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믿음의 치명적 약점은?
마태복음강해(237)
http://youtu.be/Rm2tWIIkrWc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니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마26:17-25)
마지막 만찬의 의미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의 마지막 일주일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첫째 날 일요일에 유월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대중들은 호산나 찬송하며 열렬히 주님을 맞았다. 월요일은 강도의 굴혈로 바뀐 성전을 청소했다. 화요일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며 일곱 번 질책했고 제자들에겐 종말과 재림에 관해 가르쳤다. 수요일 하루는 휴식을 취하셨다. 본문은 목요일에 이 땅에서 인간 구세주의 모습으로는 마지막 식사를 하신 내용이다.
평소와는 달리 여러 추종자들을 물리치고 열두 제자들과만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마땅히 치러야 할 고별의식이라고만 이해해선 곤란하다. 요한복음 13-17장에 따르면 이날 저녁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당신 대신에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시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는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성찬 예식을 제정하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었다.
그 가르침은 초대교회를 설립하고 신약성경을 저작할 자로써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었다. 당신께서 이 땅에 부재(不在)하는 이후로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 최선봉을 서야할 사도들의 헌신 예배를 한 셈이다.
마태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같이 간략하게 가룟 유다의 배신 사건만 기록하고 있어도 요한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배반자 유다를 사도에서 제외시킨 결과적 모습만 보아선 안 된다. 그 일련의 과정 중에 예수님의 구주(救主)되심과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더 풍성하게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 법정에선 사형수에게 처형 날짜와 방법을 사전에 알려주지 않는다. 당일에 바로 찾아가 가능한 짧은 시간 안에 집행한다. 미리 알면 사형수는 초조 불안에 떨고 식사도 못하고 잠도 못자는 초죽음에 이를 것이며 심하면 정신 이상도 생긴다.
주님은 이틀 뒤라고 본인의 처형 날짜는 물론, 십자가에 달릴 것이라고 처형 방식도 알고 있었다.(마26:2) 장래 일을 미리 알아맞힌 차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감당할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 공생애 삼년 내내 이런 날이 올 것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예루살렘에 세 번째로 올라오는 이번 순례 길에는 작심하고 성전부터 청소했고 제사장들을 일곱 번이나 질책했다. 또 재판을 받기도 전에 처형 날짜와 방식을 알고 있었다. 십자가 처형을 당신께서 주도하셨던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증거다. 십자가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절대적 권능과 은혜로 이뤄진 것이다.
만약 교도소장이 사형수에게 내일 어떻게 처형될 것이라고 통보한 후에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서 진수성찬으로 마지막 고별 식사를 하도록 친절을 베풀었다 치자. 그것은 친절이 아니라 최고로 심한 최후의 고문이 될 것이다. 아무도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없고 눈물바다를 이룰 것이다. 심하면 누구를 조롱하느냐고 식탁도 엎을 수 있다.
주님은 지금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겼다. 십자가 진리를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었고 담담히 떡을 떼어 나눠주었다. 본문이 단순히 고별잔치로 이해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씀드린 까닭이다.
바보스런(?) 랍비
유다의 배반을 예고한 것도 예수님의 신통한 영력 차원으로 이해하고 그쳐선 안 된다.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인간적 차원으로만 따져도 삼년 간 동고동락한 제자의 이상한 낌새도 눈치 채지 못하는 어리석은 스승이 된다. 제자의 생각과 영적 수준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변화와 성장은커녕 교육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로선 더더욱 자격이 없게 된다. 십자가도 그저 착하기만 하고 순진한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배반당한 바보 같은 죽음으로 평가절하 될 것이다.
마지막 날 밤에 유다의 배반을 예고한 것이 그 때서야 알게 되었거나, 죽기 전에 야단을 쳐야겠다는 뜻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를 준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배반 계획이 탄로 나면 그 자리에서 순순히 자백하고 용서를 빌게 마련이다. 아니면 그 계획을 변경 취소하고선 다음 기회를 노릴 것이다. 유다는 곧바로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신의 계획대로 결행했다.
주님은 앞으로 전개될 그 모든 상황을 미리 다 아시고서 어떻게(24절) 반응하셨는가? 인자이신 당신께선 기록된 대로 즉, 구약성경에 계시된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완수하겠다고 한다. 유다의 배반과 무관하게 골고다 언덕길로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도 한다. 나기 전부터 저주 받은 팔자라는 뜻이 아니다. 스승에게 자기 계획이 탄로 났음에도 서둘러 밀고했다. 스승과는 다른 자기만의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을 개혁하여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도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선한 의도일 수 있다. 그는 또 동료 제자들의 신임을 받은 인간적 의인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 만사를 통치하고 각 개인의 변화와 성숙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특별히 죄에서 구원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기에 완전히 헛된 인생이 되었다는 뜻이다. 인간 사회에서 아무리 크고 화려한 성공을 해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고 자기 욕심과 계획만 따랐다면 그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점수는 제로, 아니 크게 마이너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다는 배신의 최고 아이콘이 되었지 않는가?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나머지 열한 제자들의 인생은 어떠했는가? 초대교회의 사도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들의 영적 실상은 유다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어떤 면에선 더 비겁하고 치사했다.
본문 22절 기록이 참으로 흥미롭지 않는가? 주님이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당신을 팔 것이라고 하자 모두가 “혹시 나인가?” 근심했다. 그것도 ‘심히’ 말이다. “주여 내니이까?”라는 질문은 원어 의미상 부정의문문의 뜻이 있다.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그렇지요?”라고 자기가 아님을 강조하는 표현법이다.
그러나 방귀 뀐 사람이 먼저 화낸다는 속담과 같은 의미도 분명 내포하고 있다. 스승을 배반할 생각을 추호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누가 감히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지라며 주위를 둘러보고 평가하기 바쁘다. 혹시라도 예수님이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고 의심하는지 걱정될 수도 있겠지만 스승의 인격이 그렇지 않음을 평소부터 잘 알고 있기에 “심히”까지 걱정할 턱은 없다. 이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도 현장에 있었기에 자기 심정을 고백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사형수의 비유를 들자면, 교도소장의 특별 배려로 가족과 마지막 식사를 하는데 가족들이 어차피 아버지는 내일이면 처형당할 것이니까 남은 유산을 어떻게 더 많이 차지할까 궁리하고 있는 꼴이다. 실상은 예수님이 아직은 사형확정은 물론 투옥도 되지도 않았다. 단지 유대 권력층에 밉게 보인 것뿐이다. 그런데도 제자들 모두 차츰 권력층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최소한 그들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으려고 염려한 것이다.
그들이 유다처럼 돈에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배반 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해 놓고 그 실행을 머뭇거린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속마음에는 스쳐지나가는 생각일지라도 예수를 배반하겠다는, 최소한 이제 제자를 그만둘까라는 마음을 한두 번은 먹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구주라는 믿음이 없어서인가? 예수님의 인격을 불신해서인가? 엄청난 이적을 일으킨 그 큰 권능을 몰라서인가? 그 모두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와 생명 안에 완전히 들어오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성령으로 영혼이 새롭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인 상태로 유다와 동일한 성정을 지녔던 것이다. 전적으로 부패한 심령을 가져서 십자가 구원 은혜가 절실했던 똑같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다가 배반자임을 알고도 택했다.
주님은 유대의 배반을 미리 안 것을 넘어서, 그런 자인 줄 알고도 제자로 선택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오병이어 기적의 의미를 유대인들에게 설명하는 결론으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6:70)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을 갖기 훨씬 전이다. 제자를 택할 때에 이미 마귀 한 사람을 택했다는 것이다.
유대 대중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자 예수님께 항상 배불리 먹게 해달라고 졸랐다. 시내 광야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왔듯이 그저 편하게 놀고 먹도록 해달라는 요구였다. 주님은 그에 대해 모세가 준 만나는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지지만 당신이 주는 양식, 특별히 당신의 육체를 먹으면 평생 배고프지 않게 된다고 했다. 그들의 요구에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주님은 영생을 의미했으나 많은 추종자들이 식인종처럼 육체를 먹는다는 말인지 어렵다고 여기고 물러갔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더러 너희도 떠날 것이냐고 물었다. 이 때도 예의 성미 급한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신데 어디로 가겠느냐고 큰소리쳤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 마지막 만찬 자리에선 다들 배반하려고, 최소한 주님을 떠나려는 생각을 하다가 스승에게 들켜 심히 근심하고 있다.
잘 들으셔야 한다. 예수님은 유다만 배반하고 나머지 열한 명은 의리가 많은 의인인 줄 알고도 유다까지 택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잘못은 없고 예수님의 책임이다. 예수님은 열두 명 모두가 배반의 소질이 있음을 알았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의 영적 실상을 꿰뚫어보고 계셨다. 쉽게 말해 유다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배반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제자를 택할 당시 유다의 배후뿐만 아니라 모두가 사탄의 조종 아래 있음을 알고 계셨다. 당신이 오기 전의 모든 인간들의 숙명이자 고통이었다. 또 그것이 인간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였기에 누가 수제자가 되고 누가 배반할 지는 당신의 일차적 관심이 아니었다.
주님은 한마디로 사탄과의 싸움에만 모든 관심을 쏟으셨다. 사탄의 농간으로 죄에 빠져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류의 구원이 목표였다.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권세부터 깨트려야 했다. 당신의 거룩한 영광의 광채가 인간의 영혼에 비춰지는 것을 막고 있는 사탄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야 했다.
베드로는 모든 인간 중에 처음으로 예수님이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 주님도 그 후에 처음으로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르쳤다. 그리스도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라는 뜻이다.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않게 하겠다고 만류했다. 너무나 의롭고 선한 인간적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16:23)고 야단쳤다. 유다도 마귀(요6:70)라고 했다. 두 사람이 마귀 자체는 아니다. 아직도 마귀의 손 안에 있기에 당신께서 구해주겠다는 뜻이다.
유다를 미리부터 포기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유다의 배반과 무관하게 십자가를 지러 가시겠다는 말씀이 유다는 어차피 저주 받을 자이게 아예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을 알고도 선택했기에 처음부터 관심조차 갖지 않았고 그래서 내 할 일만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유다라는 한 개인을 떠나 모든 인간의 상태가 너무나 비참하고 가련하다는 것이다. 사탄의 실상과 그 흉계를 밝히겠다는 것이다. 사탄이 사람을 어떻게 얽어매고 멍에를 지우고 있는지 만천하에 드러내겠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어도 삼일 만에 부활하여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참되고 온전한 새 생명을 보이고 또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유다를 아예 저주 받을 자로 선택했거나 미리부터 포기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근거가 있다. 주님은 단 한 번도 유다를 배반자로 직접 지목하지 않았다. 열두 명 중의 한 명이 마귀라고만 언급했다.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도록 가만히 두고 보셨다. 열두 명의 속내가 드러난 마지막 만찬의 순간에도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불치병은 물론 나면서 불구자도,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다. 그 자리에서 떡을 받는 유다의 손목을 말씀 한마디로 자를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가 손을 품에 넣자 문둥병이 발했고 다시 품에 넣자 본래대로 깨끗하게 되돌리셨다.(출4:6,7) 그처럼 주님은 유다가 떡을 받을 때에 그 손을 문둥병이 생기게 했다가 자기 잘못을 실토하면 깨끗하게 해주실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유다의 인격과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두려움 때문에 따르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축복을 부어주어 정성과 열심을 바치게 하지도 않는다. 십자가에 드러난 세상에 없는 하나님의 참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기만 원한다. 하나님 당신께 진실하고 순전한 감사, 찬양, 경배, 헌신을 돌리기를 바란다.
지금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 둘 만이 알 수 있는 교통이 있다. 유다가 구태여 실토하지 않고도 다른 제자들 모르게 회개의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비록 유다가 “내니이까?”(25절)라고 물었지만 전혀 회개의 기색이 없음을 주님은 아셨다. 주님이 “네가 말하였다”고 대답했지만 다른 제자들은 눈치도 못 챘다. 모두가 자기반성 중이었고 유다가 평소에 그만큼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유다를 선택한 주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는 시종일관 자기 발로 어둠을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유다와 나머지 제자들과의 차이는?
유다와 나머지 열한 제자들과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유다는 지난 삼년 간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고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의 생각보다 더 낫고 인간 사회를 바로 세우는 선한 방안이라고 여겼다.
열한 제자들이라고 예수님께 왜 실망하지 않았겠는가? 만약 한 번도 실망하지 않았다면 엄밀히 말해 인간도 아니다. 거기다 지난 삼년 간 이름도 빛도 없이 스승을 뒷바라지 한 결과가 유대 사회를 개혁하기는커녕 도리어 핍박받고 출교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서서히 자기 앞날을 챙겨볼 시점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갈지라도 우리대로 살 길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수 있다.
그런 비겁함, 치사함, 연약함이 스스로 생각해도 싫지만 그런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을 배반하는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았다. 예수님과의 개인적 관계, 시쳇말로 의리와 정을 뗄 수는 없었다. 베드로가 스승을 보호하려 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주님의 꾸중의 의미를 제자들은 몰랐다. 아직 십자가의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주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고 하니까 기다려 보기로 한 것이다. 유다는 도무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버렸다.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되는 점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해서 유다가 바라는 세상의 개혁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의 구제를 외면한 것도 아니다. 인간에게는 그보다 더 시급하고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할 근본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좌지우지하면 농간하고 있는 사탄부터 쫓아내어야 했다. 하나님의 빛을 그 영혼에 비추어야 했다. 성령으로 죄인의 영을 거듭나게 해야 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성령의 책망을 온전히 깨닫기 전에는 인간의 근본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인간이 날마다 겪고 있는 왜곡, 모순, 갈등, 시기, 분쟁, 타락이 끊이지 않기에 주님은 반드시 그 첫째 원인을 제거해야 했다.
마리아가 당신께 부은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얼마나 선한지도 다 아셨다. 그러나 그런다고 근본적으로 가난이 없어지지 않기에 그러지 않은 것뿐이다. 영혼의 죄가 씻어지고 예수님과 일대일의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서 먼저 그분의 사랑을 받고 누려야 한다. 그분의 긍휼이 마음속에 충만하게 채워질 때에 비로소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구제를 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 생명의 복음으로 그 영이 새롭게 거듭나야 절대적 진리에 눈이 떠지고 그 때까지의 인생살이의 모든 갈급함과 허망함이 해소된다. 그럼 하나님은 물론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을 할 수 있다.
우리 믿음의 치명적 취약점은?
오늘날의 신자들이 이 기사를 접하면서 유다가 어찌 저럴 수가 있는가, 열한 제자들 모두도 너무 치사하고 비겁했다고 큰소리 칠 수는 결코 없다. 그 열두 명은 그나마 당시로선 가장 의로운 사람들이라 주님이 골랐다. 세상에서 최고로 의로운 열두 명이 모여도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와 권세를 모르면 유다 같은 배신자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가 최고라는 큰 착각에 빠져 있다. 인간 세상의 어려움을 자기들의 의로움으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정작 인간 세상의 실상은 열한 명이 유다 같은 배반자들이고 나머지 한 명이 겨우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까 말까이다. 그런데도 주님은 거꾸로 배반할 자는 한 명만 뽑고 나머지 열한 명을 하나님이 남겨둔 자들로 채웠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당신을 택한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그들을 택했다고 말씀한 이유다.
우리 믿음의 치명적 결점도 본문의 열한 명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바로 눈앞에 모시고도 자신들의 장래 상태를 근심, 그것도 심히 근심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예수님이 죄악으로 타락된 내 영혼을 새롭게 해주신 구세주요, 심판주요, 부활주라는 진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확보된 영생을 알지 못하고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이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의 싸움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싸움이야말로 오히려 더 중요하며 인생의 본질임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 믿어 신자가 됨으로써 바뀐 자신의 소속, 신분, 특권을 전혀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 임재하시기에 사단이 절대로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사탄과 대적하여 이 땅에서부터 죄를 이겨내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오묘하고 완벽한 통치를 맛볼 수 있다. 자기 가정에서부터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는 천국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일을 기껏해야 개별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하고 담임목사의 이름이 높아가는 것과 혼동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사탄에게 조종당하는 가장 큰 거짓이자 심지어 하나님께 큰 죄가 될 수 있음을 모르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 유다의 이름을 끝까지 거명하지 않았다. 그의 완악한 마음마저 끝까지 품어주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당신께서 기록된 대로 십자가를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모든 인간이 참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다른 길은 전혀 없다. 복음 안에만 영생과 세상을 이길 권능이 있다.
우리 모두가 유다처럼 하나님과 원수 되었음에도 주님은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죽으셨다. 또 예수를 믿은 후에도 나머지 열한 제자들처럼 수시로 우리의 장래 일로 심히 근심했어도 이 자리에 이르도록 함께 해주시고 모든 것에서 당신만의 은혜로 채워주셨지 않는가? 이런 주님 외에 어떤 소망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9/21/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