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에 대한 너무나 큰 착각
마태복음강해 (240)



http://youtu.be/wVVorENsW2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26:30-35)


베드로에게 위로 받는 신자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 그것도 수제자였다는 것이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 같다. 특별히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치사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면 그렇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저 정도라면 우리가 자주 넘어지고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는 것쯤이야 하나님은 아무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나 개인의 안락함을 세 번이나 택해도 주님은 세 번 다 용서해주실 것이라 기대한다. 나아가 지금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환경에 살다 보니 예수님을 부인해야 할 기회나 이유가 전혀 없다. 실제로 부인한 적도 없다. 그래서 때로는 베드로보다 우리가 나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는 너무나 큰 착각이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는 베드로와 나머지 열 명의 제자 모두가 스승을 배반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당부대로 또 다른 보혜사가 오길 소원하며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했다.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후로는 죽으면 죽었지 예수님을 절대 배반하지 않았다. 실제로 계시록을 기록케 할 목적으로 밧모 섬에 유배시킨 요한을 제외하고 모두 순교했다. 마태와 베드로 등은 십자가에 죽었고, 기둥에 묶여 화살에 맞았고 산 채로 말에 찢기거나 톱으로 썰리고 껍질이 벗기어 죽었다.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로 뽑힌 맛디아마저 참수 당했다고 전해진다.

제자들은 십자가 이전에 비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 신유, 믿음, 능력, 지혜, 지식 등의 성려의 은사도 명확히 드러내었다. 예수님을 위해선 어떤 박해와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권능을 입었다. 사도가 아니라 이름도 빛도 없던 초대교회의 신자들마저 찬양을 부르며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되었다.

비교가 잘못되었다.

지금은 오순절로부터 이천 년이나 지났다. 성경이 완비되고 구원의 진리 체계도 확정되었다. 주님 말씀(요3:5)대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바울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확증했다.(고전12:3)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그 대속의 은혜 안에 들어왔다면 또 그래서 누구 앞에서나 예수 믿는 신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면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  

다른 말로 성령 받기 전에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와 비교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성령 받은 후에 변화된 베드로에게 자신을 대입해야 한다. 만약 아직도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모습에 위로 받고 안도한다면 엄밀히 말해 성령 세례를 안 받아 거듭나기 전일 수도 있다. 구원을 받지 못해 예수님의 제자, 아니 신자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만큼 우리 신앙을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십자가 구원을 객관적 종교 지식으로 소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기독교 계명을 지켜 자신을 윤리적 인격적으로 성숙시키는 것이 믿음이 하는 역할의 전부가 아닌지, 필요할 때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고난과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물론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후에도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의 눈치를 보다가 바울로부터 견책을 받았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크고 작은 잘못도 분명히 저질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오순절에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토록 했다. 그 이후로 사도들의 리더가 되어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데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성령의 사람이 된 후로는 쓰러지고 넘어지더라도 주님이 걸어가셨던 길을 일관되게 따라갔다.  

그는 자신의 고백(벧후1:4) 대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어서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매진했다. 그럴 수 있었던 근거도 그의 입을 빌리면(벧전1:2,3)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산 소망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쇠하지 않는 하늘의 기업을 이 땅에서부터 받아 누리고 실현했던 것이다.  

자기에게 성령이 내주함을 확신하는 신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를 롤 모델로 삼아야 한다. 여전히 세 번 부인한 그를 보고 안도하는 경우는 반에서 공부를 일 등하는 학생에게 아무 도전을 받지 못하고 꼴등 하는 친구를 보고 위로 받는 격이다.

정확히 말해 사실은 본인이 꼴등인데 교회 밖의 깡패를 보고 우월감을 느끼는 셈이다. 성령 이전의 베드로는 엄밀히 말해 온전한 믿음이 없었지 않는가? 그렇다면 쉽게 말해 신자가 불신자를 본받겠다는 꼴이지 않는가? 그래도 주일날 교회에 출석은 하니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나님이 성전 마당만 밟고 갔다고 한탄하고(사1:12) 계실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베드로 맹세의 세 잘못

우리가 변화된 후의 베드로를 본받기 위해선 그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된 영적 배경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 그가 왜 어떻게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는지 추적해야 한다. 우선 분문의 맹세부터 살피면 그는 세 가지를 걸었다.

첫째,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만은 그러지 않겠다고 한다. 다른 모든 이와 비교해서 자기가 최고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이는 악하고 자기만 선하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모습이다.  

둘째, 나는 언제든지 스승을 버리지 않겠다고 한다. 항상 순종하고 충성하겠다는 것이다. 남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남들과 다른 행동으로 보이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장래 일은 자기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장담했다. 엄밀히 말해 인생사는 물론 시간까지 자기가 주도한다는 엄청난 교만이다. 그래서 주님은 도무지 맹세는 하지 말라고 했고(마5:34), 야고보는 맹세는 죄악이라고까지 말했다(약4:10).

셋째, 자기는 죽을지언정 배반은 않겠다고 했다. 배반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맹세를 생명을 걸고 보장했다. 자기가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생명도 스스로 바칠 수 있으리라 섣불리 판단한 것이다.

맹세의 이 세 내용 모두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는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들의 전형적인 태도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원죄로 묶인 자연인의 양태다. 거기다 본문의 베드로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율법과 성전제사를 성실히 준행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오지 않고는 사정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아담이 타락한 이유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최초로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하는 죄를 범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동에만 초점을 두어선 안 된다. 인간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생각에서 나온다. 아담은 자기 마음속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지워버리고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분과 자기와 연결된 끈을 아담 쪽에서 스스로 먼저 끊어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가 최고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자기가 주인이 된 것이다. 인간이 그 낙원뿐 아니라 이 땅 전체의 주인이 되려했다. 모든 일을 자기 소원, 계획, 기분에 따라 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자가 되었다. 나아가 무슨 일이든 스스로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자부했다.

아담이 그렇게 된 까닭은 사탄의 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너는 얼마든지 하나님 이상으로 잘 할 수 있는데 왜 바보 같이 일일이 하나님께 꼼짝 못하고 따라다니느냐고 부추긴 것이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진짜 이유는 네가 하나님처럼 될까봐 질투가 났기 때문이라고 속였다.

주목할 것은 사탄은 자기에게 복종하라고 강요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에게 배반하라는 직접적인 언급도 없었다. 그 반대로 네가 최고이며 너는 무엇이든 너 혼자 할 수 있다고 너무나 듣기 좋은 격려성의 말만 했다. 왜냐 하면 인간이 자기를 하나님보다 앞장세우거나 위에 두면 자연히 그분과 반대편에 서게 되고 그럼 또 자동적으로 사탄 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필요하다면, 아니 가장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관이나 감정에 좋게 여겨지는 것들만 제공한다. 현실의 풍요를 주거나 때로는 종교적 열성을 심어주어 영적인 절정을 맛보게도 해준다. 심지어 예수님에게 행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기도 한다.

인간이 사탄의 꾐에 넘어가 일단 하나님과 등을 지면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를 최고의 위치에 두게 되면 그 맛에 빠져서 가만 두어도 저절로 흑암과 멸망으로 걸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게도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하거나, 유행과 관습과 사상과 종교 등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뿌듯하게 만들어 주면 그것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줄 착각한다.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배제한 채 스스로 자기를 개발하고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는 짓인 줄 모른다.    

베드로의 가식 없는 믿음

베드로가 절대 스승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쳐놓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고 해서 그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정성과 믿음이 가식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의 스승을 향한 사랑은 진심이었다. 이 땅을 개혁하고픈 소망과 의지가 약해진 것도 결코 아니다. 자기 전부를 희생하여 헌신할 각오도 충분했다. 예수님의 큰 능력도 믿었다. 스승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맹세한 것은 분명히 순수하고 의로웠다. 실제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빼어 대제사장 하속의 귀를 베었지 않는가?  

문제는 어디서 발생했는가? 예수님이 도수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저항은커녕 아무 말도 없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세자장의 하속들과 로마 군병들이 조롱하고 멸시하고 핍박하는데도 너무나 비참하고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었다. 예수님의 큰 능력이 빠져 나간 것 같고 하나님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다 나도 스승과 똑 같은 꼴이 되는 것 아닌가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생명을 걸겠다고 맹세했는데 막상 생명을 걸 순간이 닥치자 맹세는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기 생명만 건져 올렸다.

한번 가정해보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베드로가 내가 바로 나사렛 이단의 수제자이니 나를 잡아가고 스승을 풀어주라든가, 스승의 편에 서서 함께 죽겠다고 나섰다 치자. 예수님이 그냥 죽게 버려두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성령이 빌립 집사를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를 전도하기 위해서 광야로 보내고 또 그에게 침례를 베푼 후에 홀연히 사라지게 했듯이(행8:26-40) 베드로도 홀연히 갈릴리로 먼저 보냈을 것이다.

설령 베드로가 십자가에 죽었어도 부활시킬 능력이 주님께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만은 십자가에 주님 혼자 올라 가셔야만 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야하는 어린 양은 주님이었지 베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진리의 영을 받기 전인지라 짐작은커녕 상상도 못했다. 자기 눈에 예수님이 완전히 무력해진 것처럼 보이자마자 자기 꼬리를 완전히 내려버렸다. 아이가 힘센 형님만 믿고 까불다 그 동네 싸움 짱을 만나자 형님도 꼼짝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짱에게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꼴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의 동생이 분명 형을 진정으로 믿고 사랑했듯이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열의와 헌신은 대단했다. 예수님의 권능도 믿었다. 도리어 권능만 너무 믿은 것이 탈이었다. 그는 다 좋았는데 그 모든 좋은 것들을 단번에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딱 하나 빠진 것이 있었다. 예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무지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 가장 먼저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고백했다. 그러자 비로소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르치셨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도 베드로는 스승을 죽게 할 수 수 없다고 만류했다. 주님이 그 때 어떻게 야단치셨는가?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베드로가 자기 생각대로만 고집한다는 뜻이다. 비참한 동족을 구하는 자신의 방식이 스승의 것보다 낫다고 여기고 끝까지 자기 길로 가버린 유다와 하나 다를 바 없다. 유다나 베드로나 성령을 받기 전의 자연인의 상태에선 자기 생각이 최고라고 믿는다. 또 그 필연적 결과로 자기 자신은 아주 선하고 의롭다고 여긴다.

나아가 사람들은 믿음과 무관하게 불쌍한 이웃에 대한 기본적인 긍휼함을 갖고 있다. 세상에 선을 실현하고픈 소망과 동기와 계획도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것이 타락한 후에도 양심의 형태로 희미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베드로처럼 그런 동기와 계획을 막상 자기 생명을 걸고서라도 실현해야 할 결정적 시기가 닥치면 자기를 보존하려는 쪽으로 택해버린다. 자기를 세상과 이웃보다, 나아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은 자기중심주의를 스스로는 결코 깨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생각한 하나님의 길은?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들의 구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신의 택한 백성이 우상을 최고로 숭배하는 사탄의 대리인인 로마의 지배를 계속해서 받게 하는 것도 당신의 뜻이 결코 아니었다. 단 그 구원을 이루는 방식이 인간의 생각과는 달랐다. 인간들에게 그냥 맡겨 두어선 당시의 최고 의인인 베드로마저 스승을 비겁하고도 치사하게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음을 잘 알고 계셨다.

주님은 그래서 가장 먼저 성령으로 간섭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신가 개개인이 자기가 처한 그 장소, 그 여건, 그 시간에서 예수님처럼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게 한다. 자기 속에 심겨진 예수님의 참 생명의 씨앗을 다른 사람 속에도 심게 한다.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심는 일을 반복케 해서 삼십 육십 백배의 결실을 거두게 한다. 누룩이 들어가 반죽을 부풀리게 하듯이 신자의 주변과 그가 속한 공동체가 거룩하게 바뀌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한다.  십자가 복음의 참 생명이 염병처럼 이 땅에 번져 나가게 한다.

신자에게 성령이 내주하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에 주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또 그것을 실현하는 것만을 자기 인생의 소망과 목적으로 삼는다. 세속에서 어떤 직업과 신분과 위치에 있던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통해 실현되는 도구나 통로가 되길 소원한다. 베드로와 바울과 초대 교회 신자들처럼 자신의 세상에서의 겉모습이 아무리 궁핍하고 후패해도 전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고치는 권능과 은혜가 자기를 통해 다른 이에게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알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비방, 멸시, 조롱, 핍박을 받아도 항거는커녕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이나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핍박하는 이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서 본문의 베드로처럼 스스로 의롭다고 큰소리칠 수밖에 없음을 자신의 지난 실패를 통해 잘 알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은혜로 부어주어야만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와 생명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다. 비로소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권능도 내주하신 성령님을 통해 받아 누릴 수 있다.    

베드로는 스승의 권능만 믿었지 그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음을 성령이 역사하여 깨닫게 되자 자기중심주의가 무너지고 주님을 온전히 쫓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를 완전히 죽이자 놀랍게도 주님의 능력은 더 오묘하고 신비한 방식으로 역사하기 시작했다. 성전 미문의 나면서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일어나 걷게 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 밖에 나서 옥에 갇혔어도 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사람들 사이로 마치 투명인간처럼 걸어 나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불 병거와 불 말로 엘리사와 게하시를 둘러싸고 대신에 아람군대의 눈을 멀게 하셨던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동일하게 임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땅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그 감옥 안에서 실현한 것이다.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베드로가 성령의 사람이 됨으로써 근본적으로 바뀐 점이 무엇인가? 초자연적 이적을 베풀거나 신령한 감정적 영적 절정을 맛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픈 소망과 계획은 있으나 스스로는 제대로 실현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뿐이었다. 자기 내면이 철두철미 자신만의 안락과 풍요를 추구하는 치사하고 추한 이기적 탐욕 덩어리임을 발견한 것이다.

인간에게서 선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옴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 곁에 남아 있어야 그 선을 맛보고 누리고 나눌 수 있음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은혜도 자신의 의지적 노력과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자신에 대한 긍휼을 거두지 않고 계속 사랑을 베풀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질책도 추궁도 하지 않았고 그 죄를 회개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기만 했다. 그가 반드시 있어야 할 곳인 당신의 품을 떠났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후에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그를 찾아왔고 마찬가지로 야단치거나 용서를 구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직 당신을 사랑하는지만 세 번 거푸 물었다. 인간은 예수님과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를 반드시 맺어야 하며 그 사랑에서 멀어지는 순간 곧바로 사탄의 멸망과 죽음의 구덩이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이번 배반 사건으로 철저히 깨달았는지 물어본 것이다.  

본문이 예수님이 베드로가 스승을 부인할 정확한 시간과 회수를 알아맞히는 큰 권능을 변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이신 그분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베드로가 아주 선한 의도로 예수님의 능력을 너무 믿고 설쳤지만 막상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주님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동원해 로마와 유대를 얼마든지 일순간에 개혁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 그분의 참 권능임을 몰랐던 것이다. 자기 능력을 최대한 동원해야만 겨우 문제가 해결되는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그 능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자기 계획을 완벽하게 실현해 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아무 말 없이 달리신 것이야말로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참 생명과 빛을 부어주신 신자로 하여금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베드로가 십자가의 그 진리를 깨닫게 되자 자기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이 되던 십자가 복음이 더 증거 되고 예수님의 이름이 더 높여지면 기꺼이 따랐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자리에까지 따라갔다. 본문에서 장담 했던 일을 그는 문자적으로 실현했던 것이다.  

우리가 정작 본받아야 할 사도 베드로의 참 모습이다. 우리더러 완벽한 도덕군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 땅 끝까지 가는 선교사가 되어 순교하라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게서 선이 나올 것 하나 없으므로 자기중심주의를 철두철미 부수라는 것이다. 신자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들, 신앙 행위마저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주의는 기도 중에 가장 자주 나타나며, 그 외에 예배, 봉사, 말씀을 보는데도 사탄의 올무로 작용한다. 아무리 큰 교회를 세우고 거창한 사역을 해도 하나님이 외면하는 인간중심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중심주의를 깨트리기 위해선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또 기도를 통해 그 마음을 자기 속에 받아 채우고 또 주위에 나눠주어야만 한다. 그럼 세상의 문화, 철학, 사상, 종교가 줄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반드시 충만히 발견하고 누리게 된다. 최소한 지금껏 교회를 십년 이십년을 다녀도 온전한 복음의 승리 한번 맛보지 못하고 미지근하고 메마르기만 했던 신앙생활은 끝낼 수 있다.  

10/12/2014


국중후

2014.10.13 05:31:12
*.62.203.92

말씀 감사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4.10.14 00:16:23
*.109.85.156

베드로도 세 번이나~~하면서 얼마나 위로 받는지 모릅니다. 또 베드로처럼 주님 가신 길 따르겠노라 스스로 다짐하며 괜찮은 믿음이라 위로받을 때도 많습니다. 연약하니 넉넉히 이해하여 주실 것이라는 기대며 또 열심이 자신의 뜻대로의 열심이기에 이 모양 저 모양의 자기 의 자랑이 될 때가 많은 모습들이 어쩌면 거듭나지 않은 자이기에 그러함을 배우며 조심히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됩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방법이 무엇인지 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맘을 배워나가기에 게으르지 말아얄텐데....귀한 말씀으로 여러 연약한 모습들을 들여다 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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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창세기강해 #13 - 창2:1-3)

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 창세기 강해 (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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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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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 창2:1-3)

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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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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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창2:4-7)

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耕作)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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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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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인생의 첫째 가는 소명 (창세기 강해 #10 - 창1:26-28)

신자 인생의 첫째 가는 소명 창세기 강해 (10)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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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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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 창1:31)

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이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어쩌면 영어를 숙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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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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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강해 #8 - 창1:20-23)

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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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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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세기 강해 #7 - 창1:9-13)

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1:9-13) 창세기 강해 (7)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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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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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 창1:14-19)

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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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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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부활절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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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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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 창1:9-13)

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http://youtu.be/rMSIX3C2UK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 창1:9-13)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http://youtu.be/qHjkSiEz-O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 창1:6-8) [2]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http://youtu.be/opQj6Y6sXw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 창1:1-5) [2]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http://youtu.be/ASb2eX056x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 창1:1)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http://youtu.be/eCSGTueOy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창조적 진화론? 저는 서른세 살에 완전 무신론자 집안에서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마28:17-20) [2]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http://youtu.be/IiltnYNxUe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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