여 이 땅에서의 고난과 슬픔과 상처와 핍박을 함께 이겨나가라는 것이다.
둘째는 양식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신자는 하나님께 먼저 용서 받은 죄인이다. 그래서 아직도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소개해주어야 한다. 흔히 비유하듯이 먹을 양식을 먼저 발견한 거지인 신자가 다른 거지들 즉, 불신자들에게 그 먹을 것이 어디 있는지 장소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불신자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줄 믿고 죽음이 그저 두렵기만 해서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서로 때리는 일에 파묻혀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다. 그들에게 죽음 이후의 영광을 알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 땅에서부터 그 영광의 일부를 이미 소지한 자답게 정말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하며 순수하고도 풍성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죽을 준비가 확실하게 되어 있기에 오히려 이 땅의 한 번뿐이고 짧은 인생을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정말로 온전한 참 인간답게 잘 살고 있음으로써 주위 사람으로 시기 나게 만들어야 한다. 불신자들은 세상의 소유를 두고 서로 다투며 질투한다. 신자는 자신의 존재와, 삶의 방식과, 인생의 방향으로 남들로 질투 나게 만들어야 한다.
신자가 종말을 예비함에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바로 나에게 하나님이 맡겨준 집이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양식을 나눠줄 식구들을 하나님이 붙여주었음을 알아야 한다. 당장의 내 남편과 내 아내부터가 그러하다. 하나님이 붙여주셨기에 절대 내버릴 수 없다. 야단치거나 미워하거나 싫어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긍휼만이 절실하게 필요한 똑같이 연약한 존재임을 알아서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자식이 아무리 속을 썩이더라도, 심지어 마약과 갱 짓만 해서 자식이 아니라 원수 같아도 하나님이 내게 양식을 나눠주라고 맡긴 식구다. 나의 자녀이기 이전에 그분의 자녀다. 끝까지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한다. 자녀를 노엽게 말아야 한다. 대신에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왜 괴로워하는지 그들의 입장으로 완전히 내려가서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바라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마련해주어야 한다.
어떤 면에선 가족은 혈연의 정이 있어서 믿음이 없어도 자연히 그럴 수 있다. 그보다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주는 것 없이 싫고 귀찮은 사람들에게 그래야 한다. 그들과 교제하는 것이 번거롭고 까다롭기만 해서 나의 시간과 금전에 손해가 일어나도 하나님이 내게 맡겨준 사람이요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주님처럼 낮고 낮아져서 상대를 높이고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섬겨야 한다. 내 인간적 의지나 성품으로, 또 현실적 여건이 그럴 만큼 도무지 따라주지 않는다면 최소한 주님께 올려드려 주님의 사랑으로 역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는 해야 한다.
어떻게 충성하고 지혜로워야 하는가?
바울은 우리가 감당하지, 아니 상상도 못할 엄청난 고난을 담담히 이겨냈다. 그러나 그런 고난보다 그를 더 괴롭히고 안타깝게 만든 것은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과 사탄에게 미혹된 영혼들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일대일로 대면하면서 3일간 실명되어 죽음과 방불한 체험을 했다가 주님의 은혜로 다시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때까지는 나사렛 이단을 박멸하려는 수고가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자 그분의 뜻인 줄 믿고 있었는데 비로소 정반대임을 알게 된 것이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국 영광을 본 스데반과는 달리 자신은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어서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한 짓임을 깨달은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전혀 불가능한 일인데도 자기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려 했기에 그동안 정말로 허공만 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천국까지 다녀오게 되자 바울은 죽을 준비가 철저하게 되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두렵지 않게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 땅에서 어떻게 해야 정말로 잘 사는 길인지도 분명히 깨달았다. 그래서 그 길을 모르는 자들이 이전의 자기처럼 갈급함과 허망함 가운데 방탕히 사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애처로워 그들에게 잘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을 자기 인생의 소망이자 목표로 삼게 된 것이다.
신자가 종말에 대해 깨어있는 첫째 자세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다 이루셨음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께 잘 보이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신자는 예수님의 구원의 방주 안에 이미 들어와 있기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도 감사할 수 있다. 종말을 예비하는 것도 이 땅에서 더욱 열심히 성실히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생명력에 의지하여 더더욱 활기차게 살고 있어야 한다. 복음의 은혜와 권능을 누리며 사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바울처럼 주위에 나눠주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는 것이다.
충성하라고 하니까 자꾸만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경건과 열심만 강조한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충성의 결과적 모습이다. 그 이전에 신자는 예수님께 충성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에 객관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자신의 절대적 체험이 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 은혜 안에서 이미 바뀐 나의 신분, 소속, 특권 등에 걸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말하자면 신자답게 사는 것이 충성이다. 신자답게 사는 것은 또 바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간적 욕심이 아니라 자신의 바꿔진 자아에 충성하라는 것이다. 하님이 주신 소명에 충성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자의 소속감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다시 주님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 신자의 지혜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야 한다. 다른 말로 죽을 준비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다시 추스르는 것이다.
본문을 알기 쉽게 바꿔 표현하면 이렇다. 세상의 불신자들 가운데도 자기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선 죽음을 무릅쓰고 올인(all-in) 해서 큰 업적을 쌓는 자가 많다. 신자는 이미 영생을 확보한 자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와 이유가 없다. 죽음을 초월한 자다. 그렇다면 멀리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 없이 자기 주변의 몇 안 되는 사람마저 온전히 사랑하지 못할 이유나, 근거나, 힘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8/3/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