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에 대한 더 결정적인 오류
마태복음강해 (239)
http://youtu.be/aa-MY4J-_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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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6-2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찬식을 거행하며 당신을 기념하라고 당부했다. 그 기본적인 의미는 당신께서 성취하신 피의 언약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구속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달성되었다. 신자들은 자신이 거듭났던 개인적 체험을 통해 그 구원의 은혜를 회상, 감사, 헌신하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다시 살피는 이유는 주님께서 성찬예식을 제정하신 뜻이 하나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본문 29절의 의미를 성찬에서 기념하고 실현하지 않으면 반쪽짜리 성찬이 될 뿐 아니라 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잠정적 금주선언
예수님은 포도주를 나누며 당신의 언약의 피라고 설명한 후에 뜬금없이 당신께선 다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29절)은 포도주를 뜻하는 히브리 식 표현이다. 그런데 본문을 문자적으로 자세히 살피면 잠정적인 금주 선언이다. 완전한 금주가 아니었다. 세 가지 조건을 달았다. 그 조건들이 다 충족되면 다시 마시겠다는 의도를 피력한 것이다.
첫째는 새 것으로 마시겠다고 했다. 그 종류가 기존의 포도주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원어가 이전에는 없었던 전혀 다른 종류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포도주에서 최상급이라고 어림짐작해선 안 된다. 주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다.(마9:17) 유대의 형식적 가식적 종교의 멍에를 벗기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로 회복시키려 당신께서 오셨다는 비유이다. 이처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마시겠다는 뜻이다.
둘째는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시겠다니 그 공간과 상황이 달라졌다. 그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성부 하나님 옆 보좌에 앉으셨을 때를 말하는가? 또 너희와 함께 마시겠다고 했으니, 언젠가 죽어서 천국에 갈 제자들이 당신께서 미리 마련해 놓으신 아름다운 장막에 입주하면 기념 파티를 열겠다는 것인가?
천국에선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 이 땅 물질계에서의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르다. 천국에서 하나님이 성도들과 술로 교제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합당치 않는 것 같다. 또 하나님의의 나라는 시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당신의 백성들에게 임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하나님의 나라다. 죽은 후의 천국으로만 한정짓는 것은 무리다.
셋째 조건이 가장 중요한데 제자들과 함께 마시는 날까지라고 그 시기를 제한했다. 언젠가 다시 마시겠다는 것에 초점이 있다. 따라서 이제 곧 십자가에 죽더라도 제자들과 완전한 이별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적 죽음으로 제한될 존재도, 또 당신의 사역이 중지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너희와 함께 할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새 술에 취한 제자들
이 세 조건을 종합하면 어떤 뜻이 되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질적으로 전혀 차원이 다른 그런 기쁘고 좋은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그 때에 주님은 제자들과 다시 상봉하여서 이전과 전혀 차원이 다른 교제를 나누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29절의 일차적인 뜻은 성령이 오실 것에 대한 약속이다. 주님의 이 땅에서 첫 번째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극상품 포도주로 만든 것이었다.(요2장) 현실의 삶에서 풍요롭고도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과의 혼인 잔치에 신부로 참여하는 자에게는 성령을 부어주시는 새 시대를 열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 제자들과 헤어지려는 마지막 순간에 그 첫 번째 이적에 계시된 약속을 재확인해 준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말한 것이다.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오순절에 성령이 오자 120여명의 제자들이 천하 각국의 말로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했지만 그 때가 술을 마실 시간이 아니며 또 술에 취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 부어지고 예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진리의 영이 오자 십자가가 왜 복음(good news)이자 절대적 진리가 되는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 끝까지 전도할 수 있는 권능도 얻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들고 오순절에 모였던 천하 각국으로 다시 흩어져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전했고 복음은 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하나님의 나라가 곳곳에 세워지고 확장되어져 갔다. 그 모든 일들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었고 또 함께 했기에 그런 놀라운 역사가 가능했었다.
‘이미’(already)와 ‘아직’(yet)의 갈등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았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분명히 하나님의 피의 언약은 성취되고 인류를 대속하는 계획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을 이 땅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여전히 사탄은 공중 권세를 잡고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조종하고 있다.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가 각 개인의 심령에 비취는 것을 막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심지어 사도들에게서도 죄의 본성과 그 파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그분과 대적하고 있던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 엄청난 사랑에 진심으로 항복하는 자는 당신의 자녀로 삼아서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러나 당신과 원수 되었던 때의 성품과 조건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셨기에 믿은 후에도 수시로 죄를 짓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신 것은 우리 죄의 형벌 즉, 죄 값이다. 죄악은 멸하지 않은 상태로 이 땅과 우리 속에 남아 있기에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일은 믿은 후의 신자의 책임으로 맡겨졌다.
주님의 십자가로 신자의 과거에 지었던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앞으로 지을 죄까지 그 형벌은 모두 사함 받았기에 신자에겐 더 이상의 정죄함이 없고 심판에서 완전히 면제 되었다. 그러나 믿은 후에 계속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수시로 징계는 받을 수 있다. 다른 말로 구원은 확정되었고 이미 소유하고 있지만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강력하게 도래했다. 그러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고도 순전한 모습으로 실현되는 것은 그분의 재림 때까지 연기되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이 흑암의 나라의 비참한 노예였다. 예수님이 처음 오신 후에서 다시 오시기까지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와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중간기이다.
그 때까지는 신자 개인과 피조세계 전부는 하나님의 마지막 구속을 기다리며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한 상태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때가 차서 주님이 다시 오시면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리(利)한 말씀의 검으로 사탄과 죄악은 일거(一擧)에 순간적으로 멸망시킬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망의 몸도 정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를 신령한 육체로 부활시킬 것이며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는 완벽하게 실현될 것이다.
예수 믿은 후로는 그 전 불신자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결해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자가 수시로 넘어지고 실패와 고통과 죄악 중에 힘들어 하는 것도 또 다른 한편의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다. 이미 도래한(already)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yet) 하나님 나라 간의 갈등과 긴장 관계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성찬식에 참여하는 우리의 영적 실상을 스스로 살펴봐도 그렇게 오래 믿었는데도 전혀 성숙해진 것 같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아직도 세상 쾌락과 죄악과 사탄의 시험에 수시로 넘어진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오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온전히 기념하지 못하는 것 같은 송구함과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주의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셔선 안 된다(고전11:27)는 말씀이 꼭 불신자나 세례(침례) 받지 않은 교인들이 성찬에 참여해선 안 된다는 규정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분명히 성령으로 거듭난 체험이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신자임에도 성찬에 합당치 않은 것 같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순종한 예수님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최후의 만찬이자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성찬식은 마태의 기록으로는 “무교절 첫날”(마26:17)에 일어난 것 같다. 그러나 시간과 일정을 구체적으로 정확히 기록한 요한복음과 비교해 보면 유월절을 준비하는 하루 전날 목요일로 보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율법을 어겼다고, 특별히 안식일 규정을 위반했다고 자주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수여하신 토라를 어긴 적은 없다. 바리새인들이 제정한 장로의 유전이자 인간의 계명과 상충되었을 뿐이다.
예컨대 안식일만 해도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 인자인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면서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시는 일을 했다. 장로의 안식일 유전으로는 위반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문자적으로 순종했을 뿐 아니라 그 의미까지 완성하신 것이다.
주님은 유월절 절기도 당연히 모세의 율법대로 지켰을 것이다. 그래서 유월절이 시작되어야만 유월절 양을 먹을 수 있기에 마지막 만찬 때에는 그 양을 드시지 않은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한다. 네 복음서 모두에 양을 먹었다는 기록이 없다. 유대인들인 복음서 저자들이 유월절에 양을 먹는 것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리가 없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주님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을 한 번만 기록하고 있다. 세 번을 기록한 요한까지 포함해서 마치 약속이나 하듯이 유월절 양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그럼 실제로 양을 먹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물론 그 정확한 사실은 지금 와선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주님은 십자가에 찢겨질 당신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흘릴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눠주어 먹고 마시게 했다. 단순히 피의 언약을 기념하는 차원이 아니다.
주님은 당신과, 특별히 그 육체 전부와 유월절 양을 100% 완전히 동격화(同格化)시켰다. 죄송하고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당신의 육신을 제자들 바로 눈앞의 유월절 식탁 위에 올려놓고 당신을 뜯어 먹으라고 하신 셈이다.
복음이 율법을 대체한 것이 아니다.
잘 들으셔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율법을 대체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가 다른 것이 아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아담이 타락할 때에 하나님은 짐승을 직접 죽여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무슨 뜻인가? 오직 대속의 피 흘림으로만 죄 사함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구원 원리를 최초의 범죄 때에 이미 확실하게 표명하셨다.
율법, 그 중에서 동물 희생 제사법은 그 원리를 구체화시킨 것뿐이다. 율법은 복음의 예표와 상징과 모형으로 그치지 않는다. 율법 안에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충만히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이 취소 소멸된 것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율법은 계승되고 발전되고 가시화되고 확증된 것이다. 수건으로 가린 것처럼 어렴풋이 알던 하나님의 구속이 십자가를 통해 천하 만민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명명백백히 드러난 것이다.
십자가 복음은 요한복음1:1의 선언처럼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으로써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경륜 안에 들어 있었다. 그것도 인간들이, 그것도 최초의 인간이, 그것도 어떤 것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다 갖춰진 최상의 상태 낙원에서 거역할 것을 아시고도 십자가를 먼저 세우셨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이 세상 어느 민족도 겪지도 아니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큰 이적과 은혜를 받고도 계속 배역하고 우상을 숭배할 것을 아시고도 복음은 수정, 변개, 포기는커녕 한 치도 약화되지 않았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아니 창조하기 전부터 십자가가 하나님의 계획에 들어 있었다면 인간의 영적 상황과는 아무 관계없다는 뜻이다.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영적 실상에 비례해서 절대로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타락했기에 더더욱 불쌍히 여기고 더 큰 긍휼을 품으신다.
이 땅에 하나님의 그런 사랑이 필요 없고 단 한시도 갈급해 하지 않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우주를 뒤덮고도 남는 그 크신 사랑이 인간 곁을 떠난 적도 없다. 인간을 멀리한 적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간구에 귀를 닫은 적도 없다. 정말로 하나님의 그 하나님다우심이, 그 광대하심과 인자하심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임재해주셨다. 태초부터 지금껏 그랬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순서에 주목하라.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순서를 잘 따라가며 따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기존의 포도주를 나누며 피의 언약이 달성된 것을 기념하라고 당부하셨다. 죄 사함을 받은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그 후에 기존의 포도주와는 질적으로 전혀 차원이 다른 새것으로 함께 마실 날이 꼭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신자는 영생을 이미 소유했고 자신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 뿐 아니라 하나님 그분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보배 같은 피가 신자의 인격체 전부에 뿌려져 있고 그 피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음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만으로 세상이 신자를 절대 감당 못할 신분과 특권을 얻은 것이다. 더 이상 얻을 것도 없다.
그런데 주님은 그 위에 당신께서 육신적으로도 제자들과 다시 만나 함께 할 날이 반드시 온다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못한, Already 와 Yet 사이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수시로 죄를 짓고 불완전하고 어리석었던 모습을 완전하게 바꾸어주는 날이 곧 온다는 것이다.
신자인데, 아니 장로인데, 심지어 목사인데도 분명히 내가 소원하고 계획하며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은 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히 임재케 하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내가 보기에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럽고 연약하고 부족했었다. 이제 다시 오시면 그 모든 실패는 없어지고 완전하고 충만하고 아름답고 순수한 당신의 나라로 바꿔준다는 것이다.
죄와 사탄과 사망이 아직도 활개 치는 이 땅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 많았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문제가 되어, 육체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 계속해서 실패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의 방식, 존재하는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는 때가 반드시 온다.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에 항상 붙는 수식어 ‘아직’이란 완전히 단어는 사라진다. 심지어 피의 언약을 기념하며 포도주를 나누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성령의 열매(갈5:22)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죽도록 노력해도 겨우 조금만 맛볼 정도로 미성숙하고 불완전했지만, 그 모든 열매가 저절로 맺히는 날이 온다. 성령의 열매가 정말로 충만히 채워진다.
따라서 신자가 성찬에 참여하는 진정으로 더 중요한 의미는 다가올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고 키우는 것이다. 아니 미리 참여해서 연습해야 한다. 우리 보기에 아주 보잘 것 없게 열렸지만 그 작은 성령의 열매들을 들고 나와 함께 나누고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은 적은 일과 적은 자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또 가장 기뻐하지 않는가?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와 궁극적인 승리가 신자들 바로 눈앞에 기다리고 있다. 이 땅에서 신자가 겪는 고난과 죄악과 실패와 상처 등은 신자가 인식할 수 있는 순간에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일 뿐이다. 바울처럼 그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하늘의 상급을 바라고 걸어가야 한다. 성찬식은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님이 자기를 통해 어떻게 역사했는지에 관한 보고대회여야 한다. 최소한 그런 승리를 얻기를 바라며 결단하고 헌신하는 출정식이어야 한다.
성찬식에선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 안에서 당신과 새것으로 교제해야 한다. 앞에 인용했던 로마서14:17가 설명한 하나님 나라 즉,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의 언약을 성취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룬 것이다. 화평은 그 십자가의 의에 참여한 자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기에 현실에서의 모습이 어떠하든 평강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희락은 실제로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일부 맛보고 있고 또 장차 완성될 나라를 기대함으로써 기쁨이 넘쳐야 한다는 것이다.
애잔하기만 한 성찬식
그런데 작금의 성찬식은 주로 어떤 모습으로 거행되는가? 너무 경건하고 엄숙하다 못해 죄송하지만 마치 부모님 제사 지내는 것 같은 모습이다. 잔잔하고 애잔한 찬송만 부르기에 전체 분위기가 침울할 정도다. 물론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회상하고 기념하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멜 깁슨이 만든 영화 “Passion of Christ”의 장면을 떠올리는 식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까? 우리가 주님을 걱정하고 염려해주는 것으로 마치 피의 언약에 동참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너무나 부질없는 짓이자 아주 큰 교만이기도 하다. 주님은 십자가에 기꺼이 오르셨다. 오직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십자가 처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주관하셨다. 마지막 날 밤에도 유월절 식탁 위에 당신을 통째로 올려놓으시고 제자들더러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다.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당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지 않는가?
성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온 구원만 계속 감사하는 것은 주님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시긴 했는데 처음의 허기와 갈증만 잠시 없앤 것뿐이다. 완전한 맛을 느끼지 못하고 조금만 먹고 마시다 중도에 그만 두고 반 이상 남긴 것과 같다. 성찬이 정말로 성찬다워지려면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반드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고 승리를 향해 앞으로 진군하는 모습이 함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성찬의 분위기가 다운(down)되어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렇다. 마치 말기 암으로 고통 중에 돌아가신 아버님의 추모예배를 지낼 때마다 아버지의 유언을 성취한 보고는 전혀 없고 그저 아버지가 임종 때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만 계속 떠올리며 슬퍼하는 것과 같다. 인간 암환자라 해도 이미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좋은 곳에 가 계시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는 꼴이다.
그 정도라도 괜찮은 편이다. 부모의 산소에 매년 찾아가 성묘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버지 올해는 취직했어요, 올해는 결혼 했어요, 올해는 아버지 손자를 봤어요, 올해는 승진했어요, 올해는 집을 샀어요, 등등 해가 갈수록 나아진 모습을 아뢰며 함께 기뻐해 달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반면에 내가 지금 학교동기들보다 뒤처지고 계속 실패만 거듭하는 것이 혹시 조상신이 훼방하는 탓은 아닌지 의심 불평하며 산소 앞에서 술에 취해 신세한탄 하고 있다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제가 교회 출석한지 20, 30년에 그 동안 봉사, 헌금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제가 뭐 크게 출세시켜 달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고난에서만 벗어나게 해달라는데도 여전히 아무 응답이 없으니 혹시 하나님이 저에게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습니까? 일부러 제 앞길을 훼방하는 것은 아닙니까?” 신자에게 이런 마음이 든다면 부모 산소 앞에서 술에 취해 한탄하는 불효자와 하나 다를 바 없지 않는가?
본문의 29절이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술을 끊어야 한다는 식의 지엽적이고도 가난한 말씀이 절대 아니다.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엄청난 권능과 은혜를 받았고 그분의 완전한 영광이 가까운 장래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썩어 없어지는 육체마저 완전하게 회복되는 궁극적 완성의 때가 반드시 있다.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걸고 죽기까지 확실히 보장하셨기에 반드시 그 때가 곧 온다.
신자는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완전한 해답을 이미 소지한 자다. 예수 십자가 안에서 기쁨과 충만함과 아름다움을 얼마든지 차지할 수 있다. 때로는 아직 완성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긴장 상태가 우리를 무너뜨리더라도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구하면 이 땅에서부터 마지막 날의 새것을 미리 받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처럼 얼마든지 의롭고 거룩해질 수 있다. 크리스천의 장례식, 특별히 성찬예식에선 슬픔도 있지만 불신자들이 갖지 못하는 세상이 모르는 승리와 기쁨이 넘쳐야 한다. 십자가 안에서의 자유가, 최소한 담대함과 평강은 있어야 한다.
10/5/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