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에 대한 몇몇 오류
마태복음강해 (238)
http://youtu.be/1u-5doP862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6-29)
당신을 기념하라.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줄을 아시고도 제자로 택하셨다. 유다만 특별히 사악한 인간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의 나머지 열한 제자들도 스승을 배반할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될 인류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어둠을 쫓아간 것뿐이다.
주님은 또 유다가 끝까지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자기 갈 길로 갈 것까지도 아시고 배반을 경고했다. 당신의 메시아 되심과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다른 제자들과 후대의 신자들로 깨우치기 위해서였다. 더 정확이 말하면 예수님의 성품 자체가 아무리 흉악하고 완악한 죄인이라도 긍휼의 끈을 거두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유다를 포함한 12명의 제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는 똑같이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라는 것이다.
마태의 기록에는 없지만 요한복음(13:30)은 예수님이 배반을 예고하면서 떡을 떼어서 유다에게 주자마자 곧바로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본문은 “저희가 먹을 때”(26절)라고 시작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며 유다의 배반을 예언했던 때와는 다른 때임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유다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이뤄진 성찬예식에 동참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성찬식에는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들만 참석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주님은 28절에서 직접 밝혀주셨다. 포도주 잔을 나누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했다. 따라서 피의 언약이 무엇이며, 그것이 예수님과 무슨 연관이 있으며,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 언약에 어떤 결과를 맺었는지에 대해 전혀 무지한 불신자가 그 잔을 받아야 포도주라는 것 외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포도주를 구태여 교회에 와서 마실 필요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을 추가했고(눅22:19), 바울도 그 뜻을 다시 확인하고(고전11:24) 있다. 떡을 떼는 것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다. 포도주는 그 때에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따라서 성찬식에 참여하는 신자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온전히 알아야 한다. 또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은혜가 그 당시의 제자들에게 느껴졌고 체험되어졌던 것과 동일하게 자신에게도 임하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의 뜻에 합당한 온전한 기념을 하지 않고도 성찬을 거행 내지 참여하는 몇몇 사례들이 있다. 지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떡과 포도주 자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직접 변화한다는 화체설(化體說-transubstantiation)의 잘잘못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찬식에 예수님의 육신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칼빈의 해석을 쫓는 개신교 안에서도 예수님을 순전히 기념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도 광복절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우선 불신자가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해서 단순히 기독교 고유의 의식이라고 이해하거나, 혹은 신자끼리만 예수님의 은혜를 나눈다는 배타적 고집으로 적용해선 안 된다. 광복절이 한국이 일제 강점 36년에서 해방된 날이라는 것을 외국인도 잘 안다. 그 기념식에 축하 손님으로 참석할 수 있다. 이왕이면 많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참석해주면 더 좋다.
그러나 그들이 한일전 축구를 응원할 때나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칠 때의 한국인이 갖는 그런 감정과 열정은 결코 갖지도 알지도 못한다. 그들은 광복절 기념식에 참여해도 기념한 것이 아니라 축하만 하는 것이다. 어떤 사안이 갖는 의미와 열매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실제로 적용이 되고 있어야만 기념하는 것이다.
반면에 같은 한국인일지라도 일제에 아부하여 높은 자리와 많은 재물을 차지했다가 해방 후에 친일파로 몰려 재산이 몰수당하고 사형을 당했다 치자. 그 후손이 광복절을 맞는 기분은 전혀 다를 것이다. 괜스레 씁쓸하고 단지 하루 노는 공휴일이라는 의미 밖에 없고 광복절이 다가오면 오히려 괴로울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자 이스라엘의 구주로 오셨다. 그래도 주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나 주님께 일곱 번이나 질책을 들은 제사장 바리새인들의 후손은 주님을 기념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의 중직을 맡아 성실히 봉사 충성하는 교인이라도 피의 언약을 지식적 객관적 교리로만 알고 있을 뿐 그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담임목사 곁에 서서 성찬을 집전하는 것을 직접 돕고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간혹 교회들이 성찬식을 얼마나 자주 거행하는지를 두고 영적우월성을 은근히 과시하는 경우도 있다. 초대교회는 예배 때마다 거행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매주 성찬을 한다는 것이다. 또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주님에 대한 순전한 기념이 된다면 자주 거행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성찬을 거행하는 것 자체를 두고 그분을 기념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선 안 된다.
부모님 추모예배를 매주 모여서 경건하게 드렸어도 예배가 끝나자마자 형제들끼리 유산 다툼을 한다면 차라리 추모예배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예수님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화해부터 한 후에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쳤지 않는가? (마5:23,24)
초대교회가 모일 때마다 성찬을 거행한 것은 특별한 상황이었기 때문임을 감안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저작되기 전으로 체계적인 교리도 확정되지 않았고 교회 제도도 정착되지 않았다. 지금 같은 교회 행사나 활동이 없었기에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생각부터 났을 것이다. 입만 열면 예수님 이야기뿐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싶은 마음 밖에 없고 또 그 외에 특별히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하면 할수록 순전하고 벅찬 감동, 회개, 각성, 경외가 저절로 솟구쳤을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을 기념한 내용은?
예컨대 스승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까지도 우리는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으니 너무나 부끄럽다고 모두가 뉘우쳤을 것이다.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을 때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낫다고 야단 친 일도 떠올렸을 것이다. 그 때에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던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중요하고 시급한 일에 대해 깜깜했었다고 실토했을 것이다. 사탄의 멍에가 깨트려지고 죄에서 구원 받아 예수님의 마음이 그 영혼에 심겨져야만 이웃을 참 사랑으로 섬길 수 있음은 전혀 몰랐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도 주님이 그들을 외면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따르는 신자들더러 앞장서서 구제하라는 소명을 주신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했을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도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는 데도 피신한 스승을 비겁하고 연약하다고 여겼지만 너무나 큰 오해였다고 말했을 것이다. 모세가 하늘에서 아주 신령해 보이는 만나를 내려주었어도 육신을 채우는 떡에 불과하고 주님이 주시는 영생의 떡을 먹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항상 허기짐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을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도 당신의 그 엄청난 능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항거는커녕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은 것이 연약해서가 아님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 당시로선 아무리 십자가를 말로 설명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는 한 명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고 실토했을 것이다. 그렇게 잠잠했던 모습이야말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사53:7)는 메시야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결정적인 예언을 완전히 성취한 것임을 전혀 깨닫지 못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주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나눌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또 그런 나눔 중에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적으로 뛰어난 한 선각자가 먼저 깨우친 후에 다른 이들을 가르친 것이 아닐 것이다. 모인 사람 모두가 어느 누구도 강요나 권면하지 않았는데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진정한 감사와 경외심으로 저절로 그렇게 고백했을 것이다.
지난 삼년 간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일이 여러모로 힘들었어도 그분과 함께 했던 그 시간, 가르침, 사역, 특별히 십자가의 죽음, 빈 무덤, 부활 후에 잠시 교제한 일, 승천을 목격하는 체험 등을 통해 예수님이 자신들의 구주가 되심에 이론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스승이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않는데도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신 후로는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이 더 생생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살아 계셨을 때에는 그분이 강론할 때에 졸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르쳤던 말씀의 단어 하나하나 토씨까지 정확하게 기억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외양은 이전과 하나 달라진 것 없어도, 아니 더 궁핍해지고 유대교와 로마의 핍박이 서서히 닥치는데도 그 마음에 평온함과 담대함과 자유함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 예수님을 회상하고 기념할 때마다 기쁨이 충만해지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사도가 구태여 소집을 하지 않아도 모이기에 힘쓰고 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 모임 안에 분쟁은 물론 시기 질투도 없어지고 서로의 물건을 자기들 것처럼 통용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 천국이 임하고 자기들 마음속에 예수님이 이전보다 더 풍성하고 충만하게 살아서 함께 하심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진리, 이 은혜, 이 충만을 주위 사람으로 알게 하고 또 자기들 후손에게 정확히 전수해서 받아 누리게 하고 싶어서 신약성경을 저작하고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초대교회가 예배 때마다 매번 성찬을 거행한 일을 비유하자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몇 년이 지나도록 거의 매일 아련히 생각이 나는 것과 같다. 제사도 그래서 3제, 7일제, 49제 식으로 자주 지내지 않는가? 목사가 제사를 예로 드는 것이 잘못이라면, 처음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 인생이 완전히 새롭게 뒤집어진 사람의 경우를 보라.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자기가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나누려 하고 전도하지 않는가?
피의 언약이란?
문제는 부모가 돌아가신 것을 너무나 아쉬워하고, 살아 계실 때에 효도를 제대로 못한 것을 반성하고, 또 그런 불효자였음에도 오직 자식만을 위해 뼈 빠지게 희생하고 수고하신 그 은공을 감사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반쪽짜리 기념이다. 엄격히 말해 기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정상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하는 것이며, 노력하지 않고도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또 그런 식의 기념은 한두 번이면 족하다. 진짜로 부모를 제대로 기념하려면 반드시 부모의 유언을 성취 발전시켜야 한다. 예수님을 기념하려면 당신의 피의 언약을 계승하고 확대해야 한다. 또 그것이 성찬을 올바로 지키는 방식이다.
출애굽기 24:5-8에 의하면 하나님이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모세를 따로 불러서 백성들의 대표자로 세운다. 당신의 율법을 전하고 모세더러 받아 기록하게 했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청년들로 소를 잡아서 번제를 드리게 한 후에 그 소의 피의 반은 단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모인 백성들 전부에게 뿌리게 했다. 그리고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율법)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8절)라고 선포했다.
간단히 말해 율법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죽음의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다. 죄만 지으면 곧바로 사형에 처하는 무서운 심판주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자는 이 땅에 단 한 명도 없기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음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음을 율법을 통해 깨달으라는 것이다. 또 그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피의 언약의 선포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백성들이 당신 가까이 오면 다 죽게 될 것을 염려하여 모두를 물러가게 하고 모세만 대표로 당신께로 나아오게 했다.(출19:12,13) 율법을 주시기 전에 그랬으니 사람들이 율법을 준행하든 안 하든 당신의 백성을 살려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럼에도 율법이 피의 언약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죄의 삯이 죽음이기에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기”(히9:22) 때문이다. 또 그런 하나님의 뜻을 율법 특별히 제사법 안에 명확히 밝혔다. 대속제물인 동물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감당하게 하되 죄인인 인간은 살려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뜻은 어떤 흉악한 죄도 용서해주시고 어떤 완악한 죄인도 살려주시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유다 같은 죄인을 외면하거나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의 피로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대신할 수 없는 일회적 제사에 불과해 매번 제물을 바쳐야 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시고 제2의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즉, 인간의 죄를 대신 감당하라면 인간이 죽어야 하므로,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 모두의 완전한 대속 제물로 바쳐졌고 영단번의 완전한 용서가 이뤄졌다. 예수님의 그 대속의 은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어진 것이다.
피의 언약을 기념함이란?
언약, 특별히 피의 언약은 양쪽 당사자 중에 한 쪽이라도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생명을 걸고 지키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고도 제자로 택하시고 끝까지 긍휼의 끈을 거두지 않았다. 그를 살리는 길은 당신의 십자가 은혜 외에는 결코 없음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보다 천오백 년 전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할 줄을 아시고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셨다. 언약을 파기하여 마땅히 죽어야 할 쪽은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살리기 위해 언약의 다른 당사자 하나님이 그들을 대신해서 죽으실 구원 계획을 미리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계획은 때가 차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으로 달성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언약의 피를 기념한다는 의미가 의신칭의의 교리를 믿는 정도로는 크게 부족하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은 것을 감사한다는 정도로도 모자라긴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내 대신에” 죽었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정작 십자가에 달려 죽었어야 할 자는 바로 나라는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아니 실제로 죽었다가 거듭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그 교리를 몰랐다. 그럼에도 성령의 간섭으로 주님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과 또 그분을 십자가에 매단 것이 바로 나라는 진실하고도 철두철미한 깨달음이 있었다. 나아가 그분이 내 대신 죽음으로써 자기가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런 은혜를 깨닫게 되자 예수님을 매일 기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모일 때마다 성찬을 거행해도 지겹기는커녕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더 충만해졌다. 정말로 예수로 인해 살고 죽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예수 안에 있는 이 신분과 특권만은 죽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자들이 된 것이다.
산 채로 찬양하며 맹수의 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자기들은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을 예수를 위해 언제 어디서 어떤 비참한 모습으로 죽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고 또 자신들에게 너무나 큰 영광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매달리는 것만도 교만으로 여기고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전승이 내려오지 않는가?
그럴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주님이 이미 하늘에 이 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장막을 예비해 놓았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확신이 들었는가? 당신께서 하신 말씀이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당신의 약속의 신실함을 실제로 보여주었기에 천국 장막에 대한 약속도 온전히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에겐 그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
물론 그들도 인간의 성정을 지녀서 연약하기에 맹수 밥으로 던져질 때에 공포가 엄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했더니 최초로 순교당한 스데반의 경우처럼 성령이 강력하고도 충만하게 임재 해주었다. 고린도전서 12:9,10에서 말하는 믿음과 능력의 성령 은사가 임하여 담대하게 죽을 수 있었다.
성찬에서 놓치는 아주 간단한 진리
성찬식에서 예수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모세에게 언약하시고 십자가에서 성취된 피의 언약에 동참하고 또 확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가 신자의 몸과 정신과 영혼에 완전히 뿌려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세상의 쾌락을 쫓으며 수시로 죄를 지은 것을 회개한다. 아주 중요한 일로 꼭 그래야 한다. 또 주님의 십자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전도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순전한 의미로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가 성찬에서 아주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진리를 하나 놓치고 있는 것 같다. 가룟 유다는 결과적 혹은 자의적으로 성찬에 불참했다. 그로선 주님이 성찬 예식을 제정한 의미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대신에 제 발로 걸어 나간 까닭은 자기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성찬예식을 할 때에 신자가 가장 먼저 완전히 제거해야 할 것이 바로 유다 같은 모습이라는 뜻이 된다.
유다는 자기 나름의 도덕, 철학, 사상, 종교로만 매사를 판단했다. 자기 생각으로 자기 문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특별히 자기 죄를 씻는 것까지 스스로 자살함으로 해결했다. 무슨 뜻인가? 세상에서 통용되고 인간 사회에서 의롭고 선한 그 어떤 방식으로도 해결되지 못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물을 채우려 하지만 생수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다가 판 웅덩이는 물을 저축치 못할 밑이 터진 웅덩이이기에 아무리 채우고 채운들 갈급함과 허망함이 절대 없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의 피의 언약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는 유다와는 정반대의 생각으로 주님만을 생수의 근원으로 삼아야 하고 그 생각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가장 첫 째 가는 원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유다는 스스로 인간적 방식으로만 물을 채우려 노력했지만 절망만 가득 찼다. 절망 중에서 절망을 없앨 수 있는 길은 절망이 자꾸 저절로 생겨나는 것을 억지로라도 중지시키는 길 뿐이다. 유다는 그래서 자살로 그 절망을 마감한 것이다.
역으로 말해 신자란 유다와 정반대로 예수님 없는 인생은 절망과 죽음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철두철미 인식하고 있는 자이다. 지금 신자더러 자살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실 것이다. 신자는 자신의 살고 죽음이 초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정말로, 또 절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이라고 확신해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마음에 채워나가길 소망, 아니 열망해야 한다.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고 말씀을 읽어야 한다.
또 실제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씩 받아 자기 속에 채우고 있어야 한다. 또 그 마음이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예수님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행하셨을까 헤아려서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가고 있어야 한다. 세상에 머리 둘 곳이 하나 없고 세상에선 외롭고 고달프며 멸시만 받고 있어도 때론 완전히 낙오자처럼 여겨져도 기꺼이 감사함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지 성찬식에서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한다.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을 자신에게 계속 채우면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다 보면 예수님처럼 어떤 흉악하고 완악한 죄인에게도 긍휼의 끈을 거두지 않을 수 있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비록 내 의지로 할 수 없을지라도 주님이 강권하심으로 이끌어 주신다. 정말로 신자가 주님을 따라간다면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가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처럼 긍휼 자체가 바로 자신의 성품으로 변할 수 있다.
너무나 가난한 신앙생활의 실태
유다가 끝까지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 계획을 달성하는데 앞장 세웠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 종으로 부려 먹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 또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잘 믿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사업이 번창하고, 아이들은 일류 대학에 척척 붙고, 질병과 고난과는 멀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자신의 인간적 열성과 치성일 뿐이며 그것으로만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와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성찬식에 자주 참여하다 보면 자신이 뭔가 영적으로 더 성숙해진 느낌을 갖는다. 초대 교회에서 매주 성찬식을 거행했지만 그 성찬에 참여한 신자들 중에 매주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되었던 일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정말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피의 언약에 동참했다는 사실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 부모 제사를 지낸 후에 유산을 서로 많이 차지하려는 꼴ㅇ다. 성찬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신자는 다르다. 하나님 그분, 예수님이 바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고 비교도 할 수 없는 유산을 이미 받았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그저 돈 몇 푼 더 달라고만 떼를 쓰고 있다. 재벌 회장이 아들을 그룹의 후계자로 세웠는데도 그저 최신 전자기기를 사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럼 성찬에 아무리 자주 경건하게 참여해도 교회에 포도주를 마시러 나온 것밖에 안 된다. 외국인들이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캠페인에 참여해도 자기들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하지 않는가? 그에도 전혀 못 미치게 예수님을 기념하는 셈이다.
오늘 본문에서 꼭 기억할 것은 이것 하나다. 만약에 유다가 최초의 성찬 예식에 마지막까지 자기 잘못을 고백하지 않고 뻔뻔하게 참여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은 그래도 아무 말씀 안하고 가만 두었을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는 설명해주어도 아직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하게는 그런 유다가 살 길은 오직 당신의 십자가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어차피 절망과 죽음만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신자는 바로 이런 십자가 은혜 안에 이미 들어온 자다.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을 벌써 소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무엇을 더 달라고 감히 떼를 쓰며, 무엇이 힘들다고 감히 불평할 수 있다는 말인가?
9/28/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